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은 절대로 거스를 수 없다.
그렇기에 예언의 또 다른 이름은 운명이다.
하늘의 달조차 눈을 가린 어두운 밤이었다.
나는 촛불을 들고 천천히,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림자로 뒤덮인 오두막 안에는 나무 의자며 테이블 따위가 있었고 그 외에 방금 전까지
사용했던 온갖 잡동사니들이 보였다. 벽에는 커다란 도끼가 걸려 서슬 퍼런 빛을 냈다.
나는 지금부터.
어떤 여자 아이를 죽여야만 한다.
발자국 소리가 나지 않게 앞으로 걸어가, 침실로 향했다.
낡은 나무문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이미 썩고 부서진 부분이 많았다.
잠겨있지 않아 살짝 당기니 바로 열렸다.
가죽과 가죽을 덧대 만든 나무 침대에, 조그마한 소녀가 누워 곤히 자고 있었다.
나는 침대의 옆으로 갔다. 그 다음 단검을 빼들고 칼날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다.
어린 소녀를 죽일 살인자의 얼굴이란 이렇게 생긴 건가.
촛불이 아이의 얼굴을 비추었다, 까마귀 같은 단발에 조그마한 뿔이 이마 왼쪽에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마족, 그렇지만 피부는 하얗고 보드라웠다. 혼혈이다.
인간의 피가 섞인 악마라.
그 때, 소녀가 눈을 떴다...그 동그란 눈동자에 비친 내 얼굴은, 아까 본 그것과 다르지 않다.
살인자의 얼굴이다.
“...아빠?”
대답해라, 리베르트 호프먼.
정말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오래 전에 스승이 내게 말했던 말이 떠올랐다.
용사란 옳은 것을 판단할 지혜와 목숨을 던져서라도 그걸 지킬 용기에서 태어난다고.
지금 여기서 이 아이를 죽이는 게, 정말로 ‘올바른 것’인가?
아무것도 모르는...이런 애를 죽인다는 선택이 ‘정답’이란 말인가?
“아빠, 맞죠? 아빠에요? 아빠 맞아요?”
소녀가 덜덜 떨리는 내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나는...”
이것 또한 ‘운명’이란 말인가, 예언은 거스를 수 없는 것인가.
“나는...리베르트 호프먼, 네...아빠야.”
소녀가 와락 내 허리를 껴안았다.
그렇게 나, 예언의 수호자 리베르트 호프먼은 예언의 아이 이그리트를 딸로 삼게 되었다.
“너는 용사로 태어나, 용사로 살다가, 용사로 죽을 것이다.”
어느 날, 나는 용사가 되었다. 아직 글자도 다 못 외운 11살 무렵의 일이었다.
신탁...운명의 신은 신전의 신관을 통해 예언을 내린다.
그것은 절대적이다. 예언이 빗나가는 일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런 식으로 용사로 임명받은 이들은 ‘예언의 수호자’라고 불리며 예언을 실행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예언이 어느 마을의 수몰을 예견하면, 우리는 그곳의 사람들을
대피시킨다. 마을은 홍수에 휩쓸려 사라지지만 사람들은 구할 수 있다.
운명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거기에 대응하는 일은 가능하다.
그런 식으로 평생을 예언의 수호자로 살던 중, 내게 또 다른 임무가 주어졌다.
“이그리트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가 예언을 부수리라.”
신탁의 내용은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껏 예언을 부술 거라는 예언이 내려온 적은
없었다. 세계를 정복하거나, 왕이 된다는 예언은 몇 번 있었지만 예언 그 자체를
부술 거라는 예언은 존재하지 않았다...당연히 수호자들 모두 이 소녀를 당장 잡아
죽여야한다고 말했다. 추첨 결과, 그 소녀를 죽이는 건 내 몫이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그리트를 만났다.
“아빠?”
이그리트가 날 불렀다, 그제야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떠올랐다.
“어.”
“장작, 다 팼어?”
나는 도끼로 장작을 패고 있었다, 일이 다 끝났는데도 멍하니 생각에 빠진 모양이다.
“그런 것 같네.”
“어휴, 아빠도 참.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도끼로 발등을 찍을지도 몰라.”
“그거 아프겠군.”
나는 오두막 바깥에 있는 의자에 앉아, 이그리트에게 장작을 잘 쌓아두라고 말했다.
이그리트, 예언의 아이. 언젠간 예언을 부술 아이.
그 위험성은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인간은 지금껏 예언을 들으며 살아왔다.
예언 없이 산다는 건 불가능하다, 인간은 신에게 모든 걸 맡겨버렸다.
“아빠, 아빠.”
이그리트가 내 위에 걸터앉은 뒤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음.”
“엄마랑 어떻게 만났어?”
“어?”
“아빠 말이야, 엄마랑 어떻게 만나서 결혼했냐고.”
이건 예상치 못한 질문이다.
실제로 나는 이 아이의 아버지가 아니고, 당연히 이 애의 어머니도 만난 적 없다.
