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귀찮아하던 고드프리와 하랄드였지만,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그들의 눈빛에는 놀라움이 깃들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하밀부르크가 요약했다.
“그러니깐 네 말은 지금 날뛰고 있는 짐승들의 우두머리가 이방인 하운드고 놈은 인간이나 짐승들을 자신의 부하로 만들 수 있다? 토벌하러 갔던 말튼 성의 병사 중 대다수가 놈의 수하가 되었다고?”
“그렇습니다.”
“충격적이지만, 네 말을 어떻게 믿지? 애초에 그 참사가 벌어진 현장에 무슨 일로 갔던 거냐?”
“그, 그건.”
하밀부르크의 의심에 감독관은 말문을 잃었다.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간 바로 앞에 있는 하랄드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
감독관이 입을 다물고 있자 보고 있던 고드프리가 또 다시 위협했다.
“끌, 제대로 답하지 않는 걸 보니 꾸며낸 거짓인가 보구나, 영주님 잠시 눈을 감아주시죠, 저 놈의 목을 쳐야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네 정보가 거짓이라면 수많은 이들이 죽을 지도 모른다 아니 말튼 성이 함락될지도 모르지, 그러니 증거를 대 봐라.”
“즈, 증거라면.”
고드프리의 재촉에도 감독관은 여전히 답하지 못했다.
시에나 또한 이것만큼은 어떻게 해줄 수 없는 지 입술을 깨물 뿐 달리 행동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감독관의 마음은 더 초조해졌다.
이대로라면 자신은 거짓을 고한 배신자 혹은 스파이로서 죽임을 당할 것이다.
감독관은 속으로 울부짖었다.
‘무서워, 무섭다고!’
하룬가에서 감독관이라는 자리 하나 꿰찬 채 남들을 이용하거나 부려먹기만 하는 쓰레기였다.
실력 없이 오로지 아부와 더러운 술수로 올라온 게 자신이었다.
그런 자신이 어떻게 저들을 설득시킨다는 말인가.
감독관은 속으로 이런 생각까지 했다.
‘그냥 살려달라고 엎드려서 빌까?’
그러기엔 늦었다.
빌어도 저들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건 분명했다.
떨고만 있는 감독관을 보던 하랄드가 더는 못 참겠는지 성질을 냈다.
“왜 이딴 놈에게 시간을 낭비해야하는 거지? 내가 당장 목을 칠거니 비켜라!”
쿵쿵!
하랄드는 정말로 목을 칠 기세로 검을 뽑아든 채 그 큰 덩치를 움직이며 성큼 성큼 다가왔다.
이대로 있다간 정말로 죽는다.
랠리 숲에서 짐승들에게 뜯어 먹히고 죽어가는 자신의 동료들이나 사람들처럼 자신 또한 죽을 것이다.
랠리 숲에선 노예 꼬마가 구해줬지만, 여기선 자신을 도와줄 이는 없다.
공포가 극에 달한 감독관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시뻘건 피가 입술을 타고 내려오지만, 감독관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여기서 저들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죽음뿐이다.
결심이 선 감독관은 자신을 죽이러 다가오는 하랄드에게 외쳤다.
“하랄드 님 절 모르십니까?”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이놈이 드디어 미쳤나? 오냐 바로 목을 쳐주마!”
“모르신다면 제 입으로 말하겠습니다, 전 이방인 하운드의 토벌을 위해 창설된 토벌대에 감독관이라는 직책으로 참가했습니다.”
“흐, 흐음?”
토벌대라는 말에 하랄드는 주춤거렸다.
감독관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감독관은 병사가 한 이야기가 아닌 자신이 직접 겪은 일들을 설명했다.
토벌대가 창설되고 랠리 숲에 도착해 벌어진 참사와 돌아오는 길에 봤던 모든 것들을 전부 말했다.
차분히 듣던 하밀부르크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전멸한 하룬가의 토벌대에서 겨우 살아남은 네가 말튼 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병사의 전언을 들었다라……이제야 맥락이 맞아 떨어지는군.”
확실한 증거는 아닐지언정 감독관이 어떻게 병사의 전언을 들었는지에 대한 이유는 충분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던 하밀부르크는 감독관을 응시한 채 물었다.
