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운드.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의 출현에 모두가 입을 다물고 지켜보았다.
멀리서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고 고개가 숙여지는 적의 수장.
어느새 하운드와 군대는 말튼 성 근처에 당도했다.
랠리 숲에서 이방인 하운드가 짐승들과 군대를 이끈 지 5일째.
만 명이 넘어가는 하운드의 군대에 의해 말튼 성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이방인 하운드의 출현에 성벽 위에 있던 모두가 경악하고 있을 때 가온과 아르실 그리고 렘 브란트가 막 성벽을 올라왔다.
가장 먼저 올라온 렘 브란트는 말튼 성을 포위한 군대를 보곤 욕설을 내뱉었다.
“이런 빌어먹을.”
사방이 적이다.
싸우기는커녕 적의 군세만 봐도 전의가 상실할 지경이었다.
잇따라 올라온 가온과 아르실 또한 성을 둘러싼 적들을 봤다.
아르실은 피식 웃으며 가온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나 둘……세기도 힘들 정도로 많네, 이야 이렇게 사람 많은 걸 보는 건 오랜만이네! 가온 어때? 여기 장관이지?”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
“히히, 그런데 생각보다 놀란 거 같지가 않네?”
아르실의 물음에 가온은 침묵으로 답했다.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는 듯이 가온의 눈빛은 평온했다.
가온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아르실.
그녀는 가온을 한참 바라보더니 이내 그만두고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흐흥, 이젠 내가 작정해도 가온의 생각을 알 수가 없네, 가온이 토벌에 참가하기 전까진 얼추 마음 속을 읽을 수 있었는데.”
“그래서 마음에 안 들어?”
“전혀! 오히려 재밌는 걸! 재밌게 읽고 있던 책을 중간에 못 읽게 된 거 같아!”
“그게 재밌다고?”
아르실의 영문 모를 말에 가온은 어이없단 듯 아르실을 흘겨보았다.
아르실은 자신을 바라보는 가온의 시선이 기쁜 지 히죽 히죽 웃을 뿐이었다.
잡담은 여기까지였다.
북쪽에서 어마어마한 짐승의 울음소리에 잡담은 끝났다.
“아우우우우우우!”
얼마나 소리가 큰지 하늘에서 끝없이 내리던 눈들이 잠시나마 멈췄다.
하늘이 흔들릴 정도의 하울링.
누군지는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방인 캐롤 하운드의 울부짖음이었다.
크다 못해 듣는 사람의 오금이 저릴 정도의 함성이 끝나고서 잇따라 하운드를 따르는 다른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크아아아아앙!”
“크르르르!”
“아우우우!”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짐승들의 울음소리에 성벽위에 있는 이들 말고도 말튼 성 안에 있던 사람들 또한 당황했다.
“뭐, 뭐야 이 소리는?”
“짐승 소리 아니야? 하, 한두 마리도 아니고 엄청 많은 거 같은데?”
“엄마, 무슨 소리에요? 무서워요.”
“애들아 일단 집에 숨어 있어, 엄마 말 들으렴!”
짐승들의 울부짖음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성벽위에 있던 이들은 물론이고 성 안에 있는 모두가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다.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밖에 정확한 상황은 몰라도 다들 얼추 깨닫기 시작했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몇 분이 지나고서 짐승들은 입을 다물었다.
적막만이 부는 말튼 성, 북쪽에서 거대한 늑대 이방인 하운드가 천천히 다가왔다.
높게 쌓인 눈을 살포시 밟으며 다가오는 하운드의 모습에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성벽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걸음을 멈춘 하운드는 위엄 있게 고개를 치켜든 채 입을 열었다.
“영주에게, 말한다, 샤로텐, 말튼 성.”
단어로만 이루어진 하운드의 말을 사람들은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운드에게로 막심이 바삐 달려갔다.
하운드 옆에 선 막심은 헛기침을 한 뒤 자신이 대신 하운드의 말을 알렸다.
“말튼 성의 영주 샤로텐에게 말한다! 지금 즉시 성문을 열고 항복을 해라, 그럼 하룬가를 제외한 나머지 이들의 목숨만은 살려주마.”
막심의 목소리는 성 전체에 퍼져나갔다.
이를 듣고 가장 먼저 반응한 건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하랄드였다.
하랄드는 눈을 부릅 뜬 채 성벽 너머로 보이는 막심을 확인하곤 분노했다.
“이, 이 목소리는 막심? 이 미친놈이! 하룬가를 배신하고 놈에게 붙은 거냐!”
