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이 벌어진 하룬가의 본가와 말튼 성.
이 말튼 성을 향해 힘겹게 걸어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의 등에는 작은 체구의 소년이 업혀 있었다.
죽은 듯이 곤히 잠든 소년의 목에는 노예의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각인이 새겨져 있는 노예, 가온이었다.
가온을 업고 걷는 중인 감독관.
감독관은 걷는 내내 온갖 욕을 해댔다.
“젠장 젠장,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그냥 두고 갈걸.”
혼자 가기도 힘든 거리를 사람을 업고 가고 있다.
체력은 진즉에 한계였다.
팔과 다리는 고통을 호소해하며 부르짖고 있었다.
걸으면서 등에 업힌 꼬마를 두고 갈까 수십 수백 번은 고민했다.
“제길, 곧 죽을 거 같은데 지금이라도 두고 가?”
두고 가지 않으면 중간에 탈진해서 자신이 먼저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많은 고민에도 가온을 두고 가지는 않았다.
감독관은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이 꼬마 덕분에 목숨을 건졌는데 은혜는 갚아야지.”
랠리 숲에서 나타난 늑대로부터 자신을 구한 게 바로 가온이었다.
지금은 비록 살아있는지조차 불분명한 상태지만, 이대로 두고 간다면 감독관은 짐승만도 못한 놈이 되는 거였다.
걷고 또 걸어 랠리 숲을 벗어났다.
랠리 숲을 벗어나자 감독관은 어디로 갈지 고민했다.
“젠장 말튼 성으로 돌아갔다가 하룬가 놈들에게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르는데.”
고민하던 감독관은 일단 말튼 성 외각의 마을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찾아간 마을들은 모조리 불타 있었다.
잿더미가 된 마을 잔해들을 보며 감독관은 경악했다.
“이, 이런 미친 누가 불이라도 지른 거야?”
단순 방화라고 하기는 마을 전체가 한순간에 타버렸다.
감독관은 곧 이게 누구의 짓인지 알 수 있었다.
하룬가에서 일할 때 딱 한 번 본 이방인, 카시아의 힘이었다.
감독관은 문득 토벌대가 출발할 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래 분명 우리 선발대가 출발하고서 후발대가 따라온다 했지.”
분명 카시아의 짓이다.
그런데 감독관은 랠리 숲을 빠져나오면서 카시아나 다른 병사들을 보지 못했다.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쉴 곳을 찾는 거였다.
감독관은 생각을 그만두고서 주위에 있는 다른 외곽 마을을 향해 걸어갔다.
다른 외곽 마을 또한 마찬가지였다.
전부 불에 타버린 채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마지막 외곽 마을 또한 타버린 건 마찬가지였지만, 처음으로 사람을 발견했다.
기쁜 나머지 달려가 말을 걸어보려 했다.
“어, 사, 사람이다! 이봐요!”
“흐, 흐으윽.”
“이, 이봐요?”
“그레이엄, 밀리타, 바르샤, 내 친구, 내 아내, 내 자식, 왜 없는 거야, 왜 아무도 없는 거냐고, 약을 사왔는데 어째서…….”
발견한 사람은 완전히 실성한 채 잿더미가 된 마을 잔해에 머리를 박은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감독관은 대충 상황을 눈치채곤 뒤로 물러났다.
끼어들어서 좋을 게 없었다.
감독관이 사라질 때까지 실성한 사람은 하염없이 울부짖었다.
“대체 왜 우리한테 이러는 건데! 으아아아아악!”
외곽 마을에서 쉬지 못하고 시간만 낭비하고 감독관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움직였다.
그래도 곧 있으면 말튼성의 북쪽 관문에 다다른다.
“그래, 대충 사정이라도 말하고 쉬어가야지.”
말튼 성의 병사들은 잔혹하고 음흉한 하룬가의 병사들과는 달랐다.
엄격해도 은근 정이 많은 이들이었다.
등에 업힌 가온을 보여주면서 동정심을 호소하면 잠시 쉬게 해줄 것이다.
부푼 기대도 잠시 도착한 북쪽 관문의 풍경은 풍비박산 그 자체였다.
건물 하나 멀쩡한 게 없고 모든 게 부서져 있었다.
감독관은 돌아다녀보았지만, 보이는 건 부서진 성벽의 잔해와 시체분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발견한 건 랠리 숲에서 봤던 짐승들의 털이었다.
감독관은 그제야 깨달았다.
“젠장, 그 미친 짐승들이 관문도 공격했다고?”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 챈 감독관의 입가가 딱딱하게 굳었다.
먹을 것도 쉴곳도 없다, 가만히 있으면 탈진해서 죽을 게 분명했다.
감독관은 이를 악물고 다시 걸었다.
한참을 걸어가 발견한 건 엄청난 시체무리였다.
얼핏 봐도 천은 넘어가는 시체더미에서 감독관은 부서진 갑옷에 새겨진 문양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말튼 성의 정규군이었다.
감독관은 손을 떨며 들고 있던 갑옷을 내려놓았다.
안색이 시퍼렇게 변한 감독관은 떨면서 중얼거렸다.
“맙소사, 정규군이 박살이 났다고? 짐승들한테?”
본능만으로 움직이는 짐승들이 잘 훈련된 병사들을 이긴다?
몸을 숨기기 쉬운 숲속도 아닌 탁 트인 평야였다.
상식적으로 짐승들이 이기는 건 불가능한 일었다.
감독관은 털썩 주저앉고선 등에 업은 가온을 내려놓았다.
모든 것을 포기한 표정을 지은 채 감독관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럼 어쩌자는 거야.”
짐승들은 말튼 성을 향해 진군하고 있고 그걸 막으려는 군대는 박살이 났다.
