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바이어던엔 처음이지? 생각보다 즐거울 거야. 여기 이모 손잡고 다니고 길 잃어버리면 안 된다.”
“웃기시네, 이 영감탱이가. 신병, 우리 3조원들하고 같이 활동하면서 모르는 부분이나 필요한 거 있으면 즉각 물어보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모함에서의 첫 아침을 맞아 부대원들 모두가 들떠있었다. 술, 오락, 연애 그 모든 것이 허용되는 낙원, 모함(母艦) 리바이어던이 바로 눈앞에 있었으니까. 수개월의 전투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젊은 몸을 얻은 보람을 만끽하기 위해 모두 다 자기만의 계획을 세워놓고 기대에 부푼 채 도킹 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더크와 가르시아도 불과 이틀 전에 불탄 시체 더미를 발견했던 일을 잊은 것처럼 시종 희희낙락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 역시 죽은 병사와 구덩이에 대한 의문을 잠시 구석에 둔 채 리바이어던에서의 계획에 집중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망할 늙은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죽은 병사의 일은 안타까웠지만, 전장에서 죽음은 일상이었다. 죽음의 역겨움은 생의 번잡함에 쉽게 쓸려나가는 법이니. 살아남은 자는 내일의 계획을 세워 또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
위선적이면 어때, 그런 도덕적인 가치를 고민하기에 나는 너무 늙어버렸다. 게다가 이 어린 육체는 깊은 생각보다 그저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원했다. 시체더미의 의문은 이 몸에 담아두기에는 너무 어둡고 무거운 주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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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도킹 통로의 문이 열리자, 밀려들어오는 밝은 빛에 눈을 적응시켜야 했다. 이 얼마나 오랜만에 보는 사람 사는 풍경인가!
도킹 통로를 나서자마자 태양광 조명이 바닥을 얼마나 데웠는지 입구에서부터 달착지근한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수많은 병사들이 떠드는 소리로 길목마다 활기가 넘쳤고 카리브 해변 모래같이 순 백색으로 칠해진 벽면에는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어 새로운 보급품들을 요란하게 광고하고 있었다. 구역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라틴 음악까지 더해지니 진짜 지구로 돌아온 듯한 착각이 느껴질 정도였다.
모함 내부라고 하면 지구 시절에는 기껏해야 침침한 형광 조명에 붉은 등 몇 개 섞여있는 수준의 인테리어가 다였을 것이다. 하지만, CDF의 모함은 완전히 달랐다. 달라야 했다. 모함은 전장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돌아온 늙은이들이 완전히 긴장을 풀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위험했다.
기나긴 여유 속에 불현 듯 전장의 공포를 실감하게 되는 병사들이 많았고, 몇몇 늙은이들은 다시 나가서 싸워야 한다는 가혹한 사실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CDF는 자살자수가 3자리 수를 돌파한 순간부터 인테리어를 모두 바꿔버리고 3S(스포츠, 성, 영화)정책을 도입하여 모함 내부를 일종의 실버타운으로 만들어버렸다. 그 정책이 얼마나 효과를 거뒀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테지.
내부 인테리어가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 더 지구 시절의 도시 모습을 닮아가고 있었다. 우리 중 가르시아의 반응이 가장 극적이었다. 기대이상의 감격이었는지 그는 한동안 하염없이 스크린만 쳐다보며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하기야 우리도 즐겁기는 마찬가지였다.
허나 이곳이 진짜 놀이동산이 될 수는 없었다. 내리자마자 간부들은 고성과 함께 입항식 준비를 시키면서 그 사실을 다시 상기시켜주었고, 우리는 필요 없는 시간을 들여가며 개미마냥 오와 열을 맞춘 뒤에 대대장의 일장 연설까지 들어야 했다.
“어쩌구 저쩌구 ...곳곳에 소속 헌병들이 있으니 어디서든 우리 대대의 명예를 깎아내리는 행동은 삼가고, 각자 주둔하는 기간 동안 아쉽지 않게 충분한 자기 정비를 잘 마치길 바란다. 이상.”
2조 조장인 마가렛 상병이 가르시아를 데리고 간 뒤에 나와 더크 상병은 더블백을 매고 교육장으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길목에서 그는 더블 백을 열더니 나에게 두툼한 봉투를 건넸다.
“이게 뭡니까?”
“지난 일 눈감아 주는 대가로 주는 몫이야. 교육 끝나고 신병이랑 나눠가져.”
