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밀부르크는 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잘 못 걸려도 제대로 잘 못 걸렸군.’
하밀부르크가 가만히 침묵하고 있자 고드프리는 더는 못 봐주겠다는 듯 콧방귀를 끼며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그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내뱉은 소리였군, 잠깐이나마 기대를 한 내가 바보지, 이제 다 귀찮군, 빨리 영주 놈을 기절시키고 이방인과 싸우든가 해야겠어.”
“고드프리경 섣불리 움직이시면…….”
“그 간사한 주둥아리 좀 다무시지 영주, 아니 더 나불거려도 상관없겠군, 단번에 기절시킬 거니.”
“어디 해보시죠.”
“오냐, 당장 해주마!”
고드프리는 주먹을 풀며 영주에게 달려들 준비를 마쳤고 영주 또한 정말 다가오면 자신의 목을 그을 태세로 칼을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 게 보였다.
자칫 대형사고가 터질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
있는 대로 머리를 짜내던 하밀부르크는 문득 이름 하나를 떠올리곤 망설임 없이 외쳤다.
“가온! 저와 함께 적진으로 내달렸던 그 녀석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가온? 그 갈색 로브를 입은 놈의 이름이더냐?”
가온이라는 이름 하나에 고드프리는 샤로텐에게 다가가던 걸음을 멈추고선 물었다.
하밀부르크는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네 그렇습니다. 길을 뚫은 것은 저지만, 홀로 적진의 심장부로 가 적들을 물러나게 한 건 그 녀석입니다.”
“성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사라진 놈인데 그 놈이 뭘 할 수 있겠냐?”
“사라진 것도 분명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걸 겁니다.”
“끌끌, 정체도 모르고 무슨 생각을 가진지 모를 놈에게 성의 운명을 맡기겠다고? 헛웃음도 안 나오는 군.”
까칠한 말과는 달리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고드프리의 분위기는 한결 풀어졌다.
잠시 생각하던 고드프리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채 하밀부르크에게 말했다.
“그래, 혼자서 군대를 물러가게 한 놈이라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지, 하지만, 가능성은 적고 시간이 없다, 한 시간 주마, 한 시간 안에 그 녀석을 내게 데려와 나를 설득시킨다면 영주는 그냥 두겠다.”
고드프리의 말에 하밀부르크의 시야는 자연스레 샤로텐에게 향했다.
눈을 마주친 샤로텐은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제 걱정은 말고 단장께선 어서 다녀오시죠.”
“……알겠습니다, 그럼.”
하밀부르크는 지체하지 않고 곧장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하밀부르크가 빠져나가고 둘만 남은 집무실에는 여전히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고요 속 적막을 먼저 깬 것은 고드프리였다.
고드프리는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샤로텐을 올려다보며 피식 웃으며 말했다.
“칼을 내려놓으시고 앉으시죠, 영주님, 몸에 너무 힘이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지쳐 쓰러지시면 영주님만 손해일 겁니다.”
“하하, 내려놓았다가 고드프리경께서 기습이라도 하면 전 꼼짝없이 당할 텐데 어떻게 내려놓겠습니까.”
“자유 해방단 단장 놈이 그 갈색 로브 녀석을 데려올 때 까진 영주님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제 명예를 걸고 말하는 겁니다.”
“으음,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고드프리의 권유에 샤로텐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칼을 내려놓았다.
칼을 내려놓았음에도 고드프리는 샤로텐을 건들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몇 분 전만 해도 영주를 때려눕힐 기세였던 그가 순한 양처럼 가만히 있으니 도리어 의문이 생긴 샤로텐이 먼저 물었다.
“갑자기 마음을 바꾸신 이유가 뭡니까?”
“바꾼 게 아닙니다, 잠깐 기다릴 가치가 있어서 기다리는 것뿐이죠, 끌끌.”
“기다릴 가치요? 단장이 데려온다는 그 갈색 로브 말입니까? 확실히 처음 볼 때부터 범상치 않기는 했다만…….”
