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이다! 오늘만 버티면! 아니 오늘 마지막 강의가 끝나는 6시까지만 버티면 토일월요일 오전까지 자유가 보장된다! 신난다!
……이런 식으로 마음속으로 힘차게 외쳐도 아침은 역시 일어나기 힘들어.
알람을 듣고 어기적어기적 일어났다. 아무런 인기척이 없는 나의 자취방. 보아하니 R은 먼저 학교에 간 것 같다.
“…….”
어젯밤의 기억이 갑자기 나를 덮친다.
눈과 손에 새겨진 R의 몸, R과의 대화, 부끄러움, R의 냄새, 두근거림 그리고 죄책감.
아무 일도 없었다. 아무 일도. 그냥 친구에게 마사지를 해준 거야. 아무 것도 안했어. 그냥 마사지만 했어.
속으로 중얼중얼 거리며 학교에 갈 준비를 한다.
12시. 1시간짜리 D교수님의 강의를 듣기 위해 학교에 왔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 저편. 학교의 외곽에 비행과가 실습하는 것이 보였다.
저 중에 R이 있을 것이다.
R에 대해 의식하니 또 다시 어젯밤의 기억이 갑자기 나를 덮친다.
눈과 손에 새겨진 R의 몸, R과의 대화, 부끄러움, R의 냄새, 두근거림 그리고 죄책감.
아무 일도 없었다. 아무 일도. 그냥 친구에게 마사지를 해준 거야. 아무 것도 안했어. 그냥 마사지만 했어.
또 다시 이런 식으로 속으로 중얼거리며 강의실로 향했다.
강의실에 도착하여 먼저 적당한 자리를 고르고 이미 온 동기들과 적당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우리강아지. 우쭈쭈쭈쭈.”
뒤늦게 온 H가 등 뒤에서 나를 끌어안으며 내 턱을 간질였다.
나는 내 턱을 간질이는 H의 손을 잡아 그 손의 냄새를 맡았다. 화장품의 냄새와 H의 냄새가 났다.
“후후. 그렇게 내가 보고 싶었어?”
내 머리를 쓰다듬는 H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리고 내 안에서 부족한 무언가가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우우! 커플은 꺼져라!”
동기의 야유에 나와 H는 자리로 돌아갔다. 당연한 말이지만 H의 자리는 내 옆자리.
나는 H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어제 일은 잘 해결됐어?”
“응. 뭐. 사실 나는 갈 필요는 없었지. 이미 처리는 다 끝나서 어른들 회포만 푸는 자리였어.”
“다행이네. 아니, 다행은 아닌가?”
“교류도 거의 없던 친척이라 난 딱히 아무런 감정도 안 들더라. 그래도 그곳에 갈 바엔 너랑 있는 게 백배천배만배 나았지. 나 없어서 외로웠지?”
R이랑 있어서 괜찮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R과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할 수 없었다. H가 화를 낼까봐 두려워서? 아니. 이미 알고 있다시피 H는 자신의 연인인 내가 다른 여자와 자는 것을 원하는 이상성욕자다. 그리고 나는 H의 이상성욕에 극도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분명히 H에게 알렸다. 어제 R과 있었던 일에 대해서 말하면 눈을 빛내며 자세히 물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H에게 했던 경고는 그 구속력이 약해질 것이다.
나는 H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H는 눈웃음을 지으며 내 귀에 속삭였다.
“후후. 진짜로 외로웠나보네. 오늘은 외롭게 안 할게. 마침 금요일이겠다. 제대로 불태워 보자.”
H가 내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성욕이 충전되었다. 오늘은 진짜 제대로 불태울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H에게 입을 맞추. 갑자기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는 위압감이 나를 덮쳤다.
“I군. H양. 오늘은 결석으로 처리해 드릴 테니 애정행각은 밖에서 해주시겠습니까?”
D교수님께서 강단에 서서 차가운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계셨다. 평소의 냉랭함이 그냥 얼음 같은 냉랭함이었다면 지금의 냉랭함은 눈보라 같은 냉랭함이었다. 우리를 향해 휘몰아치는 냉랭함.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너무 애정을 주고받는 것에 정신이 팔려 강의가 시작된 줄도 몰랐다.
교수님께선 잠시 우리를 노려보시다가 출석을 부르셨다.
사실 D교수님께서 저렇게 보여도 귀여운 면이 많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입니다. 본 강의에 관해서 의문점이 생기신 분은 제 개인 연구실로 따라오십시오.”
강의가 끝났다. D교수님은 평소처럼 도도한 태도로 강의실을 나가셨다. 마지막에 잠시 나와 H를 노려보신 것 같은데. 음. 요즘 교수님께 너무 친근감을 느껴 예의에 어긋나게 군 것 같다. 조심하자.
