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화 https://bbs.ruliweb.com/family/212/board/300068/read/3056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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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앞, 변명 유효.”
“…… 그거 결국 죽는다는 소리잖아.”
“그 뚫린 것도 입이라고 한다면 어디 한 번 씨불여 보세요. 너 나한테 뭐 잘못한 거 있으시죠.”
“글쎄에, 무슨 말이지 잘 모르겠는걸?”
“백단 숲 복구 비용은 아가씨 통장에서 까겠습니다.”
“하시야 잠깐.”
매정하게 캐스터를 꺼버리려는 하시를 성아가 물고 늘어졌다.
“자, 봐봐, 하시야. 그러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잘못이 아니거든? 만약 거기서 내가 갸라도스를 막지 않았어 봐, 그럼 백단시티가……”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해야죠. 니가 막으신 겁니까? 라랑이가 막았지. 게다가 그 전에도 깻박쳤다면서요, 숲.”
“…… 이래서 눈치 빠른 메이드는 싫다니깐.”
“자연이 그대를 거부할 겁니다, 이 아가씨야.”
아침나절부터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덕담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 아니, 일 터진 지 며칠이나 됐다고 그 얘기를 속속들이 다 알고 있으시대?! 너네는 할 일도 없어? 솔직히 나 감시하는 팀 따로 있지?”
“애초에 아가씨가 주인 마님의 정보력을 너무 얕보신 거예요. 전 세계에 프렌들리숍이 몇 갠데, 그 사달을 내놓고 조용히 묻어가길 바랬어요?”
“흥, 니네 엄마 멀록이다.”
“우리 엄마가 댁네 어머니세요, 이 모지리 띨빵아.”
“…….”
성아는 입이 댓바람처럼 나와선 씩씩거렸다.
라란티스는 늘 보아 온 일상이기에 여유롭게 두 사람을 무시했지만, 비비용과 딱충이는 그런 성아의 모습이 신기한 듯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 그래서, 지금은 어디세요.”
“지금…… 백단시티 빠져나와서, 파르테르 가도.”
“배지 땄어요?”
그러자 성아는 비비용과 딱충이를 끌어안으며 웃었다.
“물론이지! 진화도 했어!”
성아는 어떤 식으로 배틀이 진행됐는지에 대해 한참 동안 조잘거렸다.
“…… 그래서 배틀이 끝나니까 뿔충이도 진화해있더라고. 비비용의 진화에 자극이라도 받았나 봐.”
하시는 뜻밖이라는 듯 입을 조금 벌리고서 감탄하다가, 이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 아가씨 구라 치는 실력이 많이 느셨네요. 스토리텔링까지 써가면서 사람을 속이려 들 줄이야.”
“지, 진짜거든?!”
라란티스가 들쳐 맨 가방에는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버그 배지가 박혀 있었다. 성아는 그걸 손가락으로 휘휘 가리키며, 삐졌다는 표시로 주둥이를 잔뜩 내밀었다.
아유 못생겨라. 하시는 그렇게 말하며 입을 열었다.
“…… 그럼 다행이구요. 난 아직도 백단시티에서 못 빠져나왔으면 어쩌나, 하고 괜히 걱정했네.”
“왜?”
그 말에 하시는 누가 들을세라 귓속말하듯 손을 모아 속닥였다.
“주인 마님이 사람을 보냈어요.”
“으악.”
성아는 자지러지듯 혀를 내둘렀다.
가만히 보고 있던 라란티스가 화들짝 놀라며 아로마테라피를 뿜어낸 덕분에, 큰 소란으로 번지진 않았다. 성아가 라란티스를 꼭 끌어안으며 말을 이었다.
“혐오스럽구만.”
“난들 알았겠어요. 아가씨도 주인 마님 실행력 아시잖아요.”
“뭐 땜에? 백단 숲?”
“일단은 그것만 있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될 수 있으면 백단시티에서 멀어지시고, 당분간 프렌들리숍은 들르지 마세요.”
“진짜 개싫어.”
성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시는 그런 성아에게, 페르테르 분수 공원을 지나면 곧바로 택시를 잡으라고 말했다.
“미르시티에 핸섬 탐정 사무소라는 곳이 있을 거예요. 거기로 가 보세요. 당분간은 포켓센에 들르지 않아도 될 만큼 도구를 보내 드릴게요.”
성아가 알겠다고 답했다.