하랄드의 분노에 가득 찬 외침을 들은 막심은 피식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잘도 살아있었군 쓰레기 자식, 넌 어차피 곧 죽을 목숨이니 닥치고 있어라, 내 주인께서 지금 말하는 상대는 네 놈이 아닌 영주니.”
“무, 뭐 이런 배신자놈이! 당장 저 미친놈을 죽여! 죽이라고!”
하랄드가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막심은 더는 신경쓰지 않은 채 다시 한 번 말했다.
“영주 샤로텐은 들어라, 당장 성문을 열고 항복을 하면 하룬가를 제외한 나머지 이들은 살려주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내 위대하신 이방인 하운드께서 전부 죽일 것이다, 하룬가고 영주고 어린아이고 노약자건 뭐든 말이야!”
허언이 아닌 진심이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짐승들은 당장 성 안에 있는 모든 걸 죽일 듯이 살기를 품어대고 조종당하는 병사들 또한 무기를 빼들기 직전이었다.
살벌한 막심의 외침에 줄곧 가만히 있던 샤로텐이 입을 열었다.
“말튼 성의 영주 샤로텐이다! 그대 막심이라고 했던가? 하룬가의 밑에서 일하던 자가 어째서 이방인의 편을 들어 사람들을 죽이려고 하는 건가? 당장 그만두게!”
영주는 나름 위세 있게 외쳐보지만, 막심에겐 티끌도 먹히지 않았다.
막심은 역으로 샤로텐을 협박했다.
“괜한 허세를 부릴 생각도 마시지 영주, 아직도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냐? 항복하지 않으면 죽음뿐이다, 잘 생각해라.”
“항복하면 하룬가를 뺀 나머지를 살려주겠다고? 네놈들은 이미 말튼 성의 병사 수천 명을 죽였다, 어떻게 믿지?”
“어떻게 믿냐고? 크, 크하하하하핫!”
샤로텐의 물음에 막심은 웃음보가 터졌다.
한참을 웃던 막심은 눈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차갑게 일갈했다.
“지금 이게 제안이나 협상으로 보이나? 이건 위대하신 하운드님의 마지막 자비다!”
“자비라고?”
“눈알이 제대로 박혀있다면 여기 성을 둘러싼 하운드님의 군세가 보이겠지, 당장 말튼 성의 성문을 박살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 할 거다!”
막심의 말에 샤로텐은 무거워진 고개를 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말튼 성을 포위한 만이 넘어가는 병사들과 짐승들.
사다리나 공성 장비까지 언뜻 보였다.
한꺼번에 들이닥친다면 말튼 성은 함락될 게 분명했다.
자칫 말튼 성이 함락될 수 있는 지금, 영주인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시간 벌기였다.
저들이 당장 공격하기 못하게끔 시간을 끌어야 한다.
고민하던 샤로텐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말보른 성과 브레이튼 성의 병사들은 어째서 부하가 된 거지? 처음부터 한 패였나?”
“기껏 꺼낸 질문이 그거냐? 못 말할 것도 없지, 말보른 성과 브레이튼 성은 하운드님에게 함락 당했다.”
“함락?”
말튼 성 만큼 튼튼하고 군사력이 있는 두 성이다.
그런 두 성이 함락 당했다?
샤로텐의 눈빛이 격하게 흔들렸다.
샤로텐은 물론이고 하랄드와 하밀부르크 또한 움찔했다.
막심은 반응을 확인하곤 피식 웃으며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요 며칠 북쪽에서 내려오던 우리가 갑자기 보이지 않았던 게 이상하지 않았나? 네 놈들이 지원군을 요청할 걸 예상하고 지원군이 올 두 성을 공격했지.”
“가는 데만 하루 이틀은 걸릴 거리를 군사들을 이끌고 갔다고?”
“군대를 이끌고 가지 않았다, 아니 끌고 갈 필요도 없었지 하운드님께서 전부 정리하셨으니깐, 여기 말튼 성의 동쪽과 서쪽을 포위한 군대는 그 두 성을 점령하고 나서 하운드님이 지배한 녀석들이지.”
이어지는 막심의 말에 당황하지 않는 이는 없었다.
그냥 함락 당했어도 믿지 못할 말인데 혼자서 두 성을 점령했다니.
고작 며칠 만에 두 성을 점령하려면 성에 당도하자마자 성을 점령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듣고 있던 하랄드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막심의 말을 부정했다.
“헛소리야! 아무리 이방인이라해도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거짓말이라고 하기는 성을 포위한 두 성의 병사들 무리가 있습니다.”
“크윽.”