먼저 간 짐승들이 말튼 성을 박살내면 돌아갈 곳이 없어진다.
그 지옥 같던 숲에서 겨우 살아남았는데 더한 시련이 찾아왔다.
연신 한숨을 내쉬던 감독관은 배에서 나는 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젠장, 배는 고프다고 난리고, 주위에 먹을 건 없나.”
시체를 뒤지는 건 꺼림칙한 일이지만,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한참을 뒤지다가 죽은 시체의 주머니에서 말린 고기를 발견했다.
감독관은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군, 그래도 먹을 게 아예 없지는 않……으, 으아아악!”
미소를 짓던 감독관이 돌연 비명을 질렀다.
죽은 줄 알았던 시체의 손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죽은 줄 알았던 병사는 힘겹게 손을 들며 말했다.
“너, 너는?”
“허, 허억, 사, 살아있어?”
“내, 내장을 다쳤어, 오, 오래 말 못한다, 빨리…….”
“……지나가던 여행객입니다.”
하룬가의 사람이라고 말할 순 없기에 적당히 둘러댔다.
감독관의 대답에 병사는 힘없이 고개를 든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부 시체뿐이었다.
병사는 피 섞인 기침을 하며 말했다.
“커, 커억, 영주님께, 영주님께 알려야한다.”
“뭘 말입니까? 군대가 전멸한 거요?”
“우리 군대가 짐승 한 마리한테 전멸한건 미리 빠져나간 대원들이 알려줬을 거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커헉!”
기침과 함께 어마어마한 피가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감독관은 졸지에 얼굴에 피를 뒤집어썼지만, 개의치 않고 물었다.
“중요한 게 뭔데?”
“놈, 그 놈이……내 동료들을……만들었다.”
“뭐?”
성대가 망가진 듯 중간 중간 끊기는 병사의 말을 감독관은 이해하지 못했다.
병사는 죽어가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말을 하려 애를 썼다.
“놈은 우리를 마음에 들어 했다, 나, 나 같이 죽거나 죽어가는 동료들은 두고 잡히거나 살아남은 동료들을 전부……대장님 또한……놈의 부하가 되었다.”
“부하? 무슨 소리야, 투항이라도 한 거야?”
“투, 투항이 아니다! 커헉!”
거칠게 말한 병사의 입에서 피가 튀었다.
아까보다 튀는 피의 양이 많아졌다.
죽음이 임박했다.
죽음을 직감한 병사는 급하게 말했다.
“동료나 대장님 누구 하나도 놈에게 투항하지 않았지만, 놈이 수작을 부렸다……최면이라도 걸린 것처럼 부하가 됐다.”
“부하? 최면에 걸린 것처럼?”
병사의 악에 받친 외침에 감독관은 눈살을 찌푸렸다.
병사의 말을 의심하는 게 아니었다.
최면에 걸려 부하가 되었다는 병사들, 토벌대에 나섰던 늑대 기사단원들과 자유 해방단원들 또한 최면에 걸린 것처럼 놈의 부하가 되었던 걸 감독관은 알고 있었다.
감독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전부 부하가 됐다고? 몇 명이나? 백 명 정도?”
“백 명 정도가 아니다……말했을 텐데, 나같이 전투불능이 된 녀석들을 뺀 나머지라고.”
“나머지?”
감독관은 자기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에 보이는 병사들의 시체는 얼핏 봐도 천명은 되었다.
감독관은 조심스레 병사에게 물었다.
“몇 명이나 왔지?”
“삼천 명…….”
“사, 삼천 명?”
감독관은 순간 등골에 소름이 끼쳤다.
괴물 놈이 잡은 병사들 중 죽어가는 이들을 제외한 모두를 자신의 부하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시체 외에 나머지 병사들은 전부 놈의 부하가 되었다는 건가.
감독관은 이빨을 부딪치며 재차 물었다.
“그, 그럼 못해도 천 명 이상이 놈의 부하가 되었다는 거야?”
“그, 그래, 먼저 도망친 동료들이나 영주님은 이 상황을 모른다, 놈이 조종당하는 부하들을 데리고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그러니 어서.”
“아, 아니 놈들은 우리보다 훨씬 먼저 앞서 있는데 무슨 수로 알리라는 거야?”
감독관은 줄곧 가온을 업은 채 먼 거리를 걸었다.
혼자 걸어도 느린 발걸음에 한 사람을 업었으니 느려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앞서가는 짐승 무리와 조종당하는 병사들은 벌써 말튼성에 도착했을 것이다.
감독관의 말을 들은 병사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지금이라면 먼저 말튼 성에 도착할 수 있다.”
“먼저 도착할 수 있다고?”
“놈들은 말튼 성이 아닌……다른 방향으로 진군했다.”
“다른 방향?”
감독관의 물음에 병사는 대답대신 자신의 갑옷 틈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병사의 신분증이었다.
병사는 신분증을 감독관에게 쥐어주며 마지막으로 한 마디 했다.
“도착해서……알려줘, 영주님에게……그대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부디 위기에 빠진 말튼 성과 영주님을……커헉!”
피분수가 쏟아지며 병사는 말을 잇지 못했다.
피를 흘리며 눈을 감은 병사의 몸은 차가웠다.
감독관은 욕설을 내뱉으며 짜증을 냈다.
“젠장 하려던 말은 다 하고 가라고.”
“…….”
“빌어먹을 배고파서 뒤져본 건데 이상한 임무를 받아버렸어.”
감독관은 짜증을 내면서도 손에 쥔 신분증을 버리지는 않았다.
감독관은 죽은 병사의 주머니에서 말린 고기를 꺼내 씹기 시작했다.
“…….”
얌전히 누워있는 가온을 힐끔 보던 감독관은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어차피 갈곳도 없는데 까짓거 가보지 뭐.”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