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워!”
자그마한 기쁨 개뿔.
무겁다고.
무거워.
이렇게 무거울 거면 좀 더 큰 기쁨 바랄 걸 그랬다!
예원은 뭐가 그리 신났는지 연신 팔을 집어당기면서 “요즘 무슨 게임해?” “같이 하는 게임 있으면 친추할까?” 그런 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귀찮아져서 대충대충 대답하던 시원은 갑자기 확 체중을 싣는 예원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예원이 걸음을 딱 멈추었다.
물론 팔은 잡은 채로.
턱, 하고 당겨져 상반신만 기울어져 넘어질 뻔 했다.
시원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여자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너는 얼마나 가볍냐.
레파토리가 뻔해.
그래도 무거운 건 무겁다고.
하지만 예원의 대사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너 지금 내 말 안 듣고 있지?”
하아아아아아아!?!?!?!?!?
뭐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내가 왜 그따위 소리를 들어야하냐고!!!!
내가 니 남친이냐아아아아아아!!!!!!!!!!!!!!!!
세연이한테도 들은 적 없는데!!!!!!!!!!
뭐, 그야 그렇지.
잠시 눈물 좀 닦고.
“아니. 듣고는 있는데. 좀....... 너무 잡아당기는 거 아냐?”
“어, 그랬어? 미안.”
그러면서도 계속 매달려 있지마!
“.......너 좀 대단하다?”
시원은 머리를 긁으면서 말했다.
오늘 그런 일들이 있었다는데 정말 멘탈 갑이구나.
방탄장갑이라도 두른 거 같네.
시원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손 잡아주러 갔을 때도 웃고 있었고.
“뭐가?”
한예원이 갑자기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달라붙었다.
시원은 상반신만 옆으로 빼면서 얼버무렸다.
“아니...... 뭐.......”
“뭐? 뭐? 나 대단해? 굉장해? 뭐가 그리 놀라워?”
니 존재 자체가 놀랍다!
칭찬한 거 아니거든!?
뭐가 굉장해? 벗으면 굉장하냐?
투덜투덜.
투덜투덜.
시원은 투덜거리고 싶어졌다.
재능의 증거란 게 실재한다면 이게 바로 그것이겠지.
성격조차도 일종의 재능.
분명 1년은 넘게 고생 했겠지.
3차 예선 심사까지 통과해 올라온 게임.
아무리 적게 잡아도 그 정도는 걸린다.
그토록 오랜 시간동안 포기하지 않고 만들었다.
인디 게임이다.
돈을 받아가며 만드는 것도 아니다.
학생 신분에 시간을 쪼개가며 그저 좋아서, 좋아서 만든다.
나도 그랬다.
10월, 1차 심사 탈락 통보가 왔던 날.
빈 동아리 방에서 그냥 멍하니 메일을 읽었다.
탈락하리란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시간에 맞추지 못했다.
원래 만들려고 했던 분량의 반도 못 했다.
계획했던 대로 완성시켰어도 통과할지 말지 모르는 일인데 탈락은 당연한 결과였다.
멋지게 만들어진 게임쇼 로고와 정중한 문장들과 관공서 양식과 싸인.
현실이었다.
충격이었다.
알고 있었던 일인데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도 충격적이었다.
시원은 생각했다.
그런데 한예원은 어떤가?
3차까지 통과해 본선 심사를 눈 앞에 두고 떨어졌다.
심지어 가족과 그런 일도 있었다.
나 같으면 도저히 이렇게 웃지는 못할 것이다.
웃기는 커녕 말 조차 꺼내기 힘들었겠지.
정말 대단하다.
그래도 매달리지 좀 마!
칭찬에 굶주린 짐승 같은 녀석아!
“니 체중이 대단하다고. 좀 떨어져라.”
“아아. 또 차가워졌다. 아깐 그렇게 다정하더니.”
“뭐, 뭐, 뭐가 다, 다, 다, 다정하다단겨?”
예원이 시무룩한 어조로 말하자 시원은 펄쩍 뛰었다.
당황해서 혀까지 깨물었다.
다정이라니 이 녀석 어휘가 너무 풍부해서 탈이다.
