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태초에 신이 있었다.
신은 수많은 생명들을 창조하였다.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형상의 존재들을 만들어 나갔다.
요정, 인간, 도깨비, 노움, 오우거, 트롤, 오크...수많은 아인종들이 창조되었다.
신은 그중에서도 인간을 가장 사랑하였다.
전란의 시대. 수많은 전쟁이 일어났고 수많은 종족들이 사라졌다.
신은 방관하였다.
신은 더 이상 인간을 사랑하지 않았다.
신이 노한 탓이었을까?
대지진과 역병으로 대륙을 지배하던 인간의 수는 급감하였다.
그리고 마족과 마수가 대륙을 침범해 왔다.
그럼에도 신은 인간을 사랑한다고 믿었다.
신이 인간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었다.
1.전이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나는 남들과 다를 바 없는 그저 평범한 남학생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이어폰을 꼽은 채 지하철을 타고 사람이 북적 거리는 숨 막히는 대학로를 지나 a204 건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했다. 사방이 면으로 둘러싸인 좁은 엘리베이터 보단 탁 트인 계단이 좋았으니까. 302호 실험실에 들어서자 알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먼저 온 몇몇의 학생들은 테이블에 앉아 실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구석 자리 테이블에 가방을 벗어 올려두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3월 중순, 창 너머엔 매화가 피고 있었다.
“하나야!”
누군가 차가운 캔 음료를 볼에다 대면서 나를 불렀다. 지수 선배였다. 살짝 쳐진 눈꼬리에 웃는 미소가 귀엽고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사람. 과에서 겉돌던, 자퇴하려던 나에게 목적과 의지를 준 대상이었다.
선배가 옆으로 다가오자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돌렸다. 귀에 피가 몰리듯 얼얼했다.
‘이거 완전 티 나는 거 아냐?’ 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 내 얼굴이 원망스러웠다.
선배는 붉어진 내 얼굴을 보고 당황한 듯 다급히 양손바닥을 내보이며 한걸음 물러섰다.
“미안, 미안” 선배는 갸우뚱하게 고개를 돌리곤 ‘헤헤’ 라며 웃었다.
‘이런 해맑은 웃음을 어떻게 이겨...’ 선배에게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지만 다행히 교수님의 부름에 급하게 달려갔다.
실험이 끝나고 오후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으며 의미 없이 폰을 쳐다봤다. 전공수업과 교양수업을 들은 후 잠시 도서관에 들러 책을 몇 권 빌렸다. 자리가 있을 리 없는 만원 지하철에 무거운 백팩과 두꺼운 책 세권을 가슴에 안고 인파로 몸을 던졌다. 몇 개의 정거장을 지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타고를 반복하였다. 지하철 불빛이 깜빡 거렸다.
‘치직, 치지지직.’
어두워 졌다가 이내 다시 밝아졌다. 방송으로 뭐라고 하는데 물속에 있는 듯 주위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숨이 막혀 왔다. 서 있다가 휘청 거리는 지하철에 책을 떨어뜨렸다.
『“이번역은 치지지직,,, 이번역은 지직...치지지직.”』
어디선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수압에 귀가 막히듯 잘 들리지 않았다. 전기가 끊길 듯 깜빡이는 지하철 불빛을 뒤로 한 채 주운 책을 껴안고 지하철을 벗어났다.
인파를 벗어나 집을 향해 걸었다. 녹슨 대문, 흙냄새, 어지럽게 모여 있는 집들. 다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야경은 하늘에 떠있는 별처럼 아름다웠으나 홀로 떠있는 달처럼 외로웠다.
캄캄한 방에 도착한 나는 불도 켜지 않은 채 폰의 인공지능 비서에게 말을 걸었다. 아무 말, 쓸데없이 가벼운 말들, 누군가와 대화 하지 않으면 외로움에 미칠 것 같았다. 그렇게 고요한, 쓸쓸한 밤은 깊어져 갔다.
다음날, 당신이 살던 세계에서 한명의 성인이 실종되었다. 아무런 흔적도, 유서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처음 눈을 떴을 때, 왜 인지 몰라도 눈부신 빛의 커다란 직사각형 앞에 서있었다. 왜 이런 곳에 서있는지 알 수 없으나 내 몸은 이 빛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거? 꿈?’ 내 의지로 움직이는 것인지,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이윽고 내 몸은 커다란 빛 덩어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성장기에 몇 번 떨어지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놀이공원에서 중력을 거스르는 그 더러운 느낌을 기억하고 있다.
