내려 째는 강렬한 태양빛 아래, 세명의 일행이 목적지를 향해 황무지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중 붉은 머리의 소녀와 갈색 머리의 중년 남성은 챙이 넓고, 윗부분이 움푹 파인 모자를 쓰고 있었고, 입고 있던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다른 한 명은 그저 파란 몸체의 로봇이었다. 그 로봇의 신체는 금속뿐, 천조각 하나 걸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두 개의 배낭을 짊어진 채 걸었다.
“생각보다 많이 걸은 거 같군요. 얼마나 남은 거죠?”
파란 로봇이 물었다. 다른 두 명은 터덜터덜 거리며 걸어가던 걸음을 멈추고 잠시 자리에 서서 헉헉 거리며, 숨을 골랐다.
“허억허억, 젠장, 형씨 체력 하나는 끝내주는군. 벌써 4시간은 걸은 거 같은데, 지친 기색 하나 없구만.”
남자가 숨에 찬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옆에서 지친 숨을 고르던 소녀도 말했다.
“아무리 나라도 이번엔... 조금 지칠지도… 대단하네 오빠, 우리 짐도 다 들고 있으면서 말이야.”
소녀의 말이 끝나자 중년의 남성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아아, 잠시만, 잠시만 쉬도록 하지. 젠장, 이건 중년 학대야. 내 나이가 몇인데 젊은 놈들이랑 체력 싸움을 해야 하는 건지. 저기 끝에 보이는 검은 물체 있지? 저기가 현재 목표인 마을이야.”
남자는 손가락으로 지평선 끝에 검은 물체를 가리켰다. 그 모습을 본 소녀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하하, 그럼 잠시 휴식과 정비를 취하고 가시죠.”
로봇도 들고 있던 배낭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남자가 자신의 배낭을 끌어당기더니, 안에서 수통을 꺼내 마셨다. 소녀가 그 모습을 보더니 말했다.
“맥스, 그건 물이지? 아직 대낮이야. 갈길도 먼데, 술은 안돼.”
남자는 벌컥이며 마시던 수통을 입에서 떼어내더니, 가죽 장갑의 손으로 입을 닦으며 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푸하-. 이제야 좀 낫구만, 걱정 마, 아나. 나도 사리분별은 하는 놈인 거 알잖아.”
“자세히 보니, 어제와는 다른 수통이시네요. 식수와 주류용 수통이 따로 이신 건가요?”
로봇이 질문하자 남자는 자신이 들고 있던 수통을 들고 소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뭐, 그렇지. 저기 있는 꼬맹이한테 안 걸리려고 수통도 가끔 돌려 쓴다네. 그리고 어제는 당첨이었지.”
그렇게 말하고는 남자는 수통을 내려놓고 모자를 벗어 부채질을 했다. 소녀 또한 자신의 배낭에서 수통을 꺼내 마셨다.
“아나도 대단한대요. 아직 어린데, 지금까지 걸으며 불평불만이 없네요.”
그 말을 들으며 소녀는 수통에 뚜껑을 닫고, 땀으로 젖은 옷을 부채질했다.
“대단하지 않나? 저 꼬맹이, 저래 보여도 체력도 그렇고, 근력이나 운동신경도 뛰어나. 이미 나를 능가한 수준이라네. 어쩌면 크게 될지도 모르는 놈이야. 뭐, 아직은 꼬맹이지만 말이야.”
“맥스, 두고 봐. 언젠가는 그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게.”
“하하, 6년 이면 아직 초짜야, 초짜!!”
두 사람은 웃으며 대화했다. 로봇은 그들의 모습에서 따뜻함과 부러움을 느꼈다.
“맥스 씨는 아나와 여행 다니기 전엔 무얼 하셨나요? 지금 같이 현상금 사냥꾼 일을 하셨나요?”
로봇의 질문에 남자는 씁쓸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을 본 소녀가 대신 대답했다.
“맥스는 민병대 멤버였어, 들어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근방에서 ‘미닛맨’으로 불렸지. 꽤나 규모가 있던 단체였는데, 갑자기 사라졌대. 이유는 맥스 밖에 몰라. 왜인지는 몰라도 맥스도 안 말해줘.”
소녀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남자는 그저 부채질을 하며 조용히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었다. 남자는 생각에 빠진 거 같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들어서 알겠지? 6년 동안 따라다니는 꼬맹이도 모르는 거야. 그저 조용히 가자고, 언젠가 들을지 누가 알겠나?”