그녀는 말을 마치고 잠시 머뭇거렸다가, 이내 짤막하게 한 마디 덧붙였다.
“…… 고마워, 하시.”
“누구, 나요?”
“응.”
“……? 당신 누구야?”
“이눔이 좋은 말을 해 줘도 꼭.”
성아는 한 층 기분이 풀린 듯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 후로도 두 사람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기절했던 집사장은 이틀을 누워있다 깨어났는데, 아가씨가 예전의 기력을 되찾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보였다고 하시는 말했다.
성아는 분떠도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비비용이 낯간지러운 표정으로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탓에 한동안 분진을 뒤집어써야 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분떠도리를 품 안에 가득 안아보였다.
통화는 즐겁게 끝났다.
“보고 싶어, 하시.”
“네, 저도요.”
하시는 캐스터가 끊어진 후에도 한참 동안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 아, 내 심장.”
그녀는 방금 전 성아의 반응을 되새기며, 한층 후련해진 얼굴로 웃었다.
“안 본 지 며칠이나 됐다고 호들갑은.”
하시가 뺨을 톡톡 문지르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멀리서, 고즈넉한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비익시티의 항구가 머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어차피 좀 있다 뵐 건데.”
하시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햇빛을 잔뜩 끌어안고 있는 꽃잎들은 그것으로 자신의 색깔을 선명히 했다.
분수는 노란색과 빨간색 베일에 둘러싸여 있었고, 비단이라기엔 푸근한 구름과 같은 형상으로, 꽃밭은 바람이 불 때마다 한 빛으로 일렁이며 나란히 들썩였다.
바다의 모습이었다.
하시가 배에서 내릴 무렵에, 성아는 파르테르 분수 공원에 도착해 있었다.
“여기가 공원이구나!”
그녀의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는, 분수와 미로 정원, 꽃밭과 사람이 적절한 비율로 어우러져 있었다. 이미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고, 분수를 중심으로 둥글게 돌며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도 보였다.
“루아―!”
예상외로 가장 들뜬 것은 라란티스였다. 그녀는 진화―말 그대로 종 자체가 이루어낸 진화―를 거듭해 벌레 타입과 비슷한 심성을 지녔다지만, 근본은 풀 타입이었다. 가지각색으로 빛나는 꽃들의 모습에 그녀는 고양된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비비용―!”
그녀는 꽃밭 한가운데서 비비용을 불렀다. 비비용은 밝게 대답하며 라란티스에게로 날아갔다.
꽃밭에서도 두 사람의 색깔은 유독 돋보였다. 성아는 멀리서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비올라님이 보셨으면 환장하셨겠는데, 라고 생각했다.
“딱충이는 가서 안 놀아?”
“…… 시…….”
그는 보는 것만으로 만족한다는 듯 끄덕거렸다.
“하긴, 여자애들 노는데 끼어들면 그것도 꼴볼견이지.”
“…… 시…….”
두 사람은 근처의 카페를 알아보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하늘하늘 흩날리는 정원을 바라보며 성아는 얼음이 동동 띄워진 튼튼밀크를 한 입 빨았다. 극상의 맛이었다. 꽃향기 덕분에 우유는 꿀이 들어간 것처럼 달았다.
라란티스와 비비용은 꽃가루로 범벅이 된 채 각자 분의 나무 열매를 씹었다. 딱충이만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가만히 꽃밭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 여기서 새 친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도감을 들여다보던 성아가 그렇게 말했다.
“새 친구? 새 친구요?”
“응.”
비비용은 신이 난 듯 파닥거렸다. 그녀는 한껏 고양된 목소리로 라란티스와 성아를 쳐다보며 울었다. 성아는 그녀를 따라 바보 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려 주었다.
“아마도 이 근처에 사는 건, 세꿀버리하고 레디바인가 봐.”
“세꿀버리? 레디바?”
비비용이 모르겠다는 듯 라란티스에게 고갯짓하자, 라란티스가 짧게 설명해주었다.
“앞에 놈은 여자애가 아니면 쓰레기고, 뒤에 놈은 그냥 쓰레기야.”
“팩트로 때리는 건 나쁜 거야, 라란티스.”
그걸 또 찰떡같이 알아들은 성아가 핀잔을 주었다.
“세꿀버리 여자애는 그럼 뭐에요?”
“아아, 그 친구는 진화하면 여왕님이 돼.”
“여왕님이요?!”
비비용의 반짝거리는 눈을 확 들이밀었다.