얼굴을 스치는 날카로운 바람과 추위에 눈을 떴다.
“콜록 콜록!”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기침에 숨을 들이킬 때 마다 폐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나는 하얀 안개 속에 들어갔다가 빠져나왔다. 구름이었다.
“뭐야? 나 왜 떨어지고 있어?”
입에서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튀어나온다. 그러다가 어제 밤에 있었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분명 어제 폰을 쥐고 잠들었었는데?......폰을 쥐고 잠들었었나?’
수많은 의문을 품은 채 중력가속도로 떨어지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하려 해봤자 현실이 달라지지 않았다.
주변에는 쇠 부스러기와 두터운 쇠판들이 함께 떨어지고 있었다. 구름을 뚫고 떨어지면서 커다란 강과 호수가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살고자 발버둥 치며 주변의 두터운 쇠판을 껴안았다. 어떻게든 공기저항을 조금이라도 만들기 위해 쇠판을 돌려 수평을 맞추려 했다.
하지만 방향을 틀자 갑작스런 공기저항으로 쇠판은 “휙” 하고 날아가 버렸고 나는 쇠판에 머리를 맞고 어지럽게 사방으로 회전하며 떨어졌다.
“철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강한 충격에 정신을 잃었다. 조금씩 물에 가라앉는 느낌을 느끼면서...
기나긴 침묵, 움츠린 정적을 깨고 캄캄하고 어두운 시야에 하얗고, 또는 노랗고, 또는 색을 알 수 없는 전기적신호가 만화경처럼 눈앞에서 사라졌다 나타났다가를 반복했다.
누군가 어렴풋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먹먹한 귀 때문에 잘 들리지 않던 그 외침은 점차 또렷하게 들려왔다.
“저...정신차려!”
‘가슴이...’
“야! 일어나봐!”
‘답답해...’
갑자기 복부가 가득 차 솟구쳐 올라오는 이물질에 한참동안 숨을 멈춘 채 뱃속의 것들을 게워냈다. 투명하고 파란 위액에 실처럼 엮인 핏줄기 몇 가닥이 함께 고여 있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과 근육통, 피로감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녁노을 지는 적막한 숲, 고요한 호수 그리고 젖은 소녀.
‘응? 소녀?’
지끈거리는 두통에 눈앞은 술에 만취한 것처럼 빙글 빙글 돌았다. 이해되지 않는 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눈앞의 소녀에게 말을 건네려 다가갔다.
“우웁!”
속에서 올라오는 역류를 참지 못해 급히 몸을 돌렸다.
“이 자식! 날보고 토한 거야?” 그 모습을 본 소녀는 분해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한 대 쥐어박으려 했지만 그를 구하느라 힘을 다 소진한 탓인지 다리가 풀려 말을 듣지 않아 주저앉아 있었다.
하나는 어지러움과 현기증으로 잔디에 주저앉았다. 이 황당한 사건에 대해 말을 터놓을 사람이 필요했다. 어지러움에 의한 고통이 어느 정도 가실 때 다시 고개를 돌려 소녀를 보았다. 정황상 그를 구해준 것 같은 이 소녀는 작은 얼굴에 오똑한 코, 긴 속눈썹, 붉게 상기된 볼, 가쁜 숨을 진정 시키느라 들썩이는 작은 어깨, 이국적인 푸른 파스텔톤의 머리칼, 연하고 투명한 블루 토파즈 같은 맑은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핸드폰을 꺼냈다. 매일 같이 만지는 핸드폰에서 작은 위화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불안감이 더 컸기에 위화감은 이내 사라져 버렸다. 방수기능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일까? 위치도, 전파도, 통신도, 그 무엇도 잡히지 않았다. 불안감은 더욱 더 커졌다.
‘고장? 여긴 도대체 어디야?’ 전원만 들어오는 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하늘에서 떨어져 호수에 빠졌음. 저 소녀와 나는 흠뻑 젖어있음.’ 하나는 다시 상황을 정리 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저애가 나를 구한 건 확실하네.’
하나는 외국인일 것 같은 소녀에게 다가가 말한다.