남자는 조용히 일어나 바지에 뭍은 모래를 털어냈다. 그리고 로봇에게 말했다.
“좋아, 다시 출발해 보자고. 형씨, 짐은 다시 잘 부탁하네.”
그리고는 그저 조용히 앞서 걸었다. 그 모습을 본 소녀와 로봇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맥스라면 신경 쓰지 마. 이 주제로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저래. 안 좋은 추억이라도 있는 걸까?”
소녀가 모래를 터는 동안 로봇은 소녀와 남자의 배낭을 들었다. 로봇은 아침에 나눴던 남자와의 대화를 잠시 떠올렸다. 그사이 준비가 끝난 소녀가 출발했고, 로봇 또한 따라 걸어갔다. 두 사람과의 남자와의 거리는 조금 벌어졌다.
“보스, 거리상으로 따지면 앞으로 3시간 정도는 더 걸어야겠어. 정오쯤 되면 도착할 거야.”
“아아, 고마워 제네, 충전 잔량은? 얼마나 남았어? 화면이 깨끗해진 건 좋은데, 표시가 다 사라지니깐 뭔가 허전하네.”
“뭐, 그러면 충전량은 화면에 계속 띄워놓을게. 현재 97%, 적어도 큰 소비만 없으면 큰 지장은 없을 정도네.”
“좋아, 새로 장착한 전지가 잘 작동하니깐 기분 좋네.”
로봇이 스스로와 대화하는 모습을 본 소녀는 로봇에게 물었다. 소녀의 입장에선 목소리만 다른 자문자답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네는 그런 걸 다 어떻게 아는 거야? 오빠는 여기 주위를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것처럼 말했잖아.”
“어, 어? 그게. 보스, 이럴 땐 어떻게 답하는 게 좋을까? 나 이럴 때를 대비한 준비는 안 해놨는데…”
“나, 나한테 물어도… 아 그, 사실 이 옷에는 특별한 장치가 많이 있어. 내가 보는 시각 정보를 제네도 볼 수 있는 장치도 그중 하나야. 그래서 제네가 그걸 토대로 계산을 하는 거지.”
로봇은 급하게 생각해낸 설정을 토해냈다. 여기서 이상하게 답했다가는 소녀에게 경계심을 심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또 다른 세계에서 왔고, 제네가 실체가 없는 생명체라고 말했다가는 정신 나간 놈으로 찍힐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 그럼, 제네는 엄청 똑똑한 아이구나. 그럼 제네는 어떻게 생겼어?”
“...? 생김새…? 그, 그렇지. 제네가 어떻게 생겼냐면…”
“키는 아나보다 조금 작아, 그리고 팔 두 짝 다리 두 짝 다 달려있고, 짧고 단정한 파란 머리지.”
로봇은 자신의 생김새에 대해 술술 나열하는 제네의 말을 듣고 놀랬다. 실체가 없는 제네가 그런 모습이라도 상상한 것일까라고 로봇은 생각했다.
“...라는 설정이 잡혀있어. 물론 그분이 만드신 거고.”
“그녀가…? 대체 그런 설정까지…? 도대체 왜?”
“그건 나도 모르지 적어도 나랑 누나 말고도 더 있었지만, 걔네들 까지는 몰라. 그분께선 우릴 “인공지능”이라고 정의하고 부르셨어.”
“역시 그녀는 알 수 없는 존재네… 도대체 무엇을 위해 너희를…”
그런 로봇과 제네의 대화를 듣던 소녀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이야기에 그저 묵묵히 걸었다. 그사이 격차가 벌어진 남성과를 거리를 줄이기 위해 소녀는 말했다.
“일단 오빠, 조금 달리자. 맥스 하고 너무 멀어지면, 나중에 혼나.”
“아아, 그래. 미안하네. 대화중에 우리 이야기만 하고 말이야.”
“으응. 아니야. 빨리 가자.”
소녀와 로봇은 남자를 향해 잠시 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거리를 좁힌 두 사람은 맥스와 함께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로봇이 본 것은 고철의 판자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철벽이었다. 그냥 고철이 아닌 일종의 간판들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도시’의 주위를 동그랗게 둘러 쳐져, 내부를 지켰다. 그리고 도시의 내부로 향할 수 있는 입구 중 하나에 세명의 일행은 서있었다.
