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운드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근엄한 태도로 가온에게 말했다.
“랠리 숲에서 이미 했던 말이지만, 다시 한 번 제안하지 내 권속이 되어라 가온, 그래준다면 네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주지.”
하밀부르크와 가온이 적진을 돌파하고 있을 때, 말튼 성은 이 둘의 활약을 볼 틈도 없이 수성하기 바빴다.
하밀부르크의 활약 덕분에 동쪽 성벽의 사다리들과 정문의 공성장비는 박살났지만, 적들은 건재하고 공성장비 또한 남아 있었다.
정문 쪽은 하밀부르크와 가온 덕분에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지만, 성벽은 그렇지 못했다.
동쪽 성벽은 다시 사다리를 올리며 공성을 시작하고 서쪽 성벽은 적들이 올라오기 직전이었다.
“크윽! 놈들이 올라온다, 화살을 퍼부어!”
“방패를 둘러싼 놈들에게 화살은 소용없어! 낙석 시키라고!”
“돌이 떨어진지가 언젠데 아직도 돌 타령이야! 창이라도 들어서 막으라고!”
“부상자는 뒤로 빠져! 영주님의 명령이다!”
처음에는 낙석으로 사다리를 부시거나 적들을 떨어뜨렸지만, 준비한 돌은 금방 떨어졌다.
화살로는 떨구지 못하니 창으로 찌르거나 연장으로 사다리를 겨우 절단하며 버티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창을 맞아도 화살을 맞아도 꾸역꾸역 올라오는 적병들과 적진에서 화살까지 쏟아지니 수비병들만으로는 적들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마침내 성벽 위로 올라온 몇 명의 적병들은 서슴없이 수비병들을 베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크아아악!”
“내, 내 팔! 아, 안 돼!”
수비병들은 올라온 적병들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력하게 당했다.
기세가 꺾인 상태에서 시작된 싸움인데다가 적들의 대다수는 각 성에서 뽑힌 정예병들이다.
전면전에서는 상대가 되지가 않으니 사기가 바닥난 병사들은 혼란에 빠졌다.
“저걸 어떻게 막아? 이, 이대로 도망칠까?”
“성이 싹 다 포위됐는데 어디로 도망쳐!”
“다들 진정해라! 내가 왔다!”
“여, 영주님?”
성벽을 뛰어다니며 병사들을 지휘하던 영주가 나타나자 병사들은 화들짝 놀랐다.
적들이 바로 코앞에 있는 데 이 성의 수장인 영주가 몸을 드러내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그러나 샤로텐은 개의치 않고 외쳤다.
“코른! 이반! 올라온 적들부터 처리해라!”
“알겠습니다, 영주님.”
“명을 받들겠습니다.”
샤로텐의 명령에 영주의 등 뒤에서 두 기사가 튀어나왔다, 그냥 기사도 아닌 영주의 호위 기사들이었다.
두 기사는 올라오는 적병들을 베어 가르며 성벽 주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적들이 각 성에서 차출된 정예병들이라고는 하지만,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단련한 기사들을 당해내지 못했다.
성벽에 있던 적들이 일소되자 영주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수비병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뭐하는 거냐! 사다리를 부셔라!”
“아, 알겠습니다!”
수비병들은 들고 있던 연장으로 가까스로 사다리들을 절단하는 데 성공했다.
얼추 정리가 되자 샤로텐은 힐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금 죽은 적들의 숫자는 고작 셋, 반면 죽어간 아군 병사는 열이 넘어갔다, 또 적들이 올라오면 성벽이 점거당할 위험이 컸다.
샤로텐은 자신의 호위를 맡은 두 기사에게 명령했다.
“코른, 이반, 너희 둘은 여길 맡아라, 적들의 접근을 막아라.”
“영주님, 벌써 열이 넘는 호위 기사들이 배치되었습니다, 저희까지 배치하면 영주님을 호위할 기사가 없습니다, 저 혼자 여길 맡을 테니 최소한 코른과 함께…….”
“너 혼자서는 무리야, 또한 내 목숨보다 성벽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하지, 내 걱정은 말아라, 날 호위할 녀석은 이 녀석 하나면 된다.”
담담하게 말하는 샤로텐의 등 뒤에는 어설프게 무장한 감독관이 있었다.
