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곧 가온의 존재를 모르고 있던 막심은 하밀부르크의 외침에 그제야 깨닫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우, 우아악! 이 망할 꼬맹이는 언제 여기까지 온 거야?”
어떻게 온 건지는 몰라도 저 꼬마를 가만둘 수는 없다.
막심은 기사들에게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여기 숨어들어온 쥐새끼부터 처리해!”
“늦었어.”
막심이 명령을 내리기 전, 가온은 품 안에서 있는 가루뭉치 전부를 꺼내들었다.
꺼내 든 건 보랏빛 가루, 지금까지 조금씩 꺼내어 뿌린 것에 비해 이번에는 한 움큼이었다.
가온이 뿌린 가루 뭉치가 눈에 닿자 폭발과 함께 거대한 눈보라를 일으켰다.
쿠우우우우!
지금까지 일으켰던 눈보라 중 가장 큰 눈보라였다.
가온의 주위는 물론 하밀부르크와 세 기사가 대치하고 있는 곳까지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의해 가려졌다.
시야가 차단되자 막심은 반사적으로 랠리 숲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칫, 또 시야를 차단시키고 병사들을 혼란케 하려는 속셈이구나!”
병사들이 이렇게 모인 곳에서 또 이상한 가루가 뿌려진다면 병사들은 폭주해 날뛸 것이다.
그러나 막심은 두 번이나 당한 만큼 세 번은 당할 바보가 아니다.
그는 주위에 있는 모든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숨을 참아라! 이상한 가루가 보이면 절대 흡입하지도 만지지도 마라!”
시야는 차단 되도 목소리는 들리기에 명령을 들은 주위에 있던 모든 병사들이 숨을 참았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 막심은 어딘가에 있을 가온에게 외쳤다.
“크하하핫! 또 당해줄 줄 알았느냐? 용케 이 안까지 들어와 일을 벌인 건 칭찬해주마, 하지만 거기까지다!”
대답이 들려오지 않지만, 막심은 확신했다, 그 꼬맹이로서는 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몰아치는 눈보라가 거세 주위 상황이 어떤지는 몰라도 별탈은 없을 것이다.
이 눈보라만 그치고 꼬맹이를 찾아내 죽이리라.
자신감에 가득 차 있던 막심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하운드님은 왜 말이 없으신 거지, 서, 설마?”
막심은 떠올렸다, 랠리 숲에서 늑대 기사단 부단장 하워드를 죽일 때, 줄곧 숨어 있다가 하운드의 목을 노렸던 가온을.
수많은 적과 강자들과 싸우면서 하운드가 유일하게 입은 상처인 목의 자상, 이 상처를 입힌 건 다름 아닌 모두가 무시했던 노예 꼬마가 한 짓이라고 하운드가 직접 말했었다.
하운드와 싸웠던 상대 중 유일하게 살아남고 상처까지 입힌 노예 꼬마, 그렇기에 안심할 수 없기에 막심은 급히 하운드를 찾았다.
“그 꼬맹이가 하운드님의 목을? 하운드님! 하운드님! 어디 계십니까! 무사하신 겁니까!”
가는 실눈을 뜬 채 한참을 찾아도 하운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막심은 더욱 당황했다.
“대체 어디 계신건지……아니지 굳이 목소리로 찾을 필요가 없지.”
이방인 하운드의 권속인 막심, 권속들은 그의 주인의 위치를 알 수 있다.
숨을 죽인 채 막심은 하운드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찾아냈다.
“멀지 않은 곳이다!”
죽어라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뛰어간 막심의 시야에 저 멀리 하운드의 인영이 보이고 얼마 있지 않아 하운드의 정확한 모습이 드러났다.
상처 하나 없이 평소처럼 고고한 모습으로 눈밭에 서 있는 하운드를 보고 막심은 안심했다.
“다, 다행입니다, 혹시라도 그 건방진 노예 꼬마가 무슨 짓이라도 했을까봐 걱정했습니다.”
“건방진 노예 꼬마? 그냥 꼬마라고 하지 수식어 한 번 많이도 붙였네.”
“응? 어억!”
옆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막심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차가운 표정을 지은 채 막심을 노려보는 가온이 서 있었다.
막심은 화들짝 놀라며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들었다.
“이 쥐새끼 놈, 나와 하운드 님을 죽이려고 온 거냐! 옳지, 일부러 몸을 숨긴 채 내 뒤를 미행한 거구나!”
“아닌데.”
“하, 아니긴 무슨! 이 상황에서 그런 거짓말로 날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냐! 어림없지 넌 하운드 님에게 다가가기 전에 내 손에 죽을 거다!”
막심은 가온의 목에 검을 겨눈 채 살기등등하게 외쳤다.
여기서 이 건방진 꼬마의 목을 자르고 하운드님에게 갔다 바칠 것이다.
가온은 자신의 목 앞까지 칼이 다가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헛소리하지 말고 비켜, 지금 부는 눈보라가 그치기 전에 전부 끝내야 해.”
“그래, 시야가 차단된 눈보라 속에서 하운드 님의 목을 노리려 한 거겠지.”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거냐? 지금 내가 싸우는 것처럼 보여?”