“휴우, 겨우 도착했구만. 여기가 우리의 첫 목적지야. 형씨, 소개하네. 들어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저기 적혀있는 데로 이곳은 ‘뉴 호프’, 이 근방에선 제일 크고, 제일 멀쩡한 도시라고 할 수 있지.”
세 사람은 도시의 남쪽 입구에 서있었다. 입구의 옆엔 페인트 같은 것으로 단어들이 적혀있었다. 로봇은 처음 보는 그 문자들을 이해했지만, 그것보다 도시의 모습에 더 흥미가 갔다. 그들을 힐끗힐끗 쳐다보는 불량배 무리가 입구 옆에 서 있었지만, 로봇의 두 눈은 그들을 신경 쓸 새도 없이 처음 보는 문화를 가진 도시의 매력에 빠져있었다.
“이것들은… 간판인가요…? 어째서 이것들이 벽을 이루고 있는 거죠?”
“흠… 글쎄, 그건 나도 모르지. 전쟁이 나고 다 뒤집혔는데, 남은 거라곤 고철더미 밖에 없으니. 쓸모없는 것들을 가지고 그나마 구실을 하게 만들었겠지. 그중 한 개가 저 간판 벽일 거고.”
“전쟁이요…?”
로봇은 의문을 표했다. 남자는 그런 로봇을 또 한 번 꺼끄름하게 쳐다보았다.
“뭐야…? 형씨네 동네는 무슨 세상과의 소통을 끊고 살았나? 대전쟁을 몰라?”
“죄송합니다. 마을의 어르신들은 그쪽 이야기를 잘 안 하셔서…”
로봇은 상황을 임기응변으로 해결했고, 그런 모습을 본 남자는 간단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뭐, 난 역사학자가 아니니 짧게 말하면, 옛날 조상님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다. 뭔가를 펑 터트렸고, 그게 세상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그 여파가 현재까지 이어져서 이 꼬락서니가 된 거고. 끝. 이제 들어가지. 궁금하면 아나한테 물어보도록.”
말을 끝낸 남자는 뒤돌아서 도시의 입구로 들어갔다. 소녀 또한 따라 걸었다. 로봇은 그저 묵묵히 도시의 입구를 구경하며 걸었다. 로봇은 그제야 입구에 있던 불량배들을 봤지만, 그들이 세 사람에게 시비를 건다던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입구를 지나 도시의 내부로 들어서자. 거리는 인파로 가득했다. 수많은 건물과 사람들의 향연. 말 그대로 생명이 살아 숨셨다. 시끌벅적한 도로변에는 노점상들과 금속으로 된 탈것들이 즐비했고, 건물의 내부 또한 수많은 가게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음식을 팔거나, 옷, 무기, 귀금속, 심지어 짐승을 파는 가게도 있었다. 또 곳곳에는 경비병으로 보이는 무장을 한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그런 모습 하나하나가 로봇에게는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지금까지 와는 달리 그들이 하는 말이 모두 이해가 되었다. 그 모든 소리가 말이다.
“어이, 형씨. 계속 그렇게 뒤처져 있으면 놓고 간다?!”
남자가 로봇을 향해 소리쳤다. 로봇이 넋을 놓고 도시의 모습을 보는 사이 두 사람과의 거리가 벌어졌었다. 로봇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두 사람을 따라갔다.
“죄송합니다, 밖에서 봤던 거대한 모습도 그렇지만, 처음 보는 광경의 연속인 곳이군요. 저희는 어디로 가는 건가요? 도시 내부에 무언가 목적이라도...?”
“외곽 쪽으로 들어가면, 내가 아는 단골가게가 하나 있어. 그쪽으로 가지. 오늘은 더 이상 걸어 다니기 지치니. 거기서 하루를 묶고, 가도록 하지.”
“단골가게 말인가요… 두 사람은 이곳을 자주 오시나요?”
“뭐, 그렇지. 마지막 방문으로부터 6개월은 지났지만, 그럭저럭 자주 온다고 할 수 있지. 뭘 찾는데 이 도시 만한 곳이 없거든. 일단 가지. 나도 나이가 있어서 서있는 것도 지치거든.”