“I, H. 우리들 밥 먹으러 갈 건데, 너희들은?”
동기들이 점심팟에 초대했다.
“어디 갈 건데?”
“피자유니버스.”
어쩔까……피자 안 먹은 지 오래 돼서 끌리긴 하네. 나는 H에게 물었다.
“나는 좋은데, 너는?”
“네가 가는 곳이면 난 어디든 좋아.”
우리 모습이 눈꼴 시려웠나 보다.
“야! 쟤들은 안 간덴다! 우리끼리 가자.”
“또! 또! 저 질투심에 눈이 먼 솔로 놈.”
“내가 정치인이 되면 무조건 커플세, 잘생김세 꼭 만들고 만다.”
웃으며 말하지만 마음속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보이는구나. 나중에 여자 소개시켜줘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우리들은 점심을 먹으러 갔다.
점심을 먹고 오늘 남은 강의에 따라 일행이 갈라졌다. 바로 다음 시간 강의가 있는 나와 H 그리고 두 동기는 학교로 돌아갔다.
H가 걸어가며 나에게 속삭였다.
“사실 어제 너한테 내 사진 2탄을 보내려고 했는데 그럴 시간이 안 났어. 미안해.”
나는 H에게 속삭였다.
“그러면 오늘 제대로 찍으면 되겠네. 스튜디오는 우리 집.”
“그러면 네 사진도 찍는 거야?”
“원한다면.”
“원해. 필요해. 꼭. 소중히 잘 쓸게. 하루에 세 번 꼭.”
H는 꼬리를 격렬하게 흔들었다. 진심인 것 같았다.
“프린트해서 내 방에 붙여놓을 게.”
“아니. 그건 좀.”
H는 내 볼에 입을 맞추곤 내 주의를 빙글 돌았다.
“농담.”
진심 같았는데. 나중에 H의 집에 가면 반드시 확인하자.
함께 학교로 돌아가던 동기가 말했다.
“내가 진짜 별별 눈꼴 시린 커플은 많이 봤는데, 너희처럼 심한 커플은 못 봤다.”
H가 내 손을 잡으며 대답했다.
“후후. 다른 커플들은 우리보다 애정이 부족해서 그런 거지. 만약에 I가 하늘의 별을 따달라고 말하면 우주항공 산업을 발달시킬 거야.”
낭만적인 것 같으면서 현실적이었다.
“사랑 때문에 우주 대개척시대가 열리겠네?”
“아니. 먼저 전함을 개발한 후에 내 허락 없이는 우주에 못 나가게 해서 우주전체에 대한 점유권을 주장할 거야. I가 원하는 별을 따오는 건 그 다음.”
“…….”
“…….”
“…….”
낭만적인 것 같으면서 현실적이고 폭력적이었다.
학교에 도착한 우리는 다른 동기들과 헤어졌다. 나와 H는 다음 강의가 시작할 때까지 교내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H는 하늘을 올려다가 한쪽을 가리켰다. 비행과가 실습을 하고 있는 곳이다.
“저기에 R이 있겠지?”
속으로 조금 껄끄러운 감정이 생겼지만 무시하고 말했다.
“그렇겠지. 걔 장학생이잖아.”
“망원경으로 보면 보일까?”
“보이겠지?”
“그러면 보자.”
생각나면 그대로 실행에 옮겨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답게 H는 내 손을 잡아끌었다.
우리는 동아리가 몰려있는 학생회관으로 갔다.
“망원경은?”
“빌리면 되지?”
“어디서?”
“있는데서.”
“어디에 있는데?”
“천문 관찰 동아리? 새 관찰 동아리?”
“아는 사람 있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
없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운이 좋게도 새 관찰 동아리에 과선배가 있어서 무난하게 쌍안경을 빌릴 수 있었다.
“고마워요, 선배. 나중에 밥 사주시는 거 1회 면제해드릴게요!”
“취준생을 벗겨먹으려고 하냐! 밥은 돈 많은 사람이 사는거지!”
“어차피 취직하실 거잖아요! 20만 원짜리 밥 안 사고 쌍안경 하나 빌려주는 거면 남는 장사죠!”
H는 막무가내지만 사람 기분 좋게 만드는 말을 할 정도로 요령도 있었다.
우리는 다음으로 커피를 산 후 학생회관 옥상에 올라갔다.
“저 중에 누가 R일까?”
“음. 장학생이면 제일 앞에 있는 사람이 R아닐까?”
그러고 보니 어제 실험동에서 D 교수님과 대화를 할 때 제일 앞에 있는 사람이 R이라고 하셨지.