“음?”
가온의 차디찬 일갈에 막심의 가는 눈이 꿈틀거렸다.
자유 해방단 단장이라는 놈도 그렇고 눈앞의 노에 꼬마도 똑같다.
앞으로 하운드 님 옆에서 이 세상을 지배할 주역이 될 이 막심님을 무시하다니.
분노에 가득 찬 막심이 검을 휘두르기 전, 하운드의 짤막한 말 한 마디가 들려왔다.
“그만.”
“하, 하운드님? 여기 이놈은 적입니다, 저는 물론 하운드님의 목숨까지 노리는 미친놈이라고요.”
“아님, 지금은.”
“네?”
알 수 없는 하운드의 말에 막심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주인의 명령이기에 순순히 검을 거둬들였다.
막심이 검을 거둬들이자 가온은 거침없이 하운드에게로 다가갔다.
이번 사태를 일으킨 핵심이자 적의 수장, 거대 늑대 이방인 하운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눈밭 위, 고고한 자태를 유지하는 하운드는 다가오는 가온을 응시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반갑다, 가온, 네가 살아 돌아 올 줄 알았다.”
자신의 목을 노리고 상처까지 입힌 적에게 하는 말치곤 너무나도 상냥했다.
평소 어눌한 말투도 아닌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말투였다.
이렇듯 따뜻하게 말하는 하운드와는 달리 그에 대답하는 가온의 말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난 별로 안 반가운데.”
하운드의 말에 차갑게 받아치는 가온의 대답에 막심은 두 눈이 빠질 듯이 놀랐다.
“저, 저 놈이 실성했나, 하운드님께 무슨!”
막심이 놀라든 말든 하운드는 지난 일을 회상하듯이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온, 성문에서의 너의 활약은 인상 깊었다, 시선을 교란시키고 흥분제를 뿌려 혼란을 일으키고 여기까지 오다니, 랠리 숲에서도 그랬지.”
“…….”
“처음 짐승들에게 포위당했을 때도 미리 흥분제를 먹인 자유 해방단원들로 하여금 혼란을 일으킨 뒤 도망가고, 마지막엔 스스로 냄새와 자취까지 숨기고 잠복하고 미끼인 목도리로 내 시선까지 돌린 뒤 내 목을 노렸지, 덕분에 생긴 상처다.”
목에 새겨진 자상을 가리키며 말하는 하운드의 눈빛에는 가온에 대한 적의는 보이지 않았다.
노예인 가온을 높게 평가하는 눈빛이었다.
하운드는 아직도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흘깃 보더니 물었다.
“이 눈보라를 일으킨 것도 네가 가진 가루의 힘이더냐? 살상력은 없지만, 시야를 가리는 데는 정말 탁월하군, 이런 건 어디서 배운 거지? 설령 누군가에게 받았다한들 너처럼 적절하게 잘 쓰는 이는 없을 거다.”
“되도 않는 칭찬은 집어치워, 이방인이 한낱 노예를 이렇게 높게 평가하다니, 이방인 체면이 뭐가 되겠어.”
“신분이고 계급이고 이방인이고 무슨 상관이지, 어차피 똑같은 살덩어리다, 난 널 높게 평가 한다 가온, 재주도 능력도 없이 그 어린 몸으로 여기까지 온 시점에서 넌 다른 누구보다 대단한 놈이지.”
하운드는 그 말을 한 뒤 다시금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흘깃 보았다.
가온이 일으킨 눈보라 중 가장 크게 일으킨 눈보라지만, 어느덧 그 색이 옅어지고 있었다.
곧 있음 눈보라가 완전히 사라지고 주위가 드러날 것이다.
하운드는 사라져가는 눈보라와 가온을 번갈아보더니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고생을 하면서 나에게로 온 거지? 네가 말 한 마디만 했다면 내가 길을 열어줬을 텐데 말이야.”
“…….”
“그래도 여기까지 온 건 랠리 숲에서 내가 했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이겠지, 그땐 네가 저항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날려버렸지만, 아무튼 잘 생각했다.”
하운드의 이어지는 말에 가온은 말없이 듣기만 했다.
옆에서 멍한 표정으로 듣고 있는 막심과는 달리 가온은 하운드의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랠리 숲에서 정신을 잃고서 며칠이 지나는 동안 이 사태가 어떻게 되어갈지 알고 있었다.
하운드가 곧장 말튼 성으로 가지 않을 것도, 말튼 성으로 올 지원군을 예측하고 미리 두 성을 점령하고 부하로 만들어버린 것도.
그리고 지금처럼 말튼 성이 포위될 것도 알고 있었다.
예측이나 추측을 한 게 아닌, 바로 앞, 이 사태의 원흉인 하운드로부터 직접 들은 것들이다.
자신의 목을 노렸던 상대에게 계획을 알려주었던 하운드, 알려준 이유는 단순했다.
하운드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근엄한 태도로 가온에게 말했다.
“랠리 숲에서 이미 했던 말이지만, 다시 한 번 제안하지 내 권속이 되어라 가온, 그래준다면 네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주지.”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