맥스를 따라 세 사람은 도시의 북서쪽 외곽으로 들어섰다. 그들이 지나가는 거리는 도시의 입구와는 달리 겉보기에도 으쓱한 곳이었다. 사람들의 수는 거리가 깊어질수록 줄어들어, 거의 남지 않았고, 거리에 자리한 상점들은 입구에서 보았던 것들과는 달랐다. 대부분의 상점 주인들은 물건을 내놓지 않고, 조용히 지나가는 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봇은 그걸 보고 의구심을 가졌다.
“이쪽 거리는 민가인 건가요…? 민가라 쳐도, 분위기가 많이 어두운 곳이군요.”
남자가 조용히 앞을 보고 걸으며 말했다.
“형씨, 너무 두리번거리지는 말고, 여기는 암시장이야. 쉽게 말하면 상점가의 뒤쪽 세계지. 합법적으로는 거래되지 않는 그런 물건들이 오고 가는 상점가이지.”
“합법이라면…? 이 도시는 법이 존재한다는 것입니까?”
“법은 물론이고, 정치가도 있지. 도시의 중심부에는 높으신 분들이 사는 장소가 따로 있다네. 물론 그 동네는 이쪽이랑은 달리 콘크리트로 벽까지 예쁘게 만들어 났지… 이런 설마, 아니겠지.”
남자는 무언가 잘못됐다는 듯이 말하고는 모자를 숙여 얼굴을 가렸다. 소녀 또한 그것을 보고는 모자를 숙였다. 소녀는 총기에 손이 갔지만, 남자가 그것을 제지했다. 로봇은 남자와 소녀가 보았던,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몇몇의 불량배가 한 숙녀와 말싸움을 버리고 있었다.
“아니. 글쎄, 사람 잘못 찾았다니깐. 그런 사람 난 모른다고. 여길 찾는 사람이 바보들도 아니고 다 정체를 속이고 오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맥스는 그 모습을 보고 건물 사이의 골목에 모습을 숨겼다. 소녀와 로봇 또한 따랐다. 그리고 건물의 벽에 등을 대고 조용히 소란을 경청했다.
“... 이봐, 여자. 우리는 정보만 넘기면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다. 순순히 아는 것만 분다면, 조용히 가도록 하지.”
불량배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흑인 남성이 말했다. 큰 체구, 머리카락은 깔끔하게 밀려있었으며. 그의 총집에는 맥스와 아나와 비슷한 총이 한 자루 있었다. 그와 달리 주위의 불량배들은 세 사람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총기를 들고 있었다.
“글쎄, 나는 모른다니까. 무슨 근거로 날 협박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맘에 안 들면 너네 보스라도 데려오든가. 가뜩이나 주문량에 비해 보수도 쥐꼬리만 해서 짜증 났는데, 어디 한번 붙어보자고.”
갈색 피부에 흑발을 휘날리며 숙녀는 크게 소리쳤다. 당당한 그모습을 보더니, 맥스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밥님, 그냥 싹 밀어버리시죠. 저희도 행동을 보여야, 이 여자가 저희 말을 듣지 않을까요?”
불량배 중 하나가 흑인에게 제안했다. 하지만 그런 부하의 말을 남자는 무시했다.
“... 이봐, 거기 여자. 3일이다. 3일 후 우리가 요구한 물건을 받으러 올 때 중년 남성과 붉은 머리 소녀의 정보를 넘기지 않으면 오늘 일을 후회하게 될 거다. 전원, 복귀한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조용히 도로변을 향해 걸었다. 그 모습을 본 불량배들은 분에 안 차는 듯했지만, 그를 따라 걸어갔다.
“어이쿠. 잠시만, 아나.”
맥스는 조용히 도로변을 향해 등을 졌다. 그리고 소녀를 가렸다. 불량배 무리가 걸어가며 골목을 봤지만, 다행히 조용히 물러났다.
“젠장, 야. 오늘 여자나 안으러 가자고…”
졸개들의 말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맥스는 조용히 골목에서 걸어 나왔다. 그리고는 불량배 일행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아나와 로봇에게 손짓했다.
“자, 가자고. 우리 목표가 바로 저기거든.”
세 사람은 방금까지 말싸움이 벌어졌던 가게로 향했다. 그리고 맥스가 허리 벨트에 손을 얹으며 먼저 말을 걸었다. 여성은 세 사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뒤돈 채 가게를 정리하고 있었다.
“어이, 아가씨. 중년 남성과 붉은 머리 소녀의 대해 아는 게…”
맥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금까지 말싸움을 했던 여성이 뒤돌아 보며 소리쳤다.
