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하나 들리지 않아도 아르실은 개의치 않았다.
아르실은 한쪽 눈을 살며시 떴다.
여전히 죽은 듯이 잠든 가온의 얼굴 아래로 보이는 노예의 각인.
아르실은 각인에 손을 가까이 하며 물었다.
“각인을 만지면 엄청난 고통을 느낀다는데, 이걸로 널 깨울 수 있을까?”
“…….”
“헤헤 장난이야 장난, 정말 이걸로 깬다면 가온 네가 먼저 했겠지, 넌 정말 특별하니깐, 최강의 이방인 중 한 명에게 인정을 받고 또 한 명의 최강의 이방인에게 한반을 먹였고 그리고 내 마음을 사로잡았으니깐.”
“…….”
아르실은 가온의 각인을 만지려던 걸 그만두었다.
가온에게서 떨어지고서 아르실은 그 어느 때보다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말했다.
“임무를 마치지는 못했지만,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 가온, 힘들었던 만큼, 고생한 만큼 지금만큼은 나랑 함께 있자.”
아르실은 가온이 누운 침대에 얼굴을 맞댄 채 잠들었다.
두 소년 소녀가 잠든 방안에는 약초향과 함께 침묵이 감돌았다.
말튼 성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말튼 성 부지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는 하룬가의 본가 구역.
일반 백성들이나 귀족들이 머무는 민간구역.
그리고 영주인 샤로텐 영주가 머무는 내성이었다.
영주가 머무는 내성은 다른 지방의 영주의 내성과는 다르게 적의 공격에 방어할 수 있도록 잘 구축된 요새였다.
삼 중면으로 배치된 높다란 성벽과 전략적으로 배치된 첨탑들.
그리고 중앙에 배치된 영주가 머무는 저택까지.
하룬가의 본가 저택처럼 화려하지는 않아도 보는 이들에게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짐승 군대가 몰려온다는 소문에 다른 사람들은 난리가 났지만, 내성은 건재했다.
내성 안으로 들어가는 정문 입구.
혼란에 빠진 백성들이 오든 겁먹은 귀족들이 살려달라고 오든 입구의 병사들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내가 누군지 알아? 명문 가문 트할렌 가문의 장남 레오리우스다! 당장 짐승들이 오고 있다는 데 영주께서는 뭐 하는 건지 알아야겠다!”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는 영주님의 명이 떨어졌습니다.”
“이 놈이! 감히 내가 누군지 말했을……헉!”
난리를 치던 귀족은 자신의 목 앞에 칼이 다가와서야 입을 다물었다.
옆에 있는 다른 병사 또한 무기를 꺼내기 직전이었다.
무기를 겨눈 병사는 차갑게 말했다.
“못 들어가십니다, 영주님이 허가하신 분만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내가 말튼 성에 낸 세금만 얼마나 되는 데, 제길.”
귀족은 투덜거리지만, 더 화내지는 못하고 돌아갔다.
나름 이름 있는 귀족조차 접근조차 불가능하니 다른 이들은 다가갈 생각도 못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함부로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목이 날아갈 수 있는 내성.
그 내성 입구를 통과한 감독관은 어안이 벙벙했다.
“저, 정말로 들어왔군.”
앞서 가는 시에나를 따라가며 감독관은 방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어떻게든 내성으로 들어가고자 감독관은 죽은 병사의 신분증까지 꺼냈지만, 입구를 지키는 병사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뒤따라온 시에나의 말에 병사는 바로 들여보내주었다.
이런 말까지 하면서 말이다.
“영주님께서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대체 어디를 가셨던 겁니까?”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죠, 어서 들여보내주세요.”
“알겠습니다.”
병사는 고개를 숙인 채 예까지 표하며 자신과 시에나를 들여보내주었다.
방금 전 있었던 일을 회상을 하던 감독관은 앞서 가는 시에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대체 뭐하는 여자야?”
젊은 나이의 아름다운 미모와 기품을 가졌고 웬만한 귀족보다 영향력이 강하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영주와 가까운 관계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샤로텐 영주에겐 처자식이 없다.
그럼 대체 뭐하는 여자인가.
생각할수록 의문인 일이었다.
그녀의 정체를 감독관은 알아내지 못한 채 그녀를 따라갔다.
따라가다 보니 감독관은 내성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말튼 성에 산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말튼 성 내성에 들어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요새처럼 보이는 겉모습처럼 안 또한 군사적인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내성의 벽면을 따라 진열된 무기들과 각각 배치된 훈련장.
마냥 군사적인 시설만 있는 것도 아닌 내성 중앙에는 작은 정원과 호수가 있었다.
평소의 말튼 성이라면 새가 지저귀는 정원과 호수 근처에서 시녀들이 느긋하게 돌아다니고 훈련하다 지친 병사들은 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멍하니 걷고 있던 감독관이 한 시녀와 부딪혔다.
“아앗!”
“앗, 죄송합니다.”
감독관이 사과를 하려 하지만, 시녀는 신경도 안 쓰고 달려갔다.
달려가는 시녀는 뒤따라오는 다른 시녀들에게 거칠게 외쳤다.