“여왕님과 친구라니! 여왕님이랑 친구!”
그런 그녀의 환상을 깨부수듯 라란티스가 짤막하게 내뱉었다.
“생긴 건 독침붕이랑 비슷하지.”
“아.”
비비용의 더듬이가 축 늘어졌다.
“여왕님과 기사님이라니, 잘 어울리지 않아? 꼭 슈바르고네 같아!”
“예, 그거참…….”
아무것도 모르는 성아의 물음에 비비용은 경멸조로 웃었다. 딱충이는 몸을 움찔거리며 불만을 표시했고, 라란티스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재밌다는 듯 쿡쿡거렸다.
“…… 친구는 얼어 죽을.”
나직이 내뱉은 딱충이의 찡얼거림에 라란티스가 조소를 겸하여 말했다.
“새끼 견제하네.”
“누, 누, 누가 견제한다고요?!”
“아니었어?”
“아니거든요?”
그녀의 장난기가 다시 도지고 있었다.
“흐음…… 그렇지만, 견제하는 게 좋을걸.”
“하, 이번엔 안 속아요. 또 이상한 장난 치시는 거죠?”
“그게 아니야, 멍충아. 잘 들어봐. 이건 상당히 중요한 문제라고.”
그 말에 딱충이가 또다시 움찔거렸다.
“이러다가 만약 꽃밭에서 잘난 남자애라도 하나 나타난다고 생각해봐, 아찔하지 않아? 그 순간 그냥 끝장이라고. 네가 비교해서 봐봐. 같은 동네에서 어렸을 때부터 시비를 걸어 오던 코찔찔이 하나랑, 멋들어진 꽃밭에서 온 몸가짐 바르고 위트 있는 매너남 하나. 답은 정해지지 않았어?”
“…… 에이, 아무리 그래도 처음 보는 포켓몬인데……”
“얘가 아직 세상을 덜 살아봤네. 요즘 시대에 처음 보고 나발이고 어딨어. 수컷이냐, 잘생겼냐, 매너 좋냐. 합격? 그럼 바로 손 붙잡고 키우미집 가는 거지.”
“……!”
“게다가 비비용을 봐. 평생을 못난이 소리 듣다가 이제 막 미모에 물이 올랐는데, 그럴수록 잘생긴 남자애의 구애에 흔들리기 쉽다는 거야. 자기한텐 없었던 일이거든. 그런 상황에서 네가 그 잘난 놈들과 매력으로 승부를 벌인다? 쉽지 않지.”
“…… 누가……!”
“자, 자, 진정하고. 그러니까 지금부터가 중요한 거야, 친구. 너의 목표는, 그 더러운 수컷 놈들로부터 비비용을 지키는 거지.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아예 싹부터 뽑아버리는 거야. 따라 해봐, 갈망…… 부식…… 열일곱……”
그녀는 딱충이의 옆구리를 살살 건드리며 한창 약을 올린 다음 그를 풀어주었다.
딱충이는 흥분한 목소리로 가만히 중얼거렸다.
“비비용을 지킨다…… 친구…… 친구가 생기지 못하게……”
“그렇지, 바로 그 기세란 말이야.”
“친구…… 만들지 못한다…… 비비용……”
“옳지, 옳지. 굿 잡.”
라란티스는 벌써부터 재밌어 죽겠다는 듯 키득거리고 있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성아와 비비용은 서로 세꿀버리를 찾아 재잘거리고 있었다.
“그래서요? 그 친구는 어디 있어요?”
“지도로 보면 이쯤인데…… 아, 저기다!”
성아가 꽃밭 너머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그곳에선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달콤한 꿀을 수확하고 있는 세꿀버리들이 즐비해 있었다.
성아는 즐거운 목소리로 딱충이와 비비용에게 말했다.
“새로운 친구를 만들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는 거야――!”
“체력을 줄이는 건데, 아 저 멍청이 또 내 말 끝까지 안 듣고 달려가네.”
라란티스의 한숨을 뒤로한 채, 성아는 한 손을 방방 흔들며 세꿀버리에게 달려갔다.
“저기――!! 이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벗어나 나랑 함께 여행을 떠날 프롤레타리아 친구들 손――!!”
그러자 세꿀버리들이 하나둘 호기심을 갖고 그녀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성아는 그녀들에게 갓 사 온 나무 열매를 보여주며 이러쿵저러쿵 주절거렸다.