“아니, 진짜 당장 안 꺼지면 다 바람구멍을…”
여성은 잠시 맥스와 아나의 얼굴을 보더니 표정이 변했다.
“여어, 카산드라. 6개월 만인가. 그사이에 얼굴이 많이 안 좋아졌구만.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맥스가 웃으며 먼저 인사를 건네고, 아나가 살짝 미소 지으며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숙녀는 그걸 보고 뛰어왔다. 그리고 아나를 안았다.
“아이고, 우리 귀염둥이 왔쩌여!”
숙녀는 맥스와 로봇은 바라보지도 않고, 그저 소녀를 귀여워했다. 소녀는 괴로워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그런 모습을 본 맥스가 모자를 벗고 머리를 긁었다.
“카산드라, 숨 막혀요...”
“... 이거 참, 찬밥 신세로 구만.”
“하하, 이건 또 재밌는 분이시네요.”
잠시 후 카산드라의 환영인사가 끝나고, 그녀는 빠르게 가게문을 닫고 세 사람과 대화를 나눴다.
“아나하고 냄새나는 노인네, 그리고 처음 보는 덩치 큰 멋쟁이인가…? 카산드라의 만물점에 온 걸 환영해. 아나, 오랜만이네. 6개월 만인가?”
“내가 아까 얘기…”
“노인네는 조용히 있어! 어디 빚만 한가득 쌓인 사람이 말이 많아!! 난 아나한테 말 걸고 있잖아!!”
“... 젠장…”
여성에게 찬밥 신세를 진 맥스는 그대로 걸어 가게 안쪽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하하, 반가워요. 카산드라. 저번에는 맥스가 민폐만 끼친 거 같아 죄송하네요.”
소녀가 말하자 카산드라가 아나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며 말했다.
“아니야, 우리 아나만 와준다면, 저기 있는 노인네가 무슨 사고를 쳐도 난 좋단다!”
그런 모습을 본 멀뚱멀뚱 보고 있던 로봇을 카산드라가 먼저 한번 훑어보고 말을 걸었다.
“이쪽은 처음 보는 오빠 같은데… 새로운 일행이야?”
아나가 걸어와 두 사람을 서로 소개해줬다.
“아아, 카산드라. 이쪽은 카일 오빠예요. 카일 오빠, 이쪽은 카산드라.”
“만나서 반갑습니다. 카일이라고 합니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여행자라고 알고 계시면 됩니다.”
“흐흠, 예의 바른데. 좋아, 적어도 저기 앉아있는 노인네 보단 훨씬 나은 사람인 거 같네.”
“미안한데, 산드라. 그 노인이라는 단어 좀 그만 쓰면 안 될까? 너도 곧 40을 바라보는…”
“거기 입 다물지 못해? 마지막으로 가게에 왔을 때, 깨 먹은 장비값이 얼마인 줄 알아? 변상할 거 아니면 발언권이라도 사서 말하지?”
“... 죄송합니다.”
맥스의 기가 죽었는지 고개를 숙였다. 그런 맥스를 보며 아나가 쿡쿡 웃었다.
“좋아, 저기 있는 곧 무덤에 갈 노인네 이야기는 무시하고, 밥은 먹었어? 난 아직인데. 같이 먹을까?”
“좋아요. 저희도 막 도시에 도착했거든요. 같이 먹어요.”
“좋아, 우리 아나를 위해 오늘은 특제 볶음밥을 해볼까. 우선 두 사람은 따뜻한 물로 샤워라도 하렴. 바이크도 없이 오는데 많이 힘들었지.”
“아니에요. 아, 따뜻한 물은 잘 쓸게요. 가요, 카일 오빠. 카산드라 씨네 가게는 기본적인 생활 설비는 다 있어요. 안내해드릴게요.”
“어어, 그래.”
그렇게 아나와 맥스가 건물의 안쪽으로 사라지고, 맥스와 카산드라만이 남았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카산드라는 맥스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가 건너편에 앉으며 말을 걸었다.
“걸어온 거 맞지? 땀 투성이 같네.”
“그래, 매번 하는 거지만, 죽을 뻔했지.”
둘에게서 잠시 정적이 흘렀다. 무언가 어색한 사이 같았다.
“... 저 파란 갑옷인가? 슈트 같은 걸 입은 오빠는 처음 보네. 새로운 파트너인가?”