갑옷 틈 사이로 살이 튀어나온 채 힘겹게 무기를 손에 쥔 감독관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게 보이지만, 벌벌 떠는 그의 눈빛에는 알 수 없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심각한 상황임에도 샤로텐은 작게 미소를 지은 채 감독관에게 물었다.
“자네, 혼자서도 날 호위해줄 수 있겠지?”
“저, 저 말씀이십니까? 저, 저 혼자서 어떻게 영주님을…….”
“겸손도 심하군 할 수 있단 말로 듣겠네.”
“여, 영주님?”
샤로텐은 그 말을 하곤 정말로 감독관과 둘이서 다른 성벽을 향해 뛰어갔다.
성벽을 뛰어다니는 샤로텐 마냥 뛰기만 하지는 않았다.
“부상자들은 뒤로 빠져라! 다만 중상자가 아닌 사지가 멀쩡한 이들은 뒤에서 지원을 해라! 살라테스! 성벽 위로 적들이 올라왔다 막아라!”
“알겠습니다, 영주님!”
“여, 영주님이다! 다들 힘내자!”
“이야아아압!”
성벽을 사수하는 병사들에게 적절한 명령을 내리거나 배치된 기사들을 활용해 적들의 입성을 막아내는 영주, 영주의 적절한 지휘가 없었다면 몇몇 성벽들은 진즉에 점거 당했을 것이다.
샤로텐의 지휘를 뒤에서 지켜보던 감독관은 놀라움보다는 걱정과 두려움이 앞섰다.
‘정말 이대로 가도 괜찮은 걸까.’
성의 수장인 영주가 제대로 된 호위는커녕 싸움도 제대로 한 적 없는 배불뚝이 하나와 함께 전쟁터를 돌아다니고 있다.
영주에게 날아오는 화살들을 막는 것도 버거운데 적들이 들이닥치기라도 감독관은 물론 영주까지 꼼짝없이 죽을 것이다.
감독관의 심란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뛰어가던 샤로텐은 뒤따라오던 감독관에게 조용히 말했다.
“며칠 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정찰 임무를 도맡았는데 끝나자마자 내 호위라니, 미안하네.”
“미, 미안하다니요, 그런 말씀 마십쇼.”
한 성의 수장인 영주의 사과에 감독관은 몸 둘 바를 모른 채 고개를 숙였다.
자신은 이런 사과를 받을 사람이 아니다.
하룬가의 밑바닥에서 남을 부려먹기만 하는 쓰레기에 불과한 자신이다.
감독관은 자신이 도망치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호위 기사들을 떠올렸다.
‘고작 나 같은 걸 살리려고…….’
랠리 숲에서도 늑대에게 위협받는 자신을 노예가 살려주었다.
두 번씩이나 남에게 목숨을 빚지면서 확실히 변한 감독관은 입술을 깨문 채 다짐했다.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어떻게든 영주님을 지키겠다.’
그렇게 다짐하던 찰나, 달리고 있던 앞쪽에서 큰 소란이 벌어졌다.
“뭐야 이 놈들! 다른 놈들이랑 달라 다들 조심해!”
“크억!”
“젠장,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라!”
“어떻게든 막……컥.”
올라오려던 적들을 막던 수비병들의 진형이 와해되었다.
샤로텐 영주는 달리던 걸 멈추곤 깜짝 놀라며 외쳤다.
“갑자기 무슨? 저기도 내 친히 기사들을 배치했을 텐데?”
와해된 수비병들을 헤치며 검은 복면을 쓴 적들이 나타났다.
검은 복면에 그려져 있는 뱀과 교차하는 칼의 그림, 하룬가의 사냥개들이었다.
사냥개들 어깨너머로 목이 잘린 호위 기사들과 시체가 된 수비병들이 보였다.
샤로텐은 상처투성이의 입술을 깨문 채 분노했다.
“하룬가의 사냥개마저 놈의 부하가 된 건가!”
“영주님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성벽이 뚫렸습니다, 빨리 뒤로 피하셔야합니다!”
감독관은 샤로텐의 앞을 막은 채 다가오는 사냥개들을 견제했다.
검을 쥔 감독관의 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기사들과 수비병들을 한순간에 정리한 적들이다.
자신이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상대, 죽음이 임박했음을 감독관은 깨달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적어도 시간 벌이는 할 수 있다!’
감독관은 랠리 숲에서 하운드의 부하가 된 이들의 모습을 똑똑히 봤다.