어떻게 해야 한담.
“음...난 말이지, 원래 세계를 돌아다니며 모험을 하던 사람이었어.”
“진짜!? 굉장해! 아빠 용사야!?”
“그런 셈이지. 아무튼 여행을 하다가 엄마를 만났어, 그리고 결혼했지.”
“뭐야, 그게. 너무 이야기가 시시하잖아! 어떻게 만났어? 처음엔 어땠어?”
이거 참 곤란하군,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능력 따윈 없다.
“...네가 말 잘 들으면 나중에 더 해줄게. 알겠지?”
“지금 해주면 안 돼?”
“안 돼.”
내가 그리 말하자 이그리트는 풀이 죽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런 아이가 언젠가 예언을 부순다니. 믿기 힘들다.
“근데 아빠, 정말로 용사였어? 솔직히 아빠는 별로 안 세 보여.”
“겉모습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마, 사람은 겉과 속이 다른 동물이야.”
“아무튼! 그럼, 아빠 마법 같은 거 쓸 수 있어?”
마법이라, 나는 마법을 쓸 줄 모른다. 그런 건 머리 좋은 놈들이나 쓸 수 있는 것이다.
“아니. 대신 다른 건 알아.”
“예를 들면?”
“이런 거.”
내가 오른손을 쥐었다 펴자, 조그마한 나무 조각상이 생겼다.
“우와! 어떻게 한 거야!?”
“창조...이게 내 재능이야. 태어날 때부터 쓸 수 있는 능력이었지.”
간혹 몇몇 사람들에겐 특수한 재능이 주어진다.
사람들은 그걸 재능, 또는 신의 선물이라 불렀다.
“그리고 이렇게 없앨 수 있어.”
내가 왼손으로 조각상을 만지자,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창조와 분해. 별 다른 대가 없이, 내 오른손에선 물건이 만들어지고 왼손으론 부술 수 있다.
물론 너무 큰 물건이나 살아있는 생물은 만들지 못한다.
다만 분해의 경우, 살아있든 죽어있든 뭐든지 가루로 만든다.
이 능력으로, 나는 예언의 수호자 중에서도 가장 강한 용사로 취급받았다.
“나도 할 수 있어!?”
“아마 안 될 걸.”
“해볼게!”
그게 그렇게 쉽게 되면 내가 용사겠냐?
그렇게 말하려는 순간, 이그리트의 오른손이 빛났다.
그리고 그 작은 손 안에, 나무로 만든 새가 나타났다.
“너...! 어, 어떻게? 이렇게 쉽게 할 수 있을 리가...?”
“그냥 됐는데? 왜? 하면 안 되는 거였어?”
과연, 그 순간 나는 이 아이의 재능을 이해했다.
복제. 이 아이는 한 번 본 재능이나 기술을 복제할 수 있는 모양이다.
비슷한 종류의 재능을 본 적 있었기에 바로 알 수 있었다.
“...아니, 역시 내 딸이야. 재능도 유전되는 건가.”
“나 잘했어?”
“그래. 대신 분해는 조심해서 써, 잘못하면 크게 다칠 수도 있으니까.”
“응!”
만약 내 재능뿐만 아니라, 다른 재능도 습득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엔 온갖 재능이 다 있다...제한 없이, 이토록 손쉽게 재능을 복제할 수 있다면
언젠가 이 아이는 그 누구도 이기지 못할 존재가 될 것이다.
지금이라면 죽일 수 있다. 죽이는 건 어렵지 않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왼손을 뻗었지만- 이내 손을 꽉 쥐고 그만두었다.
이 아이는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이그리트, 오늘은 그만 들어가자. 저녁은 내가 만들어줄게.”
“오늘 메뉴는 뭐야?”
“멧돼지 뒷다리 구이.”
“맛있겠다, 얼른 가자!”
이그리트가 내 손을 붙잡고 보챘다, 나는 말없이 그 뒤를 따라갔다.
이런 아이를 죽여야만 하는 운명이라면.
나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굉음과 함께 문이 폭발했다, 정확히는 ‘얼어붙어 깨졌다.’
“꺅!?”
“...이그리트, 방으로 들어가. 문 잠그고 나오지 마.”
“아빠?”
“빨리!”
이그리트가 허겁지겁 침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오두막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온 남자는-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프레스트.”
“오, 리베르트 호프먼. 오랜만이야, 잘 지냈나?”
하얀색 장발에 턱과 코가 긴 남자였다, 두 눈은 가늘고 예리했으며 몸은 호리호리했다.
푸른색 로브를 걸친 이 남자의 이름은 프레스트 개빈스.
나와 같은 예언의 수호자다.
“하도 소식이 없어서 찾아왔다. 방금 전 그 꼬맹이가 예언의 아이, 맞지?”
“...그래.”
“그럼 안 죽이고 뭐해? 키워서 잡아먹게? 가축도 아니잖아.”
