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분수가 쏟아지며 병사는 말을 잇지 못했다.
피를 흘리며 눈을 감은 병사의 몸은 차가웠다.
감독관은 욕설을 내뱉으며 짜증을 냈다.
“젠장 하려던 말은 다 하고 가라고.”
“…….”
“빌어먹을 배고파서 뒤져본 건데 이상한 임무를 받아버렸어.”
감독관은 짜증을 내면서도 손에 쥔 신분증을 버리지는 않았다.
감독관은 죽은 병사의 주머니에서 말린 고기를 꺼내 씹기 시작했다.
“…….”
얌전히 누워있는 가온을 힐끔 보던 감독관은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어차피 갈 곳도 없는데 까짓거 가보지 뭐.”
하루가 지나갔다.
높은 언덕 위에서 감독관은 저 너머로 보이는 말튼 성을 볼 수 있었다.
감독관은 거의 죽어가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허, 허억, 허억, 병사의 말대로야.”
짐승들이 보이지 않는다.
병사의 말대로 말튼 성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 간 게 분명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말튼 성이 무사한 것만으로도 감독관은 안심했다.
“일단 들어가자, 으윽, 허리 아파 죽겠네.”
허리에 업힌 가온을 보며 짜증을 내던 감독관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혼자 가기도 힘든 거리를 노예 한 명을 업고서 왔다.
중간에 지쳐 쓰러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주저앉은 채 숨을 고르던 감독관은 마지막으로 힘을 짜내었다.
“으으으윽! 다 왔어! 다 왔다고! 그러니 좀 일어나라 망할 꼬맹아!”
“…….”
“제길, 내 말이 들리기는 하는 건지.”
이곳에 도착하는 동안 가온은 단 한 번도 눈을 뜨거나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숨만 간간히 쉴 뿐 죽은 거나 식물인간과도 같았다.
일어나기는커녕 이대로 숨만 쉬다 죽을지도 모른다.
불안한 생각에 감독관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젠장, 반드시 일어나야한다, 너 때문에 내가 이딴 고생을 했으니 말이야.”
다시 일어선 감독관은 말튼성의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멀리서 볼 땐 거대한 성 말고는 보이는 게 없었다.
그러나 멀리서 볼때와는 달리 입구는 난장판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 밖으로 나가려고 하거나 들어오려고 하는 등 난리였다.
“젠장! 곧 성이 함락될 텐데 뭐 하러 가만히 있어? 빨리 도망가자고!”
“아직도 그런 헛소문을 믿는 거냐? 헛소리 말고 비키라고! 난 성 안으로 들어가서 내 가족을 봐야한다고!”
“젠장 앞뒤로 꽉 막혀서 오고가도 못해!”
“경비는 뭐하는 거야? 빨리 어떻게 좀 해봐!”
성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과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들 간의 다툼.
기껏해야 몇 명밖에 오가지 못하는 입구에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몰려 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사람들을 제어해야하는 경비들이지만, 너무 많은 수에 경비들조차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감독관은 앞을 막아선 수많은 숫자에 발을 동동 굴렀다.
“제일 급한 건 난데.”
강제로 떠맡게 되었지만, 감독관은 영주에게 알려야 할 정보가 있다.
또한 반쯤 죽은 가온의 상태를 살펴야했다.
할 일이 태산인데 입구부터 발이 묶여버렸다.
그렇다고 이 많은 인파를 강제로 뚫기에는 감독관은 서 있는 것만으로도 한계인 상태였다.
감독관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부여잡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길은 없나?”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말튼 성의 입구는 이곳 정문 밖에 없었다.
후문이나 개구멍이 없으니 들어가려면 이곳뿐이다.
다른 길을 찾지 못한 감독관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내질렀다.
“왜 나한테만 이런 불운이 일어나는 거야!”
온갖 고생도 하고 죽음의 위기도 있었던 요 며칠이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그 아수라장을 헤쳐 나왔건만, 여기서 멈추고 말았다.
감독관은 한탄하듯 아무리 외쳐보지만, 다른 사람들은 신경쓰지도 않은 채 정문을 지나가려고 애를 썼다.
