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는 준비운동에 불과했다.
싸움은 이제 시작이다.
막심은 성문이 열리고 드러난 갈색 로브를 보고 어리둥절했다.
“뭐야, 저건?”
어떻게든 성문이 뚫리는 걸 막으려고 했던 말튼 성이 갑자기 성문을 열었다.
항복일리는 없고 분명 안에서 무언가 준비했던 게 분명했다.
그래서 문이 열릴 때 살짝 걱정했건만 나온 건 갈색 로브를 뒤집어 쓴 사람 하나가 다였다.
막심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핫! 머저리 같은 놈들, 고작 저런 거 하나 내보내겠다고 성문을 연 거냐?”
막심은 즉시 전 병력에게 신호를 보냈다.
한번 열린 성문은 쉽게 닫히지 않는다.
지금 모든 병력을 성문에 투입하면 싸움은 바로 끝난다.
막심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하운드님의 대리인으로서 명한다! 북쪽에 위치한 전 병력들은 지금 당장 진군해 성문을 점거하라!”
쿵쿵쿵!
막심의 말에 일반 병사들은 물론 지금껏 가만히 있던 정예 병사들 또한 움직였다.
단 막심의 뒤에서 대기하는 칼 리보렌과 유명 기사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막심은 진군하는 대병력을 보며 미소를 띠웠다.
“단장이라는 놈이 강해도 저만한 수의 병사들을 어쩌지는 못하겠지.”
지금까지 하밀부르크가 쓰러뜨린 병사들의 수는 고작 수십 명에 불과하다.
수백 수천이 넘는 물량을 앞세우면 하밀부르크 또한 막지 못 할 거라고 막심은 확신했다.
문이 열린 틈으로 몇 명의 병사들만이라도 들여보낸다면 이 싸움은 끝난다.
막심은 자신감의 가득 찬 표정으로 뒤에 있는 하운드에게 말했다.
“하운드님! 조금만 기다리십쇼, 저 부하 막심이 하운드님에게 직접 말튼 성을 헌상하겠습니다.”
막심은 그 말을 하고 눈을 감은 채 하운드의 칭찬을 기다렸다.
하운드의 도움 없이 자신의 지휘만으로 말튼 성을 점령하기 직전이니 칭찬 한 마디 정도는 해줄 것이다.
하운드는 자신을 더 중용할게 분명했다.
막심의 부푼 기대와는 달리 몇 초가 지나도 하운드는 말이 없었다.
“…….”
아무런 말이 없자 막심은 실눈을 살며시 치켜떴다.
하운드는 막심을 보고 있지 않았다.
성문을 향한 하운드의 시선은 갈색 로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후우우웅!
앞에서 싸우는 하밀부르크가 충격파를 일으킬 때마다 작은 눈보라가 갈색 로브의 두건이 휘날렸다.
휘날리는 두건 사이로 갈색 로브의 얼굴이 살짝 드러났다.
다크써클이 깊게 내린 흑안의 흑발의 어린 소년, 가온이었다.
하운드는 가온을 보곤 묘한 미소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기쁨, 재회.”
“하아아아압!”
콰아아앙!
하밀부르크의 기합과 함께 달려오던 병사들이 터져나가듯이 쓸려나갔다.
마법이나 특별한 무기가 아닌 주먹 하나로 해낸 일이다.
다섯 명의 병사가 저편으로 날아가고 뒤이어 또 다른 병사들 무리가 나타났다.
하밀부르크는 심호흡을 하며 다시 주먹을 쥐었다.
“칫, 아주 들어오려고 발악을 하는 군.”
성문이 닫히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 사이 한 두 명의 병사라도 성문 안에 들어간다면 대참사가 일어난다.
그렇기에 단 한 명의 적이라도 들여보낼 수 없다.
하밀부르크는 자세를 잡고 주먹을 쥔 채 정면으로 힘껏 뻗었다.
쾅!
열 명에 가까운 병사들이 날아갔지만, 다른 병사들이 그 자리를 채우곤 달려들었다.
일방적인 소모전이라면 혼자인 하밀부르크가 불리했다.
게다가 하밀부르크는 어떻게든 성문부터 적진까지 길을 뚫어야 했다.
성문을 사수함과 동시에 길을 뚫어야 하는 하밀부르크는 눈살을 찌푸린 채 뒤에 숨은 가온에게 짜증을 냈다.
“너도 뭐라도 좀 해봐! 길을 뚫기 전에 적을 성문 안으로 들이면 말튼 성은 끝이다!”