프레스트가 앞으로 걸어왔다, 난 오른손으로 커다란 도끼를 만들었다.
“돌아가. 이건 내 일이다, 내가 알아서 판단한다.”
“그래서 지금껏 저 아이를 안 죽인 건가? 이야, 그 리베르트 호프먼이? 너는 예언만
내려오면 그게 누구든지, 뭐하는 놈인지 상관없이 잘도 죽였잖아. 안 그래?”
“또 말하지 않겠다, 돌아가.”
“그 값싼 동정심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는 거냐? 그 아이가 예언을 부술 운명을
타고 태어난 걸 모르는 거냐? 예언이 없어지면 우리 모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네가 못하겠다면, 내가 해주지. 비켜.”
“아니, 비켜야 할 건 너다. 당장 꺼져.”
“아...그래? 그럼 내가 제일 좋아하는 대화 수단을 써야겠네.”
프레스트가 손을 뻗었다.
“폭력!”
얼음이 폭발하듯 날아왔다, 나는 나무 테이블을 발로 차 방어했다.
그러나 그 힘에 밀려, 테이블과 함께 날아가 벽을 뚫고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왜 그래!? 아이한테 마음을 주더니, 힘도 약해진 거냐!?”
날카로운 얼음송곳이 날아왔다, 나는 도끼로 쳐내며 튕겨냈다.
“동료를 죽이고 싶지 않다. 이게 마지막 경고다.”
“경고하면 뭐? 어쩔 건데!!”
프레스트가 침실을 향해 얼음송곳을 발사했다.
그리고 그걸로 내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나는 얼음송곳을 튕겨내며 프레스트에게 달려들었다.
“한심하긴!”
그 말과 동시에 도끼를 던졌다, 프레스트가 얼음 방패로 막았지만
거기까진 내 예상 안이었다.
그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고 프레스트에게 달려들어 발로 찼다.
그가 충격에 밀려나 자신이 부순 문 너머로 날아가, 바닥을 뒹굴었다.
“크헉...”
정신 차릴 틈도 없이, 내가 도끼를 다시 만든 다음 뛰어오르며 내리찍었다.
프레스트가 얼음 방패로 막았다. 나는 곧바로 얼음 방패를 깨부쉈지만
그가 날린 얼음송곳에 맞아 옆구리를 뚫렸다.
“!”
“배신자 주제에!”
내가 뒤로 물러서자마자 놈이 미친 듯이 얼음송곳을 퍼부었다.
나는 커다란 방패를 만들어 송곳을 막았다. 그 순간, 내 발이 얼어붙었다.
움직일 수 없다.
“그 방패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볼까!?”
굉음을 내며 얼음송곳이 방패를 꿰뚫기 시작했다, 이제 방패가 부서질 것이다.
그리고 그 잠깐의 틈이 곧 기회다.
놈의 얼음송곳을 튕겨낸 그 틈을 노려, 방패를 던진 다음 창을 만들어 던졌다.
프레스트가 그걸 눈치 채고 얼음 방패로 막았지만- 나는 이미 얼음을 분해한 뒤였다.
“이런!”
내 주먹이 놈의 안면을 갈겼다, 그 충격으로 저 멀리 날아가 땅에 처박혔다.
끝났다. 내가 놈에게 다가가자, 피투성이가 된 얼굴이 보였다.
“커...흐억...”
“돌아가라, 그리고 돌아오지 마라.”
“빌어...먹을, 지...동생이랑 조카도, 못 지킨...병신 새끼가...이제 와서 착한 척...”
나는 프레스트의 머리를 왼손으로 잡았다.
“넌 언제나 혀가 너무 길었지, 프레스트.”
“잠-”
콰지직- 피가 이리저리 튀며 놈이 머리가 으스러졌다.
끝났다, 나는 얼굴에 묻은 피를 옷소매로 닦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빠?”
“이그리트.”
내가 뒤를 돌아보자, 오두막 앞에서 덜덜 떨고 있는 이그리트의 모습이 보였다.
“아빠! 여, 옆구리! 옆구리에서 피 나!”
“난 괜찮아.”
내가 다가가자 이그리트가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 얼굴은 ‘살인자’를 보는 듯, 공포에 질린 표정이었다.
“...이그리트, 괜찮아. 물 좀 가져와줄래? 얼굴을 좀 씻어야겠어.”
“...그 사람, 죽은 거야?”
“널 해치려 했어. 이그리트, 너도 곧 알게 되겠지만 세상엔 어쩔 수 없는 일들도 있어.”
“...정말로 죽여야 했던 거야?”
“그래.”
내 대답에 이그리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등을 돌려 물을 뜨러 갔다.
나는 오른손을 상처에 대 살을 다시 만들었다.
흘린 피는 다시 만들지 못하지만 살은 만들 수 있다.
벌써 오다니, 나는 이곳이 안전하지 못하다는 걸 지금까지 잊고 있었다.
떠날 시간이 됐다.