기획자라서 그런 거냐?
나 다정하지 않거든?
차가운 도시 남자라고.
배드애스, 괄호열고 비에이디 에이에스에스 괄호닫고, 란 말야!
“전시동까진 같이 가주기로 했잖아.”
“손 잡아주는 건 아닌데.”
“치이. 뭐야 그게.”
그 순간 시원은 깨달았다.
깨달음을 얻었다.
오빠가 되었다.
이건, 그거다.
상큼이다.
상큼이였어!
남친이 아니라 오빠였던거군!
손 잡아주는 건 아닌데, 하고 말하자마자 삘이 빡 왔다.
아, 젠장.
귀찮아 죽겠네.
여긴 눈도 없고 아스팔트라고.
경사로를 다 올라와 주차장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이녀석.
투정은 니네 사촌 오빠한테 부리란말이다.
“그럼 이거라도 들어.”
시원은 메고 있던 노트북을 건넸다.
크큭. 난 여자라고 봐주지 않는 나쁜 남자.
쿨한 도시 남자라고.
“응. 알았어~”
왠일로 예원은 순순히 대답했다.
그리고는 시원이 노트북과 함께 들고 있던 검정 비닐 봉투만 쏙 하고 받아들었다.
“들어줄테니까 계속 손 잡아줘.”
“야! 그거 말고!”
“잘 안 들리는데에? 좀 더 크게 말해줄래에에?”
아니, 이 뇬이!?
그러는데 비닐 봉투 안쪽을 눈을 찡그려가며 살피던 예원이가 탄성을 질렀다.
“이거! 이거! 연꽃님 캐릭터 열쇠고리잖아!”
“......야야야야. 그냥 넣어두지 않으련?”
“이거 어떻게 구했어?”
“샀는데?”
“미친. 진짜루?”
“진짜야.”
“헐. 대박.”
“왜? 구하기 힘든 거야?”
시원은 예원의 반응에 당황했다.
그냥 스탭 티켓 보여주고 들어가서 안내받은 대로 줄 서서 사온 열쇠고리다.
남들 보다 좀 빨리 살 수 있었을 뿐인데 그렇게 호들갑을 떨 필요가 있나?
“예매 완판. 오늘 30개 한정 판매. 나도 엄청 가지고 싶었는데.”
“헐. 30개?”
“몰랐어?”
“어... 몰랐어.”
“아니, 대체 어떻게 산거야? 설마 n사에 아는 사람있어? 아. 아니지. 그래도 힘들텐데. 연꽃님이랑 아는 사이!?”
뭐...... 그렇긴 한데.
그 연꽃님이 세연이니까.
“연꽃님 여자라는 거 사실이야? 학생이라는 소문도 있던데. 같은 학교고 막 이러는 거 아냐?”
이 녀석 갑자기 엄청나게 투머치토커가 되어버렸다.
팔은 좀 놓고 말하자.
제발 부탁인데 LA 에 살 때 부터 연꽃님 좋아했다는 그런 이야기는 꺼내지 말아줘.
“아니. 잠깐만. 예매해서 샀어. 예매자 수령 코너 있단 말야. 아는 사이도 아니고.”
시원은 대충 둘러댔다.
예매자 수령 코너?
그런 거 없다.
“얼마면 되겠니?”
열쇠고리에서 눈을 떼고 시원을 바라보는데 파킹- 하는 효과음이 예원의 등 뒤에 떴다.
눈에 이상한 하트가 생겨버렸잖아. 한예원씨.
눈에 이상한 하트가 생겨버렸잖아. 한예원씨.
“안 팔아! 야! 야! 먹지마. 먹으려 하지마! 그러다 죽어!”
이 녀석! 굉장한데! 대단한데!
하핫.
발상이 위험해.
열쇠 고리를 입으로 가져가려는 듯한 눈치에 깜짝 놀란 시원이 열쇠 고리를 낚아챘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걸까. 설마 내가 그거 그냥 먹튀할 그런 사람처럼 보여?”
“응.”
니가 애냐. 베이비냐!
으어어어. 상큼이보다 더 애잖아.
그렇게 옥신각신하는 사이 둘은 전시동 건물 앞에 이르렀다.