“갈색 로브놈의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영주의 말을 중간에 끊은 고드프리는 남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양해를 구하고선 어린아이처럼 장난스럽게 이어 말했다.
“자유 해방단 단장 놈이 성 안으로 들어온 직후 갈색 로브 녀석은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사라진 녀석을 찾으려 주위의 모든 기운을 감지했을 때 익숙함을 느꼈죠.”
“익숙한 기운이요?”
“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기운이었습니다, 영주님께서 이해가 잘 안 되실 수 있으니 비유를 해야 겠군요, 흐음, 뭐가 좋을라나.”
집무실을 둘러보던 고드프리는 영주의 책상 위에 올라간 차갑게 식은 빵과 스프를 가리킨 채 말했다.
“맛으로 표현하면 되겠군요, 기운을 느낀다는 게 맛과 같습니다, 어떤 이는 그냥 밍밍하고 또 어떤 이는 먹다 남긴 빵조각처럼 퍼석퍼석하죠, 대부분 이들의 기운은 다시 느낄 필요도 없지만, 가끔씩 뇌리에 박힐 정도로 특별한 기운을 느낀 적도 있습니다, 그 갈색 로브의 기운 또한 그 특별한 기운을 가진 이였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는 사람인겁니까.”
“자세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제가 분명히 알고 있는 녀석의 기운이었습니다, 이름이 가온이라고 했던가요? 잘도 그런 가짜 이름을 내걸고 다닐 줄은 몰랐습니다, 끌끌, 뭐 어쨌든 녀석이 빨리 오기를 빌어야겠습니다, 한 시간 지나도 녀석이 안 온다면 저도 그땐 망설이지 않고 영주님을 기절시킬 거니 말이죠.”
“알고 있네.”
먹이를 노리는 듯한 살벌한 고드프리의 말에 샤로텐은 애써 담담하게 말하지만, 흐르는 땀방울은 막지 못했다.
샤로텐은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며 부디 하밀부르크가 잘 해내길 빌었다.
말튼 성을 둘러싼 만 명의 군대, 그 군대를 지휘하는 통솔권을 쥔 막심은 거대한 막사 앞에 발걸음을 멈추고선 자신을 호위하는 세 기사들에게 간단히 명령했다.
“여기서부턴 나 혼자 간다, 너희는 각자 자리로 돌아가.”
“…….”
“…….”
막심의 말 한 마디에 세 기사들은 신속히 자리를 떠나갔다.
떠나가는 기사들의 모습을 보던 막심의 가는 눈이 파르르 떨리며 입가가 씰룩거렸다.
고작 기사단의 부관에 불과했던 자신이 각 지방을 대표하는 기사들을 마음대로 부리게 되다니, 자신보다 훨씬 높은 직급의 기사단 단장은 물론 한 지방의 영주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들뜬 마음도 잠시, 막심은 자신이 어디에 왔는지 깨닫곤 표정을 가다듬었다.
막심이 발걸음을 멈춘 막사는 일반 막사에 비해 몇 배는 큰 거대 막사였다.
사람이 아닌 거대한 짐승이 머무를 법한 막사 안으로 들어가며 막심은 정중히 말했다.
“하운드 님 오늘의 보고입니다.”
막사 안에는 거대한 짐승이 자리를 잡고 누워 있었다.
하늘에서 끝없이 내리는 눈처럼 하얀 갈기를 가진 위엄 넘치는 거대한 늑대, 만 명의 군대를 굴복시키고 수하로 만들게 한, 막심의 진정한 주인 이방인 하운드였다.
하운드는 감은 눈을 뜨지도 않은 채 간단히 말했다.
“보고, 불필요, 지휘권, 네 소유, 그러니, 알아서, 처리.”
“다른 게 아니라 알아두셔야 할 게 있어서.”
“크르르르.”
“죄, 죄송합니다, 그래도 알아두셔야 할 게 있습니다.”
막심은 최대한 하운드의 심기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빠르고 간단하게 보고했다.