오두막을 떠나는 날, 나는 이그리트가 잠든 사이에 그녀의 어머니가 남긴 일기를 읽었다.
이그리트의 아버지는 인간으로, 그녀가 태어나기 전 병으로 죽었다.
그녀의 어머니- 레실라는 마족이었다. 이그리트가 태어나고 그녀를 열심히 키웠지만
여자가 아이를 기르며 숲속에서 살아남는 건 너무나도 고된 일이었다.
그렇기에 어머니는, 딸을 버리기로 했다.
영원히 오지 않을 아버지가 돌아올 거란 말만 남긴 채.
나는 왼손으로 일기를 분해해 세상에서 지워버렸다.
이 사실을 이그리트가 알게 되면 얼마나 상처받을지 짐작조차 못하겠다.
어차피 거짓뿐인 관계다. 거짓말이 늘어난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다.
나는 저 아이의 아버지가 되기로 했다.
그렇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아이를 지키겠다.
“아빠, 우리 어디 가는 거야?”
“내가 아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한테 찾아가는 거야.”
“왜?”
“왜냐하면 네 목숨을 노리는 인간들이 있고, 그 사람들을 피해야 하니까.”
우리는 오두막을 떠나 여로에 올랐다.
목적지는 북동쪽의 섬, 로스터. 그곳엔 나를 훈련시켜준 스승이 살고 있다.
괴팍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지만 내 부탁을 거절한 적은 없다.
“아빠...”
“왜?”
“그 사람들은 왜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거야?”
네가 예언이 가리킨 아이니까, 그러나 이 사실을 말해줄 순 없다.
자신이 언젠가 신과 인간의 사슬을 끊을 운명이라는 걸 알려선 안 된다.
“으음...사실 그 사람들은 옛날에 아빠를 죽이려고 했던 악당들이야.”
“진짜?”
“그래서 내 딸인 너를 죽이려고 하는 거야. 내가 고통 받도록. 네 어머니랑 만났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저들은 우릴 미워해. 마족인 엄마랑 인간이 나는 이어져선 안 됐으니.”
“정말로? 그게 왜 안 돼?”
“왜냐하면 우린 적이었으니까. 한때는 저들도 내 친구, 동료들이었어. 그렇지만 내가
마족과 사랑에 빠지자 우리를 죽이려고 했지. 물론 나도 한때는 네 엄마의 적이었고
우린 한참이나 싸웠어. 하지만 어느새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지.”
“멋지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어?”
“네가 말을 잘 들으면, 나중에 또 해줄게.”
이젠 걷잡을 수 없이 거짓말이 커지고 있다.
거짓말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고? 좋다, 그럼 어디까지 커지는지 볼까.
우리는 걷다가 길가에서 야영을 하고, 짐승들을 사냥해 잡아먹거나 풀을 뽑아와
끓여먹었다. 가는 길에 누군가를 만나거나 위기에 처하진 않았다.
그들은 지금도 우릴 쫓고 있을 것이다.
일단 섬까지 가면, 이그리트는 안전해 질 수 있다.
문제는 거기까지 가는 지금 이 순간이다.
언제, 어디서 누가 공격할지, 알 수 없다.
방심하면 이그리트를 잃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우린 어느 마을에 다다랐다, 고작 1,000명도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비교적 평화롭고 풍요한 곳이었다. 한참이나 혹독한 행군을 한 터라 당분간 그곳에서
휴식을 하다 다시 출발할 생각이었다. 이 아이는 아직 7살, 8살 정도였고 그 긴 길을
쉬지 않고 가기엔 너무 약했다. 자칫 아이의 체력이 떨어져 병에 걸릴지도 몰랐다.
또, 할 일이 있었다. 내 힘만으로 이 아이를 지키는 건 쉽지 않다.
그렇다면 이 아이의 재능을 키워주는 수밖에 없다.
“이그리트! 살아남고 싶다면 강해져야 한다. 오늘부터 넌 훈련받을 거야.”
“정말로 해야 돼?”
“그래. 자, 왼손은 분해고 오른손은 창조다. 이걸 적절히 조합해야 살아남을 수 있어.”
“응...”
우리는 훈련했다, 이그리트는 재능을 복제할 수 있었지만 다루는 법까진 알지 못했다.
그녀는 힘이 약하고 체격도 작았다. 검이나 창을 들 수 없으니 대신 작은 단궁을
만들어 쏘게 했다. 또, 방패를 만들어 방어하는 법이나 상대방의 무기나 공격을
왼손으로 막아 분해하는 법도 가르쳐주었다. 힘들고 고된 일이지만 이그리트는
불평하지 않고 잘 따라왔다. 훈련이 끝난 후, 나는 이그리트에게 물었다.
“힘들지 않아?”
“힘들어, 그래도 아빠랑 같이 있을 수 있으면 다 괜찮아.”
“그렇구나...아, 나중에 저 사람들을 따돌리면 엄마를 찾으러 가자.”