“Do you speak english?” 자신감 없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생각해보니 한국인에게 한국말 아냐고 묻는 꼴인가? 얼굴이 화끈 거렸다. 그러나 하나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기울인다. 표정을 보니 당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겠다는 표정이었다.
‘내 발음이 그렇게 구린가.’
“흠! 험! 험”! 하나는 으쓱해 하며 머리를 긁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뭐라는 거야?” 그녀가 뜬금없이 한국말을 내뱉었다.
‘뭐야? 한국말 할 줄 알잖아?’
“저기 혹시 내말 알아들을 수 있어?”
“그럼 못 알아듣겠냐?”
‘얘는 말투가 왜 이리 공격적이냐?’
“혹시 네가 나를 구해준거야?”
“응.”
“고마워. 구해줘서.”
“그래. 그런데 너 어디서 떨어 진거야?”
생각보다 유창한 한국말에 하나는 조금 당황했다.
“어...음...나도 그게 궁금해. 어제 분명 집에서 잠들었는데 잠에서 깨니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더라고.”
“풉 으흐흐흐흣.” 그녀는 실소하며 배를 잡고 웃는다.
‘이거 몰래 카메라? 장난? 아니면 혹시 실험?’ 정리되지 않는 상황에 의문만 커져갔다.
“너도 혹시 나처럼 떨어 진거야?” 그는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푸흡! 하늘에서 떨어지는 사람 처음 봤어. 자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사람이라니! 푸흡!”
“하...”
하나는 한숨을 쉬며 폰을 꺼냈다. 역시 어떠한 전파도 닿지 않았다. 고장이란 생각에 애써 폰을 손바닥에 툭툭 쳤다.
“아오! 미치겠네.” 폰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자 짜증이 입 밖으로 흘러 나왔다.
“혹시 여기가 어디야?”
소녀는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이 마냥 신기 한지 웃으며 말했다.
“하늘의 문.”
“응? 어디라고?”
“저 호수 이름이 하늘의 문이라고.”
“아 장난치지 말고.”
그녀의 입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하늘의 문 호수가 라고.”
‘우리나라에 하늘의 문이라는 호수가 있었나? 거의 한자니까 문천지?’ 하나는 습관처럼 폰을 꺼냈다가 표정을 찡그리며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혹시 여기 어느 지역이야?”
“5방 8부였나? 프랑 지역.”
“뭐, 뭣? 잘못 들었어. 다시, 다시 말해줄래?”
“프랑 지역!” 그녀는 짜증나는 듯 외치듯 말했다.
처음 들어보는 지역 명에 하나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되었다.
‘외국? 그런 것 치고 말이 너무 잘 통하는데? 외국인데 이 외국인이 그냥 한국말을 잘하는 건가?’
“혹시, 여기 어느 나라야?”
소녀는 황당한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가 이내 포기한 듯 입술을 양가로 늘어트리곤 말했다.
“데르키온”
‘데르키온, 데르키온, 데르키온... 내가 아는 나라 중에 데르키온 이라는 나라는 없는데? 뭐하는 나라야?’
하나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너 한국 알아?”
“그게 뭔데? 먹는 거야?”
“아니...아니... 그런데 한국은 모르는데 한국말은 어떻게 알아?”
“응? 무슨 말?”
“지금 네가 사용하는 언어! 어디서 배웠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너 이상하다. 언어를 어떻게 배워? 언어를 배운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데?”
“언어를 누군가에게 배웠으니까 사용할 거 아냐?”
“뭐야? 너 지금 짜증내는 거야? 기껏 구해줬더니!” 그녀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미안.”
“말 같은 거,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하는 걸. 뭘 배운다고 하냐?” 누가 봐도 하나가 연상이었지만 이국적 소녀는 대놓고 말을 놓았다.
‘이 동네는 학교도 없나? 어쨌든 여기는 한국이네?’ 하나는 섣부른 결론을 내렸다.
하나는 이내 소녀를 측은하게 보았다.
‘얘, 정상이 아니구나?’
‘일단 여기가 어딘지만 알면 찾아갈 수 있어.’
“너... 이름이?”
“록펠싱.” 이국적인 외모에 걸 맞는 이국적인 이름이라 생각했다.
“사람들 모여 있는 곳 알아?”
