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살아가기 바쁘기만 하던 시절이 가고 하루하루 살아남기 바쁜 세상이 도래한 지도 벌써 수년이나 지났다. 현대적인 건물들은 대부분 현대적인 폐허가 되어 숲과의 경계가 무너지고 사람과 자연 사이의 간격도 어느 순간부터 있는 듯 없는 듯 사라져서 지금 와서는 과거의 모습은 기억나지도 않는다. 아무래도 과거의 영광보다 현실적인 고통이 더 가까운 모양이다.
"으극……. 내가 언제부터 여기에 누워있었지."
죽은 듯이 쓰러져있던 사내가 위태위태하게 몸을 일으켰다. 자욱하게 깔린 희뿌연 먼지에 입을 가리고 몇 차례나 기침을 내뱉었다.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으며 주변이 점차 보이며 근처로부터 풍겨오는 비릿한 향에 사내의 표정은 점차 썩어들어갔다.
지평선 기준으로 위가 푸른 하늘로 가득 차 있다면 지평선을 포함한 모든 대지는 붉게 물들었다.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당연하지만 주변에는 멀리서 불어오는 건조한 바람 소리만 들릴 뿐 대답이라고는 돌아오지 않는다.
시체라도 보인다면, 적어도 부서져서 굴러다니는 고기조각이라도 보였으면 했지만, 곤죽이라도 되어버린 것인지 붉은 핏물 속에는 사람이었던 형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차라리 반대로 붉은 하늘 아래에서, 푸른 핏물 속에서 눈을 떴다면 지금만큼 절망적이었을까.
몇 년 전 어느 날, 갑작스럽게 나타난 침략자들의 손에 세상이 망했다. 갑작스럽단 말이 전혀 과하지 않게 아차 하는 찰나의 순간에 강세했던 국가들이 파도 앞의 모래성과 같이 사라져버렸고 수많은 사람이 국가를 잃었다.
그와 같이 사람들 속에서도 침략자에 대항하기 위한 능력자들이 하나둘씩 그리고 점차 많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다. 그리고 능력자들을 중심으로 전 세계는 하나로 다시 모였다.
종래에 가서는 사람 대부분이 힘을 얻고 그 힘을 하나로 합쳤지만, 인간의 수는 침략자에 한참 미치지 못했고 결국 지금과 같은 상황까지 왔다.
푸른 피.
물론 지구상에도 푸른 피를 가진 생명체가 있지만 지금 와서 푸른 피는 침략자들을 칭하는 하나의 이름이 되었다.
녀석들의 특징을 구체적인 기준 아래에 정리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녀석들은 단일종이 아니었으며 같은 종 안에서도 개체마다 특징과 능력이 모두 달랐다.
그 탓에 초기 정보가 부족하던 시절에는 녀석들에게 준 피해의 곱절 이상으로 피해를 보았다.
모든 것이 끝난 지금에서도 아직 알아낸 정보가 극히 일부라는 것을 생각하면 전멸에 가까운 패배는 당연한 이야기였다.
이런저런 생각하던 사내가 허탈하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제 와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웃기지."
아직 살아남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사내의 몸이 바닥에 붙어 옴짝달싹 못 했다. 팔에 힘이 빠진 게 아닐까 하고 모든 방법으로 다리를 움직여보지만 사내는 얼마 지나지 않아 허리 아래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다.
다리의 문제인지 척추의 문제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다고 느꼈던 사내의 마음은 마지막으로 한계에 다다랐다.
모든 것을 잃고 바닥에 몸을 눕힌 그에게 남은 건 이제 무엇을 선택하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포기하는지 뿐이었다.
"푸른 피 녀석들이든 누구든 간에 이젠 그냥 조용히 가고 싶어."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잠시 안정을 취하기 위해 눈을 감았더니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네요.
-우리가 좀 더 개입했으면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렇기에 우리가 지상으로 내려온 것이지 않은가.
-그것보다 얼른 이 일을 마무리 짓자고. 그 녀석은 어디에 있어?
사내가 눈을 뜨니 하늘에서 내려온 빛의 구슬이 그의 앞에까지 다가왔다. 형상은 하나지만 그 속에 담긴 목소리는 여러 가지며 나뉘어서 보이지는 않지만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래, 이 아해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아해인가 보구나.
-이 아이가 인류의 마지막 희망….
-마지막 희망이라는 것 치고는 별 볼 일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일단 이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잖아?
"여러분은 누구신가요?"
이미 늦었다고 느끼지만, 괜한 희망이 독보다도 더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빛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 들은 사내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최후의 희망을 걸었다.
-우리는 세계의 일부이자 신의 대행자. 아해야 너는 그저 우리가 인도하는 길을 따라오면 된단다.
-너는 세계로부터 선택받은 마지막 희망. 너에게는 마지막 기회를 주도록 하지.
-침략자에게 대항하기 위한 충분한 특혜를 제공해드릴게요.
-그러니 너는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세계를 이끌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렇다면 한가지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지금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위해서. 지금에서야 가지게 된 용기를 위해서.
-그래, 아해야. 말해 보거라. 우리의 권한 안이라면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으니.
"떠나간 사람들을 위해 저에게 푸른 피들에 복수 할 힘을…."
-그건 안된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른 목소리가 사내의 말을 잘랐다. 어째서? 말을 하고 싶었지만 굳어버린 입으로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들의 말을 들었다면 이미 알겠지만, 이 세계는 이미 망했다. 남은 사람이라고는 너 혼자인데 여기서 괜한 힘을 빼서 어쩌자는 거지?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잘 알겠어. 하지만 우리가 제공 가능한 힘도 무한하지는 않아.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우리만의 권능을 제공할게.
-네가 지금 가진 힘과 비견되지 않을 만큼 강한 능력도 약속하겠네.
-그리고 침략자를 상대하는 데 필요한 지식도 드릴게요.
-마지막으로 우리들의 사자로서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하는 권한도 주도록 하지. 대신 과거로 돌아간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그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희망이 꺾인 사내의 귀에는 아무런 말도 닿지 않았다.
과거로 돌아간다고 하지만 그 사람들이 과연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맞을까?
겉모습이 같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시점까지 도착한 그들이 과연 지금과 같은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그러면 우리들의 사자로서 과거로 돌아가겠나?
"알겠어요. 원하시는 대로 과거로 돌아갈게요. 대신에…."
사내에게 필요했던 세계는 이제 곧 사라진다. 평생을 같이해온 세계는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처럼 흩어져 사라지고 그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사내가 지키고자 했던 것들은 이제 그의 기억 속으로 잠들 것이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정해지지 않은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당신들이 저에게 약속한 권능, 능력, 지식, 권한. 다 필요 없으니 도로 가져가세요. 그리고 제가 가진 능력도 도로 가져가세요."
어차피 저들의 목적은 사내를 과거로 보내는 것으로 끝. 그 목적에 맞게 과거로 가면 된다. 단,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채로.
어차피 지킬 의지도 필요도 없는 세계. 사내는 그저 관계없는 사람으로 방문해서 무고한 일반인으로 끝마칠 생각이다.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을 겁니다."
빛의 구슬은 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고는 알아서 해보라는 듯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스스로 공기 중에 흩어지며 빛의 문을 만들었다.
사내는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되새기며 문 너머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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