“일단 오늘 저희 쪽의 사상자는 약 칠 백 명 입니다, 이 중 오백 명은 자유 해방단 단장 놈에게 당한 이들이고 나머지는 공성전 중 나온 사상자입니다.”
“그게 끝?”
“아, 아닙니다, 보고할 건 지금부터입니다, 공성전 시작 전 제가 하룬가에서 천대받는 하룬가의 사냥개들을 포섭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영주를 암살하라 했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걸 보니 당한 게 분명합니다, 당시 말튼 성 내에 하룬가의 사냥개들의 협공을 당해낼 만 한 강자는 성 안에 없었습니다, 외부인사의 짓 인 게 분명합니다, 따라서…….”
“크르르르! 말, 길다! 줄여라!”
하운드의 노성에 막심은 덜컥 겁을 먹고선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고드프리! 트라야비아가의 백전노장인 그가 말튼 성에 있는 게 분명합니다!”
“고드프리? 강함? 그자는?”
“네? 아, 하룬가에 있을 때 지겹게 들은 이야기론 단신으로 이방인을 잡고 다녔다고 합니다, 고드프리가 속한 트라야비아가를 적대하는 하룬가니 그 이야기는 축소되었으면 축소되었지 부풀려진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이방인 사냥꾼? 나도 해봄, 별거 없다.”
이방인들을 잡았다는 고드프리의 이름이 나와도 하운드는 딱히 관심 없다는 말투였다.
더 말을 했다간 하운드의 노여움을 살 수 도 있지만, 그럼에도 막심은 그만두지 않고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가장 큰 변수였던 얼음 마녀 미르는 다행히 소문대로 말튼 성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위험한 변수들이 많습니다, 자유 해방단의 단장의 예상치 못한 강함은 물론 숨어있던 노장 고드프리까지, 이런 변수들이 합쳐지면 아무리 하운드님이라도…….”
“이긴다, 내가 전부.”
한쪽 눈을 살며시 치켜 뜬 채 하운드는 단호하게 말했다.
눈을 뜬 하운드의 눈빛은 불꽃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자신의 앞길을 막아서는 이는 누구라도 밟아죽이겠다는 의지가 돋보였다.
하운드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막심을 노려보며 재차 말했다.
“이방인이든, 기사든, 별거 없다, 전부 살덩어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 그건 그렇지만.”
“그보다, 그 아이, 가온은?
“아직 안 왔습니다, 기간은 하루였으니 내일 오후를 넘어서도 안 오면 배신했다고 생각해야겠죠.”
천막 틈새 너머로 보이는 밤하늘에 뜬 달을 보며 말하는 막심의 표정은 불안해 보였다.
여전히 이쪽이 우세한 건 누가 봐도 분명하지만, 일이 조금씩 틀어지고 있다.
건방진 가온이라는 꼬맹이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고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나타나고 있는 와중에 또 다른 변수가 생기면 일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걱정하는 막심을 노려보던 하운드는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표정, 불안, 내 힘을, 의심?”
“아, 아닙니다, 하운드님, 하운드님의 힘을 제가 어찌 의심하겠습니까.”
“믿어라, 지금의 난 무적, 그 누가 와도 이긴다.”
“물론입니다, 믿고 있습니다, 하운드님.”
고개를 숙이며 예의바르게 말한 막심은 막사를 나가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이 뜬 하늘 아래 내리는 눈들을 보며 막심은 머릿속에 있는 불안들을 지웠다.
늘 그래왔듯 예상치 못한 변수들은 하운드가 해결해줄 것이다.
“…….”
그러나 완전히 불안을 지우지는 못했다.
처음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어느새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은 가장 위험한 변수 노예 가온.
만약 녀석이 하운드님을 배신하고 적으로 나타난다면 일이 어떻게 틀어질지 모른다.
막심은 입술을 깨문 채 다짐했다.
“가온, 만약 네 놈이 정말 나와 하운드 님을 배신한다면 네 놈만큼은 내 손으로 죽여주마.”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