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이건 기회일 수도 있다.
잠시 입을 다물던 샤로텐은 표정을 굳인 채 말했다.
“극비 사항이지만, 고드프리 경이니 말하겠습니다, 몇 주 전 하룬가에서 이방인 한 명이 죄를 저지르고 탈주했다고 합니다, 그를 잡기 위해 며칠 전 하룬가에서 토벌대를 꾸려…….”
“이방인?”
샤로텐의 긴 설명에 고드프리는 제대로 듣지 않았다.
그러나 딱 한 단어에 고드프리는 눈빛이 변했다.
이방인이라는 단어였다.
한적한 주말 오후.
매일이 바쁜 자유 해방단원들이지만, 주말만큼은 예외였다.
모두가 늘어져 쉬는 가운데 누군가 급하게 해방단원 지부로 들어왔다.
“야! 큰일났다! 단장님은 지금 어디 계셔?”
“흐아아암, 단장님은 왜?”
“빨리! 지금 급한 일이라고!”
“아오 귀찮게, 안에 계실거야, 노크 하고 들어…….”
쾅!
노크하란 동료의 말에도 단원은 듣지 않았다.
단원은 냅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이 열린 단장실에는 사진 액자를 든 채 응시하는 하밀부르크가 앉아 있었다.
하밀부르크는 노크도 없이 들어온 예의 없는 부하를 노려보았다.
“지금 허락도 없이 들어온 거냐?”
“다, 단장님 지금 그러실 때가 아닙니다!”
“으음?”
호되게 혼낼 생각이었지만, 부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하밀부르크는 들고 있던 사진 액자를 내려놓았다.
표정을 갈무리한 하밀부르크는 진지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단장인 하밀부르크의 물음에 급히 들어온 단원은 일말의 지체도 없었다.
방안이 떠나갈 정도로 단원은 목청껏 외쳤다.
“말튼 성이 함락 될 위기입니다!”
“음? 지금 뭐라 한 거지?”
“말 그대로입니다! 천 마리가 넘는 짐승 군대가 진군하고 있답니다! 북쪽 랠리 숲에서 나타났는데 북쪽 경계 초소가 순식간에 파괴되었답니다!”
부하 단원의 말에 하밀부르크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도적떼도 아니고 하룬가의 사병도 아닌 짐승 떼가 말튼 성을 향해 오고 있다?
게다가 몇 백 명은 주둔하고 있을 북쪽 경계 초소를 박살냈다면 보통 짐승들이 아닐 것이다.
하밀부르크는 머리가 지끈거림을 참으며 물었다.
“그냥 짐승들이더냐? 설마 몬스터 같은 건…….”
“수 십 년 전에 멸종되었다는 그 몬스터 말입니까? 그건 아닐 겁니다, 성 내에 있는 정보원에게 듣기로는 일반 짐승들이라고 합니다.”
“평범한 짐승들이라고? 지능도 없는 흉포한 야생동물들이 어떻게 한꺼번에 몰려다닌 다는 거냐?”
“그건 모르겠습니다.”
모른다는 단원의 말에 하밀부르크는 눈살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요즘 생각이 복잡한 데 큰 일이 터져버렸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게 두통이 심했다.
자기도 모르게 쥔 주먹이 파르르 떨려왔다.
그걸 본 단원이 걱정했다.
“다, 단장님, 괜찮으십니까?”
“……영주는? 말튼 성의 영주는 이 사실을 알고 있더냐?”
“네! 상당수의 수비대와 수비대장 칼 리보렌을 구성으로 한 토벌대를 꾸려 보냈답니다, 한나절에 출발했습니다.”
“역시 샤로텐 영주, 신속한 대응이야.”
단원의 말에 하밀부르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천 마리나 되는 짐승들이 오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샤로텐 영주는 방심하지 않고 삼천의 토벌대를 보냈다.
토벌 대장 또한 무능한 이가 아닌 이 지방에서 가장 유명한 기사이자 영주의 측근인 칼 리보렌이다.
하밀부르크는 안심하며 쥐었던 주먹을 풀었다.
“짐승 건은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되겠군, 그나저나 잘하고 있을련지.”
“네?”
“아니다, 그냥 혼잣말이다 나가봐라, 새로운 소식 있으면 바로 보고 해라, 물론 노크는 하고.”
“알겠습니다, 단장님.”
고개를 꾸벅 숙이며 단원은 나갔다.
방안에는 하밀부르크 혼자만이 남았다.
혼자남은 하밀부르크는 책상위에 다리를 올린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무 말 없이 몇 분, 하밀부르크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망할 노예 꼬마 놈, 며칠 째 아무런 소식이 없는 데 잘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미르를 구해야한다며 하룬가의 이방인 토벌대에 들어간 노예.
잘하고 있는지는 커녕 살아있는지초자 모른다.
하밀부르크는 또 한 번 한숨을 내쉬며 걱정어린 눈빛을 띠었다.
하지만 그 걱정은 가온을 향한 눈빛이 아니었다.
