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게도 소위가 원하는 애는 안 온 모양이네?”
문틈으로 복도에 선 대기자들을 힐끗 둘러본 에리카는 무표정이었지만 왠지 즐거워 보였다. 그와 반대로 알렉스는 죽음을 앞 둔 노인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역시... 지원서를 잘못 낸 게 맞단 말인가?”
“그럴 리가. 자기소개서 하나로 서류 통과한 아인데. 아무튼 이 이상 기다려 줄 순 없어. 우리는 군인이고 사관생도 지원자에게 군인다운 모습을 보여줘야지. 그 첫째는 시간 엄수.”
“시간 엄수라...”
알렉스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이미 시간은 지났다. 알렉스는 초조한 기색으로 초침이 자비심 없이 시계방향으로 도는 것을 지켜보다가 이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어쩔 수 없나...?”
“자 그럼 시작할까?”
에리카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때 우당탕 하는 소리가 복도 쪽에서 들리는 가 싶더니 누군가가 후다닥 뛰어 왔다. 세이트 데반 하이스쿨의 세일러 복 스타일의 교복을 입은 금발의 미소녀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녀의 정체는 다름 아닌 마리아 루이즈 롤랜드. 마리를 본 알렉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반면 에리카는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잠시 후 그녀의 뒤를 따라 그녀의 소꿉친구 및 수행원 로이드 블루가 맥없는 얼굴로 들어오자 에리카는 입을 삐죽거리며 무언가 중얼거렸다.
“이 학교 애들은 시간관념이 없나?”
“그렇게 볼 것만은 아니야. 당일에 통보한 우리 과실도 있으니까.”
알렉스가 열심히 변호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들은 그들을 태운 연방우주군 소속 뱅가드 호가 콜로니에 입항할 때 비로소 면접 소집 일정을 알렸다. 그 전에 미리 알릴 수도 있었지만 항로가 갑자기 변경됨에 따라 불가피한 일정조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군인은 언제 어디서나 소집에 응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돼.”
그렇다 하더라도 에리카는 어느 정도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알렉스는 그런 에리카에게 어디서 났는지 캔 커피를 권하며 달랬다.
“쟤들은 아직 군인이 아니잖아. 자 이거나 마시고 화나 풀어.”
“...알겠어. 근데 이거 아메리카노네?”
“미안. 너.. 달콤한 거 좋아하지?”
“괜찮아. 커피라면 다 좋으니까.”
에리카는 커피를 홀짝이며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캔 커피 하나에 마리아 루이즈 롤랜드 및 그 떨거지를 받아준 것이다. 알렉스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옆모습을 지켜본 후 자신의 앞에 놓인 서류를 응시했다. 물론 거기엔 금발에 초록 눈동자를 지닌 소녀의 프로필이 가장 앞에 놓여 있었다.
잠시 후 면접이 시작됐다. 우주에서는 보기 드문 미션스쿨인 세인트 데반 하이스쿨에서는 모두 4명의 지원자가 있었다. 에리카는 그중 특별히 마음에 드는 인재가 없었다. 그녀 기준에서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것은 첫째로 높은 성적이고 둘째로 품행 방정이었다. 두 가지가 충족되면 어디서 어떤 일을 하건 잘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사관생도 선발이 악명 높은 데님스 스쿨 교장의 청에 따른 것이니 만큼 적어도 중간은 하는 인물을 뽑을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이곳의 지원자들은 다른 것 차치하고서라도 성적이 탑클래스에 해당하는 인물은 없었다. 더군다나 면접이 진행될수록 에리카는 이곳 지원자들이 별 의지 없이 그냥 한 번 소신 지원했다는 생각을 점점 강하게 굳혔다.
‘어휴... 시간낭비야.’
그런 생각을 하며 에리카는 알렉스가 그토록 기다리던 금발의 소녀 마리에 대한 면접을 시작했다.
“자기소개 해보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세인트 데반 하이스쿨 2학년 마리아 루이즈 롤랜드입니다. 데님스 스쿨엔 정말로 가고 싶고요.. 그리고... 잘 부탁드립니다!
“그게 전부인가요?”