“마을?”
“그래 마을. 그곳으로 날 안내해줄 수 있어?”
“응! 따라와.” 그녀는 기분이 풀렸는지 이내 발랄하게 앞장서 걷는다.
몇 걸음을 내딛은 록펠싱이 하나를 향해 뒤돌아 물었다.
“넌 이름이 뭐야?”
“하나. 강하나”
“헤에. 신기한 이름이네.”
‘네가 더 신기한 이름이거든?’ 하나는 속으로 말하며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10분쯤 걸어갔을까? 크고 작은 논과 밭이 나왔고 아기자기한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이 눈에 보였다. 마을에 들어서자 40대 중반 쯤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다가와 물었다.
“으잉? 니 여서 뭐하노? 흠뻑 젖어가꼬. 자는 또 누고.”
“주웠어요. 호수에서.”
“호수? 거 빠졌나? 니 집은 어데고?”
‘잘은 몰라도 집의 위치를 묻는 거겠지?’
“저의 집은 서울시....”
갑자기 머리가 아파왔다. 지끈 거리는 두통에 머리를 움켜쥐었다.
‘나의 집은... 내 집 주소는...’
기억나지 않았다. 바로 어제까지 잠들었던 집의 주소가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아주 오래된 기억처럼.
“자 머리 아픈갑네. 일단 드가가 쉬라. 야야 니가 자 델고 가가 눕히 줘라. 글고 옷도 좀 갈고.”
낮선 방언에 몇 마디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록펠싱은 따라 오라는 손짓을 했고 하나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그녀의 뒤를 따라 갔다. 그녀를 따라 별장 같은 2층 목재 집으로 들어갔다. 1층에는 원형 테이블과 의자가 많았는데 마치 음식점 같았다. 그녀가 2층으로 향하는 구석계단으로 안내했다. 목재계단은 밟을 때 마다 삐끄덕 거리는 소리가 났다.
‘집에 가고 싶어. 여기는 어디야? 쉬고 싶다. 집에서 자고 싶다.’ 그녀를 따라 방안에 들어온 하나는 오한이 드는 몸을 움츠리며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뭐라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의식이 점차 멀어져 갔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미 초저녁이었다. 이불을 걷었는데 생전 처음 보는 속옷밖에 걸치지 않은 것을 보고 다시 이불을 몸에 휘감았다.
‘음...설마~ 아니겠지.’ 하나는 방을 둘러보았다. 나무로 된 서랍장과 침대, 작은 테이블과 의자 두 개뿐이었다. 촛불로 불을 밝힌 게 골동품 같은 느낌이다. 하나는 옷을 찾기 위해 서랍을 열었다.
‘......’ 못 본 걸로 하자 아무래도 그녀의 방인 것 같았다. 서랍을 닫자 맨 아래서랍에서 끌려나온 분홍빛으로 물든 끈이 보였다.
‘뭐지?’ 궁금함을 이기지 못한 하나는 맨 아래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는 피로 물든 듯 빛바랜 채 가위로 마구 잘라 놓은 것 같은 셔츠와 펜던트가 있었다. 펜던트의 앞면엔 매인지 독수리인지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뒷면엔 록펠싱 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이 록펠싱이었지?’ 하나는 펜던트를 넣어둔 채 올라왔던 계단으로 내려갔다. 아래층으로 다가갈수록 환해졌고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테이블은 거의 가득 차있었다. 옷이나 얼굴에 흙먼지가 묻은 남녀노소가 술과 음식을 먹고 있었다. 록펠싱은 분주하게 음식과 술을 나르고 있었는데 술 취한 마을 청년들이 록펠싱을 꼬시고 있었다. 그러다가 맡은 편의 소녀가 버럭 거리며 그 청년을 한 대 쥐어박았다. 이런 차림으로 사람들 앞 나타났다가 신고당할 거란 생각에 하나는 몸을 돌렸다. 최대한 조심히 계단을 밟으려 했으나 하나의 마음을 몰라준 나무 바닥은 삐끄덕 소리를 냈다. 생각보다 큰 소리에 술을 마시던 몇몇 마을청년과 록펠싱의 눈은 하나의 뒷모습을 향했다. 속옷 차림의 남자... 마을 청년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오늘 숙박으로 온 손님 있어?”