“빨리 움직여! 빨래 감을 들고 있을 때가 아니야! 빨리 물자를 옮기라고!”
“시녀장님! 5구역에 배치된 다친 병사들의 상태가 심각해요! 인력을 더 투입해야 해요!”
“더 투입할 인력 없어! 하지만 부상자들을 못 본채 할 수 없지, 내가 직접 갈 거라고 말해줘!”
“알겠습니다!”
바쁘게 돌아다니는 시녀들은 물자들을 옮기는 중이었다.
단순 물자도 아닌 군용물자였다.
처음 내성에 들어왔을 때는 들리지 않던 다친 부상자들의 신음성이 감독관의 귀에 들려왔다.
“끄, 끄아아아악!”
“참으세요! 고름을 빼내야 살 수 있다고요!”
“사, 살려줘! 그 짐승이 우릴 전부 죽이려 들 거야!”
“또 발작을 일으키네, 진정 좀 시켜!”
내성 곳곳에 임시로 설치된 막사 안에서는 전멸한 토벌대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부상자들을 시녀들이 치료 중이었다.
부상자들의 울부짖음과 시녀들의 다급한 외침에 감독관은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
정신없는 건 시녀들과 하인들만이 아니었다.
내성에 주둔 중인 병사들의 안색에는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병사들이 들고 있는 무기 중 떨지 않는 무기가 없었다.
무기가 떠는 게 아닌 들고 있는 병사들의 손이 떨고 있는 것이다.
병사들은 하나 같이 구석에 박힌 채 서로 앞으로의 일을 걱정했다.
“어, 어쩌지 진짜로 짐승들이 온다고?”
“토벌대가 완전히 전멸했다는 데 이길 수 있는 거야?”
“제, 젠장, 무서운데.”
“영주님만 믿자, 영주님이라면 어떻게든 해줄 거야.”
병사들은 두려워하면서도 억지로 서로를 두둔하고 있었다.
감독관의 눈에 내성의 풍경은 더 이상 평화로워 보이지 않았다.
병사들의 비명소리, 분주한 시녀들, 떨고 있는 병사들.
이들의 모습을 보니 감독관은 내심 실감이 났다.
곧 이곳에 전쟁이 난다는 것이.
짐승 군대가 말튼 성을 점령한다면 랠리 숲에 있었던 참사보다 참혹한 일이 날 것이다.
꿀꺽.
감독관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잠시 상념에 빠져있던 감독관은 앞서가던 시에나에게 한 소리 들었다.
“뭐하세요? 급한 일이라고 하셨잖아요, 어서 가요.”
“아, 갑니다.”
앞서 가는 시에나의 외침에 감독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달려 두 사람은 영주의 저택 안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집무실 앞에 서 있는 시녀는 시에나를 알아보곤 깜짝 놀라며 외쳤다.
“시에나? 너 대체 지금까지 어디를…….”
“쉬잇, 영주님은 어디 계셔?”
시에나는 시녀의 말을 일방적으로 끊은 채 물었다.
시녀는 머뭇거리더니 떨리는 손끝으로 집무실을 가리켰다.
장인의 손길로 조각된 집무실 문 너머로 여러 사람들의 대화가 들리고 있었다.
“젠장, 이 몸께서 이런 하찮은 집무실에 있어야 한다니, 우리 위대한 하룬가 저택에서 회의를 할 것이지 쯧.”
“말씀 삼가시오 하랄드경.”
“끌끌, 저 돼지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군.”
“서로 싸우실 때가…….”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감독관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문 앞에 있던 시녀 또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안에 계셔, 하지만 들어가면 안 돼, 안에 다른 분들하고 회의하고 계신다고.”
“격식이나 절차를 가릴 때가 아니야.”
“어, 어어어엇!”
시에나는 시녀가 말리기도 전에 집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
시에나가 성큼 성큼 들어가니 감독관 또한 어쩔 수 없이 함께 따라갔다.
영주가 머무는 집무실에는 마치 도서관에 온 마냥 여러 서재들과 고풍스러운 가구들로 가득했다.
오래된 책 냄새가 감독관의 코끝을 자극했다.
평화롭고 조용해야할 집무실이지만, 밖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집무실은 정신없었다.
“언제 놈들이 올지 모르니 당장 군사를 무장시켜야합니다.”
“그러고는 있지만, 시간이 부족하네, 한번이라도 제대로 훈련시킨다면 좋겠건만,”
“말튼 성에 오면서 잠깐 둘러보니 성벽 보수나 다른 시설은 잘 정비되어있군요, 그나마 다행입니다, 영주님.”
“쯧, 우리 하룬가였다면 바로 정비하고 싸울 준비를 마쳤을 거다.”
집무실에 자리를 잡고 논의를 하는 네 명의 사람들.
네 사람이 누군지 알아본 감독관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어, 어어엇?”
자유 해방단 단장 하밀부르크와 하룬가 가주의 적자 하랄드.
심지어 트라야비아가의 부단장 고드프리까지 있다.
네 명은 감독관과 시에나가 들어오기 전까지 격한 논의를 나누고 있었다.
회의를 이끌어 나가는 건 영주 샤로텐이었다.
