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내 도움 없이 혼자 막겠다고?”
“혼자는 아니야.”
가온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가온의 시선은 아르실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성벽 위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는 하밀부르크와 좌절하는 영주 샤로텐.
가온의 시선은 그 둘에게 향해 있었다.
말튼 성을 향해 진군하는 하운드의 군대, 그들은 무식하게 다짜고짜 돌격부터 하지 않았다.
짐승들은 본능적으로 달려들지 않고 뒤에서 대기했다.
성벽 근처에 있는 병사들은 성벽에 달라붙은 채 사다리를 준비하고 북쪽에 포진한 병사들은 공성장비를 호위하며 말튼 성의 정문을 향해 전진했다.
하밀부르크는 급한 마음에 영주 대신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뭐하는 거냐! 당장 저 공성무기의 접근을 막아라! 사다리로 올라오려는 놈들에겐 화살과 준비한 돌을 먹여줘라!”
“공성장비는 어, 어떻게 막습니까?”
“어떻게 하긴! 목재 장비니 불화살로 태워라!”
“아, 알겠습니다.”
성벽 위의 궁수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당겼다.
쉬시시시식!
성벽 위를 떠나 수십의 화살들이 날아갔다.
터터터터덩!
기세는 좋지만 그게 다였다.
날아간 불화살들은 호위하는 병사들의 방패에 가로막히거나 운 좋게 맞는다 해도 공성장비는 물 먹인 가죽으로 뒤덮였다.
불화살이 맞아도 오래가지 못하고 꺼져버렸다.
궁수들은 이를 악문 채 욕설을 내뱉었다.
“제길, 불화살이 먹히지가 않아!”
“눈이 이렇게 많이 내리니 화살촉을 점화시키기도 힘들어!”
“사다리라도 어떻게 해봐!”
“사다리 타고 올라오는 놈들은 죄다 방패를 뒤집어썼어! 사격대신 낙석 시켜!”
하밀부르크의 지휘 하에 사다리는 가까스로 막고는 있지만, 공성장비는 막지 못했다.
어느새 성문 앞에 선 공성장비는 본격적으로 성문의 파괴를 시작했다.
막심은 제대로 막지 못하고 우왕좌왕거리는 말튼 성의 병사들을 보며 한껏 비웃었다.
“하하하핫! 어떠냐!”
“닥쳐라, 미친 자식.”
하밀부르크의 살벌한 위협에도 막심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성벽에서 저렇게 위협을 해봤자 자신에게 해가 안 온다는 걸 막심은 알고 있었다.
막심은 두 팔을 벌린 채 자신의 손아귀에 놀아나고 있는 말튼 성을 향해 마음껏 외쳤다.
“군대를 모은 건 하운드님이지만, 이 모든 계획을 세운 건 나다! 가주를 공격하고 늑대 기사단을 끌어들인 것부터 지금까지! 너희들은 내 계획의 범주 안에서 벗어나지를 못해!”
“저 개자식이.”
지껄이는 막심의 외침에 하밀부르크는 이를 악물었다.
분하지만, 성벽 위에 병사들은 소수인데다가 경험도 적은 초짜들이다.
이들만으론 적들의 진격을 막지 못한다.
최악은 이대로 성문이 뚫리고 전면전이 벌어지는 것.
성 안에는 안심하고 남은 주민들이 대다수다.
적들이 들이닥치면 힘없는 주민들은 도륙 당할 것이다.
하밀부르크는 비장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직접 가야하나.”
당장이라도 내려가면 공성장비와 호위병쯤은 혼자서도 충분히 박살낼 수 있다.
문제는 그 뒤에 있는 만이 넘어가는 병사들과 짐승들 그리고 이방인 하운드다.
고드프리도 없는 와중에 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까.
하지만 시간이 없다.
당장 가지 않으면 성문이 뚫릴 것이다.
하밀부르크가 직접 가려는 찰나였다.
누군가 그의 옷자락을 잡은 채 그를 불렀다.
“기다려.”
변성기도 안 온 여물지 않은 목소리지만,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하밀부르크가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갈색 로브를 뒤집어 쓴 작은 체구의 누군가가 있었다.
전시상황이다.
그렇기에 처음 보는 이였다면 경계하거나 곧장 제압했겠지만, 처음 듣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하밀부르크는 냅다 화를 냈다.
“너! 대체 뭐하다가!”
“쉬잇, 시간이 없어, 날 데리고 길만 뚫어줘 그러면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야.”
“이 자식이 갑자기 나타나선 이상한 소리를.”
“빨리, 뚫리면 다 끝이야.”
다른 사람들이 듣는다면 미친 자의 헛소리라고 치부했을 말이었다.
그러나 하밀부르크는 무시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하밀부르크는 굳은 표정으로 갈색 로브를 노려보며 물었다.
“시간을 어떻게 끌 거지? 내가 널 믿어도 된다는 근거는?”
“그런 걸 물어 볼 시간에 움직여.”
“건방진 자식, 조금이라도 문제라도 생기면 널 먼저 죽일 거다.”
하밀부르크는 그렇게 말하곤 홀로 성벽에서 뛰어내렸다.
쿵!
밑에서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눈보라가 성벽까지 치솟았다.
그리고 성벽 밑에서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갈색 로브는 내려간 하밀부르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확인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길 정도는 뚫어주겠지.”