“하찮은 노예에게 도움을 받아도 되겠어? 자유 해방단의 명성이 땅으로 떨어지겠네.”
“이런 건방진 꼬맹이가……할 수 있다는 거지? 잠깐만 시간을 끌어줘 몇 초라도 좋으니.”
“막무가내로 떠맡기네, 내가 못하면 어쩌려고.”
하밀부르크는 가온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뒤로 물러났다.
누가 상대든 병사들의 돌격은 멈추지 않았다.
성문으로 가는 길에 방해되는 모든 것들은 베어버릴 듯이 병사들은 무기를 빼든 채 달려들었다.
가온은 달려오는 병사들을 보며 차갑게 웃었다.
“동네 개도 아니고 아주 미친 듯이 달려오네.”
가온은 달려드는 병사들을 보고도 겁을 먹지 않고 로브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희미한 보랏빛의 작은 가루였다.
가온은 가루를 손에 쥔 채 빠르게 앞에 뿌렸다.
뿌려진 가루가 눈에 닿는 순간, 작은 폭발과 함께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퍼어어엉!
휘이이잉!
갑자기 터진 폭발과 생겨난 눈보라에 시야가 가려진 병사들은 주춤거렸다.
그때 가온의 날카로운 함성이 터졌다.
“숨 참아!”
병사들에게 한 말이 아닌 뒤에 있을 하밀부르크에게 한 말이었다.
뒤이어 또 다른 가루가 뿌려졌다.
희미한 붉은 빛의 가루였다.
붉은 가루는 보랏빛 가루처럼 터지지 않고 눈보라에 휩쓸린 채 사방으로 뿌려졌다.
투구 사이로 붉은 가루가 들어가자 병사들은 자연스레 붉은 가루를 흡입했다.
“……?”
붉은 가루를 들이마신 병사들은 처음에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러나 몇 초도 안 되어서 병사들은 갑자기 미친 듯이 흥분한 채 검을 휘둘렀다.
병사들의 폭주는 붉은 가루를 들이마신 모두에게 해당되었다.
폭주한 병사들은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못하고 서로에게 검을 휘두르며 난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멀리서 보고 있던 막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저, 저건?”
막심은 기시감을 느꼈다.
갑작스러운 눈보라와 자신의 부하들이 갑자기 미쳐 날뛰는 광경, 랠리 숲에서 봤던 거다.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건 딱 한 명뿐이었다.
그는 입술을 깨문 채 격하게 화를 냈다.
“그 건방진 꼬맹이가 또!”
후우우웅!
화를 내던 막심은 돌연 움찔했다.
하늘에서 내리던 눈들이 바람에 의해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이 향하는 방향은 성문이었다.
정확히는 자세를 잡은 채 무언가를 준비하는 하밀부르크에게로 바람은 불고 있었다.
후우우웅!
자연적인 바람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모으는 바람이었다.
그 바람을 모으고 있는 하밀부르크는 앞에서 시간을 버는 가온을 보곤 적지 않은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냥 생각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런 걸 준비해뒀을 줄이야.’
눈보라를 일으켜 적들의 눈을 가리고 그 사이에 흥분제가 섞인 가루를 뿌려 적들을 혼란시킨다.
영향을 받지 않은 다른 병사들은 이미 폭주한 병사들에게 휘말려 접근도 못하고 있었다.
덕분에 시간을 번 건 물론 적들은 성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했다.
철저한 계산과 담력이 없다면 시도도 못할 일을 저 노예는 해내고 있었다.
한 가지 불만은 있다.
‘숨을 참으라는 말에 일단은 참았지만, 호흡이 힘드니 바람을 모으기가 힘들잖아.’
그래도 시간은 충분히 번 건 분명했다.
하밀부르크는 한쪽 다리를 앞으로 내밀고 다른 다리는 뒤로 뺀 채 몸을 지탱했다.
두 손은 허리 옆으로 돌린 채 한 손은 주먹을 쥐었다.
바람은 하밀부르크의 머리부터 상체, 허리를 타고 내려오며 마지막은 주먹을 쥔 손에 모였다.
후우우우웅!
준비는 다 끝났다.
하밀부르크는 고개를 들어 자신과 저 멀리 있는 하운드와의 거리를 가늠했다.
‘150미터, 아니 200은 되나, 충분히 닿겠지.’
하밀부르크는 더 기다리지 않았다.
허리를 비틀며 바람이 모인 주먹을 내질렀다.
퍼어어어엉!
수천 장의 비단이 찢어지는 파공성과 함께 거대한 바람이 회전하며 저 멀리 있는 하운드에게로 쏘아졌다.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