봉투 속에는 유난히도 색깔이 두드러져 보이는 디오 잎들이 가지런히 압축되어 있었다. ‘우리 몫’이란 게 있을 줄은 몰랐는걸. 의외라고 생각하며 더블 백 속을 훔쳐보니 이런 봉투들이 8~9장은 더 있는 듯 했다. 내 봉투가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면 그렇지. 이런 구두쇠 같으니. 이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휘파람을 불어가며 먼저 교육장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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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 보직 교육 첫째 날은 생각보다 상당히 자유로웠다.
첫 날부터 강제 교육을 해봤자 소용이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아서인지 수많은 부스에 홍보물, 무기 시연회로 대신하면서 보직 교육보다는 모터쇼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특히나 기갑 쪽은 화려함 그 자체를 보여주었다. 최첨단 헬기나 주포 시뮬레이터를 운영하면서 병사들이 놀이동산처럼 줄을 서는 진풍경이 펼쳐졌고, 가상현실 홍보관 앞에는 유전적으로 가장 뛰어난 미모를 가진 홍보병들이 배치되어 남녀 가리지 않고 모두 모여들게 만들었다.
“젠장, 무기업체 늙은이들은 우주까지 와서도 돈을 쏟아 붓는구먼! 다들 이렇게 붐비는걸 보니 어지간히 보병이 싫긴 한 모양이지.”
더크가 푸념하듯 말했다.
“어차피 저희랑은 관계없지 않습니까, 더크 상병님. 사람 없는 부스에서 시간 좀 때우다가 오락 구역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먼저 가서 쉬고 있어. 난 저 전투선 주포 시뮬레이터 한번만 갈겨보고 가야겠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나는 더크를 뒤로 한 채 계획해 둔대로 의무병 교육 부스를 찾아갔다. 운 좋게도 외과 부스 문 앞에만 병사들이 몰려있었을 뿐, 정신과 부스 쪽은 한산하게 비어있었다. 뛰어난 육체를 가지고 온갖 죽는 소리로 불평이나 해대는 꾀병쟁이 늙은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겨우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부스 안은 갖가지 책들로 가득한 갈색 오크나무 책장들로 둘러싸인 채 은은한 베이지색을 띄고 있었다. 심하게 전형적인 인테리어지만 오랜만에 지구에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CDF내에 아직 이런 구닥다리 취향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니. 잠시 들떠 둘러보는 동안 여성 군의관은 등받이 의자에 앉은 채로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책을 좋아하는 모양이네.”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내 처지를 까맣게 잊고 있었군.
군의관은 조용히 자신 옆의 가죽소파를 가리켰다. 소파에서 받는 정신과 진단이라, CDF는 뭐든지 서양 스타일이다. 허나 불평할 거리는 못되었다. 오히려 수도 통합 병원 스타일 이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옛날 생각이 나서 그만.”
“민망해할 필요 없어. 그걸 노리고 설치한 인테리어인걸.”
군의관은 그렇게 말하고는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티 없이 맑은 녹색 미소. CDF내에 여자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웃음이었다. 중대 내에 여자 병사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머리를 밀어버린 채 싸움과 욕지거리만 늘어서 대부분 여성성을 잃은 지 오래였던 것이다.
“일레나 중위라고 하네. 자네는 정신과 지망인가?”
“아닙니다. 482대대 소속 병사입니다.”
“아, ‘망나니 사냥꾼’. 자네도 설마 꾀병 부리러 온건 아니겠지? 입실 시켜달라고 애걸복걸 하는 녀석들은 오전 동안 벌써 질리도록 봤거든.”
순조로운 시작은 아니군. 나는 차근차근 어깨의 통증과 아드레날린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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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 이야기를 들은 후, 내 기록을 살펴보며 일레나 중위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했다. 좋은 징조였다. 풀기 어려운 문제일수록 내 입원 확률은 더 높아질 테니까.
그러나 생각 끝에 그녀가 입을 열었을 때, 나의 기대는 무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미안하지만, 입실은 힘들 것 같네.”
“힘... 힘들다뇨? 하지만 이대로라면 전투 중에 사고가 나고 말겁니다. 제발 입실로 처리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그녀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은 뒤 나를 토닥이며 미소를 보였다. 아까까지는 천사 같던 미소였지만 이제는 조금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물론 자네가 꾀병을 부린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일레나 중위는 조심스럽게 이야기 했다.
“자네의 증상에는 관심이 있어. 하지만 여기서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잖나?”
“그러면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가서 다시 겪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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