“진짜!?”
“물론이지, 그리고 셋이서 같이 살자.”
“우와!”
이그리트가 눈을 빛내며 내게 어디서 살지, 어떤 집에서 살지 계속 캐물었다.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헛된 희망이라도, 이 아이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이 세상엔 자유도 희망도 없으니까.
“리베르트 씨, 오랜만이에요. 지금까지 잘도 도망치셨네요.”
버틀러! 또 다른 예언의 수호자였다. 검은 단발에 지그시 뜬 좁은 눈이 특징인
수수한 남자였다. 그러나 실력만은 프레스트와 비슷할 정도로 뛰어났다.
이그리트는 벌써 잠든 밤이었다. 마을의 여관에서 나와 잠시 생각하기 위해
산책을 나왔다, 버틀러와 마주쳤다.
“버틀러.”
“프레스트 씨는 당하셨나 보네요. 하긴, 당신을 이기기엔 너무 약하죠.”
“너도 방해할 셈이냐?”
“그 아이를 지킬 생각인가요? 리베르트 씨.”
“그래.”
“어째서죠?”
“설명해봤자 넌 모른다.”
“알 것 같은데요? 그 아이한테서 당신의 조카를 투영하는 거 아닌 가요?”
나는 오른손으로 장검을 만들었다.
“입조심 해라, 애송아.”
“저기요, 전 당신을 좋아해요. 저희들 중 가장 뛰어났고, 제일 충성스러웠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당신이라도 저희 전부를 상대할 순 없어요. 아시잖아요?”
“알다마다.”
“그럼 왜 저 아이를 지키려고 하시는 거죠? 가족도 아니잖아요? 어지간한 일이라면
그냥 모른 척 넘어가드리겠지만 이번엔 달라요. 수호자 전원이 그 아이를 죽여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예언을 부수다니,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아시잖아요.”
“저 아이는 아무것도 몰라.”
“하지만 알게 되겠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버틀러가 긴 장검을 뽑았다, 이번엔 저번처럼 쉽지 않을 것 같다.
“아이가 있는 장소를 안내해주세요, 그럼 제가 죽여 드릴게요. 그리고 돌아가면 당신의
죄에 대해선 제가 변호해드릴게요. 처벌을 피할 순 없지만 목숨은 구할 수...”
“할 말은 그게 다냐?”
내 말에 버틀러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하긴, 이제야 당신답네요.”
버틀러가 사라졌다, 나는 곧바로 등 뒤에 검을 댔다.
곧 강렬한 충격에 검이 떨렸다.
“이런, 한 번에 끝내드릴 생각이었는데.”
“네가 제일 먼저 등을 노린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냐?”
버틀러 세바스찬, 재능은 순간이동. 프레스트의 냉각보다 훨씬 성가시다.
“그럼 이건 어때요?”
버틀러가 사라졌다, 그리고 내 우측에서 나타나 다시 공격했다.
내가 검으로 방어했지만 그러기 무섭게 바로 사라졌다, 다시 왼쪽에서 나를 공격했다.
방어하고, 사라지고, 다시 공격해온다.
이것이 버틀러의 전투 방식...어느 방향에서, 어떤 공격을 할지 알 수 없다.
“크흑!”
몇 번은 피하거나 방어했지만, 역시 완전히 막는 건 불가능해 몸에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단순하지만 효과적이다, 대부분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살해당한다.
“자!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으신가요!? 1분?! 30초?!”
침착해라, 이길 수 없는 상대는 없다. 누구에게나 약점은 존재한다.
버틀러의 약점. 나는 그 곁에서 오랫동안 싸웠기에 그걸 알고 있다.
먼저 오른쪽, 그 다음 왼쪽, 그리고 다시 오른쪽으로 갔다가 뒤에서 공격.
녀석은 자신이 변화무쌍한 공격을 하고 있다 생각하지만 사람이란 무의식적으로
패턴이라는 걸 만든다. 이 패턴을 익히면, 예측도 가능하다.
오른쪽, 왼쪽, 다시 오른쪽. 그 다음...!
“!”
내가 왼손으로 버틀러의 장검을 분해했다, 예상치 못한 듯 버틀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어, 어떻게?”
“뻔하지, 넌 네 능력을 너무 과신하거든.”
버틀러가 장검을 버린 다음, 곧바로 사라졌다.
시간이 없다. 놈이 다시 무기를 들고 오면 같은 일의 반복이다.
나는 허겁지겁 달려 여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방으로 올라가 이그리트를 깨웠다.
“이그리트! 여기서 당장 나가야 돼! 일어나!”
“아, 아빠...? 아직 밤인데...”
“그게 문제가 아니야! 얼...”
“역시 찾으러 오셨군요.”
어느새 버틀러가 침대 위에 나타나, 이그리트를 붙잡고 단검을 목에 댔다.
“꺄악!?”
“이그리트!!”
“항복하세요, 이 아이는 인질입니다.”
