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화 https://bbs.ruliweb.com/family/212/board/300068/read/3056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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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마, 이건 꿈과 희망이 가득한 모험이 아니야. 쇼 비즈니스지.”
성아는 한 리무진 안에서 눈을 떴다.
“포켓몬 리그라는 것은 결국 엔터테인먼트에 불과하단다.”
“너는 사업체, 나는 투자자. 내가 너한테 지원을 한 만큼, 응당 거기에 맞는 수익을 내야 하지 않겠니?”
차 안에는 아무런 사람도 보이지 않고, 다만 이런 목소리들만이 성아의 귓속 깊숙이 맴돌고 있었다.
그녀는 답답한 마음에 차창을 두들겨 보았으나 새까만 창밖으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벌레 타입이라니, 같잖은 소리를 하는구나.”
“요즘은 메르헨 소녀가 대세라고 합니다, 사모님.”
“말을 안 들어? 처벌이 필요하군.”
“컨셉에 걸맞은 행동을 하려무나. 메르헨 소녀라면 거기서 그렇게 행동하지 않아.”
“그 상태에서 은혜갚기를 쓰다니, 멍청한 것.”
“포켓몬에게 마음을 주려고 하지 마, 그냥 외우면 될 것 아니냐.”
“님피아의 특공 육성이 덜 된 것 같군요, 아가씨.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허락도 없이 배틀을 하면 어떡해! 노력치 망했잖아, 덜떨어진 년이!”
“지금 뭘 하자는 거지?”
“그만두십시오, 아가씨!”
갑자기 차창이 깨지더니, 먹구름이 낀 안개 너머로 그녀의 엄마가 뒷모습을 드러냈다.
“도대체 이해가 되질 않는구나. 원하는 건 다 들어줬단다. 트레이너를 하고 싶대서 배틀을 시켜줬고, 리그에 나가고 싶대서 특등급 포켓몬도 구해왔지. 너처럼 편하고 안전하게 여행을 떠나는 트레이너도 없을 거다. 그런데 너는, 너라는 아이는, 좀체 만족을 모르고 기어오르는구나.”
“짜랑랑!”
그녀는 곧 짜랑랑이었던 라란티스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 그래. 이 아이가 문제였나 보군.”
“아니에요!”
그러나 그녀의 절박한 외침이 무심하게도, 그녀의 엄마는 짜랑랑의 목을 맥없이 부러뜨렸다.
성아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는 리무진에서 벗어나 보려고 안간힘을 써 보았으나 좀처럼 안전벨트를 풀 수가 없었다.
성아는 무력감에 울부짖었다.
“아니에요, 이런 건, 이런 건 내가 원하던 게 아니에요……!”
“그래?”
그녀의 엄마가 몸을 돌려 성아와 눈을 마주했다.
“그런데 나한텐 왜 그랬어요?”
그곳엔 피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는 분떠도리가 있었다.
성아는 비명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포켓몬센터였다.
“놀래라!”
“…… 여긴……?”
“갑자기 쓰러지셨다길래 비올라님께서 옮겨주셨어요. 자기가 백단숲에 가볼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화들짝 놀란 간호순이 허겁지겁 그녀의 땀을 닦아주며 말을 이었다.
성아는 식은땀으로 젖은 이불을 걷어낸 채 한참 동안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매정한 시곗바늘은 한나절이 지났음을 알려주듯 창가를 향해 손짓했다. 성아가 고개를 돌렸다. 저물어가는 하늘 위로 투명한 달이 떠올라 있었다.
“안 좋은 꿈이라도 꿨어요? 안색이 나빠요.”
“분떠도리…….”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일어나면 안 돼요! 좀 더 회복하지 않으면…….”
“안 돼요…….”
성아가 벽에 걸린 모자를 챙기며 말했다.
“내가 가보지 않으면…….”
그녀는 간호순의 제지도 무시한 채 곧장 백단숲으로 향했다.
날은 벌써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기울어진 해는 게이트 위로 닿을락 말락 했고, 숲은 칙칙한 어둠과 안개에 휩싸여 공포심을 자아내고 있었다. 입구에서 비올라를 기다리던 제민이는 성아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며 다가와 말했다.
“누나? 좀 괜찮아?”
그러나 성아는 대충 끄덕이고는 거침없이 숲으로 들어섰다.
제민이가 그녀의 팔을 잡아끌며 놀란 표정으로 다그쳤다.
“누나 미쳤어? 이 시간에 들어가면 최소 실종이야. 관장님도 웬만해선 밤에 안 들어가는데, 미쳤다고 외지인이 혼자 들어가.”
“라란티스는.”
“어, 어? 안에 있지.”
성아는 가만히 눈을 깜빡이고는 안쪽으로 향했다.
“그럼 됐어.”
“누나? 누나?!”
