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학기가 시작하고 한 달이 지난날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진 술판을 이제는 자제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던 시기였지만 이날도 역시나 술판에 끌려가고 말았다.
시작은 저녁밥의 반주였지만 그것이 서서히 한 병 두 병 늘어나더니 종국에는 언제나처럼 먹고 죽자 식의 난장판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선배들이 언제나처럼 ‘빨리 군대가’라고 핀잔을 준다. 이에 나는 ‘특전사 들어갈 준비하고 있다’는 식의 농담과 아직 군대 안 간 선배에게 화살을 돌리는 것으로 넘기고, 동기가 계속 권하는 술은 속이 안 좋다는 핑계로 피하고, 아직 자신의 주량을 파악 못하고 주정부리는 신입생은 얼른 집에 돌려보내는 등.
내가 술을 마시러 왔는지 아니면 사람들 비위맞추면서, 술자리 뒤치다꺼리하러 왔는지 헷갈리는 술판이었다. 신입생 때부터 해온 것이니 이제는 당연하게 하고 있기는 하지만 회의감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뭐, 그래도 나쁜 것만은 아니다. 덕분에 내 돈 주고 술 마신 기억은 거의 없으니까. 아니, 까놓고 말하자면 공짜술을 마시니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지.
“꺄하하! 엄마 같아요! 선배! 엄마 같아.”
“아니, 말하자면 쟤는 아빠지.”
“그런 가요! 아빠! 어부바! 어부바!”
그래도 술주정뱅이들을 상대하는 것은 힘들다. 어부바해달라고 달라붙는 후배를 달래며 시간을 본다.
지금이……2시가 다 돼가네. 오늘은 이만 슬슬 돌아가야겠다.
“선배들, 전 내일 1교시에 수업이 있어서 오늘 이만 가볼게요.”
그러자 선배 중 하나가 정색을 한다. 짓궂기로 정평이 난 선배다.
“얌마! 가긴 어딜 가! 너만 수업있냐! 나도 수업있다!”
‘그러면 선배도 가셔야죠.’ 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내가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은 경험으로 알고 있으니까. 대신 나는 곤란함을 무마하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전공이라서요.”
“나도 전공이야!”
이 선배 글러먹었다.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인간성은 글러먹은 선배는 아니었기에 그 선배는 표정을 풀고 손사래를 친다.
“장난이야, 임마.”
그렇게 말하면서 ‘내일 1교시에 전공수업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라고 위험한 말을 덧붙인다.
이 선배 연속으로 학고 맞았다고 지난번에 말하지 않았던가? ……알게 뭐야 내 성적도 아닌데.
“그러면 조심해서 들어가라. 가는 김에 걔도 데려가고.”
선배가 말한 걔는 얼굴이 예쁘장한 데에다가 애교와 장난기가 많아서 인기가 많은 여후배였다. 학교에 입학하고 한 달 동안 고백을 열 번인가 받았다던가. 그래도 그 고백을 전부 거절하고 아직까지 솔로인 후배.
그래서 ‘이렇게 호의를 보여주면 나와 사귀어줄지 모른다.’는 식의 흑심을 품은 남자들 덕분에 아직까지 자기돈 내고 술을 마셔본 적이 없는 후배다.
“아빠! 어부바! 어부바!”
그래봤자 지금은 술이 떡이 돼서 나에게 어부바해달라는 술주정뱅이일 뿐이지만 말이다.
“그래, 업혀라 업혀.”
살짝 짜증은 나지만 그렇다고 여후배를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술에 취한 여자가 어떤 봉변을 당하는지 TV나 인터넷에서 많이 볼 수 있으니까.
내가 무릎을 굽히고 등을 보이자 후배는 ‘꺄하하’웃으며 내 등으로 뛰어들었다. 하마터면 앞으로 엎어질 뻔했다.
“야야, 조심해라. 남자한테 허리는 생명이야.”
후배의 행동과 선배의 성희롱에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지만 참아낸다. 이 정도로 짜증을 냈다면 평소 생활은 못했다.
후배를 등에 업고 선배들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다.
“그러면 전 들어가볼게요. 수고하세요.”
“야! 걔가 떡이 됐다고 덮치면 안 된다! 범죄야!”