“돈도 못 버는 내가 뭐하러 입을 하나 더 늘리겠어. 여기 오다 만났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본부에 찾는 게 있는 거 같더라고, 행동이 수상쩍기는 해도 나쁜 놈은 아닌 거 같아. 뭐랄까, 그냥 비밀이 많은 사람이라고 할까?”
“재밌는 사람을 만났나 보네. 뭐, 우리 맥시가 놔둔 거 보면 나쁜 사람은 아니겠지. 그리고 아나는 못 본 사이 쑥쑥 크는 거 같아. 그래 아직도 성장하고 있는 거야?”
“... 그래, 이미 날 넘어서고 있지. 체력은 그렇다 쳐도, 감각뿐만이 아니야… 근력 또한 이미 날 아득히 앞서 나가더군. 내가 저 나이 때에는 저거 반만 했는데 말이야.”
맥스가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 모습을 본 카산드라가 말했다.
“그렇지… 성인 남성도 쓰기 힘든 총을 한 손으로 휙휙 휘둘렀을 땐 엄청 놀랐다니깐.”
“... 그래, 그건 둘째치고 가게 앞에 있었던 놈들… 어떤 놈들이야? 갱단 놈들인가?”
“... 놀라지 말고 들어. 샘을 봤어. 그 배불뚝이 샘 말이야.”
“... 뭐? 샘? 그 녀석이 살아있었어?”
“... 잘 들어. 맥시, 소문을 들었겠지만, 너희 민병대 본부에 갱단 놈들이 무언가를 설치했어. 그리고 그 갱단 놈들을 지휘하는 게 그 샘이야. 너희가 저번에 여길 뜨고 얼마 안 있어서 샘이 찾아왔어, 박물관을 찾았다면서 처음 보는 무기와 갱단 놈들 몇 명 하고 말이야. 그리고는 너랑 아나에 대한 소문을 물으면서 협조를 요구하더라고… 지금은 적당히 협조하며 조용히 있지만, 조만간 일이 크게 터질 거 같아..”
“젠장, 그 빌어먹을 놈이 배신자였나. 예상은 했지만, 그럴 배짱이 있는 놈인 줄은 몰랐는데.”
원수를 찾은 듯이 맥스는 분노에 차 이빨을 아득아득 갈았다. 그런 맥스를 보며, 카산드라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아까 봤는지 모르겠지만, 샘은 박물관에 찾은 물건들을 수리해서 갱단에 보급하더니, 암시장에 뿌리기 시작했어. 이미 상당한 수익을 올렸을 거야. 그리고 그 무기들 말이야. 우리가 지금까지 써 온 거랑은 수준이 달라. 이 무기들이 퍼져서 개량된다면, 네가 지금 허리에 차고 있는 건 장난감에 불과하게 될 거야.”
“... 그건 나중에 처리하지, 그래… 샘이 본부에 무슨 짓을 했는지는 자세하게 아나...?”
“글쎄, 그거까지는 나도 잘 몰라. 그쪽 소문은 갱단 놈들이 다 막고 있어서 말이야… 그건 그렇고, 너 저번에 얘기했던 병은 어때, 좀 호전이 됐어?”
“... 아니, 의사선생은 죽을 때까지 고통이 이어질 거라더군. 전쟁 전이라면 모를까, 적어도 지금의 기술로는 고통을 줄이는 게 전부라던데, 그 비용도 엄청나더군.”
“... 얼마나 남았는데?”
“몰라, 이제 길면 1년 반…? 아아, 그렇지. 의사선생이 술이랑 담배는 하지 말랬는데, 너무 고통스러워서 계속했으니…. 더 짧아지지 않았을까?”
“하아… 아나한테는 말했어?”
“아니… 아직. 하지만 곧 얘기하게 될 거야. 이번에 큰 일을 계획 중이거든.”
여성과 남자는 서로 진지하게 마주 봤다. 그 와중에 남성은 안쪽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말했다.
“어이, 거기 형씨. 어디부터 들었지?”
안쪽에선 로봇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죄송합니다. 엿들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나올 타이밍을 잡지를 못해서…”
로봇의 모습을 보고 남자는 웃었다. 여자는 그런 남자의 얼굴을 보고 시선을 피했다.
“난 어디서부터 들었냐고 물었어, 형씨. 물론 마지막은 들었겠지?”
“예, 맥스, 당신의 병에 대해선 다 들었습니다.”