멀어지는 성아를 바라보며, 머리를 벅벅 긁던 제민이 당황한 투로 성아에게 달려갔다.
“분떠도리는 아직도 못 찾았어. 백단숲 토박이인 관장님이 한낮 내내 돌아다녀도 못 찾았는데, 누나라고 쉽게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곧 해가 질 거야. 여긴 관장님이랑 라란티스한테 맡겨두고……”
그러나 성아는
“라란티스, 안에 있다며.”
“어…… 응.”
일말의 고민도 없이 숲으로 걸음을 옮겼다.
“…… 환장하겠네.”
제민이가 옅은 신음을 내뱉었다.
두 사람은 머지않아 탁한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 쟨 또 뭘 하는 거람.”
뿔충이가 나무 사이로 얼굴을 내밀며 분떠도리를 멀찍이 바라보았다.
검붉은 이파리가 맺힌 나뭇가지들이 호숫가를 따라 지붕을 이루고 있었다. 물이 닿는 곳엔 굵은 밑동들이 기둥처럼 그 지붕을 떠받들고, 비 새듯 쏟아지는 사양 빛이 수면 위에서 안개와 뒤섞여 일렁였다.
물이끼 냄새가 진하게 났다. 잔잔한 호수는 거울이라도 된 것처럼 우거진 수목을 담아내었고, 분떠도리는 그 사이에 서 있었다.
“분명 어떤 트레이너한테 간다고 했었잖아. 설마 벌써 버려진 거야?”
“뭐하냐 103684호.”
지나가던 독침붕이 그의 어깨를 콱 건들며 말을 건넸다.
화들짝 놀란 뿔충이가 펄쩍 뒤를 돌아봤다.
“형님이십니까. 놀랐잖습니까.”
“뭐야, 쟤가 그 막내네 분이벌레야? 분떠도린데?”
“진화했나부지, 멍청아.”
“막내야, 또 짝사랑이냐.”
어느새 셋으로 늘어난 독침붕이 뿔충이를 둘러싸고 수군거렸다.
“짜, 짜, 짝사랑이라뇨?! 제가 언제?”
“얼씨구, 맨날 분이벌레 진화시키겠다고 어거지로 괴롭히다가 진화 시기 놓친 놈이 누군데?”
“그래도, 쟤 분떠도리로 진화했는데?”
“길 가다가 죽은 캐터피라도 밟았나 보지. 애초에 쟤도 진화 시기는 한참 지났어.”
“형님들 제발.”
옹기종기 나무 뒤에 모여앉아 나 몰라라 웅성대는 독침붕들 때문에 뿔충이는 그만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행히 분떠도리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는 야트막한 호수 안으로 찰박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몸에 실을 두르기 시작했다.
“뭐야, 뭐, 쟤 뭐 시작했다.”
“야, 야야, 봐라, 봐.”
“뭐야? 실인데?”
분떠도리는 몇 차례 실을 허리에다 꽁꽁 두르더니, 이내 그물 펼치듯 휙, 하고 수면 위로 던졌다.
실은 멀리 날아가지 못하고 호수 가장자리에서만 늘어졌다. 그녀는 울상이 된 채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몸에다 실을 감았다.
“뭐야?”
“뭔데?”
“뭐냐?”
“좀 조용히 해보세요…….”
네 형제는 침을 꿀꺽 삼키고 나무 뒤에서 그 광경을 다시 지켜보았다.
분떠도리는 계속해서 몸에 두른 실을 호숫가에 내던졌다. 그녀가 있는 가장자리는 이제 거미집이 된 것처럼 실로 범벅이었고, 물가에도 난잡하게 실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저게 뭔데. 나만 이해 안 되냐?”
“아니, 나도.”
“갸라도스라도 낚으려는 거 아냐?”
세 형제는 그녀의 반복되는 행동에 금방 지루해졌다. 그들은 다시 잡담을 시작했다.
“일단 계획을 세워보자.”
“계획? 무슨 계획.”
“과연 어떻게 해야 막내의 연애를 성공시킬 수 있을까.”
“오오, 그거 좋다.”
“누구 의견 없어?”
“나, 나. 의견. 일단 우리가 강도 포켓몬인 것처럼 분떠도리를 위협하는 거야. 그다음에, 막내가 나타나서 분떠도리를 구해주는 거지.”
“오오, 그거 좋다.”
“근데 분떠도리 우리 얼굴 알잖아.”
“앗.”
“음, 그럼 이런 건 어때. 일단 우리가 강도 포켓몬인 것처럼 분떠도리를 납치하는 거야. 그다음에……”
“그니까 쟤 우리 얼굴 안다니까?”
“형님들, 형님들! 조용히 하고 저거나 보세요.”
뿔충이가 턱으로 분떠도리를 가리켰다.
