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이 푹푹 빠질정도로 내리는 폭설이였다. 함박눈은 눈보라 속에서 아프게 소년의 뺨을 때려댔다.
어디로 가는지, 목적지가 어디인지 그것은 말해주지 않았다. 다만 차가운 바람 사이를 헤처나가며 바닥에 기이한 무늬를 남기는 흰 지네의 몸통을 계속해서 길잡이 삼아 따라갈 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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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멈추면 귀가 아려오는 고요만이 가득했다.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될 때 쯔음에 다시금 바람이 불어오면, 귓가엔 그저 고통스런 바람이 바싹 말라가는 귓가를 살살 아프게 휘적거리는 소리만이 맴돌았다.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한다. 소년은 발걸음에 천천히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게, 제대로 된 장비도 방한도구도, 간단한 패딩조차도 제대로 입지 않고 그저 편한 점퍼 하나로 달랑 몸을 지키고 있었기에. 그것의 손에 이끌려 벌써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폭설이 내리고 있는 한라산의 어느 길목으로 따라가고 있으니, 어느새 소년의 어깨위와 낡고, 헤저 뜯어진 가방 위에는 튀어나온 실밥 위로 눈이 소복히 쌓였다.
소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따라갔다. 이제 와서 돌아가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라도 하고 있을까? 아니, 오히려 소년은 아무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냥 머릿속을 텅 비운채로, 통증은 이미 천천히 마비되었으며 흰 눈밭 위와, 바람소리, 그것의 무수히 많은 다리들이 눈길 위에 새기는 무늬를 감상하며 천천히 따라갈 뿐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 앞은 흐릿해진다. 애초에 그리 건강한 몸도 아니였을 뿐더러, 조금 통통한 살집을 보아 소년은 그다지 이런 운동과는 관련이 없는 부류의 사람이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몇시간이고 눈이 잔뜩 내리는 가파른 산길을, 추위에 떨며 따라가는것은 무리가 있겠지. 정신이 오락가락 한다. 현실과 망상의 경계가 흐려진다. 모든것이 꿈처럼 느껴지고, 눈 앞의 지네가 그냥 소년의 머릿속 환상에 불과했던건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윽고 소년은
천천히 경계를 허물어가기 시작한다. 눈꺼풀은 무겁고, 몸도 물 먹은 솜처럼 무겁다. 귀신에게 홀린것일까. 그런 걱정이 들기도 전에, 소년은 푹신한 눈밭 위에 고개를 처박고 꼬꾸라젔다. 기억의 필름은 이곳에서 끊어지고, 이윽고 소년은 새까만 세상으로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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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흐흐, 바보같은 사내로구만 ... "
붉은 눈은 초승달처럼 굽어저, 새빨간 눈빛을 소년에게 보내고 있다. 따뜻한 온기, 몸은 바짝 얼어있다가 부드럽게 풀려있었으며, 이 사실은 소년의 마음에 괜시리 안심을 불러일으켰다.
" .. 용기는 있으나, 체력이 없다라. 근성은 있으니 칭찬하지 "
타닥타닥, 타오르는 불길 사이로, 다시금 그것의 아름다운 미성이 흘러들어왔다. 너무 달아서 오히려 쓴, 독같은 목소리였다. 이윽고 그것은 소년의 눈 앞에 작고 여린 손으로 가볍게 박수를 첬다.
" ... 정신을 차렸다면 .. 그 주린 배나 채우지, 보아하니 녹초가 되어서는 "
그것은 달그락 거리는 소리르 조금 내더니, 화로 위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뭉근한 고기죽을 주걱으로 푹 푸더니, 새하얀 그릇에 담아 소년의 앞으로 들이밀었다.
" 약 맛이 좀 날터이니, 다 몸에 좋은것이라 생각하고 우겨넣어 ... 크흐흐 "
웃음이 헤픈것인지, 아니면 그저 자신을 따라온 이 인간이 신기해서 그런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괜시리 그것은 웃음을 헤프게 흘리며 천천히 몸을 움직혀서 반쯤 몸을 일으켜 그릇을 잡은 소년의 곁으로 다가갔다.