하밀부르크의 반론에 하랄드는 곧장 입을 다물었다.
막심의 말을 뒷받침해주는 증거는 멀리 있지 않았다.
이방인 하운드의 부하가 된 말보른 성과 브레이튼 성의 병사들.
그리고 지휘관 혹은 기사들까지.
하운드의 부하가 되어버린 다른 두 성의 병사들과 기사들이 그 증거였다.
그 중에는 샤로텐의 심복이었던 칼 리보렌 또한 속해 있었다.
자신의 충직한 부하가 적의 수하가 된 걸 두 눈으로 보는 샤로텐의 표정은 복잡했다.
샤로텐의 표정을 본 막심은 킥킥 웃으며 즐거워했다.
“아 여기 있는 붉은 투구 기사는 우리 영주님께서 아끼던 기사였지? 아쉬워 할 필요 없어, 그쪽이 항복하면 여기 있는 자들처럼 똑같이 하운드님의 부하가 될 테니.”
막심은 칼 리보렌의 붉은 투구를 톡톡 건드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막심이 투구를 건드려도 칼 리보렌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낯빛이 극히 어두워진 샤로텐은 힘에 겨운 목소리로 물었다.
“항복하면 살려준다 하지 않았나.”
“목숨을 살려준다 했지, 멀쩡히 살려준다는 말은 안 했는걸, 자 그래서 어쩔거냐, 끝까지 항전할거냐?”
막심은 손을 든 채 마지막으로 물었다.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는다면 당장 공격 명령을 내릴 모양이었다.
하랄드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막심에게 화를 내는 중이었다.
“저 천한 놈이 감히 누굴 죽이겠다고? 가주님과 날 건드리면 하룬가가 네 놈을 몰살 시킬 거다! 여봐라! 저 놈을 당장 가서 죽이는 놈에겐 내 친히 가문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영광을 주마!”
“…….”
“왜, 왜 아무도 나서지 않는 거냐! 위대한 하룬가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기회라고!”
고래고래 외쳐 봐도 나서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하랄드는 패닉에 빠졌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자신의 편은 없다.
하랄드는 평소에 자신이 그토록 하대하던 오툰을 찾기까지 했다.
“오툰! 이 무능한 근위대장은 뭐하는 거냐! 당장 나가 저 버러지를 죽이고 하룬가의 명예를 되찾아라!”
“오툰경은 지금 혼수상태입니다.”
옆에서 한심한 눈으로 하밀부르크가 일침하자 하랄드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자신의 수족이 되어주던 근위대장도 본가를 지키던 병력도 이방인조차 없다.
힘이 없는 하룬가는 그저 악명만 가득한 가문에 불과했다.
하랄드는 급기야 환청까지 듣기 시작했다.
“저 하룬가 놈의 적자랑 병상에 누운 가주만 죽이면 되는 거 아니야?”
“하룬가의 사병들도 거의 다 죽었고 근위대장도 이방인도 없잖아, 지금이야말로 기회라고.”
“내 가족이 하룬가한테 죽었어, 이참에 복수하자!”
“죽여 버리자!”
환청까지 들리기 시작한 하랄드의 눈은 광기에 휩싸였다.
“으아아아악! 날 죽일 생각이냐! 헛소리 마라 하룬가는 위대한 가문이다! 건드리면 네 놈들 모두 무사하지 못할 거다!”
하랄드는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그는 성벽에 선 경비병 한 명의 멱살을 잡은 채 위협했다.
“천한 것! 당장 성벽 밖으로 나가 저 건방진 놈의 목을 따라! 해낸다면 큰 보상을 해줄 것이다!”
“허, 허억, 저, 전 못합니다!”
“못한다고? 이런 무능한 놈! 그냥 내 손에 죽어라!”
“으아아악!”
하랄드가 허리춤에 찬 칼을 뽑아들기 직전이었다.
하밀부르크가 하랄드의 팔목을 붙잡았다.
눈이 돌아간 하랄드는 하밀부르크를 노려보며 위협하려 했다.
“넌 또 뭐야…….”
“좀 닥쳐라.”
퍽!
하밀부르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하랄드의 뺨을 쳤다.
손바닥으로 쳤지만, 주먹으로 친 것 같은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하랄드의 고개가 꺾였다.
“커, 커어억!”
고개가 꺾인 채 하랄드는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숨은 쉬고 있지만, 일어나지를 못했다.
기절한 듯 보였다.
하밀부르크는 쓰러진 하랄드를 한심한 눈으로 쏘아보곤 고개를 돌렸다.
더 신경 쓸 가치도 없는 놈이다.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