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한 마디 씩 남기며 기사들은 검을 뽑아들었다.
감독관이 안전하게 도망가게끔 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기 위해서 기사들은 목숨을 장작으로 삼아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같은 시각 북쪽을 지키는 오툰과 휘하 병사들에게도 일이 터졌다.
오툰은 근무를 서는 병사로부터 뜻밖의 정보를 듣고는 놀란 눈을 감추지 못했다.
“멀리서 문장을 확인한 결과, 말보른 성의 병사들입니다! 곧 이쪽을 지나갈 예정입니다.”
“그거 다행이군!”
희소식에 오툰은 기뻐했다.
지원군이 함께라면 짐승 군대가 쳐들어와도 승리를 장담할 수 있다.
오툰은 곧장 채비를 갖추고 막사 밖으로 나왔다.
아직도 끝없이 내리는 눈으로 인해 막사 주위에는 사람의 발목까지 눈이 쌓여있었다.
잔뜩 쌓인 눈을 헤치며 오툰은 부관을 찾았다.
“부관들은 어디 있지?”
“곧 올 지원군을 인솔하기 위해 먼저 가셨다고 합니다, 대장님은 여기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하하, 녀석들도 참, 안 해도 될 일을 굳이 하는 군.”
오툰은 내심 기쁜지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그렇게 몇 분을 기다리자 저 멀리 높게 치켜세워진 깃발 하나가 보였다.
동쪽의 말보른 성을 상징하는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내리는 눈 때문에 정확한 군세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 말보른 성의 지원군이었다.
오툰은 기뻐하며 그들을 맞이하려 했다.
“잘 오셨소! 저는 하룬가의 근위대장 오툰이라고 합니…….”
쉬이익!
오툰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말보른 성의 지원군이 있는 방향으로부터 길고 커다란 무언가가 오툰을 향해 날아왔다.
눈보라를 헤치며 날아오는 건 날이 날카롭게 세워진 창이었다.
갑작스런 공격에도 오툰은 당황했지만, 재빨리 검을 꺼내들어 막았다.
챙!
금속음과 불똥이 튀며 오툰은 뒤로 쭉 밀려나갔다.
밀려난 오툰의 검 끝은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기습이라지만, 하룬가의 근위대장을 맡은 자신이 고작 창 하나로 버거워하다니.
오툰은 말 없이 자신의 떨리는 손을 봤다.
“…….”
막긴 막았지만, 아슬아슬했다.
막는 게 조금만 늦었다면 오툰의 가슴팍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을 것이다.
오툰은 눈살을 찌푸리며 거칠게 외쳤다.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냐!”
“…….”
“우린 말튼 성에서 출진한 하룬가와 자유 해방단의 병사들이다! 적대행위를 멈춰라!”
오툰의 일갈에도 상대는 아무 말도 없었다.
분위기가 이상하다.
오툰은 불안한 마음에 서둘러 먼저 지원군을 맞이하러 갔을 부관들을 찾았다.
“부관들은 어디 있느냐? 저자들이 정말 우리의 지원군이 맞더냐?”
“대, 대장 저, 저기 깃발을 자세히 보십쇼.”
병사들의 외침에 오툰은 자기도 모르게 말보른 성의 문장이 새겨져 있는 깃발을 응시했다.
멀리서 볼 땐 새겨진 문장 밖에 안 보이던 깃발.
그러나 가까이서 보니 다른 게 보였다.
깃발 아래 매달린 오툰의 부관들의 목만 남은 시체였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굳어버린 표정과 감지도 못한 눈동자 그리고 목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붉은 핏방울.
먼저 맞이하러 갔다는 부관들의 시체를 본 오툰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 이게 무슨.”
“대장님! 놈들이 옵니다!”
지척까지 다가온 말보른 성의 병사들을 일제히 무기를 빼들었다.
그리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하룬가의 병사와 자유 해방단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갑자기 공격해오는 말보른 성의 병사들의 행동에 혼란에 빠졌다.
“으윽!”
“팔을 베였어!”
“대장님 어떡합니까?”
부하들의 목소리에 오툰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머리가 혼란스럽지만, 이들은 적인 건 확실해졌다.
그렇다고 여기서 맞서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오툰은 칼을 빼든 채 외쳤다.
“말튼 성 안으로 후퇴한다!”
“공격당하는 중에 후퇴하면 피해가 너무 큽니다!”
“내가 막아서겠다! 그러니 너희들은 어서 피해라!”
오툰은 병사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코앞에서 무기를 빼든 채 살기를 풍기는 말보른 성의 병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오툰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적들을 바라보며 함성을 내질렀다.
“와라!”
쉬이익!
처음에 오툰은 먼저 달려오는 말보른 성의 병사들을 단칼에 베어버렸다.
서걱!
한 번의 검 격으로 다섯의 말보른 성의 병사들의 허리가 두 동강 나며 그 사이로 뒤 따라 오는 적들이 보였다.
이걸로는 부족하다.
오툰은 검 끝을 쌓인 눈밭에 박은 채 힘을 주었다.
“하아아압!”.
콰아아앙!
폭탄이라도 터진 것 마냥 쌓여있던 눈들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지면이 뒤집혔다.
달려오던 병사들은 갑작스런 눈보라에 허둥지둥 거리다 뒤집힌 지면에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적들의 기세가 흔들렸음을 오툰은 알아채곤 검을 빼든 채 달려들었다.