‘흐음..?’
첫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여성편력으로 악명 높은 알렉스가 노래를 부리던 만큼 미모 하나 만큼은 발군이었지만 얼굴과 달리 말솜씨는 형편없었다. 다른 지원자들이 자기소개를 할 땐 갖은 미사여구로 자신을 포장한 것에 비교하면 말이다. 예쁜 여자애들이 흔히 지니고 있는 작위적인 애교도 없었다. 오히려 꾸밈없는 순박함을 느낄 수 있었다. 성실하고 착한 아이다. 에리카는 한눈에 그런 느낌을 받았다. 커다란 초록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자신을 응시하는 것도 열의는 있어 보였다. 그러나 지각한 것은 용서할 수 없고 게다가 알렉스에 대한 반감도 있고 해서 처음부터 좋은 점수를 줄 순 없었다. 에리카는 마리를 응시하며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가족력부터 특기, 수상내역, 학교생활 등 지극히 일반적이고 단편적인 질문이었다. 마리는 중간에 버벅 되긴 했지만 그럭저럭 열심히 대답했고 큰 무리 없이 면접을 마쳤다. 그리고 마지막 자유질문. 주제를 면접자의 자율에 맡기는 최후 질문으로 이것에 의해 당락이 판가름 난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중요한 질문이다. 에리카는 자기소개서를 훑어보며 마지막 질문을 했다.
“자기소개서를 보아하니 2급 모빌슈트 운용 자격증이 있네요. 게다가 학교에서도 모빌슈트 관련 서클에서 활동한 것 같기도 하고."
"네! 모빌슈트에 관해선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 있어요!"
"모빌슈트 파일럿이라고 되고 싶다고 했죠?”
“네!”
“파일럿은 위험하기도 하고 고되기도 한데 왜 지원했을까요? 라고 묻고 싶지만 정말 하고 싶은 모양이네요?”
“딱히 이유는 없어요. 다른 애들은 전쟁이라면 진저리를 치는데 전 좀 이상한 가 봐요.”
“네에~.”
“그런데 정말 하고 싶은 걸요.”
“왜 하고 싶을까요?”
“멋있잖아요. 아빠가 말씀하길 모빌슈트는 동시대의 전장을 지배하는 여왕이라고 했어요.”
그 말을 들은 알렉스는 피식 웃더니 대화에 끼어들었다.
“여왕이 되고 싶다 이거군요. 굳이 여왕이 되고 싶다면 다른 방법도...”
그러나 에리카가 손을 내저어 그의 말을 가로 막아버렸다. 알렉스는 고개를 여러 차례 가로저으며 한동안 싱겁게 히죽거렸다. 에리카는 서류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은 후 말했다.
“에라스무스 왈, 전쟁은 좋은 것이다. 그것을 경험하지 않은 자에게는. 롤랜드 양은 단순히 멋있다고 해서 매료된 거 같은데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아요.”
“그런가요.. 그럼 면접관님은 파일럿인가요?”
“아뇨. 하지만 사관학교 동기들 중에 파일럿이 많아요. 꽤요. 우리 같은 여자들도 있죠. 그런 애들한테 이야기를 전해 들어요.”
“..네.”
“모빌슈트를 조종하며 우주를 누비는 것, 정말 매력적이죠. 하지만 하루종일 모빌슈트에만 탑승할 순 없죠. 그것은 파일럿의 주 임무지만 모든 일과를 가리키는 건 아니거든요. 군인의 하루는 속박과 단조로움 그 자체에요.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야 하고 밥도 주는 것만 먹어야 하고 사이 나쁜 동료를 매일 봐야 할뿐더러 상관의 명령엔 무조건 복종해야 하죠. 특히 우주함대에 배속된다면, 그것도 경순양함급에 배치되면 열악한 시설과 협소함에 신경쇠약을 호소하는 사관이 속출해요. 특히 여자라면. 더욱 견디기 어렵죠. 왠 줄 알아요?”
“...아뇨.”
“남자들 밖에 없거든요. 여자들 사이에서 생활하는 것과 남자들 사이에서 생활하는 것이 주는 스트레스는 종류도 강도도 다르죠. 롤랜드 양도 여성이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죠?”