“걱정마세요. 얘가 이상한 짓 하면 비명을 지를 테니까요.”
최후의 성희롱을 농담으로 받아넘기자 테이블에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한두 번 듣는 것도 아니니 이제는 포기했다.
술 때문에 달아오른 몸에 찬 공기가 닿으니 기분이 좋다.
“어부바! 어부바! 이히히히히!”
등에 업힌 이 녀석만 없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다.
“후~!”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몸이 힘든 건 둘째치고, 심적으로 힘들다.
여후배는 집은 학교에서 지하철로 왕복 2시간이 걸리는 곳에 있다. 막차는 이미 끊겼으니 내 자취방에서 재우는 수 밖에 없다. 술주정뱅이를 집에 들이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씻기고, 옷주고, 잠자리 마련해주고, 아침밥도 차려주고, 이불도 새로 빨아야하고 혹여나 토라도 하면 고생은 갑절로 늘어나고.
그렇다고 버리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원.
“아빠, 힘들어?”
내 한숨소리를 들었는지 후배는 술냄새 풀풀 풍기며 내 귓가에다가 말한다. 구태여 숨길 마음도 안생기니 사실을 말하자.
“그래, 조금 힘드네.”
“응, 그러면 내려줘, 아빠. 아빠가 힘든 거 싫어.”
진짜 자식이 이런 말을 했다면 참으로 기특했겠지만 지금 내 등에 업힌 것은 술냄새 풀풀 풍기는 술주정뱅이다. 그래도 그나마 귀여운 여후배였으니 다행이지 남자였다면 업어치기가 곧장 들어갔다. 아니 그전에 업지도 않았다.
그래도 내 등에서 내려가 준다니 다행이다. 사실 슬슬 힘들어지기 시작했으니까. 내려가기 편하게 아까 전처럼 무릎을 살짝 굽힌다. 땅에 발을 디딘 후배가 휘청거리자 손을 뻗어 허리를 감싸 부축한다.
“헤헤, 고마워요, 선배.”
자식에서 후배로 돌아왔나 보다. 사실 그거 들어주는 거 창피했다고.
후배는 나에게 몸을 기댔다.
“아직 어지러워서 그런데 도착할 때까지 이럴 수 있을까요?”
업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 정도를 못할까?
“그러던가.”
“헤헤.”
뭐가 좋은지 계속 실실거린다.
잘 따라주는 건 좋은데 이 정도로 잘 따라주면 부담스럽다고 해야 할까, 귀찮다고 해야 할까. 그렇다고 호의를 가지고 달라붙는 녀석에게 적당히 하라고 말할 수도 없으니……그냥 참아야지.
이번엔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쉰다. 한숨을 내쉬었다간 이번엔 또 무엇 때문이냐며 물고 늘어질게 뻔하다.
그렇게 팔 한 쪽에 짐덩이를 매단 채 집으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집 근처의 편의점 앞을 지나갈 때 나는 한 가지를 떠올렸다.
맞다. 이 녀석이 쓸 칫솔이 없지. 내가 쓰던 칫솔을 쓰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1회용으로 하나 사야겠다.
“잠시 편의점에 들렀다 가자. 네가 쓸 칫솔이 없다.”
후배는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웃지마. 정들어.
내 자취방인 원룸에 도착하자마자 반 즈음 골아떨어진 후배를 화장실에 집어넣었다. 잠시 기다리니 물소리가 들린다. 다행히 후배가 화장실에서 잠드는 사태는 피했다.
후배를 먼저 씻게 하고 그 동안 후배가 입을 잠옷(트레이닝바지와 티셔츠)과 덮고 잘 이불을 준비. 후배가 간신히 씻고 기어 나오면 이제 내가 화장실에 들어간다. 늦은 시간이기에 샤워는 생략하고 세수와 땀이 난 부분을 물로 씻는 것으로만 끝낸다.
내가 씻고 나오자 이불 위에 엎어져 있을 거라(혹은 이불 위에 엄청난 짓을 했을 거라) 생각했던 후배는 만면을 웃음으로 채우고 나에게 달라붙었다. 술 냄새…….
“아직 안 잤냐? 곧 죽을 것 같은 얼굴이더니.”