“…… 친구…… 안된다…….”
그러나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딱충이는, 이내 뭐라고 한참을 중얼거리더니 무리를 향해 거친 돌진을 감행했다.
“…… 응?”
딱충이는 나무열매를 들고 있는 성아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세꿀버리를 향해 단단한 등껍질을 휘둘렀다. 얻어맞은 세꿀버리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고, 성아는 당황한 표정으로 웃으며 딱충이를 타일렀다.
“아하하, 딱충이가 뭘 좀 아는구나! 그렇지, 새로운 친구를 만들 때는 체력을 줄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야! 어, 그치만 말이야, 조금 살살 쳐도 될 거 같은데……?”
그러나 딱충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돌진을 날렸다.
“…… 저기요?”
주변에서 작업하던 세꿀버리가 웅성거리며 그를 피해 도망쳤다.
비비용은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고, 라란티스는 그런 두 꼬맹이의 모습에 깔깔거리며 웃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나.”
“라란티스, 니가 또 뭐 한 거지.”
“아아, 별 건 아니고. 간단한 세뇌 실험.”
“이놈이.”
성아는 찡얼거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타이르며, 세꿀버리들이 진정될 때까지 풀숲에 숨어있기로 했다.
“알겠어, 딱충이? 무엇보다 친구는 쌈박질로만 만드는 게 아니란 말이야.”
그러나 딱충이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머지않아 몇몇 세꿀버리들이 다시금 꿀을 수확하러 성아에게 다가왔지만, 그녀가 손 쓸 틈도 없이 튀어나온 딱충이가 그들을 물리쳤다. 그러기를 두어 번 반복하자, 세꿀버리들도 이제 성아가 풀숲에 숨어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수군거리며 그 주위를 피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이익…… 딱충이……!!”
“…… 시이…….”
성아와 딱충이는 그렇게 또 서로를 마주 보고 으르렁거렸다.
바로 그때, 가까운 곳에서 꽃밭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딱충이는 몸을 날렸다.
“안돼! 막아!!”
성아가 기겁하며 라란티스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라란티스는 그다지 그를 막을 생각이 없었는지, 딱충이의 돌진을 대충 받아내고선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웃었다.
“아 저 망할 년이 진짜…… 비비용, 딱충이한테 수면가루!”
비비용이 나폴나폴 날아가 그의 머리 위로 수면가루를 쏟아부었다. 명중이었다. 그러나 가루를 들이마신 딱충이의 몸이 일순간 빳빳해지더니, 곧 쩌적이는 소리와 함께 허물을 가르고 맨들맨들한 새 딱충이가 튀어나왔다.
“탈피?!”
그는 으르렁거리며 비비용을 확 밀치고는 세꿀버리들을 향해 맹렬히 내달렸다.
“아니 딱충이 주제에 뭐 저리 잘 싸우는 건데?”
성아는 몬스터볼을 손에 들고선 딱충이 옆으로 자신의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흔들리는 꽃밭으로 달려들었다.
눈이 뒤집힌 황소처럼 내달리는 딱충이와, 그를 막기 위해 땅바닥을 데굴거리는 성아의 몸짓에 갸날픈 꽃줄기들이 우수수 꺾여나갔다. 흔들거리며 흩어진 꽃잎 사이로 야생의 포켓몬이 모습을 드러냈다. 딱충이는 그의 얼굴을 보자 우뚝 걸음을 멈추었고, 뒤따르던 성아는 그만 그의 등에 코를 쥐어박으며 구르기를 그쳤다.
“아야야…… 잡았다 요놈!”
성아가 덥석 눈앞의 물체를 부둥켜안았다.
그러나 그녀의 품 안에는
“…… 바아아?”
땡그란 눈동자로 꽃을 꺾던 레디바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
“…… 시……”
“바아아아아――??”
그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성아와 딱충이는 뻘쭘한 표정으로 점잖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조용히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회피했다.
“으, 응. 아무래도 세꿀버리가 아니었던 모양이네. 응……”
“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격해지는 레디바의 울음소리에 두 사람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바아? 바아아아아아?”
덩그러니 남겨진 레디바만 멀어지는 성아를 바라보며 눈을 반짝거릴 뿐이었다.
“후…… 놀래라……. 그러니까 딱충이, 네가 그렇게 뛰쳐나간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니까.”
라란티스가 있던 풀숲으로 도망쳐 나온 성아가 거친 숨을 고르며 중얼거렸다.