하밀부르크는 아까 두었던 사진 액자를 다시 들었다.
사진 액자에는 어깨동무를 한 두 사람의 사진이 있었다.
한쪽은 무뚝뚝한 표정을 지은 하밀부르크와 다른 한쪽은 해맑게 웃으며 하밀부르크의 어깨에 손을 올린 미르였다.
사과보다 더 붉은 머리칼을 지닌 이방인 미르, 해맑게 웃는 모습이 태양과도 같았던 그녀.
복잡한 감정 섞인 눈으로 사진을 보던 하밀부르크는 이를 악물었다.
“미르, 넌 지금 대체 어디 있다는 말이냐.”
사진에 대고 말하지만,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다.
하밀부르크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신음성을 토해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정말 널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미르가 자유 해방단을 떠난 첫날.
하밀부르크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때 그는 미르가 없어도 금방 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며칠이 지나고 또 지나도 잊지 못했다.
미르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커져만 갔다.
쾅!
자기도 모르게 책상을 주먹을 내리쳤다.
주먹에 의해 반으로 쪼개진 책상을 보며 하밀부르크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하룬가고 트라야비야가문이고 상관없다, 제발 무사히 돌아와라 미르, 네가 없으면 난 죽은 거나 다름없는 인간이다, 만약 네가 정말 돌아오지 못한다면 난…….”
쾅!
그때 또 다시 문이 열렸다.
아까 그 단원이었다.
하밀부르크는 이번에도 노크 없이 들어온 단원을 노려보았다.
“분명, 노크를 하라, 했을 텐데?”
“크, 큰일입니다!”
“그래 큰일이겠지, 내 명령을 두 번이나 어겼으니 말이야.”
하밀부르크는 단원의 말은 무시한 채 살기를 내뿜었다.
당장 죽일 기세였다.
단원은 살벌한 하밀부르크의 기세에 아무 말도 못했다.
“다, 다, 단장님?”
“닥쳐라, 내겐 말 안 듣는 부하 따윈 필요 없어.”
“히, 히익, 사, 살려만 주십쇼!”
“시끄럽다.”
성큼 성큼 다가오는 하밀부르크의 앞에서 단원은 말도 못하고 벌벌 떨었다.
그때 열린 방문 너머 단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 진짜라고?”
“그래, 지금 성내에 소문이 싹 다 퍼졌다니깐.”
“간신히 살아 도망친 병사가 말한 거래.”
“맙소사 토벌대가 거의 전멸했다고?”
밖에서 들려오는 단원들의 말소리에 하밀부르크는 멈칫했다.
하밀부르크는 눈앞에서 벌벌 떠는 단원에게 조용히 물었다.
“하려던 말을 해라.”
“네, 넷?”
“정말로 화내기 전에 빨리 말해라.”
“아, 알겠습니다! 그, 그러니깐, 제가 전에 말씀드렸던 짐승 토벌대가 저, 전멸했다고 합니다.”
떨면서 겨우 겨우 말한 단원의 말.
하밀부르크는 입을 다문 채 표정이 굳었다.
그걸 본 단원은 더욱 두려워했다.
“허, 허억, 사, 살려만 주십쇼, 다음부턴 반드시 노크를 하고 들어올테니.”
“지금 그게 문제인거 같으냐?”
“네, 넷?”
“이럴 시간 없다, 당장 말튼 성에 있는 모든 단원들을 소집해라!”
하밀부르크의 목소리는 방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울려 퍼졌다.
짧은 시간 만에 정보원을 제외한 말튼성의 모든 자유 해방단원들이 집합했다.
하밀부르크는 그들로부터 토벌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니깐 제가 듣기로는 토벌대는 삼 천 명 가량으로…….”
“지휘관은 유명한 기사 칼 리보렌이라고 합니다.”
각자 첫마디는 달라도 요약하면 같았다.
한 나절 전에 출발했던 삼천의 토벌대는 거의 다 전멸했다.
천 마리의 짐승들과는 싸우지도 못했다.
그리고 토벌대를 격파한 건 단 한 마리의 거대 늑대라는 단원들의 말.
상황 설명을 들은 하밀부르크는 어이없다는 듯 다시금 물었다.
“그러니깐 말하는 거대 늑대 한 마리한테 삼천의 토벌대가 전멸 당했다고?”
“그, 그렇습니다, 저도 믿기지가 않았지만, 살아남은 생존자한테 들은 이야기입니다.”
“차라리 거짓말이었으면 좋겠군.”
하밀부르크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룬가와의 마찰과 트라야비야 가문 그리고 미르.
위의 문제들만 감당하는 것조차 하밀부르크는 벅찼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머릿속이 깨질 듯이 복잡했다.
하밀부르크가 불안해하는 것처럼 단원들 또한 혼란에 빠졌다.
“어, 어쩌냐, 진짜라면 우리 다 큰일 난 거 아니야?”
“큰일 난 정도가 아니지 다 죽을지도 몰라.”