나의 물음에 후배는 멍청해 보이는 웃음을 지을 뿐이다.
“헤헤헤헤헤헤헤헤.”
웃지 말라니까.
다시 한숨을 내쉬고 후배를 이불에 눕혔다.
“이제 주무세요. 술주정뱅이 씨.”
“네~”
후배는 활기차게 대답하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불을 끄고 내 자리에 누웠다. 알딸딸하게 올라오는 알코올의 힘을 빌어 잠이 들려는 찰나.
“선배.”
잠들었을거라 생각했던 후배가 말을 걸었다.
“……왜?”
후배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물었다.
“선배는 사귀는 사람 없나요?”
하하하, 이 녀석! 하하하! 그냥 잠이나 쳐 주무시지 왜 그딴 걸 물으시나.
“그런 거 없다.”
“왜요?”
안 만드는 거야. 안 만드는 거. 안 만드는 거라니까.……젠장.
“나 좋다고 하는 사람이 없네.”
“좋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귈 거예요?”
“생각해보고. 솔로라곤 해도 나도 상대는 가린다. 이 정도면 됐지? 자라. 나 1교시 수업이다.”
억지로 대화의 흐름을 끊고 나는 후배에게서 등을 돌렸다.
시간이 흘렀다. 부족한 단열제로 인해서 옆 집에서 코를 고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그 것외의 소음이라고는 나와 후배의 숨소리뿐. 불투명한 유리로 집 앞 가로등의 불빛이 스며들어온다. 나의 의신은 서서히 잠의 영역으로 이동한다.
의식이 반쯤 잠의 영역에 도달했을 때.
“선배.”
“……또 왜?”
반쯤 잠들다가 잠이 깨서 이번엔 조금 짜증을 섞어서 대답했다. 이래서 술주정뱅이를 집에 들이는 것이 싫다니까.
술주정뱅이는 말했다.
“저 선배가 좋아요.”
“그러냐? 고맙다. 자라.”
대충 대답한다. 하지만 후배님은 나의 대답이 불만인가보다. 등 뒤에서 부스스 후배가 몸을 일으키는 것이 느껴졌다. 뒤통수에 후배의 시선이 팍팍 꽂힌다.
무시해버리고 싶었으나 무시할 수 없었기에 나는 몸을 돌려 후배를 바라보았다. 원룸 밖 가로등의 조명을 받은 후배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후배의 진지한 얼굴에서는 취기는 느껴졌으나 웃음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후배는 다시 입을 열었다.
“선배. 저 선배가 좋아요. 선배를 사랑해요.”
흠. 흐음. 흐으으음. 흐으으으으음. 흐으으으으으으으으으음.
그렇구나.
그랬구나.
어쩐지.
고백을 많이 받아도 전부 거절한 이유가 있었구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다른 사람의 고백을 거절한 거였구나.
그런데 그게 나였냐? 술의 힘을 빌어서 고백하는 거냐? 전혀 예상 못했네. 그런데 예상 못할 만하지.
“야……”
말을 하다가 목에 무언가가 턱하니 걸렸다. 나는 그것을 억지로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머리맡에 있는 생수로 목구멍을 씻은 후에 나는 말을 할 수 있었다.
“나……여자야.”
나도 여자, 후배도 여자. 그러니 선배들이 나에게 후배를 업혀 보내고, 내가 후배를 내 자취방에서 재울 수 있는 것이지. 보통 여자가 여자를 성적으로 희롱하거나 성폭행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니.
후배는 대답했다.
“괜찮아요. 저도 여자니까요.”
“아니, 그게 문제라니까.”
후배는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생각에 빠진 후배를 바라보며 나도 생각에 빠졌다. 내가 머리도 짧고 남자처럼 입고 털털한 면이 있어 남자 취급받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영락없는 여자에 이성애자다. 아무리 후배가 귀엽고 애교가 많고 나에게 고백했다고 하더라도 도저히 연애대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거절하고 싶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후배에게도 나에게도 상처를 덜 입히면서 거절할 수 있을……
후배는 갑자기 고개를 들고 나에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거기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첫키스는 과일과 캬라멜처럼 향긋하고 달콤하다고? 웃기지마.
내 첫키스는 술냄새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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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합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