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말튼 성의 영주 샤로텐은 그대에게 병사들을 통솔하는 인검을 내린다, 이걸 보여주면 성문을 열어줄 거다, 그대의 이름은 뭐지?”
“가온, 굳이 기억할 필요는 없어, 이름이 지어진지는 두 달도 안 되었으니깐.”
“두 달도 안 된 이름?”
샤로텐이 묻기도 전에 갈색 로브를 뒤집어 쓴 가온은 미끄러지듯이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내려가는 가온을 보며 샤로텐은 열었던 입을 굳게 다물었다.
물어볼 시간조차 아까웠다.
하밀부르크가 사라진 성벽의 병사들에게는 자신들을 지휘할 지휘관이 필요했다.
샤로텐은 기운을 차리곤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나 말튼 성의 영주 샤로텐이 명한다! 병사들은 각자 자리를 사수하며 적들의 침입을 허용해선 안 될 것이다!”
쾅!
십 미터가 훌쩍 늠는 성벽에서 뛰어내린 하밀부르크는 사뿐히 눈밭에 착지했다.
난데없이 성벽에서 뛰어내린 하밀부르크를 본 하운드의 병사들은 어리둥절해했다.
“……?”
“……?”
중무장을 한 것도 아니고 달랑 경갑옷 차림이었다.
막심은 홀로 성벽에서 떨어진 하밀부르크를 보며 한껏 비웃었다.
“미친 놈, 성벽에서 뭐 하나 싶더니 도망이라도 가려고 떨어진 거냐? 내가 못 봤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당장 저 겁쟁이를 죽여라!”
“……!”
말튼 성의 모든 이들을 죽이라는 막심의 명령대로 병사들은 무기를 빼든 채 하밀부르크에게 달려들었다.
선두에 선 방패병과 바로 뒤에 창을 겨누고 있는 창병들 그리고 뒤에서 사격준비를 하는 궁수들까지.
살기를 내뿜으며 다가오는 포위망이 다가옴에도 하밀부르크는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하밀부르크는 다가오는 적들은 신경 쓰지도 않은 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흠, 성문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하지, 내가 떨어진 성벽 위치가 말튼 성 북동쪽이었으니…….”
쉬이이익!
궁수들이 쏜 화살들이 하밀부르크에게로 날아갔다.
화살들이 하밀부르크에게 닿기 직전 하밀부르크는 그제야 화살들이 날아오는 걸 인지했다.
죽음이 코앞까지 찾아왔음에도 하밀부르크는 놀라지 않았다.
동네 산책 나온 사람처럼 태연하게 그는 날아오는 화살들을 모두 맞았다.
푹푹푹!
경 갑옷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그대로 뚫렸다.
모든 화살들이 적중한 것이다.
막심은 고슴도치처럼 온 몸에 화살이 박혔을 하밀부르크의 모습을 상상하며 즐거워했다.
“큭큭, 날 무시한 대가다 건방진 놈! 화살에 고통스러워하며 너의 그 자만을 후회해라!”
“네 놈은 혼자 헛소리하는 게 특기인가 보군.”
“흠?”
실컷 비웃던 막심은 저만치서 들려오는 하밀부르크의 말에 흠칫거렸다.
화살을 맞은 사람치곤 너무나도 평온한 목소리였다.
막심은 화살을 맞은 하밀부르크를 자세히 살폈다.
놀랍게도 화살들은 갑옷은 뚫었지만, 정작 하밀부르크의 몸은 뚫지 못했다.
얇은 벽에 막힌 듯 박힌 화살들은 이내 힘없이 눈 바닥에 떨어졌다.
투두둑.
막심은 믿기지 않는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무, 무슨? 분명 전부 박혔을 텐데!”
“좀만 기다려라, 그 나불거리는 입 뭉개주려 갈 테니.”
“크윽, 보병! 놈을 막아라!”
