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달형의 녹색 검날이 달린 언월도를 든 둥근 투구의 기사였다.
하밀부르크는 거한의 기사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제야 나왔군.”
“…….”
하밀부르크는 이 자가 누구인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말보른 성에서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기사인 초승달의 기사 켈레베른이었다.
기사는 말없이 언월도를 든 채 다시금 하밀부르크에게 겨누었고 하밀부르크 또한 다른 말은 하지 않은 채 주먹을 쥐었다.
후우웅!
“흠?”
자세를 취하던 하밀부르크는 옆에서 빠르게 날아온 철퇴에 팔을 들어 막았다.
쾅!
“큭!”
거대한 충격음과 함께 옆으로 밀려난 하밀부르크는 막았던 자신의 팔을 확인했다.
막은 팔은 벌겋게 부은 채 파르르 떨고 있었다.
하밀부르크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철퇴를 날린 상대를 확인했다.
“망할, 한 명이 아니라고?”
켈베보른 외에 또 다른 기사가 출현했다.
다른 병사들의 몇 배가 넘는 덩치에 플레이트 갑옷으로 중무장한 철퇴를 휘두르는 기사, 브레이튼 성의 유명 기사이며 하마 기사라고 불리는 발퉁이었다.
두 기사의 출현에 하밀부르크는 본능적으로 떠올렸다.
“두 성의 기사가 나왔다는 건 말튼 성의 그 자도…….”
쉬이이익!
하밀부르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켈리베른의 어깨너머로 뭔가가 빠르게 날아왔다.
화살과는 비교도 안 되는 빠르기로 날아오는 투창이었다.
하밀부르크는 다급히 생각했다.
‘이건 못 피한다!’
콰득.
하밀부르크는 다급히 주먹을 들어 창과 부딪혔다.
쿠우우웅!!
창과 주먹이 격돌하며 거대한 충격음이 울려 퍼졌다.
근접공격도 아닌 투창이지만, 다른 두 기사의 공격과는 한층 더 거칠고 강했다.
멈추지 않는 창의 기세에 주춤거리던 하밀부르크는 이를 악물며 주먹에 힘을 주었다.
“흐아아압!”
퉁!
아슬아슬하게 투창을 겨우 튕겨냈지만, 그로인한 반동으로 하밀부르크는 또 한 번 뒤로 밀려나버렸다.
하밀부르크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어 마지막 상대를 확인했다.
붉은 투구의 창을 날리는 기사 칼 리보렌, 말튼 성의 사는 이들이면 모를 리가 없는 기사였다.
하밀부르크는 땀을 흘리며 힘겹게 중얼거렸다.
“칼 리보렌, 저자까지 나설 줄이야.”
초승달의 기사 켈레보른, 하마 기사 발퉁 그리고 붉은 투구의 기사 칼 리보렌까지 각 성의 유명기사들이 하밀부르크를 막기 위해 나섰다.
하밀부르크는 쓰게 웃으며 세 기사들을 움직이게 한 막심에게 말했다.
“고작 단장 한 명 막는데 과한 투자 아닌가.”
“큭큭, 쥐새끼 하나 잡는 데 고양이 몇 마리 정도는 풀어줘야지 않겠냐, 뭣들 하냐, 놈을 에워싸고 죽여라!”
막심의 명령에 세 기사는 하밀부르크의 주위를 포위한 채 아까처럼 동시에 공격했다.
정면에서 찔러오는 언월도와 사각에서 휘둘러진 철퇴 그리고 머리를 노리며 날아오는 투창까지.
눈으로 보고 따라가기 힘들 정도의 공격들을 향해 하밀부르크는 주먹을 내질었다.
슈슈슉!
하밀부르크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채 연신 내지른 주먹은 그 빠르기가 마치 동시에 주먹을 내지른 것 같았다.
쾅! 쾅! 쾅!
사방에서 들이닥친 세 기사의 공격은 하밀부르크의 세 번의 주먹질로 모조리 튕겨나갔다.
공격은 막았지만, 연이은 공격을 막아낸 하밀부르크의 주먹은 양 주먹 다 멍이 시퍼렇게 든 채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다음 공격은 버티지 못할 게 분명했다.
기사들뿐만 아니라 하밀부르크의 양 옆에서는 새로이 병사들이 밀물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하밀부르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최악이군.”
기사 한 명 한 명도 만만치 않은 상대인데다가 기사들만 상대하다 시간을 끌면 몰려오는 병사들에게 포위당해 죽는다.
하밀부르크는 힐끔 눈을 돌려 주위에 떨어진 죽은 병사 시체의 무기를 응시했다.
그가 지금껏 주먹만으로 싸운 것은 무기를 못 써서가 아니었다.
“그저 조종당하는 이들이다, 하운드가 죽으면 다시 제정신을 차리겠지.”
하밀부르크와 싸우고 있는 적들은 하운드에게 패배하고 조종당하는 이들이다.