적의 군대가 진군하는 와중에 샤로텐은 입술을 깨문 채 중얼거렸다.
“제길.”
이미 깨물었던 입술을 또 깨무니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샤로텐은 피가 흐르든 말든 개의치 않으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며칠 간 보이지 않았다고 너무 안일했어.”
토벌군을 전멸시킬 정도의 전력을 가진 하운드 군세가 곧바로 말튼 성을 치지 않은 걸로 기뻐하곤 마음을 놓은 게 화근이었다.
적들이 보이지 않았을 때 좀 더 의심하고 대비를 했더라면.
후회와 자책 속에서 괴로워하던 샤로텐의 귓가에 소년의 차디찬 일갈이 들렸다.
“한 성의 영주가 손 놓고 있다니, 제정신입니까?”
“으음?”
자신을 질책하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샤로텐은 고개를 들었다.
갈색 로브를 뒤집어 쓴 작은 체구의 소년이었다.
갈색 로브는 손을 들어 샤로텐을 가리킨 채 무뚝뚝하게 말했다.
“성문을 열어주십쇼,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시간을 벌겠다고? 아니 그보다 그대는 누군가?”
“그게 중요합니까? 성문이 뚫리기 직전입니다.”
“아무리 급하다 해도 성문을 열어달라니, 말튼 성의 영주로서 알 수 없는 자에게 이 성의 운명을 맡길 수 없네! 신원부터 밝혀라!”
아무리 정신이 피폐해졌어도 이성마저 마비되지는 않았다.
어처구니 없는 갈색 로브의 요구에 샤로텐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나 갈색 로브는 물러서지 않았다.
갈색 로브는 성큼 성큼 다가가더니 그의 뺨을 쳤다.
찰싹!
가볍게 쳤지만, 뺨을 맞은 샤로텐의 표정은 당혹스러움으로 가득했다.
항상 자신과 말튼 성을 무시하는 하룬가의 하랄드조차 이런 무례는 저지르지 않는다.
화가 끝까지 난 샤로텐의 호통이 있기 전, 갈색 로브가 선수를 쳤다.
“정신 차려, 영주라는 직급과 되도 않는 호통 한번으로 지금의 말튼 성을 구해줄 거 같아?”
“네 놈…….”
“아무것도 못하고 가만히 있던 주제에 입 털지 말라고.”
갈색 로브의 폭언에 샤로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채 입을 다물었다.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이 일이 벌어진 이유에는 자신의 실수 또한 있었다.
샤로텐이 입을 다물자 갈색 로브는 손을 내밀며 재촉했다.
“빨리, 어차피 이대로 가면 성문은 뚫려.”
쿵! 쿵!
가온이 가리킨 성문 쪽에선 들려오는 소리에 샤로텐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믿을 수 없는 자에게 성의 운명을 맡길 수 없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성문이 뚫릴 것은 분명했다.
잠시 고민하던 샤로텐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힘겹게 말했다.
“그럼 하다못해 조금이라도 기다려주게, 고드프리경이 곧 이쪽으로 올 거야 그와 함께 가게나.”
“고드프리? 설마 트라야비아가의 부단장?”
갈색 로브는 생각지 못한 이름이 나오자 당황했다.
그러나 당황은 잠시뿐이었다.
갈색 로브는 고개를 내저으며 거절했다.
“언제 올 지도 모르는 늙은이를 기다리기엔 사태가 급박해, 날 못 믿어서 그런 거라면 걱정 마, 미리 내려간 하밀부르크와 같이 움직일 테니.”
“하밀부르크? 자유 해방단 단장인 그와 어떻게?”
“설명할 시간 없어, 그래서 허락해 줄 거야 말거야? 허락 안 해도 어차피 성문은 뚫려, 무고한 민간인들이 다 죽을 거라고.”
갈색 로브의 협박 아닌 협박에 샤로텐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참으로 무능력한 영주다.
초면인데다가 자신에게 이토록 무례하게 대한 놈에게 성의 운명을 맡겨야 한다니.
샤로텐은 쓰게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틀린 말도 아니지, 나로선 적들의 진군을 막지 못한다, 이대로 성문이 뚫리면 수많은 이들이 학살당할 거야.’
고드프리가 병사들을 끌고 오기 전까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
만약 눈앞의 건방진 놈이 그 시간을 벌 수만 있다면…….
밑져야 본전, 샤로텐은 자신의 허리춤에 찬 인검을 건네주며 명을 내렸다.
“나 말튼 성의 영주 샤로텐은 그대에게 병사들을 통솔하는 인검을 내린다, 이걸 보여주면 성문을 열어줄 거다, 그대의 이름은 뭐지?”
“가온, 굳이 기억할 필요는 없어, 이름이 지어진지는 두 달도 안 되었으니깐.”
“두 달도 안 된 이름?”
샤로텐이 묻기도 전에 갈색 로브를 뒤집어 쓴 가온은 미끄러지듯이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내려가는 가온을 보며 샤로텐은 열었던 입을 굳게 다물었다.
물어볼 시간조차 아까웠다.
하밀부르크가 사라진 성벽의 병사들에게는 자신들을 지휘할 지휘관이 필요했다.
샤로텐은 기운을 차리곤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나 말튼 성의 영주 샤로텐이 명한다! 병사들은 각자 자리를 사수하며 적들의 침입을 허용해선 안 될 것이다!”
항상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