“으으…… 저 레디바……. 맘 같아선 데려가고 싶은데…….”
그러자 라란티스가 성아를 향해 키득거렸다.
“친구를 가려 사귀는 건 나쁜 거야.”
“아무리 그래도 레디바는 힘들단 말야. 저 얼굴을 봐, 저 순수한 아이가 배틀을 하게 생겼어? 리그가 얼마 남았다고, 안되는 건 안되는 거야.”
“바아아?”
“그래, 너 말야…… 응?”
성아의 발치에는 방금 전의 그 레디바가 눈을 반짝이며 모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바아아아아?”
“…… 우와악?!”
레디바는 그렇게 속날개를 씰룩거리며 성아의 몸통을 향해 뛰어들었다. 엉덩방아를 찧은 성아는 레디바의 아래에 깔린 채 괴성에 가까운 비명을 내질렀다.
“얘 뭐야?! 얘 뭐야!! 라란티스, 라란티스!”
“바아아아아아?”
“저…… 레디바……? 그, 그러고 있으면 언니가…… 힘이 들지…… 않을까…… 요……?”
비비용은 그녀가 걱정되는지 레디바의 등 뒤에서 이리저리 나풀거렸지만
“바아아아아아아??”
그는 계속해서 입을 벌려 옹알이같은 울음소리를 내보낼 뿐이었다.
“거 컨셉 한 번 괴랄 맞은 친구구만.”
라란티스는 비비용에게 괜찮다는 듯 손짓하고는, 바보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는 딱충이를 몬스터볼로 수거해갔다. 그녀는 얼굴에 들러붙은 레디바를 떼어내기위해 버둥거리는 성아가 재밌다는 듯 내려다보다가, 이내 풀숲 멀리서 들려오는 진동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
“왜, 왜요?”
“그냥……”
라란티스는 말하다 말고 그 소리의 출처를 확인하기 위해 꽃밭 사이를 한달음에 달려나갔다.
“가, 같이 가요, 언니!”
“야, 어디가! 라란티스, 라란티스?!”
비비용은 열심히 날갯짓하며 그녀의 뒤를 따랐고, 성아는 올라앉은 레디바를 떼어내지 못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레디바는 이제 밤송이만한 주먹으로 성아의 볼을 짓주무르고 있었다. 성아는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애타게 라란티스를 불러세웠으나, 라란티스는 이미 성아한테서 멀찍이 떨어진 지 오래였다.
소란의 원인은 머지않아 드러났다.
꽃밭의 너머에서, 세꿀버리들이 일렬로 합을 맞춰 날갯짓하고 있는 소리가 맹렬히 울려퍼졌다. 날갯소리가 공명을 일으키는 바람에 비비용은 주춤거리며 몸을 움츠렸다.
“비비용, 이쪽으로!”
두 포켓몬은 가까운 덤불에 숨었다. 정갈하게 늘어선 세꿀버리들은 가운데를 비워 놓은 형태로 둥글게 자리를 잡았고, 그들이 둘러싼 중심부에는 몇몇 세꿀버리들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주위를 살펴보고 있었다.
“…… 이치들은 이와 같은 둥지의 강령을 어기고, 더러운 인간들과의 접촉을 시도한 반동분자들이다!”
“언니? 뭐예요……?”
“쉬잇.”
무리의 중심에서, 한 세꿀버리가 분주하게 청중들 사이를 오가며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머리에 붉은 표지가 달린 것으로 봐선 암컷인 듯했다.
그녀의 연설이 끝나자, 정원의 반대편에서부터 거대한 날갯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퀸의 공격지령이었다. 떨림을 느낀 세꿀버리들은 지령이 끝나기가 무섭게 매서운 기세로 욕지거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몇몇은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고, 몇몇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듯 경악한 표정으로 공중에서 비틀거렸다.
“…… 동지들이여, 1을 세 번 더하면 몇이 되는가?”
암컷 세꿀버리가 흐름을 이끌어가며 청중들에게 소리쳤다.
“1입니다!”
“정말로 1인가?”
“1, 1입니다!”
무리는 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렁찼다기보단 어딘지 모르게 소름이 돋는 섬뜩함이 묻어 있었다.
“그렇다! 빅 시스터는 1을 세 번 더해도 1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허나! 여기 이치들은 그 값이 무려 3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어떻게! 1을 세 번 더하면 3이 된다는 말인가?!”