“크아아압!”
서걱 서걱!
한 명의 병사라도 더 도망가게 할 수 있게끔 사방에서 몰려오는 말보른 성의 병사들을 베어나갔다.
적들은 말보른 성의 병사들만이 다가 아니었다.
말보른 성에서 주둔하는 하룬가의 사병들 또한 섞여 있었다.
그러나 오툰의 검 끝은 흔들리지 않았다.
“어째서 너희들이 우리를 공격하는지는 몰라도 적인 건 확실한 일! 베어주마!”
서걱!
하룬가의 병사들도 몇몇 기마병들까지 처치해나갔다.
슈슈슉!
이번엔 화살비다.
뒤에 포진한 궁수들의 사격에 오툰은 근처에 주운 시체로 막아냈다.
적들의 기세를 혼자서 막아내는 오툰.
정말 혼자서 적들의 진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오툰은 슬그머니 뒤를 돌아봤다.
쌓인 눈 탓으로 속도는 느리지만, 자신의 부하들과 자유 해방단원들은 말튼 성으로 도망치는 중이었다.
오툰은 힘겹게 미소를 지은 채 중얼거렸다.
“좋아, 이대로 시간을 더 끌면 된다.”
적당히 시간만 끌다 자신 또한 퇴각할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눈보라를 가르며 한 창이 빠르게 날아왔다.
다른 병사들과는 격이 다른 빠르기와 기세의 투창이었다.
이를 눈치 챈 오툰은 재빨리 검을 든 채 창을 막아냈다.
챙!
또 다시 뒤로 밀려난 오툰은 이를 드러낸 채 튕겨나간 창을 확인했다.
“처음에 날아왔던 그 창이로군.”
오툰은 떨리는 자신의 손을 보며 창의 주인의 힘을 가늠했다.
아까도 그렇고 이번의 투창도 일반 병사의 짓이 아니었다.
분명 적들의 대장인 게 분명했다.
오툰은 창이 날아온 방향을 검 끝으로 가리킨 채 외쳤다.
“어째서 이런 짓을 벌이는지는 모르지만, 애꿎은 부하들만 보내지 말고 대장끼리 승부를 내자!”
“…….”
“쯧, 나올 생각이 없는 건가.”
다시금 병사들을 베려고 준비하려는 찰나, 달려오던 말보른 성의 병사들이 우뚝 멈춰 섰다.
멈춰선 병서들이 양 쪽으로 갈라지며 누군가 나타났다.
중무장을 한 기사지만, 일반 기사와는 다르게 붉은 투구를 쓰고 있었다.
이질적인 붉은 투구를 본 오툰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투구에 새겨진 문장 때문이었다.
“그 문장은 말튼 성의 문장? 거기다가 붉은 투구라면 설마?”
오툰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말튼 성의 문장이 새겨진 붉은 투구, 이걸 쓴 기사는 자신이 알기로는 한 명 밖에 없다.
말튼 성 영주 샤로텐이 가장 아끼는 인물이자 말튼 지방에서 손꼽히는 기사, 말튼 성 수비 대장 칼 리보렌이었다.
오툰은 당황한 나머지 칼 리보렌에게 질문을 했다.
“어째서 경이 이런 곳에? 분명 짐승 군대에게 패해 죽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
“살아난 건 둘째 치고 어째서 말보른 성의 군대를 이끌고 우리를 공격하는 겁니까!”
“…….”
오툰의 거친 물음에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붉은 투구의 기사, 칼 리보렌은 대답 대신 창을 들었다.
오툰은 아차했다.
“이, 이런!”
승부에서 찰나의 방심은 목숨을 앗아가는 법이다.
세 번째 투창이 칼 리보렌의 손에서 날아갔다.
코앞에서 날아온 투창에도 오툰은 최대한 빠르게 검을 들어 막으려 했다.
대처는 훌륭하지만, 오툰이 당황한 나머지 미처 생각지 못한 게 하나 있었다.
세 번째 투창까지 막기에는 오툰의 검이 부실했다는 것이었다.
챙강!
창이 오툰의 검과 부딪히자마자 검이 박살나며 창은 그대로 오툰의 몸에 박혔다.
“커헉!”
창의 기세 때문인지 오툰은 창이 박힌 채 뒤로 멀리 날아가 버렸다.
병사들은 대장인 오툰이 자신들에게로 날아오자 혼비백산에 빠졌다.
“대, 대장님?”
“부상이 심해! 일단 업고 가자고!”
하룬가의 병사들은 신속히 오툰을 들쳐 업은 채 도망을 계속했다.
유일한 방해꾼이 사라지자 칼 리보렌은 손을 들어 병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
칼 리보렌의 신호에 말보른 성의 병사들은 도망가는 하룬가의 병사들과 자유해방단원들을 쫓기 시작했다.
“살려줘!”
“끄으윽! 등에 화살이 꽂혔어.”
“으아아악!”
싸울 의욕을 완전히 잃은 채 도망가는 병사들과 그 뒤를 쫓는 말보른 성의 병사들.
눈이 내리는 하늘 아래 말튼 성의 북쪽 벌판에서 때 도망가는 자들과 쫓는 자들 간의 살육전이 벌어졌다.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