H는 쌍안경으로 비행과가 실습을 하고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아닌 거 같은데. 날개 색이 달라.”
“그러면 하나하나 찾아봐야겠네.”
나는 H가 R을 찾는 동안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잠시 후.
“아. 찾았다. 맞나? 날개 색 보면 맞는데. 모자랑 고글 때문에 얼굴이 안 보여서 모르겠어. 비행과에 R말고 적익족이 있던가?”
“글쎄. 난 본적 없는 거 같은데.”
“네가 확인 해봐.”
H는 나에게 쌍안경을 넘겨주며 말했다.
“앞에서 여섯 번째.”
나는 쌍안경으로 받고 R을 찾았다.
여섯 번째. 여섯 번째. 여섯 번째. 아. 찾았다. 붉은 날개. 새의 다리를 닮은 다리. 적익족이 맞다. 하지만 아직은 모르겠는데.
나 역시도 긴가민가했다. 그러나 내가 관찰하는 적익족 학생이 방향을 전환하기 위해 몸을 옆으로 눕혔을 때. 나는 확신했다.
R이었다.
어제 마사지를 하면서 눈과 손으로 익혔던 그 모습, 그 실루엣이 일치했다.
“맞는 거 같은데.”
“그래? 뭘 보고 알아 본거야?”
“……그냥 맞는 거 같은 느낌이 들어서. R이 나는 모습은 많이 봤으니까.”
나는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뒤늦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 정도로 자연스럽게 거짓말이 나왔다. 그리고 거짓말을 했다는 자각과 함께 죄책감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어때?”
“잘 나네. 다른 사람들보다 안정적으로 나는 거 같은데? 그러면 R이 확실히 맞겠지. 장학생이니. 뭐 난 비행에 대해선 문외한이지만.”
하지만 죄책감을 숨기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런데. 점심시간인데 쟤들은 밥 안 먹나?”
“그런 실습인가보지.”
“고생한다. 고생해.”
이런 식으로 우리는 강의가 시작하기 직전까지 R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6,7교시 강의가 끝났다.
“불금이다!”
H가 기지개를 키며 말했다.
“난 아직인데.”
8,9교시가 남은 내가 책상에 엎드리며 말했다. 제기랄 이번 학기 수강신청은 아무리 생각해도 실패다. 어정쩡하게 하루에 수업 하나인 날이 두 개나 있고 풀강의인 날이 하루 있고 금요일은 마지막 교시까지 있으니.
H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같이 들어줄까?”
“그러고 싶은 마음이 한 가득이지만. 실험 강의라 안 듣는 사람이 들어오면 눈에 띄어. 그냥 먼저 집에 가 있어.”
“으이구. 불쌍한 내 강아지.”
H는 그렇게 말하고 내 양 손을 잡았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내 양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옮겼다.
“두 시간 동안 힘내. 파이팅!”
옷과 속옷의 방해를 받지만 그래도 탐스러운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H는 내 손을 자신의 손으로 누르며 문질렀다.
“가, 갑자기. 엄청 자체 휴강 하고 싶어지잖아.”
역효과다. 아니. 기운이 넘치는 건 맞는데. 그 기운이 학업이 아닌 다른 쪽으로 향하게 돼서 문제다.
“자체 휴강해버릴래?”
소악마의 속삭임. 그리고 내 안의 자기합리화 기구에서도 ‘어차피 금요일 마지막 수업이니 자체 휴강할 사람이 많다.’, ‘한 번 정도는 자체휴강해도 되겠지.’, ‘레포트는 동기들에게 부탁하면 볼 수 있잖아.’라고 속삭인다.
…….
“아니. 그래도 수업은 들어가련다. 한 번 빠져버리면 다음에 또 빠질 확률이 높잖아.”
“학업 따위에 내 매력이 지다니.”
H는 좌절했다. 진심으로 내가 자체휴강하기를 바란 것 같다.
그렇다면 이번엔 내가.
나는 H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H의 뾰족한 귀에 속삭였다.
“H는 착한 아이지? 기다리면 이 오빠가 H가 좋아하는 거 해줄게.”
변태 같다고? 나 변태 맞아. 음마의 아들인데.
“진짜? 그러면 헤르렁 헤르렁, 할락 발락, 뽈랑깔랑도?”
헤르렁 헤르렁, 할락 발락, 뽈랑깔랑이 뭔지 묻지 말기를 바란다. 단지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건. H도 만만찮게 변태라는 거다.
“물론 H가 착하게 잘 기다리면.”
“그러면 H는 기다릴 수 있어.”
H는 나를 끌어안았다.
“빨리 와야 해, 오빠야.”
오늘 진짜 제대로 불태우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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