“주, 죽는다고? 제, 제길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 않은데.”
“다른 지부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거야? 지원은 없어?”
단원들은 혼란에 빠진 채 어쩔 줄을 몰랐다.
하밀부르크 또한 마찬가지이지만, 그는 단장이었다.
이곳을 이끄는 대장이자 책임자 그렇기에 그는 차분해야했다.
머리를 차갑게 식힌 하밀부르크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그런데 몇 명이 비는 거 같은데.”
“며칠 전에 행방이 묘연해진 렘 브란트 단원을 찾으려 다른 단원들이 찾던 도중 실종되었습니다.”
“뭐? 그런 중요한 일을 왜 이제야 이야기 해?”
“그, 그게 그 녀석들이 개인적인 일이라고 말하지 말라 해서.”
머뭇거리며 단원이 실토하자 하밀부르크는 이마를 감쌌다.
다른 일들 때문에 신경을 못 썼는데 실종된 단원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하밀부르크는 눈살을 찌푸린 채 매섭게 물었다.
“어디냐? 목적지 정도는 말했겠지?”
“네, 넷 성 내에 위치한 그라안 숙소라고 했습니다.”
“그라안 숙소?”
하밀부르크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다른 숙소와 다를 바 없는 숙소지만, 그곳은 노예 소년이 머물렀던 장소였다.
심상치 않은 하밀부르크의 표정을 본 단원이 조심스레 물었다.
“여차하면 제가 가볼까요?”
“아니, 내가 직접 간다.”
“단장님이 직접이요?”
“그래.”
만약 그 소년과 관련이 있다면 단원들을 보내선 안 되었다.
하밀부르크는 부하들은 대기시킨 채 홀로 그라안 숙소로 향했다.
토벌대가 패배했다는 소문은 성내에 퍼진 지 오래였다.
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대개 두 부류로 나뉘었다.
소문을 믿고 도망치거나 정신이 나간 이들이었다.
“삼천면의 병사들이 전멸했다고? 그럼 여기도 위험한 거 아니야?”
“당장 떠날 준비를 하자! 짐 챙겨!”
“하, 하하하, 다 끝났어, 다 끝났다고.”
“이게 전부 하룬가 때문이야, 영주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혼란에 빠진 건 주민들만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주민들을 진정시키고자 성내 병력들이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도리어 병사들또한 소문을 믿고 두려워했다.
“젠장, 우리 이대로 있다가 다 죽는 거 아니야?”
“무서운 소리 하지 마,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살아남은 토벌대 병사가 말한 거잖아, 우리 모두 죽을지도 모른다고.”
“제길, 어쩌지.”
하밀부르크는 혼란 속에 빠진 사람들을 무시했다.
이들에게 신경 쓸 시간은 없었다.
하밀부르크에게 중요한 건 사라진 단원들이었다.
걸어가던 하밀부르크의 귓가에 누군가의 악의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야! 저 새끼 잡아!”
외친 건 소년 무리 중 가장 체격이 큰 덩치였다.
이전에 가온을 잡으려다 호되게 당한 덩치와 졸개들이었다.
그들은 피난 준비를 하던 주민을 에워쌌다.
주민은 자신을 둘러싼 무리를 보고 당황하며 외쳤다.
“왜, 왜들 이러는 거시오? 이럴 때가 아니야,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는 괴물들이 있다고! 빨리 여길 나가야 한다고!”
“거 말도 많네, 난 오히려 이 상황이 좋은 걸? 내가 이런 짓을 해도 아무도 모르니깐!”
퍽퍽!
거리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주민이 땅바닥에 누운 채 매질을 당했다.
“커, 커컥, 커억.”
“야, 야 그만해라, 죽여서 좋은 건 없으니깐, 물건이나 챙기자.”
“오케이 대장.”
“큭큭, 대장 덕에 이런 날도 오네.”
불량아들은 죽어가는 주민을 내팽겨 치고 그가 실은 수레에서 물건을 빼갔다.
수레 뒤로 누군가 나타났다.
불량아들보다 한참 어린 소년이었다.
소년은 죽어가는 주민에게 달려가며 외쳤다.
“아, 아빠!”
“크, 크윽, 오지마라!”
“피투성이에요!”
주민의 자식인 소년은 눈물을 흘렸다.
불량아들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애를 패는 건 조금 마음에 걸리지만, 목격자가 있으면 안 되지.”
“난 패고 싶어, 전에 우리에게 망신을 줬던 그 노예 새끼가 생각나거든.”
“큭큭 그래도 죽이지는 말고 팔 다리만 조지자.”
불량아들은 소년에게 다가갔다.
정말로 해코지를 할 생각이었다.
멀리서 보고만 있던 하밀부르크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바빠도 쓰레기는 치워야겠지.”
하밀부르크가 불량아들에게 달려가려는 찰나였다.
각목을 들었던 한 불량아의 움직임이 돌연 멈췄다.
늦게라도 다시 올리네요!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