분떠도리는 다시 실을 꽁꽁 싸맨 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녀는 물이 허리까지 잠기게끔 앞으로 움직였다.
충분히 적셨다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몸을 뒤틀어 실을 내던졌다. 무게가 실린 실뭉치는 무난하게 물안개를 가르며 호수의 중심부까지 넓게 퍼졌다.
분떠도리가 조그맣게 입을 벌리고선 헤헤 웃었다.
“웃는다.”
“웃네.”
“저게 성공한 거야?”
삼 형제는 이게 뭐냐는 투로 얼빠진 표정을 짓고는, 다시 저들만의 대화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뿔충이는 분떠도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가만히 답했다.
“아마도 그 인간한테서 배운 거겠죠.”
그는 다시금 연습에 몰두하는 분떠도리를 바라보며 쓸쓸하게 웃었다.
“…… 바보같이. 이젠 아무런 쓸모도 없는데…….”
“저런, 불쌍하네.”
“가엾어라.”
“엥? 뭐가?”
“버려졌다잖아.”
“…… 그럼 막내한테는 오히려 기회 아니야?”
“아, 그런가?”
“그렇지, 이득인 거지.”
“그렇구나. 다행이네.”
“버려져서 다행이네!”
“…….”
뿔충이는 멍청한 표정으로 떠들어대는 세 형을 바라보며, 이젠 질렸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누나.”
숲은 곧 어둠이 찾아올 것처럼 스산하게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다. 안개가 짙어졌다.
성아가 앞장을 서고, 제민이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아무런 말도 없이 성큼성큼 나아가는 성아의 모습에 제민이는 걱정이 되는 심정으로 그녀를 불러세웠다.
“누나!”
“……? 왜?”
“지금 분떠도리가 어딨는지 알고 가는 거 맞아?”
“알아.”
성아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생각을 하더니, 제민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 아마도?”
“추측이잖아…….”
두 사람은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잠깐만 쉬어도 성아의 모습이 흐릿해질 정도로 숲은 미로와 같았다. 제민이는, 저 누나가 원래 저렇게 체력이 좋았나, 하는 투로 무릎을 부여잡고 숨을 골랐다가, 다시 달려가 그녀의 뒤를 따라잡기만 할 뿐이었다.
“천천히 좀 가……!”
슬쩍슬쩍 뜀박질을 섞은 경보를 하며, 캐스터의 손전등을 켜려는 성아에게 제민이가 소리쳤다.
“분떠도리를 찾는다고 해도……!”
그 말에 성아가 우뚝 멈춰섰다.
“만난다고 해도, 만나서 어떻게 하게?! 다시 배틀을 해달라고 말할 거야? 아까 그렇게 패닉에 질려 하던 녀석한테?”
“…… 아니야.”
성아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누나는 배틀을 싫어하는 포켓몬을 두 마리 길러봤어.”
그녀는 리조트에서 놀고 있는 콘팡과 파라스를 떠올렸다.
둘 다 진화를 거부하는 녀석들이었다. 성아는 그 둘이 필드에 나가지 않으려고 온갖 공작을 펼치던 것을 회상했다.
“정말로 배틀을 싫어한다면, 체육관에 들어오지도 않았어.”
그녀는 그걸로 대답이 되었다는 듯 다시 몸을 돌렸다.
“분떠도리는 자가당착에 빠진 거야. 배틀을 하고 싶지만, 막상 배틀을 하려니까 무서운 거지. 난 억지로 밀어붙이면 해결될 줄 알았어.”
걸음을 옮기며, 성아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누구보다 그게 끔찍하다는 걸 아는 녀석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모습에 제민이는 더 이상 별 말 하지 않았다.
안개 사이로 장막이 걷히듯 나무들이 팔을 벌렸다. 공기의 냄새가 바뀌었다. 제민이는 성아의 걸음이 느려지는 것을 보고 목적지에 도달했음을 깨달았다. 숨을 달싹이며 멈춰 선 성아의 옆에 서며, 그는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을 내다보았다.
마침내 드러난 풍경은, 호수였다.
“근데 쟤는 하루종일 저거만 한다냐?”
또다시 물에 들어가려고 하는 분떠도리를 가리키며, 지루함에 늘어진 독침붕이 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뿔충이는 바보 같은 표정으로 웃으며 그녀의 노력을 응원해주고 있었다.
“좋단다 등신. 둘째야, 막내 연애계획은 어떻게 돼가고 있냐.”
“…….”
“망했구만.”
“…… 방금 막 좋은 생각이 났어. 일단 우리가 분떠도리를 호수에 빠뜨리는 거야. 그다음에, 막내가 나타나서 분떠도리를 구해주는 거지.”
“넌 도대체가 그 레퍼토리에서 벗어나질 않냐.”