당했다! 버틀러가 영리한 놈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설마 내 뒤를 쫓을 줄이야.
어떻게 하지? 방법이 없다. 지금 반항했다간 이그리트가 죽는다.
“알, 알겠다. 항복...”
그 순간, 이그리트의 왼손이 빛났다.
피와 살점이 허공으로 튀며, 버틀러의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어...?”
“분해!”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장검으로 버틀러의 가슴을 꿰뚫었다.
놈이 벽에 박히며 피를 토했다. 단검을 들고 있던 오른팔은 분해 당해 너덜너덜했다.
“어...어떻게...? 분해라니, 설마...이...얘의 재능...은...!”
“그래, 복제다. 이 아이는 한 번 본 재능을 복제할 수 있어.”
“말...도 안 돼...과연...예언의, 아...”
콰지직- 내가 검을 돌려 꺾자 버틀러의 숨통이 끊어졌다.
내가 장검을 분해하자 놈의 시체가 침대 위로 힘없이 쓰러졌다.
“하아...후우...제기랄...”
일이 커지기 전에 끝내야 한다, 나는 왼손으로 버틀러의 시체를 분해했다.
이러면 마을 사람들도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만 알뿐, 살인이라는 건 알지 못하니
추격해 오진 않을 것이다.
“아, 아빠...죽인 거야? 또, 죽인...”
이그리트가 울먹거리며 덜덜 떨었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그녀를 안아주었다.
“괜찮아, 다 끝났어. 이제 가자.”
“나, 나...저 사람, 죽인 거야...? 그런 거야...?”
나는 이그리트를 꽉 껴안았다.
“아니야. 넌 아무 잘못도 없어, 잘못이 있다면...전부 내 잘못이야.”
“흐...으윽, 흐으윽...우으으윽...!”
신이여, 왜 당신은 이 아이에게 이런 시련을 내리시나이까.
딱 하나, 공평한 게 있다면 그건 당신이 우리 모두에게 잔혹하다는 것뿐입니다.
당신이 준 운명은- 너무나도 잔인합니다.
신이시여.
부디 제게서 이 아이를 빼앗아가지 마소서.
나는 용사가 되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렇게 되어야만 했다.
“오빠!”
“뭐냐, 레이? 또 어디서 사고라도 치고 왔냐?”
“아니라니까! 그나저나 오빠 진짜로 용사가 된 거야?”
“그렇다는데? 뭐, 이딴 재능으로 뭘 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무슨 소리야! 오빠라면 잘 할 수 있어. 나만 믿으라니까!”
“하! 널 믿을 바엔 길거리 거지의 말을 믿겠네.”
“뭐야!?”
내 여동생은 왈가닥에 사고뭉치였다, 내 금빛 머리카락과 달리 검은 장발을 휘날리며
온 동네를 들쑤시고 다니는 말괄량이기도 했다. 그래도 내게는 하나뿐인 가족이었다.
우리는 어릴 때 전염병으로 부모님을 잃고 단 둘이서 살아야 했다.
그렇기에 내게는 여동생, 레이 말고 없었고 레이에게도 다른 사람은 없었다.
나는 용사가 되어 스승님을 따라 여행을 떠났다. 이윽고 스승의 곁을 벗어나
예언의 수호자로서 활동했을 때에도 레이를 잊은 적은 없었다.
아주 드물게, 몇 년에 한 번 레이를 찾아갔다.
“오빠, 나 결혼했어. 벌써 아이도 낳았어.”
“어?”
“짠! 이름은 엘레나, 여자애야. 이제 겨우 2달 됐어. 안아볼래?”
24살이 되던 해에 찾아간 레이는 결혼을 했고, 이미 아이까지 낳은 뒤였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엘레나를 안았다.
“아...”
“어때? 귀엽지? 하긴, 날 닮았는데 안 귀여울...뭐, 뭐야? 오빠 울어?”
“...고맙다, 레이...고마워...나...!”
내 세상에 존재하는 건 너와 나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너를 지키는 게 아닌
예언을 지키는 것. 그럼에도 레이는 나를 원망하지 않았다.
또한 내게 새로운 ‘가족’을, 살아갈 ‘의미’를 주었다.
그제야 난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던 이유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운명은, 모두에게 그렇듯 너무나도 잔인했다.
“...레이! 레이!! 어디 있어!? 레이!!”
대화재가 일어났고,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나는 화재가 일어난 바로 그 날- 수호자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레이의 곁에서
살 생각이었다. 좋은 남자를 만나,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사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지키며 평생을 바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신은 그걸 용서치 않았다, 신은 아직도 나를 원했다.
나는 불길을 헤치고 나아가 레이의 집으로 들어갔다,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고
있었지만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맨손으로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집안은 이미 불이 붙어 새까만 잿더미로 변하는 중이었다.
“레이! 엘레나!! 어디 있어!? 어디...에...”
나는 생각했다.
내가 용사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신은 나를 용서해줬을까?