거기까지 말한 후 에리카는 마리의 반응을 살폈다. 마리는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듣고 있었는데 머리카락으로 가리운 음영 아래 드러난 연분홍빛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에리카는 다음 말을 하려다가 마리의 입술이 천천히 열리는 것을 보고 기다렸다.
“약해빠졌어요.”
“네?”
“약해빠졌다고요. 그런 것도 못 견디면서 파일럿 지망이라니.”
“글쎄요. 현실과 이상과의 괴리는 늘 있는 법이니.”
“아뇨. 전 두려워하지 않겠어요. 전 반드시 내가 하고 싶은 것 하고야 말거예요. 누가 뭐라고 하든, 가로막든!”
그 말은 에리카와 알렉스 두 사관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다. 그녀의 눈과 목소리, 그리고 전신에 서린 기도가 구구절절한 설명보다 강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알렉스는 에리카의 팔을 팔꿈치로 툭툭 치며 속삭였다.
“강단 있는데? 니가 좋아하는 타입 아냐?”
에리카는 알렉스를 무시하고 마리를 응시했다. 빠져들어 갈 것 같은 에메랄드빛의 눈동자 속에 감춰진 무언가를 들여다보기 위해 숨을 죽이고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렇게까지 해서 이루려는 게 뭔가요? 목적이 있을 거 아니에요? 아니면 롤모델이 있거나.”
“네! 있어요! 그렇게 되고 싶은 사람이.”
“그게 누구죠?”
에리카는 지금까지 회자된 수많은 전쟁 영웅들을 떠올렸다.
‘아므로 레이나 레빌 장군은 아니겠지? 너무 상투적인데.’
“전 붉은 혜성... 샤아 아즈너블처럼 되고 싶어요!”
그 말을 들은 직후 알렉스와 에리카는 약속이나 한 듯 서로 마주봤다. 둘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제야 자신이 실언을 한 것을 안 마리는 풀이 죽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잠깐의 무거운 침묵이 있은 후 에리카가 입을 열었다.
“...다른데 가서 그런 말을 하면 안돼요. 특히 연방 군인 앞에서는.”
“죄.. 죄송합니다!”
“알면 됐어요. 그의 이름은 마치 금기와도 같아요. 그의 공과 사,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를 팔아먹으려는 협잡꾼이 우주의 먼지만큼이나 많거든요.”
“하지만 전.. 그저!”
"무엇보다 그는 지구 그 자체를 멸하려고 했어요. 본인의 진의가 무엇이든 간에."
"...네."
“일단 면접을 종료하겠어요. 나머지 두 분을 평가한 후 늦어도 내일까진 결과를 통보해 드릴께요.”
면접을 끝낸 마리는 온 몸이 진이 빠진 듯 무기력한 얼굴로 비틀거리며 면접장을 나섰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로이드가 그녀를 맞이했다.
“...쫄딱 말아먹은 모양이군.”
딱히 로이드가 감이 날카로운 건 아니었다. 사색이 된 마리의 얼굴을 보면 누구나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으... 실수를 해버렸어!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마리는 자신의 면접 과정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마지막 부분을 들은 후 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퉁명스레 말했다.
“너 진짜 쫄딱 말아먹었다.”
“그렇지? 그런 거지? 내가 그렇지. 뭐. 흐흐흐흐흐. 흐하하하하하하!”
마리는 허탈한 표정으로 미친 듯이 웃어댔다. 로이드는 쓴 웃음을 지으며 이상하게 쳐다보는 행인들의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어이.. 그만해.”
그 순간 콜로니 전역에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급전입니다. 지금 현재 다카르 소재 연방 의회에서 쿠데타 발생. 헬리오스 포론 대령이라고 주장하는 인물의 연설을 지금 송출하겠습니다."