막심의 명령에 포위망을 짰던 방패병과 창병들이 돌격해왔다.
하밀부르크는 가라앉은 눈으로 빠르게 훑어보았다.
다가오는 병사들 무리 뒤로 또 한 무리의 병사들이 포위망을 짜고 있었다.
잘 훈련된 병사들이다, 한두 번 박살내는 것만으론 뚫을 순 없다.
“굳이 여기서 무리할 필요는 없겠지 제대로 싸우는 건 성문부터다.”
타탓!
하밀부르크는 달려드는 병사들을 무시한 채 냅다 성벽에 뛰어들었다.
성벽에 발을 맞대며 벽을 타며 정문을 향해 달려갔다.
벽을 마치 평지처럼 이용하는 하밀부르크의 모습에 막심은 또 한 번 놀랐다.
“저, 저건 또 무슨!”
가만히 보고 있을 막심이 아니다.
성벽을 둘러싼 병사들에게 하밀부르크를 저지하란 명령을 내렸다.
“쏴! 저 놈을 막으라고!”
쉬이이익!
수십 수백의 화살들이 하밀부르크에게 박혔지만, 아까처럼 무언가에 막힌 채 몸을 뚫지 못했다.
화살이 안 먹히면 근접 무기로 타격해야하지만, 눈이 가득 쌓인 바닥에 있는 보병들로선 벽을 타고 있는 하밀부르크를 공격할 방법이 없었다.
하밀부르크는 성벽을 타는 도중 성벽 위를 올라가려고 올려둔 사다리를 박살내기도 했다.
콰직!
사다리를 박살내는 족족 사다리를 타고 있던 병사들은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성벽 위에서 농성 중이던 말튼 성의 수비군은 하밀부르크의 뜻하지 않은 활약에 사기가 올랐다.
“오오! 자유 해방단 단장이 우릴 돕고 있다!”
“벼, 벽을 타다니 대단해!”
“우리도 힘을 내자!”
“자유 해방단 단장뿐만이 아니라 영주님이 뒤에서 우릴 보고 계신다!”
병사들의 환호를 뒤로하고 하밀부르크는 계속 달렸다.
성벽을 타고 빙 돌아 어느새 성문 근처까지 달려왔다.
공성추로 성문을 타격하고 있던 병사들은 성벽을 타고오는 한 남자의 출현에 움찔했다.
하밀부르크는 병사들의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하밀부르크는 공성추에 다짜고짜 달려들더니 주먹을 들어 내리쳤다.
쾅!
폭탄이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눈보라가 사리진 그 자리에는 박살난 공성추와 쓰러진 병사들 그리고 홀로 서 있는 하밀부르크가 있었다.
하밀부르크는 내리쳤던 주먹을 매만지며 부서진 공성추의 강도를 칭찬했다.
“생각보다 공성추가 튼튼해서 놀랐어, 주먹이 좀 부었다고.”
“저, 저런 미친 놈, 맨 주먹으로 공성 추를 부셨다고?”
“보여줄 건 아직 많으니 잘 감상하라고.”
하밀부르크는 그 말을 하고선 주먹만으로 성문으로 몰려오는 병사들을 하나하나 박살냈다.
쾅쾅!
날아오는 화살들은 그냥 맞아주고 몰려오는 보병들은 주먹 한 번으로 날려버렸다.
보병만으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은 막심은 기마부대를 지휘했다.
수 십 기의 기마병들이 진영을 가로지르며 하밀부르크에게 돌격했다.
“히히히힝!”
“기마병? 이건 좀 위험하지!”
들이닥친 기마병들의 랜스 차징을 하밀부르크는 가볍게 몸을 비틀어 피했다.
이어지는 다른 기마병들의 공격 또한 피하면서 자신은 주먹으로 반격했다.
주먹 한 번에 병사는 물론이고 말까지 그대로 곤죽으로 만들었다.