“왜? 난 좋은 거 같은데. 물속에 빠뜨리면 우리 얼굴도 못 알아볼 거 아냐.”
“그렇다잖아.”
“…… 그런가?”
어딘가 부족해 보이는 대화를 주고받던 독침붕들은, 결론이 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제히 뿔충이를 불러세웠다.
“야, 막내야. 형들이 네 연애사업 도와주련다.”
“…… 그냥 가만히 계시면 안 될까요.”
“그치만, 이미 늦어버렸는걸.”
셋째가 가리킨 곳에는 분떠도리의 등 뒤로 향하는 첫째의 모습이 있었다. 일순간에 상황을 파악한 뿔충이의 눈동자가 화악 커졌다. 분떠도리는 다시 실을 적신다고 뭍에서 멀어져 있었고, 독침붕은 날갯소리를 죽인 채 살금살금 다리를 담그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뿔충이는 맹렬한 기세로 두 형의 팔을 뿌리치며, 첫째를 향해 달려들었다.
“오오, 멋지다야.”
“남자다잉.”
“엥? 아니 잠깐만, 이런 건 계획에 없었잖……!”
악. 소리를 내며 얻어맞은 첫째 독침붕이 호수 속으로 풍덩 빠져버렸다.
화들짝 놀란 분떠도리가 뒤를 돌아봤다. 숨을 할딱이며 짜증 나는 표정을 짓고 있던 뿔충이는 곧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어, 어? 어?”
“아니, 네가 뭔 생각 하는지는 알겠는데, 오해야.”
나무 뒤에서 형들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뿔충이는 눈을 꿈뻑이며 분떠도리의 시선을 회피했다.
“왜, 왜, 왜 온 거야…….”
“그게 아니라…….”
“네, 네가 말한 대로 진화도 했잖아! 왜, 왜 자꾸만 날 괴롭히는 거야……!”
“막내 망했네―.”
“으으…….”
때마침 수면 위로 첫째의 실루엣이 드리웠다. 뿔충이는 분떠도리의 눈길을 회피하며, 떠오른 첫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차라리 잘 됐어요. 형님이 와서 설명을……”
그러나 첫째는 떠올랐다.
“해…… 주십……?”
계속해서 호수 위로 떠올랐다.
“…… 아?”
“형님……?”
“…… 막내야!”
떠오른 첫째는 의식을 잃고 있었다.
그것은 포켓몬이라기보단 거대한 기둥이었다.
머리 위에 올라앉은 독침붕을 뭍 저편까지 내던지고는, 녀석은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우락부락한 입안에 머금었다. 시들하게 내걸린 해가 그의 머리를 차마 비추지 못하고 들썩거렸다. 나무 뒤에 숨어있던 독침붕들은 경악하며 첫째와 막내에게로 달려가고, 기둥의 응달에 가려진 분떠도리와 뿔충이는 초라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지들이 몇 안 남은 이파리를 바르르 떨었다.
시간마저 멈춘 듯 모두는 숨을 죽였고
마침내, 그의 입에서 폭풍이 쏟아져나왔다.
“누가아――!!”
매섭게 찢어진 눈동자가 더욱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죽인다아――!!”
그것은 갸라도스였다.
고치로 뒤덮인 갸라도스의 얼굴엔 분노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숲의 지붕을 다 벗겨낼 기세로 소리를 질러댔다. 위협만으로 온몸이 저릿저릿해 분떠도리와 뿔충이는 벌벌 떨며 그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독침붕네가 꺄악, 하는 비명을 내지르며 혼비백산 흩어졌다.
갸라도스는 실로 범벅이 된 호숫가를 널찍이 둘러보더니, 허리에 실을 두르고 있는 분떠도리를 향해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가 콧김을 내쉬자 분떠도리의 고치에 붙어있던 분진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분떠도리는 침을 꿀떡 삼켰다. 날카롭게 굴러다니는 그의 눈알 하나하나가 분떠도리보다 커 보였다.
“너냐아――!!”
그가 네모난 입을 왁 벌려서 소리를 내질렀다. 고약한 물방울과 침이 뒤섞인 폭풍에 두 꼬마들은 눈조차 뜰 수 없었다. 분떠도리는 실의 무게 때문에 괜찮았지만, 뿔충이는 그것만으로도 이미 저만치 나무까지 튕겨 나가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그가 분떠도리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도망쳐! 죽을거야!”
“…… 싫어!”
“……?! 멍청아! 지금은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니라고!”
“더 이상 도망치고 싶지 않아!”
분떠도리를 눈을 질끈 감으며 허공에 대고 아무렇게나 소리쳤다.
그의 몸에 붙어있던 분진이 들썩였다. 냄새를 맡은 갸라도스가 기분 나쁘다는 듯 입에 물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천벌을――!!”
그녀는 호흡을 허억 들이쉬며 울먹이듯 미간을 찡그렸다.