워낙 외곽의 산골 마을이라 숙박하는 손님은 극히 드물었다. 소금이나 농기구 파는 보따리상이나 마차상인이 드물게 마을에서 묵곤 하였다. 그러나 오늘 이곳으로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을 청년들 모두 고개를 저었다.
“록펠싱에게 남자가!!!” 마을 청년 중 하나가 크게 외쳤고 청년들 다수가 충격 먹은 듯, 나라를 잃은 표정을 지으며 절규했다.
“으이그...”
록펠싱은 쟁반을 품에 안으며 이를 갈았다. 그런 록펠싱의 마음을 모르는 듯 하나는 2층 록펠싱의 방 침대에 다시 누웠다. 누군가 계단으로 올라오는지 삐끄덕 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아니 나무계단이 부서질 듯 “쿵쾅” 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문이 “벌컥” 열렸다. 록펠싱이 다소 짜증난 표정으로 다가와 옷가지를 침대로 “휙” 하고 던졌다.
“으... 너 말야. 그런 꼴로 내려오지 말라고!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자꾸 잡아서 물어보잖아! 어휴...” 그녀는 허리춤에 오른손을 얹고 한숨을 쉬었다.
“지금 한창 바쁘니까 2시간 정도는 걸릴 거야.” 라고 말하곤 다른 한손에 있던 스튜로 보이는 음식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두 시간이야!” 라고 재차 강조하곤 세게 문을 닫고 가버렸다.
스튜를 먹은 후 옷을 입은 하나는 식탁에 앉아 빈 그릇만 숟가락으로 휘젓고 있었다.
‘두 시간이라고 말했지만 두 시간 후에 내려갈 이유는 없지!’ 이미 밤은 늦었고 조금이라도 빨리 출발해야 집으로 갈 터였다. 무엇보다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게 불안했다. 삐끄덕 거리는 계단을 최대한 조심히 내려갔다. 영업시간이 끝났는지 손님은 모두 돌아간 상태였고 록펠싱은 빈 그릇을 주워 담고 있었다.
“야! 너 두 시간 후에 내려오라 했지!”
“미안 시계가 없어서.” 하나는 쓴 웃음을 지어보였다.
“쳇.” 록펠싱은 못 마땅한 표정을 지은 채, 하던 일을 계속 했다.
낮에 보았던 방언 쓰던 아저씨가 있었다. 하나는 그에게 다가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됐다. 구한 건 내가 아이고 자라 카이.” 아저씨는 밀대 질을 멈추고 말했다.
“니는 어데 아고? 우짜다 호수에 빠졌노?”
“저...그게... 저도 잘......” 본인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일을 당했기에 설명이 불가능했다.
“혹시 여기가...어딘가요?”
“브로톤 마을이제. 아~ 그 뭐시고 5방 8부 프랑 지역에 북쪽 끝에 있는 브로톤 마을이제.”
하나는 갑자기 올라오는 현기증에 머리가 어찔했다.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마을이름에 자꾸 불안한 생각이 와 닿았다.
‘내가 살던 세계가 아닌 것 같아. 하지만 말은 통하잖아?’ 있을 수 없는 현실에 자신의 일이 아닌 듯 무감각하게 잘 와 닿지 않았다. 아니 아직도 현실을 직시할 수 없었다. 록펠싱과 같이 이 아저씨도 정상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그래 내가 모르는 변방 마을이 있을 수 도 있어. 내일 마을을 벗어나 두 눈으로 확인해 보겠어.’ 라고 다짐 했다. 일을 마친 록펠싱이 손에 묻은 물을 하나의 등에 닦으며 말했다.
“다했다~아!”
등이 축축해진 하나는 애써 짜증을 숨기며 한숨을 쉬었다. 불안감이 스트레스를 가중시켰다.
“바람이나 쐬러 가자!” 록펠싱은 다짜고짜 하나의 손을 잡아 당겼다. 사춘기 이후 이성과 손잡을 일이 없었기에 여자에 대한 면역이 부족한 하나는 귀까지 빨개진 채로 당황해 하며 그녀가 이끄는 데로 끌려갔다.