하밀부르크의 엄청난 활약에 막심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이런 젠장 할 일개 단장 주제에 왜 저렇게 강한 거야.”
보병들과 궁수들은 물론 기마병들로도 막지 못한다.
막심은 은근슬쩍 뒤를 돌아봤다.
막심의 바로 뒤에는 붉은 투구의 기사 칼 리보렌과 다른 성의 유명 기사들이 집합해 있었다.
“저 한 놈 잡자고 이 녀석들을 써야하나.”
귀중한 전력이다.
일개 단장 하나 잡자고 저들을 투입했다 한 명이라도 잃으면 뼈아픈 손실이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저 멀리서 이 광경을 관람하고 있는 하운드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막심은 은근슬쩍 하운드에게 신호를 보냈다.
“저, 저 하운드님?”
“…….”
“지금 보고 계시죠? 저 건방진 놈 하나가 난리를 피우고 있는 데 하운드님이 나서준다면…….”
“거부, 싸움, 하찮은.”
하운드는 짤막한 대답과 함께 막심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고작 저것도 처리하지 못하고 쩔쩔 매냐는 눈빛이었다.
하운드의 살벌한 눈빛에 막심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막심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크윽, 어차피 저 놈 혼자서는 전황을 바꾸지 못해.”
막심은 표정을 풀고선 다시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하밀부르크를 조소했다.
“공성장비는 어차피 더 있다, 몇 개를 부수든 소용없단 말이지.”
“…….”
“아직까진 잘 싸우는 거 같지만, 네 놈도 인간이니 언젠간 지치겠지,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지 보자고!”
“내가 생각 없이 싸우는 놈처럼 보이냐? 성문 주위는 다 치웠다, 어서 나와 망할 놈아!”
빈정대는 막심의 말에 하밀부르크는 자신의 등 뒤에 있는 성문을 가볍게 치며 거칠게 외쳤다.
하밀부르크의 신호에 굳게 닫혔던 성문이 움직였다.
쿠구구구!
성 안에서 성문을 열어주는 간수들의 혼란스러운 목소리가 하밀부르크에게 전해졌다.
“이, 일단 영주님의 명령이니 하는 거지만, 진짜 열어도 되는 거야?”
“나도 몰라 하라면 해야지.”
“젠장, 무서워 죽겠는데.”
성문이 열리고 드러난 건 갈색 로브를 뒤집어 쓴 작은 체구의 사람이었다.
갈색 로브는 깨끗해진 성문 주위를 보곤 작게나마 하밀부르크를 칭찬했다.
“제법이네, 다른 지부의 자유 해방단 단장과는 비교도 안 되는 걸.”
“같잖은 칭찬은 집어치워라, 그래서 계획은?”
“아까 한 말 그대로야, 길을 열어줘 적 쪽 대장이 있는 데 까지.”
“이런 정신 나간 놈.”
갈색 로브의 담담한 말에 하밀부르크는 험악한 표정으로 한 마디 했다.
“말은 아주 쉽게 하는 군, 정말로 길만 뚫으면 시간을 벌 수 있는 거냐?”
“내 목숨을 걸고 약속할게.”
“네 놈의 목숨은 몇 개를 줘도 안 받는다, 차라리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가 더 가치 있겠지, 좀 더 제대로 된 걸 걸어라.”
“애 앞에서 불평도 가지가지야, 그만 투덜거리고 어른답게 행동해.”
갈색로브의 말에 하밀부르크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머리끝까지 화가 났지만, 억지로 화를 가라앉혔다.
자신을 조롱하는 노예 놈이 죽도록 싫지만, 지금은 믿을 수밖에 없다.
하밀부르크는 몸을 풀며 본격적으로 싸울 준비를 했다.
“후우우.”
숨을 깊게 들이쉬며 온 몸에 힘을 주었다.
지금까지는 준비운동에 불과했다.
싸움은 이제 시작이다.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