“저 머저리가!”
“막내야, 안돼! 너라도 도망쳐!”
“분떠도리―!”
성아가 물로 뛰쳐 든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 언니?!”
“늦어서 미안해, 분떠도리.”
갸라도스의 하이드로펌프가 두 사람 바로 옆에 직격했다. 땅은 폭발음을 내며 큰 구덩이를 만들었고, 그 틈으로 호숫가의 물이 콸콸 고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분떠도리를 꼭 껴안았다.
“더 이상 너를 혼자서 도망치게 두지 않을게.”
그리고 분떠도리를 지키기 위해 갸라도스에게 등을 내보였다.
분떠도리의 눈가에 눈물이 핑 고였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 너머로, 정신을 가다듬은 갸라도스가 다시 하이드로펌프를 준비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눈을 질끈 감았다.
“신명이시여――!!”
분노에 일그러진 날숨을 내뱉으며, 갸라도스가 무겁게 응축된 물줄기를 뿜어댔다.
하이드로펌프는 빗나감 없이 그녀들을 향해 쏟아졌고
그런 그녀들 위로, 쐐애액 날아온 바위 하나가 물대포와 맞섰다.
“키샤아아――!!”
“라란티스?!”
바위는 하이드로펌프를 여러 갈래로 찢으며, 거침없이 날아가 갸라도스의 이마에 명중했다.
그의 눈 사이로 피가 주룩 흘렀다. 갸라도스는 어질했는지 뒤로 넘어질 듯 휘청이며 호수 중심으로 물러섰다.
성아가 숲 안쪽을 올려다보았다.
바위가 날아온 경로를 따라, 그 충격파에 둥글게 휘어진 나무와 안개들이 터널처럼 길을 열어주고 있었다.
“누구냐아――!!”
“저승사자다 이 새끼야.”
어둠 속에서, 동공이 얇아진 라란티스가 매서운 위협 소리를 내뱉으며 달려왔다.
그녀는 공기보다 빠른 속도로 나무 위로 사라지더니, 순식간에 호수 한가운데로 뛰어올랐다.
“신님이 그렇게 좋으면 가서 쎄쎄쎄나 하던가. 내가 보내줄 테니까.”
그러고는 곧장 팔을 교차하며 베어 갈랐다. 크로스로 휘두른 팔의 경로를 따라 갸라도스의 복부에서 피가 솟구쳤다.
하늘을 향해 피비린내가 역류하는 가운데, 갸라도스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라란티스에게 이마를 휘둘렀다. 라란티스는 둔탁한 풀뿌리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호수 바닥에 처박혔다.
갸라도스의 눈동자엔 흰자밖에 남지 않았다.
“갈(喝)――!!”
그는 온 힘을 다해 물속으로 돌진했다. 용오름 치듯 솟아오른 물기둥이 나무를 벗어나 하늘에 닿을 만큼 번뜩였다. 쿠르르거리는 물줄기 휘몰아치는 소리가 호숫가를 덜덜 떨게 했고, 지진과 같은 울림에 성아와 포켓몬들은 중심을 못 잡고 엉금엉금 기었다.
성아의 키를 훌쩍 뛰어넘는 파도가 넘실거리며 다가왔다. 물보라가 성아를 덮치려 하자, 뒤늦게 도착한 비올라와 제민이가 포켓몬들을 이용해 파도를 가라앉혔다.
“좀 천천히 가라니까……!”
“상황은요?”
“라, 라란티스가 갸라도스랑……”
성아는 겨우 몸을 일으켜 다른 사람들처럼 호수 한가운데를 살펴보았다.
커다란 물회오리가 깔때기 모양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호수 바닥이 드러날 만큼 거대한 충격이 터지더니, 갸라도스가 호수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모두는 몸을 움츠렸다. 그의 몸을 받아 준 나무 기둥이 우지끈 소리를 내며 부러져나갔다.
제민이와 비올라는 그 크기에 경악했다. 족히 8m가 넘어가는 갸라도스는, 피와 물이 뒤섞인 거구를 나무에 기대듯 끌어올리더니, 지친 숨을 끌어모아 호수에 남아있는 라란티스를 향해 시커먼 아가리를 내 벌렸다.
빈 바닥을 다시 채우기 위해 모여드는 호수의 물줄기를 정면으로 가르며, 라란티스가 갸라도스에게 날아가듯 달려가 그의 입술을 위아래로 붙잡았다.
그녀의 근육이 팽팽해졌다.
“처……언…… 주우……!!”
갸라도스의 입에서 파괴광선이 쏟아져나왔다. 라란티스는 이를 악문 채 그의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파괴광선을 맞은 나무들의 머리가 단번에 잘려나가고, 잔불이 붙은 나뭇가지들은 타닥이며 바닥으로 우수수 쏟아졌다.