그때였다.
작지만 선명한 어느 소녀의 목소리가 정문 너머 성 안에서 들려왔다.
“아 뭐야, 사람들이 뭐가 이렇게 많아? 다 꺼져.”
심통 난 소녀의 말에 비켜줄 사람들이 아니었다.
귀라도 기울여주면 다행일 것이다.
아무도 비키거나 신경쓰지 않자 화가 난 소녀는 날카롭게 외쳤다.
“전부 비키라고 했지!”
기적이 일어났다.
소녀의 앙칼진 한 마디에 정문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멈췄다.
들어가려고 하거나 나가려는 사람들도 이들을 말리려는 경비들조차 멈췄다.
그리고 바다가 갈라지듯이 그 많던 인파가 양 옆으로 비켜주며 길을 내주었다.
길이 열리고서 멀리 보이는 건 주근깨 있는 금발머리 소녀와 귀족처럼 보이는 우아한 여성이었다.
금발 머리 소녀는 시원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주 좋아! 뻥 뚫리니깐 시원하고 좋네!”
“아, 아르실? 지금 뭐한 거니? 사람들이 멈춘 거 같은데 네가 설마?”
“걱정 마, 금방 풀어줄 거야, 가온이 올 때까지.”
“올, 올 때까지?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두 여성의 대화는 감독관에게도 똑똑히 들려왔다.
감독관은 다른 이들처럼 몸이 멈췄지만, 눈과 귀는 움직일 수 있었다.
감독관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혼란스러워하는 감독관과 소녀 아르실과의 두 눈이 마주쳤다.
아르실의 작은 동공이 커다랗게 확장되며 소녀는 외쳤다.
“어라? 가온?”
놀란 아르실은 바삐 감독관에게 달려왔다.
아르실은 등에 업힌 가온을 보곤 격하게 기뻐했다.
“하, 하하하하핫! 역시 올 줄 알았어! 역시 가온이야, 그 난장판에서 살아올 줄 알았다고!”
“…….”
“가온? 왜 아무 말도 없어? 네가 평소에도 과묵한 걸 컨셉으로 잡은 건 알고 있지만, 이건 좀 심하잖아?”
“…….”
아르실이 아무리 말을 걸어도 가온의 입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상함을 느낀 아르실이 가온을 업은 감독관에게 물었다.
“이봐 너, 가온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가온에게 말할 때와는 달리 살벌한 목소리였다.
감독관은 자신이 여기까지 온 경위를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열리지가 않았다.
감독관의 표정을 빤히 보던 아르실의 눈은 모든 것을 꿰뚫을 것 같이 날카로웠다.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르고서 아르실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토벌대의 짐꾼 감독관이라고? 가온을 그렇게 부려먹었다니, 네가 가온을 두고 여기에 혼자 왔다면 바로 목을 꺾었을 거야.”
“…….”
아르실의 살벌한 말에 감독관의 등골이 오싹했다.
자신의 정체는 물론 말하지도 않은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들을 저 소녀는 다 알고 있다.
보통 꼬마가 아니다.
사람들을 멈춘 것도 저 꼬마의 짓이 분명했다.
아르실은 피식 웃으며 손짓했다.
“따라와, 여긴 보는 눈이 많으니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고.”
아르실의 말에 굳었던 감독관의 몸이 다시 움직여지기 시작했다.
감독관의 머릿속은 여전히 혼란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저 소녀의 말을 거스르다간 목숨을 보전치 못하리라는 것을.
감독관은 하는 수 없이 가온을 업은 채 아르실을 따라갔다.
감독관이 성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멈췄던 사람들은 다시 움직였다.
“언제까지 길을 안 비킬 거야! 빨리 도망가야한다고!”
“헛소문이라고 몇 번을 말하냐, 그깟 짐승들에게 군대가 전멸당했다는 게 말이 되냐?”
“악! 누가 날 때렸어!”
“이런 빌어먹을 놈들, 다 비키라고!”
방금 전 자신들이 멈췄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아까와 같은 난리를 반복했다.
난리가 났던 입구와는 다르게 성내는 조용했다.