그 말에 세꿀버리들이 일제히 비명을 내질렀다. “나메일, 나메일이야!” 한 세꿀버리가 들고 있던 달콤한 꿀을 내던지며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제각기 말은 달랐지만, 무리는 한 목소리로 분노를 표출하였고, 나무와 꽃잎들은 소리 없이 몸을 떨며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자 안간힘이었다.
증오는 2분간 계속되었다.
정원의 반대편에서 또 다른 날갯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이번엔 귀를 틀어막게 하는 날카로운 진동 소리가 아니라, 하프를 뜯는 것과 같은 은은하고 차분한 회복 지령이었다.
그 소리에 세꿀버리들은 분노하던 것을 그치고 초점 없는 눈을 하늘로 향했다. 나무들이 부풀었던 자신들의 갈기를 가라앉혔다. 소란은 순식간에 폭발하듯 순식간에 가라앉았고, 세꿀버리들은 이제 뜨거운 눈물을 두 줄기 얼굴에 머금고서, 한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동자여, 농민이여, 단결하라, 손에 꿀을 들어라!
오늘은 신성한 의무의 날이니!
강하고 평화로운, 현명하고 용감한 우리 인민은!
세계를 구하기 위한 싸움을 한다네……!”
노래가 끝나자 그들은 목청이 떠나가라 “빅――시스터!! 빅――시스터!!”하는 구호를 외쳤다. 그러고는 다시금 자신이 도맡은 일을 끝마치기 위해 분주하게 날갯짓하기 시작했다.
“…… 이 나라엔 도대체 정상인 것이 없구나.”
“저…… 저런 여왕님은 싫어요…….”
이 모든 걸 가만히 지켜보던 라란티스와 비비용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일단은 우리를 눈치채지 못한 거 같으니까, 조용히……”
“야아――!! 라란티스――!!”
성아였다.
라란티스와 비비용은 이마에 손을 얹으며 절규했다. 그녀들은 뒤통수 너머로 느껴지는 꿀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성아를 향해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간절히 내보였으나, 이미 성아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우와아아악! 뭔데, 뭔데!”
“더러운 부르주아를 타도하라――!!”
세꿀버리들이 성난 날갯짓으로 공기를 찢으며 달려들었다. 숲 너머로 비퀸의 경고음이 쉬지 않고 울려 퍼졌다. 비비용은 울먹거리며 성아의 머리 위에서 날갯짓했고, 성아는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세꿀버리들에게서 도망쳤다.
“이게 뭐야, 라란티스, 라란티스!!”
그녀는 애타게 라란티스를 불러보았으나, 라란티스는 양팔을 벌린 상태로 가만히 꽃인척했다. 쏟아지는 세꿀버리들의 급류가 그녀를 지나쳐 곧장 성아에게로 향했다.
“저, 저 치사한 년! 야! 쟤 포켓몬이야! 나한테 하지 말고 쟤한테 해! 쟤한테!”
“지만 살겠다고 저거 저 의리 없는 년.”
“네가 할 말은 아니지?!”
“바아아? 바아아? 바아아? 바아아?”
성아의 품에 안겨있던 레디바는 그녀의 뜀박질에 맞춰 울음소리를 위아래로 떨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성아의 어깨너머에서 맹렬하게 다가오는 세꿀버리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바아아아――??”
“……!!“
그러나 그럴수록 세꿀버리들은 더욱 바싹 약이 올라 성아를 쫓아왔다.
”아니,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는 건데――?!“
꿀벌들의 물살이 점점 거리를 좁혀왔다.
“어, 언니…… 살려줘요……!”
비비용의 날개가 점차 힘을 잃어가더니, 이내 땅바닥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안 돼! 비비용!”
성아와 딱충이는 거의 동시에 그렇게 외치며 비비용을 돌아보았다. 성아는 비상용으로 쓰려고 가지고 있던 벌레회피스프레이에 손을 가져다 대었고, 딱충이는 몬스터볼에서 불쑥 튀어나오며 비비용을 구하기 위해 거칠게 몸을 내던졌다.
“조금만 기다려――”
“아, 그냥 몬스터볼에 들어가면 되는구나.”
그러나 비비용은 그렇게 말하며 성아의 몬스터볼로 쏘옥 들어갔다.
딱충이는 순간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녀를 돌아보았다. 비비용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몬스터볼로 들어갔고, 세꿀버리의 무리들이 마치 피할 수 없는 눈보라처럼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 마, 만세……! 블리자드 만세!!”