성아와 비올라의 머리 위로도 파괴광선이 지나가 모두는 고개를 수그렸다. 라란티스는 갸라도스의 머리를 아래로 향하게 했다. 호수 저편에서부터 일직선을 긋듯 땅에 상처가 났다. 꼬리를 꿈틀거리던 갸라도스가 지느러미에 물을 적셔 따귀 때리듯 라란티스의 옆면을 후려쳤다. 그녀의 목에서 우드득 소리가 났다. 라란티스는 충격에 떠밀리면서도 엄청난 힘으로 갸라도스의 주둥아리를 잡아끌었다.
그가 고개를 뒤흔들자 나무 위로 파괴광선이 솟구쳤다. 라란티스는 땅에 단단히 발을 박고서 그의 양 입술을 아드득 오므렸다. 갸라도스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로 울부짖었고, 라란티스는 라란티스대로 눈동자가 돌아가 쇠 긁는 소리를 내질렀다. 맹렬한 기합이 숲 구석구석을 찔러댔다. 맞붙은 두 살기에 주변에 있던 포켓몬들은 재난이라도 난 것처럼 숲 바깥으로 도망쳤다. 성아는 이성을 잃은 라란티스의 모습을 보며 발뒤꿈치까지 섬짓한 소름이 돋았다.
“하늘…… 이시여……!!”
눈을 부릅뜬 갸라도스가 연신 몸부림쳤다. 그는 하늘을 매섭게 노려보더니 검은 먹구름을 끌어모아 폭풍을 일으켰다. 날 선 칼바람에 성아는 모자를 깊숙이 눌러썼다. 빗방울에 뒤섞인 나뭇가지와 돌가루들이 갸라도스 자신을 뒤덮고, 라란티스는 파괴광선과 폭풍 사이에서 짓눌리듯 휘말려 옅게 신음했다. 그녀는 자신의 근육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고는,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박으며 악을 썼다.
마침내 갸라도스가 라란티스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어거지로 입을 다물었다. 파괴광선을 머금은 그의 볼 안이 빵빵해졌다. 벌어진 입술 틈으로 새하얀 빛무리가 새어 나왔고, 곧 폭발했다.
충격에 휘말린 라란티스가 성아 쪽으로 나뒹굴었다. 뿌연 연기와 잿가루, 안개와 흙먼지가 한데 모여 갸라도스를 뒤덮었다.
“해, 해치웠나?”
“야 임마!”
라란티스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성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갸라도스는 연기를 뚫고 뛰쳐나와 뱀처럼 땅바닥에 몸을 구불거리며 라란티스에게로 달려들었다.
“천…… 마앙……!”
“아아, 너 때문에 살아났잖아.”
라란티스는 으드득거리며 한쪽 팔의 근육을 부여잡고는, 갸라도스와의 충격에 대비했다.
마침내 서로의 눈동자가 마주치고, 갸라도스는 라란티스를 물어뜯기 위해 검게 그을린 고개를 치켜들었다.
“오오, 오오오……!”
그러나 라란티스가 더 빨랐다.
“시끄러.”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갸라도스의 주둥아리를 내리쳤다.
그의 턱주가리를 얻어맞은 땅이 꽈르릉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흙의 파편이 사방으로 날뛰었다. 뒤따르던 그의 몸통은 관성을 주체하지 못하고 하늘 높이 치솟았고, 라란티스는 그런 갸라도스의 머리를 붙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성아가 있으니까 이쯤 해두는 줄 알아.”
그녀는 곧이어 갸라도스를 하늘 위로 높이 내던졌다.
그 시점에서 이미 그는 의식을 잃고 있었다.
“알겠으면 너희 집으로 돌아가.”
라란티스는 그렇게 말하며 오른쪽 몸을 비틀어 힘을 모았다. 한껏 뻗은 그녀의 왼손은 떨어지는 갸라도스를 가리켰고, 오른손은 마치 팽팽해진 새총을 쏘듯 극한으로 잡아당긴 근육을 풀어헤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분떠도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저거예요……. 나한테 썼던 주먹질…….”
그녀는 곧장 허공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고, 그 손끝이 멈춘 곳에서부터 공기는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터져나갔다. 수면은 다시 한번 바닥이 갈라지는 기적을 일으키며 둥글게 파도를 일으켰다. 그 충격파를 얻어맞은 갸라도스는 활 모양으로 몸을 구부리며 최후의 단말마를 토해냈고, 이내 풍랑을 만난 바다처럼 들썩이는 호수면 아래로 깊이 사라졌다.
라란티스는 끝까지 신경을 놓지 않으며 그의 그림자에 대고 싸늘하게 내뱉었다.
“그리고 다신 돌아오지 마.”
온 신경을 저릿하게 만드는 전운만이 적적하게 수면 위를 떠돌 뿐이었다.