“그렇군… 그럼, 부탁 하나 하지. 아나에게는 내가 말한다. 남자 대 남자로 약속하지. 그전까지는 이 얘기는 꺼내지 말아 주겠나?”
“... 알겠습니다. 맹세코 조용히 입 다물고 있겠습니다.”
“좋아, 그럼. 산드라, 점심 준비를 부탁하지. 나도 좀 씻고 와야겠어.”
맥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의자를 밀며 일어나 로봇을 지나 안쪽으로 사라졌다. 로봇과 여성만이 남았다.
“... 제가 괜한 걸 들은 거 같군요.”
“아니야, 어차피 맥스 목을 노리는 놈이 아니라면 누가 알든 상관없는 정보였어, 그래 여행자라고? 맥스가 널 통과시켰다는 건 네가 별 문제없다는 이야기인 건가?”
“환영식이라고 해야 할까요… 처음 만났을 때, 맥스 씨가 어깨에 총탄 한 발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하하, 노인네 답네. 좋아, 나도 슬슬 준비를 해야지. 여기 앉아 있어도 되고, 아니면 도시를 둘러보고 와도 돼. 한 30분 정도 걸릴 거야.”
“아아, 전 밖에서 먹겠습니다. 세 사람이서 식사하셔도 됩니다. 혹시 옥상을 이용해도 될까요?”
“어어? 내 볶음밥은 인기 많은데. 뭐, 좋아. 옥상문은 열려있으니깐. 그냥 올라가서 열면 돼.”
“감사합니다. 카산드라 씨.”
로봇은 뒤돌아 아나가 안내해줬던 계단을 조용히 올라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가자 도시의 일부분이 보였다.
“보스, 혹시 압박감 때문에 도망친 거야?”
“... 어차피 난 밥도 못 먹잖아. 제네, 기능 시험이나 해보자. 너, 탐색을 기록하고 싶다며. 아트나 나비한테도 보여줄 겸 드론으로 도시 상공이나 찍어줘.”
“예입. 본부대로 합죠.”
로봇은 허리 부분에 있던 구체를 하나, 하늘로 던졌다. 던져진 구체는 위쪽에서 두 개의 날개가 나와 돌기 시작했고, 전면에서는 카메라가 빛났다. 공중에 떠있던 드론은 곧 도시의 상공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로봇은 조용히 옥상 한켠에 앉아, 생각에 빠졌다.
1시간 여가 지나고, 로봇이 가게로 내려오자 내부에는 카산드라만이 작업 테이블에 앉아 총기를 점검 하고 있었다. 점검 중인 총기는 두정, 맥스와 아나의 물건이었다.
“... 두 사람은 어디 나갔나요…?”
“아아, 두 사람이라면 방에서 누워 자고 있어. 여기까지 오는데 걸어왔다며, 아냐? 많이 지쳤을 거야. 저녁까지는 내버려 두자고.”
“... 그렇군요. 카산드라 씨, 혹시 시간이 되신다면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해주시겠나요?”
“아나랑 맥스? 뭐 내가 아는 건 별거 없지만, 알고 싶은 게 뭔데?”
“아까 맥스 씨가 옛날에 민병대원 시절이랑 아나에 성장이라고 하셨던 부분입니다.”
여자가 분해된 총기 부품을 바라보던 표정이 달라지더니,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로봇의 질문에 답하려 했다.
“... 대답은 해줄게, 대신 민병대원 시절 이야기는 안돼. 맥스가 알면 혼나. 그 이야긴 맥스, 본인한테 듣도록. 아나 이야기라면 해줄게. ”
“그래도 좋습니다. 그냥 궁금증에 물어보는 거니까요..”
카산드라는 부품을 내려놓고, 끼고 있던 장갑을 테이블 위에 얹어놓고는 의자를 틀어 앉아 로봇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 민병대원 이야기는 안되지만, 맥스의 꼬꼬마 시절 이야기는 해줄 수 있는데? 흥미 있어?”
“그것도 나쁘지 않군요.”
여자는 씨익 미소를 짓더니,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해 말로 꺼냈다.