레이를, 엘레나를, 살려줬을까?
“아...”
붉게 타오르던 시체들은,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나는 그게 누구인지 바로 알아봤다.
“아...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안 돼!! 이건, 아니야!!”
내가 살아가던 이유.
내가 사랑하던 사람.
내가 지금까지 지켰던 모든 것이.
그 날, 그 자리에서 불타 사라졌다.
“아니야!!!”
나는 절규했다, 머리를 쥐어뜯고 울부짖으며 절망했다.
용사로 태어나, 용사로 살다가, 용사로 죽으리라.
인간은 운명의 노예다.
그렇기에 그 운명에게서 도망치려 한 자는, 저주받는다.
이것이 나의-
“아빠?”
“...응.”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 안개가 걷히지 않은 새벽이었다.
우리는 마을을 떠나 다시 북동쪽의 섬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나, 꿈을 꿨어.”
“어떤 꿈이었어?”
“엄마랑 아빠랑, 내가 같이 집으로 들어가는 꿈.”
“...그래...뭐, 언젠간 그렇게 될 거야.”
나는 장작을 주워 꺼져가는 모닥불에 던졌다.
“아빠, 아빠는 엄마를...사랑했어?”
“물론이지.”
“나도 사랑했을까?”
“당연하지. 왜 그런 걸 묻는 거야?”
“...그럼 엄마는 왜, 떠난 거야?”
이그리트의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나는 한참이나 말없이 생각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
“이그리트, 가끔 우리는 사랑하기에 죽여야만 하는 순간을 맞이해.”
“무슨 소리야?”
“소중한 걸 지키기 위해, 자신의 소중한 걸 상처 입혀야 하는 순간이 와.”
잘 모르겠어, 이그리트가 슬픈 표정으로 대답했다.
“엄마도 마찬가지야, 널 지키기 위해 떠난 거야. 언젠간 너도 이해하게 될 거야.”
“...아빠도 나를 버릴 거야?”
나는 이그리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아니, 난 절대로 네 곁에서 떠나지 않아. 약속할게.”
“정말로?”
“그래.”
거짓뿐인 관계, 거짓뿐인 약속.
내게 또 다른 이름이 주어진다면.
나는 거짓의 용사란 이름으로 불릴 것이다.
“...스승님, 그간 무탈하셨는지요.”
“어울리지도 않는 예의범절은 때려 치워라, 그래. 수호자들을 배신했다고?”
“벌써 거기까지 소문이 퍼졌습니까?”
“그야 당연하지, 그 아이는 어디 있느냐?”
기나긴 여행 끝에, 나는 스승님을 만났다. 그곳은 해안가에 있는 조그마한 어촌으로
스승님의 섬으로 가기 위해선 여기서 배를 타야만 했다.
내 스승, 카이사 제네메르는 350년을 산 대마법사이자 과거 예언의 수호자를
키운 사람이다. 예언이 용사로 태어난 아이를 알려주면, 그가 직접 수련시킨다.
외견은 지저분한 검은색 로브를 입은, 하얀 수염이 무성한 노인일 뿐이다.
하지만 어마어마하게 강하고 현명하다.
“아직 마을에 있습니다.”
“그래? 뭐, 네가 온 이유야 뻔하지. 아이를 내게 맡길 생각이더냐?”
“네.”
“내가 거절하면?”
“저희 둘 다 죽겠죠. 아주 처참하게.”
“잘 알고 있다니 다행이구나.”
스승님이 내게 손짓했다, 그는 잠깐 산책이나 하자며 바닷가를 거닐었다.
밤의 바다는 우주와 같았고, 하늘의 별은 달의 존재조차 잊고 밝게 타오르고 있었다.
“알다시피 나라면 그 아이를 지켜줄 수 있다. 저들도 내 말 한 마디면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겠지. 너와 아이 모두 살려줄 수는 있다. 단...”
스승님이 나를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너는 동료를 살해했다, 그 죄는 크다.”
“알고 있습니다.”
“본래라면 난 너와 아이 모두 죽여야 한다. 그렇지만 너는 내가 기른 애송이들 중
제일 괜찮은 놈이었고, 나도 아무것도 모르는 애를 죽이는 건 싫다.”
“그럼...”
“그러니 난 이렇게 생각했다. 모든 죄를, 네가 짊어지고 가는 거다.”
그게 무슨 뜻인지, 나는 이해했다.
“...감사합니다.”
“리베르트,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다. 그 아이와 함께 도망치는 것도 나쁘지 않...”
“아뇨, 그걸로 좋습니다. 부디, 이그리트를 지켜주십시오.”
나는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스승님은 불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정말로?”
“네.”
“죽을 거다, 아무리 너라도 그들을 이기는 건 불가능해.”
“압니다.”
“그래도 정녕 도망치지 않을 거냐?”
“스승님, 당신의 말씀대로 전 죄를 지었습니다. 또...언젠간 그 아이는 제가 그 얘에게
한 거짓말을 알게 될 것이며, 저로선 그 아이를 지켜줄 힘이 없습니다.”