그렇기에 최대한 살생을 자제하기 위해 주먹만을 썼지만, 더 이상은 한계였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바닥에 떨어진 무기를 집으려는 찰나, 그의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활기찬 여성의 목소리가 그의 행동을 제지했다
-하밀! 무기 쓰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어, 평소엔 멀쩡하다가도 무기만 쥐면 사람이 돌변하잖아! 저번 임무에서도 무기 들고 죽일 필요 없는 이들까지 죽이고 말이야, 그래선 부하 단원들이 널 따르겠어?
“…….”
-어차피 힘으로 눌러서 온 자리라고? 그래도 무기는 가급적 쓰지 말아줘, 사람을 죽이는 건 정말 어쩔 수 없을 때만……그래줄 수 있지?
목소리는 어디선가 따로 들려오는 게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강하지만 모두에게 친절하고 따뜻하고 활기찼던 그녀, 이방인 미르와 함께했던 기억의 한 조각이었다.
명령조가 아닌 아이를 달래듯 따뜻하고 온화한 어조로 부탁하는 미르의 말에 하밀부르크는 무기를 들려던 걸 그만두었다.
옛날 기억 속에서처럼, 지금과 같이 무기를 버린 하밀부르크를 칭찬하는 미르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래 하밀, 넌 검 없이도 강하잖아, 내가 인정한 강한 남자 하밀이니깐! 자꾸 줄여서 부르지 말라고? 길게 말하면 귀찮잖아, 설마 부끄러운 거야, 흐흐흐, 자주 써먹어야겠네!
“부끄럽긴 무슨, 자기 몸도 못 챙기는 멍청이 주제에, 그래. 무기 안쓴다 안 써, 하운드만 죽이면 다 정상으로 돌아올 사람들을 죽일 순 없지.”
머릿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혼잣말로 답하는 하밀부르크.
고작 한줌의 기억 때문에 스스로 무기를 버린 꼴이지만, 하밀부르크는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잠깐이었지만, 진짜 목소리도 아닌 기억의 파편을 회상한 것뿐이지만,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기뻤다.
기쁨도 잠시, 하밀부르크는 험악한 표정을 지은 채 이 사단을 낸 가온에게 화풀이를 했다.
“노예 놈 때문에 이런 데서 죽을 위기라니, 야 노예, 다 너 때문이라고 알아? 입이 있으면 뭐라도 말하라고.”
“…….”
“뭐야 왜 말이 없냐, 설마 방금 싸운 거 때문에 정신이라도 잃은 거냐.”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하밀부르크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방금 있었던 세 기사와의 싸움이 가온에게 피해를 주었다면 정신을 잃을 수도 어쩌면 이미 죽었을 수도 있었다.
하밀부르크는 황급히 자신의 등을 확인했다.
“이 나약한 노예 녀석, 기절이라도 한 거……뭐야, 어디 갔어.”
아까까지만 해도 등에 업혀 있던 가온이 언제 업혔다는 듯 감쪽같이 사라졌다.
설마 세 기사의 공격의 반동으로 날아가 버리기라도 한 걸까.
주위를 둘러보던 하밀부르크는 이윽고 가온을 찾았다, 그리고는 경악했다.
“저, 저 정신 나간 놈이!”
하밀부르크에게서 빠져나온 가온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멀쩡한 건 다행이지만, 문제는 그런 가온이 있는 장소였다.
가온이 있는 곳은 하밀부르크를 포위한 세 기사를 넘어선 막심과 하운드가 있는 곳이었다.
적 본진의 심장부까지 소리 없이 도달한 가온에게 하밀부르크는 벌컥 화를 냈다.
“저런 미친 꼬맹이가! 미르를 찾기 전까지 죽지 않겠다며! 거기 있다간 죽는다! 나한테 와!”
하밀부르크의 목청을 들은 가온이 고개를 들었다.
다른 곳도 아닌 적진의 심장부, 까딱하면 목이 날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위험한 곳에서 당당히 혼자 들어간 가온은 차갑게 한 마디 했다.
“신경 끄고 성으로 돌아가.”
“거기서 죽을 생각이냐!”
“안 죽어, 성으로 돌아가서 기다리기나 해, 안내역 수고했어.”
가온은 그 말을 하곤 안주머니에 손을 넣고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줄곧 가온의 존재를 모르고 있던 막심은 하밀부르크의 외침에 그제야 깨닫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우, 우아악! 이 망할 꼬맹이는 언제 여기까지 온 거야?”
어떻게 온 건지는 몰라도 저 꼬마를 가만둘 수는 없다.
막심은 기사들에게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여기 숨어들어온 쥐새끼부터 처리해!”
“늦었어.”
막심이 명령을 내리기 전, 가온은 품 안에서 있는 가루뭉치 전부를 꺼내들었다.
꺼내 든 건 보랏빛 가루, 지금까지 조금씩 꺼내어 뿌린 것에 비해 이번에는 한 움큼이었다.
가온이 뿌린 가루 뭉치가 눈에 닿자 폭발과 함께 거대한 눈보라를 일으켰다.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