생전의 전투능력은 그대로여도 판단 능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그러니 자신이 이들을 막아서기만 한다면 사냥개들은 자신을 죽이는 데만 집중할 테고 그 사이 영주는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와라!”
무기를 빼든 채 거칠게 외친 감독관을 향해 사냥개들이 달려들었다.
감독관의 눈으로는 따라잡기도 힘든 속도였다.
휙!
“어?”
쏜살같이 다가온 사냥개들은 감독관에게 무기를 휘두르는 게 아닌 그냥 지나쳐버렸다.
감독관은 바람처럼 지나가는 사냥개들의 잔상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급히 고개를 돌렸다.
“서, 설마!”
뒤를 돌아본 감독관은 사냥개들에 의해 포위당한 영주를 볼 수 있었다.
하운드에게 지배당한 이들이라면 그저 눈앞의 적만을 죽여야 하는 데 마치 이성이 있는 것처럼 성의 핵심인물인 샤로텐을 우선적으로 노렸다.
샤로텐은 자신을 포위한 사냥개들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말했다.
“네 놈들, 이방인 하운드에게 지배당한 놈들이 아니구나.”
“……과연 말튼 성의 영주, 눈치 하나는 빠르군.”
“어째서냐! 네 놈들은 지금 말튼 성은 물론 하룬가를 배신했다! 이성을 잃고 지배당한 것도 아닌 맨 정신으로 이방인의 명령을 따르는 이유가 뭐냐!”
“왜긴 왜겠어, 돈 때문이지, 하룬가고 말튼 성이고 상관없다, 우린 그저 돈만 벌 수 있으면 족해.”
사냥개들 중 한 명이 비아냥거리듯이 말하며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가리킨 곳은 하룬가의 본가였다.
사냥개는 탐욕 가득한 눈을 한 채 킬킬거렸다.
“막심이라는 놈이 그러더군, 전투가 시작 될 때 영주를 척살하면 하룬가 본가에 있는 보물들은 전부 우리 거라고!”
“이런 정신 나간! 고작 재물 때문에 인륜을 저버린 거냐!”
샤로텐의 분노어린 외침은 사냥개들에게 닿지 않았다.
사냥개는 샤로텐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잘 나신 영주님이 알 리가 없겠지만, 우린 하루 한 끼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굶는 게 일상인 놈들이야, 대우를 제대로 안 해준 하룬가를 탓하라고.”
“그럼 이번 전투에서 공을 세우면 되는 거 아니냐! 인륜을 저버린 이방인과 그의 수하의 말을 믿는 거냐!”
“우린 의미 없는 공보단 눈앞의 재물이 좋거든, 애들아 어서 영주의 목을 치자, 증거물로 가져가야지, 클클.”
사냥개들은 암기를 꺼낸 채 천천히 샤로텐에게 다가갔다.
주위에 달리 도울 수비병들이나 기사조차 없었다.
샤로텐의 목숨은 경각에 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멈춰라! 이놈들!”
그때 감독관이 목청을 지르며 사냥개들에게 달려갔다.
달려오는 감독관을 사냥개들은 한심하게 쳐다보며 한 마디씩 했다.
“저건 뭐야? 돼지인줄 알았는데 사람이었어?”
“벨 가치도 없어서, 그냥 지나쳤는데 어쩔까.”
“어쩌긴 빨리 목을 베어버려, 다음은 영주다.”
사냥개들은 감독관을 적으로 보지도 않았다.
수비병들과 기사들마저 베어버린 사냥개들의 눈에 감독관은 살로 뒤룩 찐 돼지로 보였다.
압도적인 전력 차, 샤로텐 조차 상대가 안 될 것을 알고 급히 외쳤다.
“도망가라! 그대만이라도 도망가서 고드프리경에게 알려라!”
“싫습니다!”
샤로텐의 만류에도 감독관은 방향을 꺾지 않았다.
평생을 비겁자 겁쟁이로 살아온 자신이다.
랠리 숲에서도 평원에서도, 두 번이나 목숨을 구원받으면서도 자신은 도망치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겁쟁이로 사는 것도 이젠 지겹다!’
감독관은 품안에 손을 넣더니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보랏빛의 가루, 일전에 랠리 숲에서 가온에게 받았던 가루였다.
눈에 닿으면 폭발하는 성질의 가루를 감독관은 힘껏 던졌다.
“이얍!”
퍼어어어엉!
항상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