“뭐 먹을까?”
예원이 말했다.
“여기 음식점엔 열쇠고리는 안 팔걸?”
시원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럼 오늘은 일식으로 할까?”
예원이가 발랄하게 다시 물었다.
“어젠 열쇠고리 먹었다는 느낌으로 말하지 마. 당연히 같이 먹을 거라는 느낌으로 말하지도 마. 손도 놔. 이제 이별의 시간이다.”
“우와. 재수 없어. 짜증나.”
“짜증나면 놓으라고. 땀 나잖아!”
“같이 먹자아앙.”
“귀엽게 말해도 싫은데.”
“귀여웠어?”
“조금.”
“히잉.”
“이번 건 좀 짜증났어. 차라리 열쇠 먹는 게 낫겠다.”
“줄 거야?”
“너네 집 열쇠나 먹어.”
“우리집 도어락인데.”
“숫자도 맛있어.”
“먹어봤어?”
“그럼. 매일 먹는데. 어제 먹은 건 0.48.”
어느덧 침묵이 찾아왔다.
두 사람 모두 그걸 알아챘다.
시원은 잡혀있던 팔을 빼고 노트북을 고쳐메었다.
입을 다문 예원은 밧데리가 나간 폰처럼 멍하니 전신동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촌 오빠 기다리겠다. 어서 가봐.”
밥은 둘이서 먹으면 되잖아.
시원은 그렇게 생각했다.
“바래다 줘서 고마워.”
눈발이 흩어지는 가운데, 여자애는 탈색된 미소를 지었다.
시원은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입 안에 쓴, 아주 쓴 무언가가 차는 걸 느꼈다.
이제부터 찾아올 일들을 이 애는 어떻게 견뎌낼까.
“괜찮아?”
시원이 물었다.
그러자 마치 멈춰있던 심장이 다시 뛰기라도 한 것처럼 예원의 표정이 달라졌다.
“무슨 소리야. 내가 누군데.”
활짝 웃는 얼굴.
나, 한예원이야.
그런 말이 들린 것만 같았다.
시원은 웃으며 돌아섰다.
떨어졌다고는 해도 본선 진출이랑 마찬가지다.
알고보면 엄청난 애.
나랑은 차원이 다른.
재능의 소유자.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예원아! 너 뭐하는 거야?!”
그렇게 돌아서는 찰나.
화가 난 듯한 목소리의 누군가가 여자애를 불렀다.
“이진 오빠?”
“팀 대기실에도 안 오고. 이제껏 남자랑 노닥거리고 있었어?”
우뚝. 시원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방금 머릿속에 스쳤던 [이제부터 찾아올 일들] 이 예고도 없이, 이렇게나 빨리 찾아왔다.
“오빠. 진정해. 그게 아냐.”
당황한 듯한 한예원의 목소리.
“메세지 봤어? 밴드에.”
남자의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 묻어있다.
“아니. 아직.......”
“......어이가 없네. 이렇게 중요한 날.”
“오빠. 내 말 좀 들어봐.”
“너나 내 말 들어. 우리 게임 어떻게 되었는지 알기나 해?”
시원은 듣고 있었다.
나완 관계없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듣고 있다.
왜? 모르겠다.
한예원의 폰과 아침에 있었던 일들.
그리고 지금까지.
우연찮게도 그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사람은 여기 게임쇼에서 나 뿐이다.
나만이 그녀가 지금 소리치고 있는 놈 못지않게 상처받았고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나?
할 자격이 있나?
애당초 남들하고 다투는 걸 싫어한다.
게임 커뮤니티의 그 협박 댓글 같은 짓이라도 했다간 스트레스로 며칠 동안 드러누울 판이다.
“리허설에서 게임 뻗었어! 그거 다 너 때문이야. 알아?”
시원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그만해.
같은 팀에게 그딴 소리 하는 게 아냐.
시원은 돌아섰다.
“니가 넣자고 한 턴제 전투 때문에 게임 뻗었다구!”
지나가던 사람들 중 몇몇은 발걸음을 멈추고 구경하기 시작했고, 몇몇은 혀를 차며 지나간다.