“현재 말튼 성에 남은 병사는 천 이백 명이오, 토벌대 중 일부가 돌아왔다고는 하나, 다들 다치거나 반쯤 정신을 잃었소, 게다가 남은 병사들은 대부분이 예비군이지, 일단 당장 짐승들이 오고 있는 중이니, 최대한 빨리 병사들을 재편해 수비하는 쪽으로…….”
“사실상 무용지물인 쓰레기들로 뭘 한다는 거지?”
“무용지물? 애초에 이 사단이 벌어진 이유에는 그쪽 하룬가의 탓도 있소, 말 좀 조심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만.”
샤로텐의 경고에도 하랄드는 아무렇지도 않아했다.
도리어 하랄드는 살찐 턱을 만지작거리며 샤로텐을 비웃었다.
“한낱 짐승에게 몰살당하는 게 말튼 성의 정규군이면 예비군은 볼 것도 없지, 우리 하룬가에게 맡겨라, 우리의 정예 병력이면 바로 쓸어버릴 거다.”
하랄드의 빈정거림에 샤로텐의 입가에 주름이 졌다.
이걸 가만히 보고 있을 고드프리가 아니었다.
고드프리는 곧장 하랄드에게 일침을 가했다.
“끌끌, 하룬가의 정예병사가 단 한 사람에게 썰리는 걸 내 눈으로 봤는데 그게 정예라고? 하껄껄, 말튼성의 예비군과 별반 차이 없을 거 같군.”
“닥쳐라 늙은이.”
“끌끌, 말문 막히니깐 바로 욕설이더냐? 한심한 놈.”
“이 늙은이가!”
고드프리가 계속 빈정거리자 보다 못한 하밀부르크가 말렸다.
“당장 군사를 성벽에 배치시키고 싸울 준비를 해야 하는 데 알력 다툼이라니요! 그만하십쇼.”
“……칫.”
“끌끌, 알겠네 알겠어, 그나저나 새 손님이 온 거 같다만.”
하밀부르크의 만류에 두 사람은 겨우 진정했다.
고드프리는 고개를 살며시 돌리며 감독관과 시에나를 보며 말했다.
동시에 다른 세 사람의 시선 또한 그들에게로 향했다.
살벌한 네 사람의 시선에 감독관의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논의 도중 감독관을 본 샤로텐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자는 뭔가? 내가 분명 누구도 안에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을 텐데.”
“허, 허어억?”
샤로텐의 엄호령에 감독관은 더욱 당황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는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진지 오래였다.
입안이 바짝 말라 가뭄이 든 것만 같았다.
어찌할 줄 모르는 감독관은 대신해 시에나가 대신 말했다.
“영주님, 실례인걸 알지만, 급한 일이 있어 어쩔 수 없이 오게 되었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시길.”
“시에나? 네가 여길 어찌? 아니 그동안 대체 어디 있었던 거냐?”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이 사람의 말을 들어주세요.”
“으음?”
시에나의 간곡한 요청에 샤로텐은 고개를 갸웃하며 감독관을 쳐다보았다.
잔뜩 긴장한 감독관은 말은커녕 입술 하나 꼼짝하지 못했다.
머뭇거리는 감독관을 보던 하랄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자기 가문 소속의 사람이지만, 짐꾼을 관리하는 직책의 감독관을 하랄드가 알아 볼 리가 없다.
하랄드는 살벌한 기색으로 말했다.
“저 멍청한 놈은 뭐야? 그냥 목을 쳐버려.”
고드프리 또한 불청객이 마음에 안 드는지 수염을 당기며 한 마디 했다.
“왔으면 말을 해라, 네 놈 때문에 회의가 지체되었다, 만약 쓸데없는 말은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내가 목을 쳐 버릴 거니 말이야.”
하랄드와 고드프리의 살벌한 말에 감독관은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풍겨오는 살기와 위압감에 감독관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던 시에나가 감독관에 등을 치며 외쳤다.
“정신 차리세요! 바보 같이 서 있으려고 여기 온 건가요?”
“……!”
시에나의 외침에 감독관은 정신을 차렸다.
감독관은 입술을 깨문 채 생각했다.
랠리 숲에서 겪었던 일들에 비하면 애교에 불과했다.
감독관은 죽은 병사의 신분증을 꺼내며 샤로텐에게 말했다.
“죽은 말튼 성의 병사로부터 들은 전언을 고하겠습니다.”
감독관은 그 이후로 죽었던 병사가 한 모든 이야기를 샤로텐에게 고했다.
처음에는 귀찮아하던 고드프리와 하랄드였지만,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그들의 눈빛에는 놀라움이 깃들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하밀부르크가 요약했다.
“그러니깐 네 말은 지금 날뛰고 있는 짐승들의 우두머리가 이방인 하운드고 놈은 인간이나 짐승들을 자신의 부하로 만들 수 있다? 토벌하러 갔던 말튼 성의 병사 중 대다수가 놈의 수하가 되었다고?”
“그렇습니다.”
“충격적이지만, 네 말을 어떻게 믿지? 애초에 그 참사가 벌어진 현장에 무슨 일로 갔던 거냐?”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