“왜 처음부터 네 정체를 밝히지 않았지?”
“자칫 밝혔다가 배신자로 낙인찍힐게 두려웠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하룬가에선 도망친 녀석을 배신자로 간주하고 바로 죽인다고 하니.”
하밀부르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하밀부르크가 힐끔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아직도 칼을 든 채 살기를 뿜어내는 하랄드가 있었다.
하랄드는 당장 감독관을 죽일 듯이 굴었다.
“우리 위대한 하룬가에서 내린 임무를 다 수행하지도 않고 도망친 놈이었다니, 당장 목을 쳐주마!”
정말로 칼을 휘두를 기세였다.
살기로 범벅인 하랄드의 검이 감독관을 내리기치 직전 누군가 앞을 막아섰다.
고드프리였다.
고드프리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잔잔하게 말했다.
“끌끌, 이제 그만하지?”
“비켜라 늙은이, 저 놈의 말을 믿는 거냐?”
“끌끌, 말하는 거 보니 거짓은 아닌 거 같은데 믿어줘야지.”
하랄드의 거센 비난에도 고드프리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고드프리는 감독관을 죽일 거라고 위협할 때와는 달리 호탕하게 웃으며 샤로텐에게 물었다.
“껄껄, 영주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저도 일전에 들은 바가 있습니다, 이방인은 자신이 꺾은 상대를 자신의 부하로 만들 수 있다고요.”
영주와 고드프리는 물론 하밀부르크는 믿는 기색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랄드는 여전히 감독관을 죽일 기세였다.
“좋아 믿는다 치자고! 대신 이놈은 여기서 죽여야겠다!”
고드프리가 가로 막았음에도 하랄드는 행동에 거리낌이 없었다.
어떻게든 감독관을 죽이려는 하랄드의 행동을 보다 못한 샤로텐이 한 마디 했다.
“그만!”
“뭐라고?”
“저자는 우리에게 귀중한 정보를 가져다 준 자입니다.”
“하핫! 어이가 없군 위대하신 말튼 성의 영주께서 이따위 천한 놈을 감싸는 건가 지금? 그것도 우리 하룬가의 사람을?”
하랄드의 빈정거림에도 샤로텐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감독관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샤로텐은 확고히 말했다.
“하룬가의 인물인 게 뭐가 중요합니까, 지금 다가오는 위협에 맞서기 위해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온 자입니다, 하랄드 경이 이 자를 얼마나 미워하든 이 자에게 해를 끼치는 건 용서할 수 없습니다.”
“망할 영주 놈, 쳇 마음대로 해라.”
하랄드는 감독관을 죽이려는 걸 포기했는지 빼든 검을 집어넣었다.
목숨의 위기를 넘긴 것은 물론 이들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감독관은 몹시도 기뻐했다.
감독관이 고개를 돌리자 시에나는 방긋 웃으며 그를 칭찬해주었다.
“잘하셨어요.”
“하, 하핫, 감사합니다.”
기뻐하는 것도 잠시였다.
고드프리는 수염을 쓸어 담으며 한마디 했다.
“끌, 그럼 지금 놈의 군세는 전보다 더 늘어났겠군요, 짐승만이 아니라 일반 병사들까지 합류했다니.”
고드프리의 말에 모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감독관 덕분에 적의 군세가 어느 정도 되는 지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다가오는 위협은 그 크기를 알게 된다고 막아지는 게 아니었다.
무거운 분위기 속 하밀부르크는 감독관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방인 하운드와 그 군대의 마지막 경로가 어디라고 했지?”
“죽은 병사의 말로는 서쪽이라고 합니다, 제가 확인한 흔적 또한 서쪽으로 이어져 있었고요.”
“서쪽이라고? 이상하군, 말튼 성으로 직행하려면 남쪽이어야 할 텐데.”
잠시 생각에 빠진 하밀부르크는 이윽고 샤로텐에게 말했다.
“영주님, 비록 적의 군세가 어마어마하지만, 놈들은 당장 이곳으로 오지는 않을 겁니다.”
“적들의 마지막 경로 때문인가?”
“네, 짐승들의 진군 속도를 생각하면 진즉에 말튼 성에 왔어야 했는데 아직도 오지 않은 걸 보면 다른 곳으로 간 게 분명합니다.”