눈에 핏대를 세우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시원은 확인했다.
나이는 한예원의 사촌 오빠인 박현준 뻘로 보였다.
선이 가늘고 신경질적인, 전형적인 개발자 스타일.
“오빠. 미안해...... 나도 알아. 내 탓이야. 내가.......”
한예원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창백해진 입술이 말을 자아내기 힘들어 보였다.
“그래. 니 탓이지. 방금 팀장 형도 그러더라. 니가 넣은 계산식에서 뻗는 거라고. 보스전에서 뻗는 거라고. 기획서 고치라고 내가 그랬잖아!”
남자의 말에 한예원은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천천히, 천천히 한 손을 들어올린 한예원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만하라고. 걔 얼굴 안 보여? 부어오른 뺨 안보이냐고.
시원은 몸을 움직였다.
“니가 다 망친.......”
“예원아!”
예원을 부른 시원은 예원과 남자 사이로 걸어갔다.
예원은 여전히 입을 가린 채 시원을 바라보았고 남자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나랑 밥 먹기로 했잖아. 왜 안 따라와?”
시원은 예원의 손을 붙잡아 당겼다.
그대로 자리를 벗어나려는데 남자가 시원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대로 자리를 벗어나려는데 남자가 시원의 어깨를 붙잡았다.
“뭐야 넌?”
돌아보니 남자가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머리 끝까지 열 받은 상태였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신경을 집중하지 않으면 바로 토해버릴 것 같았다.
아아. 성미에도 맞지 않는 짓을 괜히 했다.
지나가던 행인 A 주제에.
시원이 고개를 떨구려는 데 잡고 있던 손에서 압력이 전해졌다.
한예원이 시원의 손을 꾸욱 눌러 잡았다.
시원은 한예원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고, 어떤 식으로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충분했다.
“그러는 넌 뭔데?”
시원은 등을 쭈욱 폈다.
남자의 고개가 그에 맞춰 올라갔다.
마른 체구였지만 기괴한 위압감이 있었다.
남자는 말문이 막혔다.
구경꾼들이 더 많아졌다.
“......예원이랑 중요한 일 이야기 중이니까...... 관계도 없는 놈이 나설 자리 아니야.”
“중요한 이야기라고요?”
“그래. 그러니까 비켜.”
“그게 이야깁니까?”
시원은 예원의 손을 끌어 뒤로 보낸 후 버텨섰다.
“이야기는 무슨, 그냥 짜증내고 있는 거더만.”
“뭐, 뭐?”
“그리고 중요한 이야기를 왜 이런데서 해요? 아저씨.”
“.......”
“쪽 팔리는 줄 아셔야지. 다 큰 어른이 고등학생한테, 그것도 여자한테 뭐하는 겁니까? 얘 얼굴 안 보여요? 무슨 일 있었구나~ 싶지 않아요? 폰 잃어버리고 아침 내내 다른 일 때문에 고생하던 애한테 뭐하는 짓입니까?”
의외로 말은 잘 나왔다.
한 번 입을 떼니 봇물 터지듯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건 논리적이지 않아.
거짓말까지 하고 있어.
그렇게 생각했지만 시원은 멈출 수 없었다. 멈추지 않았다.
“이야기 할 거면 나중에 하시죠. 지금은 저랑 선약 있으니까.”
그대로 몸을 돌려 한예원의 손을 끌고 걸었다.
붙잡거나 부르는 기색은 없었다.
성큼성큼 걷던 걸음이 어느 샌가 뜀박질로 변했다.
얼마나 뛰었을까.
“잠깐, 잠깐만.”
한예원이 부르는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린 시원은 손을 놓고 사방을 살폈다.
전시동 후문이었다.
생각보다 멀리 오진 않았다.
전시동을 반바퀴 주욱 돈 셈이었다.
거칠어진 호흡을 정리하며 예원을 향하려던 그 순간.
"우에에에에에에엑."
예원의 표정을 살필 틈도 없었다.
시원은 그대로 토해버렸다.
- 드디어 밝혀진다. 시원의 뱃속에서 이상한 소리를 내던 그 괴생명체의 정체가!
다음화도 서비스 서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