가끔 보이는 사람들의 표정은 둘 중 하나였다.
다 포기하거나 아무 생각이 없거나, 짐승들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에 겁을 먹고 포기했거나 믿지 않고 일상을 보내는 이들일 것이다.
시에나는 멍하니 남은 주민들을 걱정했다.
“다들 충격이 클 텐데.”
“신경쓰지 마, 시간 낭비야.”
“그래도.”
“오지랖도 적당히 해야지, 지금 중요한 건 가온이야.”
아르실의 일침에 시에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걸어서 도착한 곳은 아르실과 가온이 머무는 여관이었다.
여관에 도착하고서 감독관은 가온을 침대에 눕혔다.
아르실은 허리에 손을 얹으며 미리 엄포를 내렸다.
“가온의 상태를 확인할거니 얌전히들 있어!”
아르실은 그 말을 하곤 가온에게 다가갔다.
짐이 사라진 감독관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동안 몰린 피로가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후우.”
“어머, 괜찮으세요? 먼 길을 걸어오신 거 같은데 이거라도 드세요.”
“아, 감사합니다.”
감독관은 시에나가 타준 차를 받아주며 말했다.
처음 보지만, 아름답고 따뜻한 여성이다.
자연스레 관심이 생긴 감독관은 시에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뭐하시는 분입니까? 평범한 여인은 아니신 거 같은데.”
“호호, 저에 대해 궁금하신가요?”
“곤란한 거라면 묻지는 않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보다 가온을 업고 여기까지 오신 건가요? 대단하시네요.”
시에나가 눈웃음을 지으며 칭찬했다.
감독관은 머쓱한지 헛기침을 했다.
“큼큼, 정말 힘들었죠, 포악한 짐승무리를 뚫고 수많은 시체들을 조우하며 온 길입니다.”
“세상에나, 좀 더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하하 물론입니다.”
오랜만에 듣는 칭찬에 감독관은 입가에 미소를 늘어뜨린 채 이야기를 풀려 했다.
하지만 아르실이 두 사람의 대화를 끊었다.
“조용! 방해하지 말라고!”
“…….”
“…….”
“그래 이제 좀 조용하네.”
아르실은 쓰러진 가온의 상태를 살폈다.
한참 살펴보더니 아르실은 감독관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가온이 뭔가에 얻어맞고 날아와 박힌 걸 네가 발견하고 데리고 온 거지?”
“그, 그렇지? 무슨 큰 문제라도 있나?”
감독관은 가온의 상태를 걱정했다.
수백 미터는 되는 거리를 날아와 눈 속에 쳐 박혔던 가온이다.
겉보기엔 멀쩡해도 내상이 없을 리가 없다.
감독관의 물음에 아르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있지 진짜 큰 문제가.”
“큰 문제라고? 내장을 다친 거야? 아니면 뼈라도…….”
감독관의 말에 아르실을 고개를 내저으며 완강히 부정했다.
“그 정도 문제가 아니라고.”
“얼마나 큰 문제이길래.”
시에나는 두 눈에 눈물을 보이며 걱정했다.
단순 외상 내상이 아니면 생명에 위험이 갈 문제인 게 분명했다.
모두의 걱정 어린 물음에 아르실은 짤막하게 설명했다.
“목도리가 없어.”
“뭐?”
“응?”
생각지도 못한 아르실의 말에 두 사람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아르실은 가온의 몸을 살펴보며 없어진 목도리를 찾으려 애를 썼다.
“목도리는 어디다가 둔 거야?”
“목도리?”
감독관은 토벌대 출발 당시 가온이 두르고 있던 엉성한 보라색 목도리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난리가 난 와중에 찢어지거나 사라진 게 분명했다.
설마 큰 문제라는 게 자기가 해준 목도리가 사라져서라는 건가.
아르실은 볼을 부풀이며 속상해했다.
“내가 가온에게 짜 준 목도리! 그거 만들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설마 큰 문제라는 게 그거야?”
“당연하지! 이게 아니면 뭐가 중요해?”
“아, 아니 저 꼬마의 건강상태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