“재정비 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말이군.”
샤로텐의 말에 하밀부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좋지 않은 건 분명하지만, 최악은 아니었다.
적들이 아직 오지 않는 다는 건 재정비할 시간이 있다는 말이었다.
샤로텐은 약간은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성의 영주들에게 지원 요청을 했네, 적들이 당장 오지는 않으니 하루에서 이틀만 버틸 수 있다면 지원군이 올 거야.”
샤로텐의 말에 하밀부르크와 하랄드 또한 한 마디 씩 했다.
“저 또한 다른 자유 해방단 지부에 지원 요청을 했습니다.”
“쯧, 나도 다른 성에 위치한 하룬가들에게 지원 요청을 했다, 이곳 말튼 성에는 본가와 가주님이 계시니 거절하지는 않을 거다.”
이를 보고 있던 고드프리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끌끌, 상황이 최악은 아니군요.”
말튼 성은 외딴 성이 아니다.
서쪽의 브레이튼 성, 동쪽의 말보른.
양 쪽 성에서 지원군이 온다면 제 아무리 이방인과 거대한 군세라도 싸울 만하다.
고드프리는 수염을 잡아당기며 샤로텐에게 제안했다.
“지원군도 지원군이지만, 지금 떨고 있을 말튼 성의 병사들을 훈련시킬 시간은 있겠군요, 달리 할 사람이 없다면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건 제가 하겠습니다.”
“그래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고드프리 경.”
“끌끌, 감사하다면 그 이방인 하운드를 발견하면 저에게 바로 알려주셔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샤로텐에게 확답을 받은 고드프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부인인 고드프리는 전투가 벌어지기 전까진 할 일이 없다.
트라야비아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트라야비아가와 그 세력은 이곳과는 멀다.
당장 고드프리가 할 수 있는 건 이게 최선이었다.
고드프리가 나가자 샤로텐은 위엄 넘치는 목소리로 감독관을 불렀다.
“큰 도움이 되었네, 아까 전 조금 험하게 말한 건 미안하게 생각하네.”
“당치않은 말씀이십니다, 영주님.”
“여기까지 오는 데 고생한 건 알지만, 한 가지 부탁을 하고 싶네만.”
“마, 말씀만 하십쇼.”
감독관은 깜짝 놀랐다.
자기보다 월등히 높은 직위에 있는 영주가 자신에게 부탁을 하다니.
명령하면 죽어도 따라야하는 하룬가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감독관의 말에 샤로텐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내 직속 친위대 몇 명을 붙여 줄 테니 말튼 성 근처를 정찰해주게, 다른 곳으로 갔다한들 짐승들이 언제 올지 모르니깐.”
샤로텐은 그 말을 하며 눈빛으로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샤로텐의 눈빛이 향한 곳은 아직도 감독관을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는 하랄드였다.
하랄드가 한발 물러섰다 해도 언제 감독관을 죽이려 들지 모른다.
그걸 알고 제안하는 샤로텐의 배려이자 호의였다.
샤로텐의 말뜻을 깨달은 감독관은 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 물론입니다.”
감독관이 명령을 받고 나가자 샤로텐은 슬그머니 시에나를 응시한 채 말했다.
“묻고 싶은게 많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구나, 밖의 상황을 보았겠지? 물자 조달은 물론이고 다친 부상자들의 치료를 위한 인력이 부족하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시에나는 곧바로 영주의 뜻을 알아차렸다.
시에나 또한 조용히 물러났다.
시에나가 방을 나가기 전 잠깐 하밀부르크와 눈을 마주쳤다.
“…….”
“…….”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지만, 여기서 굳이 아는 척을 하지는 않았다.
시에나마저 나가고서 집무실에는 이제 세 명만이 남았다.
샤로텐은 하밀부르크를 응시한 채 물었다.
“회의가 잠시 끊겼지만, 다시 하도록 하지.”
아직 회의는 끝나지 않았다.
남은 세 사람은 현 말튼 성의 병력을 책임지는 수장들이었다.
어떻게 병력을 배치할지에 대한 회의는 오랜 시간 동안 집무실에서 계속되었다.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