모든 것이 끝나고, 성아와 분떠도리는 서로를 껴안은 채 재회의 시간을 가졌다.
비올라와 제민이는 파괴광선의 잔불이 옮겨붙지 않도록 진화 작업을 하면서, 동시에 두 포켓몬의 혈투로 어질러진 숲의 상태를 둘러보았다. 그 사이에서, 터진 근육들을 보살피던 라란티스는 비올라가 건네는 회복약에 괜찮다는 손짓을 보내고는, 달빛을 햇빛 삼아 광합성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막내 망했네.”
네 형제는 멀찍이 떨어진 수풀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버려진 게 아니라 도망친 거였었네.”
“그리고 다시 만났고.”
“이제 떠나면 영영 못 만나겠네. 완전히 망했는걸?”
뿔충이는 사람들 품에 둘러싸인 분떠도리를 멀찍이 내다보았다.
“…… 별로 상관없어요.”
“아닌데? 울라 그러는데?”
“야, 우냐?”
“야 이 새끼 운다!”
독침붕들은 손끝으로 뿔충이의 얼굴을 쿡쿡 찔러가며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를 냈다.
끝날 줄 모르는 형들의 조롱에 뿔충이는 빈정이 확 상했다.
그는 고개를 치켜들며 조용히 회복하고 있는 라란티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자신의 형들을 번갈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내 그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 난 이 망할 집구석을 떠나겠어요.”
그리고 그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동생 놀리는 재미에 빠져있던 세 형제는 그 와중에도 상황 파악을 못 하고 힉힉대다가, 정말로 뿔충이가 떠나려 하자 화들짝 놀라며 그를 불러세웠다.
“야―― 막내야――!”
그러나 뿔충이는 뒤도 안 돌아보고 라란티스한테로 향했다.
“저…… 누님……!”
“엉?”
라란티스는 상체를 뒤로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뿔충이는 그녀의 앞에서 절하듯 고개를 숙였다.
“부디 절 제자로……”
“싫어.”
“예?”
라란티스는 단칼에 거절하고는, 나무 뒤에 숨어선 낄낄대는 그의 형들에게 돌아가 보라고 휘휘 손짓했다.
“이, 이익……! 왜, 왜 싫으신 거예요?! 제가 꼬맹이라서? 아무것도 못 하는 뿔충이라서?”
“……? 그냥 귀찮은 건데.”
“이익……!”
입을 모나게 오므린 상태로 부들거리는 뿔충이의 기척에, 라란티스는 그걸로 대답이 부족했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훽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몇 명 길러 봤는데, 따라오는 녀석이 없더라고. 예외라면 모아머랑 핫삼 정도랄까. 넌 진화하면 독침붕이 되는 거지? 나보단 슈바르고가 가르치는 게 낫겠는걸. 물론 그 녀석 성격에 제자라는 걸 받을지는 모르겠다만.”
그리곤 됐냐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려 맑은 별하늘의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러나 뿔충이는 납득할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시야 한켠으로 자신의 못난 얼굴을 들이밀었다.
“세 번째 예외는 제가 되겠네요.”
그 말에 라란티스가 피식 실소를 내뱉었다.
“아, 미안. 실수 실수.”
그녀가 벌떡 일어나 앉아서 뿔충이의 근육 상태를 체크했다.
“…… 팩트로 말해주자면, 재능이 없는걸. 맷집은 모르겠다만, 근육이 이래서야 심판을 봐도 10을 못넘기겠는데…… 아니, 잘하면 Z……?”
“그런 건 상관없어요.”
뿔충이는 그러고서 독침을 움직여 확확 싸우는 시늉을 해 보였다.
“노력할 테니까요.”
“세상엔 노오력으로 안 되는 게 널리고 널렸단다 애송아.”
“그래도요.”
라란티스는 한숨을 쉬며 그의 앞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 귀찮게. 왜 강해지려고 하는 거야? 이유나 들어보자.”
“지켜 주고 싶은 포켓몬이 있어요.”
뿔충이는 곁눈질로 성아의 품에 안겨있는 분떠도리를 훔쳐보았다.
“그치만…… 갸라도스가 나타났을 때 전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아하, 아까 그 꼬맹이었구만.”
뿔충이는 제 딴에 티를 내지 않겠다고 서둘러 시선을 거두었지만, 대충 눈치를 챈 라란티스가 알겠다는 듯 음흉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성아와 분떠도리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심술을 부리고 싶어졌다.
“꼬맹이, 너 분떠도리 좋아하지.”
“누, 누, 누가――!!”
예상외로 격한 리액션에 라란티스는 새로운 장난감을 찾았다는 듯 쿡쿡 웃어 보였다.
“고백해봐. 그럼 받아 줄게.”
“으으……!”