“정말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마족의 아이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거냐?”
“당신께서 말씀하셨지요. 용사란 옳은 것을 판단할 지혜와 목숨을 던져서라도
그걸 지킬 용기에서 태어난다고. 이게 옳은 일입니다.”
스승님이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저 먼 바다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놈, 언제 그렇게 컸냐?”
“하하하.”
“아이는 내일 아침에 데려 가마.”
“감사합니다.”
“흥.”
스승님은 마지막까지 바다를 바라보셨다.
그 초라한 뒷모습에서 나는 무한한 감사를 느꼈다.
“이그리트, 내일부터 우리 스승님...카이사 할아버지가 널 돌봐주실 거야.”
“...”
그 날 새벽, 나는 이그리트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보지 않았다.
“이그리트.”
“싫어.”
이그리트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아빠도 같이 가.”
“나는 갈 수 없어.”
“왜?”
“왜냐하면 난 떠나야 하니까, 이그리트. 나는-”
“싫어!! 아빠도 엄마처럼 날 버릴 생각이잖아! 아빠도, 아빠도...!”
전부 알고 있었다.
사실, 처음부터 이그리트는 모두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진짜 아빠가 아니라는 것.
엄마는 사실 자신을 버린 것.
그리고 내가 언젠간 자신을 두고 갈 거라는 것.
그 모든 걸, 알면서도 모른 체 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그리트는- 모른 척 했다.
“나는, 아니...‘아빠’는 널 떠나지 않아. 이그리트, 약속할게. 이번만큼은 거짓이 아니야.
자, 손가락 걸어. 아빠는 널 버리지 않아. 꼭, 다시 만나러 갈게.”
나는 이그리트- 아니, ‘딸’을 품에 안고 눈을 감았다.
그 조그마한 생명을 위해서 나는 죽어야만 한다.
그래도 좋다.
나는, 아 아이가 살아주었으면 한다.
이그리트는 마지막까지 나를 놓지 않았다.
나도, 그 아이를 놓지 않았다.
“리베르트 호프만, 너는 예언의 아이를 보호하고 동료인 프레스트와 버틀러를 살해했다.
그 죄는 네 목숨으로 갚아야만 할 것이다. 이의 있나?”
이그리트를 떠나보내고 나흘이 흐른 아침이었다.
나는 바위에 걸터앉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없다.”
“왜 도망치지 않았지? 우리 전부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예언의 수호자들의 대장, 토르겐이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토르겐, 이시로, 브로허스트, 아일레아, 제이카, 로드게리즈...총 6명이었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나와 동등한 힘을 지녔다.
나로선 이길 수 없다.
“나는 죄를 지었고, 그 대가를 치러야만 하니까.”
“네가 구한 그 아이는 언젠가 예언을 부술 것이다.”
토르겐이 거대한 망치를 땅에 내리꽂으며 말했다.
“그걸로 됐다.”
“예언이 없다면, 우리에겐 뭐가 남는단 말이냐?!”
“...자유!”
내 대답에 토르겐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용사가 되었다, 용사로 태어나 용사로 살았다. 그렇게 예언을 지키고 세상을
지켰다. 하지만 결국 내가 정말로 지키고 싶은 건 지킬 수 없었다. 내 가족, 내 삶...
그 예언이 나를 운명으로 묶었다. 이제 난, 운명에게서 벗어나겠다.”
“헛소리!”
“만약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죽여야만 지켜질 세상이라면!! 예언에 의존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세계라면!! 나는, 더 이상 용사로 남지 않겠다!!”
“미쳤군, 완전히 미쳐버렸어. 예언이 없는 세상엔 아무것도 없다!”
“우린 앞날을 보지 못하지만 대신 자유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미래를
두려워하겠지만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예언은, 부서질 것이다!!”
“죽여라!!”
6명이 내게 일제히 달려들었다.
승산은 없다, 나는 죽는다. 처절하게 싸운 끝에 비참하게 죽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네가 내일을 살아갈 수 있다면, 나는 그걸로 만족해.
살아라.
이그리트.
나는 신전을 올려보았다.
하얀 대리석과 황금으로 꾸민 광활한 신전엔, 무수히 많은 시체가 쌓여있었다.
“그만...둬라, 예언의 옥좌가 없으면...더 이상, 우리들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나는 피투성이가 되어 기어오던 신관을 보았다.
이것이 운명이라면.
나는 이 운명을, 부수겠다.
“더 이상 예언 따윈 필요 없어.”
나는 보석과 황금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예언의 옥좌를 왼손으로 붙잡았다.
“우리는 자유야.”
예언의 옥좌가 가루가 되어 허공에 날렸다.
당신은 예언에 의해 용사가 된 자.
나는 예언에 의해 예언을 부순 자.
이제, 더 이상 운명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예언의 잔재를 보며, 생각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