그러나 그의 비명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세꿀버리들이 그에게 들러붙어 야단법석을 떨었다. 성아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으나, 딱충이는 세꿀버리의 틈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배, 백단숲의 첩자를 잡았다!!”
“죽여라!!”
“딱충이?!”
성아는 화들짝 놀라며 뛰는 방향을 바꿔 딱충이에게로 향했다. 세꿀버리들은 이제 그녀보다 자신들이 포획해놓은 포켓몬에게 적개심을 뿜어내고 있었다. 성아는 손에 든 벌레회피스프레이를 뿌리기 위해 위아래로 흔들며, 세꿀버리들을 쫓아내기 위해 딱충이가 갇혀있는 거대한 무덤으로 몸을 던지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장 눈을 가리며 뒤로 물러서야 했다.
“이익……!”
새하얀 빛이 무리 사이사이로 솟아오르고, 고치를 깨고 나온 독침붕이 자신의 팔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만해 미친놈들아!”
그가 원뿔로 된 날카로운 양팔을 휘둘러 세꿀버리들을 쳐냈다. 독침붕의 날 선 울음소리에 세꿀버리들이 우르르 뒤로 물러섰다.
“독침붕?!”
그는 곧이어 매서운 기합을 내지르며 눈앞에 보이는 세꿀버리들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성아의 얼굴에 드리운 근심이 환희로 바뀌었다.
“하긴…… 그렇게 세꿀버리들을 잡아댔으니…….”
그녀는 도망치는 세꿀버리들을 쫓아 난무를 벌이는 독침붕을 바라보았다. 빳빳하게 몸을 굳혔던 라란티스도, 한참 동안 날갯짓을 하느라 지친 비비용도 모두 몸을 쉬이며 진화한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바아아아아?!”
무엇보다 흥분한 것은 레디바였다.
반짝거리는 그의 눈동자에는 사나운 악당들을 추풍낙엽으로 쓸어버리는 기사님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가 “끼이――?!”하고 숨이 넘어가는 감탄을 내질렀다. 성아는 비록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 레디바, 네 맘은 잘 알겠는데 말이야……”
그녀는 레디바가 동경의 눈빛을 보내고 있는 독침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음…… 저런 건 보통……”
“…… 약하다고 하는 거지.”
“응, 그치.”
레디바의 상상과 달리, 독침붕은 혼란을 맞은 것처럼 아무렇게나 허공에 팔을 휘저어대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공격을 맞는 세꿀버리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독침붕의 공격 반경 이상으로 거리를 벌린 채 그를 에워쌌고, 독침붕은 세꿀버리들이 일제히 쏟아붓는 바람일으키기에 이리저리 얻어맞다가 바닥을 나뒹굴기 시작했다.
“아악! 일루와 이 개자식들!!”
성아가 못 봐주겠다는 듯 자신의 얼굴을 쥐어짰다. 그녀의 위에서, 비비용은 경멸과 혐오가 담긴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독침붕…… 약해…….”
“응, 약하네…….”
“바아아?”
보다 못한 비비용이 나서서 바람을 일으켜 세꿀버리들을 몰아내었다.
독침붕은 그제서야 자세를 고쳐잡을 수 있었다.
“비, 비비용……?”
그의 얼굴에는 드디어 진화했다는 일종의 성취감과, 비비용의 눈앞에서 추태를 부렸다는 사실에서 오는 절망감이 적절히 뒤섞여 있었다.
라란티스가 부풀렸던 볼을 빵 터뜨리며 바닥을 두드렸다.
“정말…… 뭐라고 해야 할까…….”
성아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태어나서 봤던 것 중에 가장 멋없는 진화 장면이었던 거 같은데…….”
“바아아?”
아무것도 모르고 계속해서 환호성을 내지르는 레디바의 모습에 성아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응, 아냐. 그래…… 너라도 멋지게 봐 줘야지…… 우리 독침붕…….”
독침붕은 뒤늦게 몰려오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몬스터볼 안으로 몸을 숨겼다. 그 후 미르시티에 도착할 때까지, 한동안 그의 몬스터볼은 마치 텅 빈 상자처럼 고요한 정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 벌레 타입 포켓몬 트레이너 하는 소설 6화
그것은, 굉장히, 슬픈 일이 아니던가
마침
연재는 매 10일마다(10일, 20일, 30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