“보자, 옛날에… 그러니깐 맥스가 어릴 때, 집안이 목장일을 했다고 하더라고. 근데 집안이 좀 개판이었어. 아빠라는 작자는 맨날 마을에 도박을 하러 다녔고, 술에 취해서 맥스랑 아내에게 폭력을 휘둘렀다고 하더라고. 그러다가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아빠랑 작자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어. 그러자 맥스는 혼자 생각에 빠졌다더라. 그리고 몇 날 며칠의 시간이 지나고, 맥스는 목장에 있던 동물들을 다 풀어주고, 그 길로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어.”
여자의 이야기는 마치 한 편의 전기 같았다. 맥스의 어릴 적 이야기는 그리 밝지 않게 시작되었다. 모두의 인생이 같을 수는 없지만, 그의 이야기는 이미 평범을 벗어나 있었다.
“온갖 일을 다해봤대, 사냥부터 심부름, 청소 같은 잡일까지 말이야. 그러다 마을에 돌아다니던 불량배 놈들도 맥스가 나서서 두들겨 줬지. 그러자 사람들이 맥스를 치켜세워 줬다 하더래. 그 길로 맥스는 그 마을에서 자경단 활동을 시작했어. 뭐, 그래 봤자. 평상시엔 순찰 돌다 술 취한 사람들 집에다 업어주는 게 전부였지.”
“... 그렇게 4년을 일했다고 했나? 마을에 쳐들어 오던 갱단 놈들이랑도 여러 번 치고받다 보니 여기저기 소문이 퍼졌더라고. 그리고 그 사람이 찾아왔어, 민병대의 리더라고 부르는 사람이지만 그때는 아직 그냥 총잡이였지. 그 사람은 그 길로 사람들을 하나둘 모아, 민병대를 조직했고, 그 규모가 커져서 마을과 마을을 이어 나가는 ‘미닛맨’이 된 거지.”
“... 그럼 맥스 씨는 어릴 때부터 정의의 사도 같은 거였군요. 평생을 그렇게 사시다니… 하지만 어쩌다가 민병대가 해체된 거죠?”
“글쎄, 그건 나도 잘 몰라. 갱단이랑 몇 번의 전쟁이 원인일까, 아니면 교역상들을 덮치는 강도들을 정리한 거에 대한 보복일까. 8년 전 어느 날, 20여 년의 세월을 지내오던 민병대는 말 그대로 허공으로 사라졌어. 지금은 사람들의 소문만이 그들의 존재를 기억하지. 이유는 맥스를 비롯한 미닛맨의 남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 않을까…?”
장엄하게 말을 끝낸 카산드라는 작업 테이블에 놓였던 컵을 들어 물을 한모금 마시며 잠시 숨을 골랐다. 로봇은 그저 서서 조용히 카산드라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 아나 차례인가?.”
“... 예? 아아, 그렇습니다.”
“나도 모르니깐 자세하게는 말 못 해. 아나 말이야. 실은 초인 일지도 몰라.”
“초인이라면…?”
“글쎄, 그냥 요새 아이들은 성장이 빨라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아나는 말이야. 그 결과가 어마어마하다랄까, 그 작은 몸집의 소녀가 성인 남성보다 강하다면 이해되려나…? 성인 남성이 두 손으로 써야 할 정도의 총기를 한 손으로 휙휙 휘두르며 쏘질 않나, 총기의 반동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고,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아나가 쏘면 10발 중 9발은 맞는다고 보면 돼지. 그것도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서도 말이야.”
“과장이 아니라면, 아나는 명사수인 거군요.”
“뭐, 어디까지나 맥스의 말을 토대로 말하는 거야. 자, 이야기는 여기까지. 궁금한 건 맥스에게 직접 물어보도록. 그만큼 타인이 이렇다 저렇다 할 사안이 아니라는 거야. 맥스한테 들었어. 본부로 간다며? 뭐 찾는 거라도 있어?”
“예, 제가 찾는 게 그곳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함께 가고 있습니다.”
“뭐, 그럼 적어도 거기 없기를 빌어야겠네.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맥스 말이야. 본부를 다 날려버리려고 하고 있거든.”
카산드라가 말한 말에 로봇은 큰 충격을 받은 듯 했다.
“... 예!? 날려버린다니? 폭파라도 시킨다는 건가요?”
“그렇다나 봐. 이미 아나랑은 이야기가 됐다던데? 나중에 일어나면 이야기해봐.”
말을 끝낸 카산드라는 다시 의자를 돌려 작업에 들어갔다. 홀로 서 있던 로봇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일이 커져 가는 것을 말이다. 그런 사이에도 하늘의 구름은 조금씩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