" 자 ~ 자. 어서 들어보아. 요리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친 않으니. "
가까이 다가온 그것에게서, 소년은 달콤한 향내를 맡았다. 그것의 체취인지는 모르겠지만 괜시리 부끄러워져서는, 소년은 고개를 푹 숙이고, 그것이 준 나무 숟가락으로 죽을 퍼먹기 시작했다. 식성이 좋기도 한지, 방금 기절해서 일어난 몸인데도 불구하고 뚝딱, 고기죽을 두그릇이나 해치웠다. 무슨 고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살이 조금 질겨도 특유의 향이 죽 맛을 돋궈 주는지 제법 맛이 있었던 모양이다. 소년은 빈 그릇을 내려놓고, 입을 가볍게 손으로 닦았다.
" .. 그, 고맙 .. 습니다 "
우물쭈물, 앉아서는 고개를 푹 숙여 인사했다. 죽을 대접해주어서 고맙다는 것인지, 아니면 어울려주어 고맙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인사가 맘에 들었는지 그것은 손을 제 입에 가져가선 실실 웃고는 별거 아니라는듯 손사래를 첬다.
" 인사성이 바른 사내로구만, 싫지 않아 .. 싫지 않아 "
소년은 그것을 한번 바라보고는 주변을 다시금 둘러보았다. 옛 향기가 가득 나는 오래된 집임에도 불구하고 사방이 견고하게 잘 보수가 되어 있어서, 차가운 바람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는 소년은 똑바로 앉아선 그것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 그 .. 이곳은, 당신이 사는 .. 곳이군요 "" 음, 음 .. 그렇지, 꽤나 너저분하고 잡동사니가 많긴 하지만 .. 쿠흐흐, 그대라면 이해해줄거라 믿어 "
" .. 그, 아닙니다. 더럽지 않고 .. 오히려 이런 곳이 있다는것 자체로 조금 .. 놀랐습니다. 산속에 .. "
소년은 고개를 쭈뼜거렸다. 오히려 이때는 산 속에 이런 집보단, 기이한 당신같은 것이 살고 있다는것이 더 놀라운 부분이 아닌가? 하는 부분은 개의치 않은 모양이다.
" .. 편견이 없는건지, 겁이 없는건지 .. "
그것은 천천히 다가와서는, 소년의 옆에 앉아 웃음소리를 흘렸다.
" .. 아니 .. 그게 " " 쿠흐흐 .. 아니네, 아니야 .. 그냥 내 짖굳은 농담이니 .. 괘념치 말아.. 그러고보니, 이름도 듣지 못했는데. 그대야 .. 이름은 무엇인지 ? "
이름, 이름 말이지. 소년은 조금 긴장한것 처럼 몸을 뻣뻣하게 세워서 대답했다.
" 제 이름은 백입니다. 최 백. 흰 백을 씁니다. "
최는 성이고, 이름은 백.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 백, 백이라 .. 오늘같은 날씨에 딱 어울리는 이름중 하나로 보이는데 .. 맘에 드는구나 "
자기의 붉게 물든 입술을 손 끝으로 톡톡 건드리며 실실 웃더니, 다시금 붉은 눈동자가 보름달에서 초승달로 변해 눈웃음을 짓고는 그것은 다시금 이야기를 이었다.
" .. 크흐, 내 이름을 밝히지 않으면 실례겠지 .. 좋네, 좋아 .. 내 이름은 설홍이네. 설. 홍. .. 잊기엔 특이한 이름이지 ? "
그것의 이름은 설홍. 눈 위에 붉은 피. 소년은 마음속에 그것의 이름을 새겼다. 잊을수야 없을 것이다. 이토록 달콤한 쓴맛이 가득한 공기가 가득찬 공간속에서 그것의 웃음소리는 무엇보다도 아름다웠으니까. 소년은 귀신에 홀린것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냥, 지금만큼은.
이것이 그것의 독이라 한들, 잔뜩 취해선, 그것과 함께 눈밭 위에서 춤추고 싶었을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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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우울해진 탓에 이어서 마구잡이로 글을 써 올려봅니다
지네 화신과 소년의 이야기 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드백, 비판, 지적 등 모두 달게 받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