“싫어? 분떠도리 안 좋아해?”
“당연하죠! 저런 못생긴 걸 누가 좋아한다고!”
“…… 아?”
타이밍 좋게도 라란티스의 뒤에는 성아의 품에 안긴 분떠도리가 와있었다.
두 꼬맹이의 눈이 마주쳤다. 뿔충이의 눈동자는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덜덜거렸고, 분떠도리의 눈동자는 그만 잿빛으로 스르르 사그라들었다.
분떠도리가 고개를 훽 돌리며 성아의 가슴 안에 파고들더니, 한 층 우울해진 목소리로 라란티스에게 말을 건넸다.
“저, 저…… 저쪽에 성아 언니랑 가 있을게요…… 언니…….”
“엉…… 고생해…….”
멀어지는 분떠도리를 바라보며, 뿔충이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그녀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 가만히 입을 틀어막고 있던 라란티스는 그만 빵 터져선 명랑하게 꺄하하, 하고 웃어 재꼈다.
“이야, 이거 볼 만 한걸.”
지켜보던 독침붕 삼 형제도 이제 숨는 건 뒷전이고 웃다가 죽을 것 같이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막내야, 넌 그냥 평생 연애하지 마라.”
“네 연애사업은 어쩜 하나부터 열까지 레전드 뿐이니.”
“크흡…… 제자로 받아 줄게. 이 정도면 그냥 통과야.”
“…… 저 그냥 죽을래요…….”
비참하게 신음을 내뱉는 뿔충이를 바라보며, 라란티스와 독침붕들은 그러고도 한참 동안 숨이 넘어갈 듯 웃으며 꼬맹이를 놀려댔다.
두 사람은 한적한 호숫가에 나란히 앉았다.
무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적적한 호숫가였다. 성아는 갸라도스가 사라진 호수 중심부를 지그시 쳐다보았고, 분떠도리는 좀전의 충격으로 인해 우울한 빛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머, 멋대로 도망쳐서 죄송해요…….”
정적을 유지하던 분떠도리가 살며시 입을 열었다.
“두 분이서 그렇게 챙겨주셨는데,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제가 너무 한심했어요…….”
“응, 괜찮아.”
성아는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어째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서웠어요…… 배틀도 무서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비비용이 되는 건 더 무서웠어요…….”
뺨에서 떨어진 눈물 하나가 잔잔하게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분떠도리는 울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나, 눈물이 한두 방울 삐져나오자 결국 꼭지가 터진 것처럼 눈물을 쏟아냈다.
“나도, 나도 도망치고 싶지 않았어요오……”
그녀는 턱을 벌리고선 성아의 가슴께에 얼굴을 파묻었다. 인분이 섞인 물줄기가 그녀의 몸을 타고 호숫가에 스며들었다. 성아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분떠도리를 내려다보았다.
“나도 미안해……. 나는 그냥 몰아붙이면 네가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성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분떠도리를 진정시키며 자신의 겪었던 트라우마를 이야기해 주었다.
“앞으론 네가 혼자 도망치도록 두지 않을게. 무서워해도 괜찮아. 울어도 괜찮아. 천천히, 차근차근, 네가 원하는 배틀을 하는 거야.”
성아는 실로 범벅이 된 호숫가를 둘러보았다. 어지러운 실뭉치들이 나무에서부터 호수까지 거미집처럼 늘어져 있었으나, 그것은 아늑하다기보단 쓸쓸한 빛깔로 호수의 정경을 담아내고 있었다.
분떠도리의 피땀이 섞인 실뭉치를 찬찬히 더듬으며, 성아의 뺨 위로 샛별이 담긴 눈물 한줄기가 떨어졌다.
“성실하구나, 분떠도리는.”
그녀는 비올라의 「진화」 연작 21번을 떠올렸다.
“고마워.”
그리고는 분떠도리를 품 안에 꼬옥 껴안으며
“나랑 친구가 되어 줘서, 정말 고마워.”
작게나마, 상처받은 그녀의 등을 보듬어주었다.
그제야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울 수 있었다.
분떠도리는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따뜻함에 어쩔 줄 모르고 몸서리쳤고
성아는 겨우겨우 손에 쥐게 된 실뭉치를 놓지 않기 위해 힘을 주었다.
두 가지 언어가 한데 모인 숲속에서
안도와 이해가 뒤섞인 눈물은 천천히 호수 위로 파동을 자아냈고
마침내 울려 퍼지는 잔잔한 물결에
단단히 뭉쳐있던 분떠도리의 실뭉치가 부드럽게 풀렸다.
그것은 작고
여리고
그렇기에 단단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고치였다.
― 벌레 타입 포켓몬 트레이너 하는 소설 4화
원하고, 찾고, 헤매고, 이윽고 노래하고
마침
연재는 매 10일마다(10일, 20일, 30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