마을을 벗어난 밤길은 온통 캄캄했다. 이렇게 어두운 길을 그녀는 마치 익숙하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걸어갔다. 논과 밭을 벗어나자 나무가 무성한 수풀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풀과 흙 내음이 코에 자극을 주었다. 곤충들과 야생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니, 잠깐만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하나는 뒤돌아 마을 쪽을 쳐다보았다. 마을의 불빛은 아주 작아졌다. 동시에 달빛은 우리를 밝게 비추어 주었다.
‘여기도 달이 있구나...’ 은하수처럼 보이는 비단 같은 아름다운 하늘의 강물.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별을 본 건 아마 처음인 것 같았다.
“따라와 보면 알아.” 그녀는 장난 끼 가득한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찡그리며 웃었다.
‘쏴아아아아’ 시원하고 차가운 소리가 들렸다.
‘물 흐르는 소리?’ 곧 그들의 앞에 넓고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은,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 같은 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밤이라 그런 것인지 강은 마치 거대한 뱀처럼 꿈틀거리며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그녀는 하나의 손을 놓고 강가로 뛰쳐나갔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녀가 다짜고짜 지른 고함을 지른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녀는 지칠 때 까지 한참동안 고함을 질렀다.
‘어이? 내가 옆에 있다는 걸 잊어버림?’ 하긴 평소에도 난 존재감이 없었지.
드디어 지쳤는지 풀썩 주저앉았다. 적막 속에 물 흐르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침묵을 깨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너도 질러.”
“뭘?”
“고함. 지르라고.” 그녀는 하나를 다그친다.
‘가만히 있는 나는 왜?’ 하나는 띠꺼운 표정을 지었다.
‘난 고함지르고 싶지 않은데.’
“너도 답답한 것 있을 거 아냐? 실컷 지르고 나면 시원해진다고.” 그녀는 개구쟁이처럼 익살스런 표정으로 찡그리며 웃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가슴속에 눌려있던 억압감과 불안감이 솟구쳐 올라왔다.
하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외쳤다.
“집에 가고 싶다! 집에 보내줘어어어!!!” 하나가 외치자 갑자기 옆에 있던 록펠싱도 외쳤다.
“나도! 나도 집에 가고 싶다아아아!!!”
하나는 놀라며 물었다.
“너...너 네 집... 거기 아냐?”
“아닌데?” 록펠싱은 게스츠름한 눈으로 하나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잠깐 동안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녀는 강가에 쪼그리고 앉더니 옆자리의 평평한 잔디 위를 손으로 ‘팡팡’ 내리쳤다.
‘이거 앉으라는 손짓이지?’ 하나는 그녀의 옆에 말없이 앉았다.
그리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 기억을 잃었어...” 그녀는 강가로 시선을 흘긴다.
하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아까 일하던 그곳에 있던 ‘한스’ 아저씨가 내 생명의 은인이야.”
“아마 6개월 전 쯤 일거야. 아저씨가 강가에 떠내려 온 걸 구해준 게.”
“난...난 내가 누군지 몰라. 내 이름이 록펠싱인지도... 단지 그 이름이 적힌 펜던트를 목에 걸고 있어서 내 이름일 거라고 짐작할 뿐이야.” 그녀는 자신의 목 가슴 부분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녀의 방에서 봤던 새문양의 펜던트가 떠올랐다.
“나...나도... 여긴 내가 살던 곳이 아니야.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나는 지수 선배를 떠올리며 말했다.
“네가 오기 전까지 잠시 잊고 있었어. 기억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려 했었는데...”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그래?” 기억이 없다는 건 어떤 느낌인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같이 가보자. 다른 곳으로, 다른 마을이든, 도시든, 다른 나라든 내 기억을 찾을 수 있을 만한 곳으로. 어디든 가다보면 기억나는 곳이 있겠지. 날 아는 누군가를 만날지도 모르고. 너도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하잖아?”
‘아니 나는 왜 엮어 들어가는 건데?’
“내일! 내일 떠나자. 아저씨께 작별 인사는 해야 하니까.”
“난 어차피 내일 갈 거였는데? 넌 괜찮겠어?” 왠지 혹이 하나 붙은 느낌이었다.
“응. 망설여지면 저질러버려라! 라는 말도 있잖아?”
“그런 말이 있어? 고민하지 말고 나아가란 말인가?”
하나는 가볍게 생각하였으나 적어도 록펠싱은 내일 여행을 떠날 거라며 굳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