곧 스크린에 한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육전용 위장패턴 군복을 입고 베레모를 쓴 강인해 보이는 인상과 신사적인 기풍을 함께 간직한 사나이였다. 상반신만 화면에 노출되었지만 떡 벌어진 어깨와 화면이 좁아 보일 정도의 비율로 미루어 상당한 거한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는 카메라에 시선을 두지 않고 아래에 놓아둔 연설문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스피커 너머로 희미하게 포성과 총성 그리고 누군가의 외침이 노이즈처럼 섞여 들어왔다. 마리는 불안한 눈빛으로 그것을 지켜봤다. 잠시 후 헬리오스의 잿빛 눈동자가 화면 정중앙에 고정되며 연설이 시작됐다.
"친애하는 지구 그리고 우주의 인류동포들이여. 오늘 본관이 이 자리에 선 것은 흔해빠진 정의니 대의니 하는 덧없고 추상적인 이데올로기를 운운하기 위함이 아니다. 본관은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위협 그리고 장래에 다가올 대파국을 막기 위해 오늘의 거사를 결행한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우리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어떤 흑막들이 어느샌 가 연방 여기저기에 스며들어 어두운 그늘을 만들어냈다. 아마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일반 시민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그다지 설득력 있게 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흑막의 기원이... 지온의 망령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지구권은 또 다시 무차별적인 파괴와 살상에 노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보다 더욱 두려운 것은 그들이 우리들을 왜곡된 우상에 예속시키고 굴종시키는 것이다. 그게 바로 본관이 여기 서 있는 이유이다. 본관은 연방에 거스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연방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연방의 뿌리 밑에 기어들어가 근간을 좀먹는 사악한 자들을 척결하기 위해! 두 번 다시 이 땅, 그리고 우주에 지크 지온이라는 저주받을 말이 울려 퍼지지 않기 위해!"
***
신조전함 뱅가드. 넬 아가마 후속 클래스로 진수된지 3개월도 채 되지 않는 뉴페이스다. 함장은 이런저런 전과가 있는 42세의 연방군 대령 미카엘 갈리반 리카르도 에스테반. 최근 주위에서 기적의 에스테반이라 불린다. 그 수많은 오점에도 불구하고 용케도 대령 진급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방송을 지켜보다 한마디 툭 던졌다.
"아 저놈. 나 저놈 본 적 있어. 아주 대단한 친구지. 음.. 아주 대단한 친구야."
그러자 옆에 있던 부함장 줄리안 헨드릭 소령이 그를 돌아다보며 물었다.
"어디서 보셨는데요?"
"그리프스 전역 때."
"함장님은 그... 쪽 출신이었죠?"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어. 출신은 지온놈들 개 잡듯 때려잡던 순혈 지구연방군이야. 티탄즈엔 조금... 그러니까 잠깐 파견 나간 걸로 치자고. 자네라도 안가고 버틸 수가 없었을 걸. 일단 난 말이야. 1년 전쟁 때 쟈미토프 중장 밑에 있었고 무엇보다 간지가 났잖아. 옷도 검은 거 쫙 빼입고. 목에 힘주고 다닐 수도 있고. 특히 옛날 상관노릇 했던 놈 앞에서 검은 옷 입고 대가리 딱 처들고 똑바로 쏘아보며 티탄즈는 지구연방군 1계급 이상에 준한다라고 말할 때 기분은... 캬... 말로 설명할 수가 없지!"
"그런데 왜 거기서 나오신 겁니까?"
"나온게 아니라 배신을 때린 거지."
"왜요? 아깐 안 가고는 못 뻐기겠다고 하시더니."
"뭐.. 있어 보니까 곧 망하겠더라고. 쟈미토프 중장은 날 기억도 못하지 어디서 굴러먹은 지도 모르는 새파란 양아치놈이 떡하니 양 옆에 미인들을 끼고 설치는 꼴 보고 있자니 배알이 꼴리더군. 내가 생각해도 타이밍을 잘 잡았지. 자고로 말이야. 배신을 때릴 때도 타이밍이 중요한 거지. 좀 어려운 쪽에 붙어야 대접이 좋은 법이라고. 그러니까 대령을 달았지."
"아.. 네."
"나중에 티탄즈 망하고 흡수될 때 거기 남아 있던 놈들 보라고. 그땐 좋게좋게 말해도 전부 옷 벗었잖아! 지금 그놈들 뭐하는 줄 알아? 연금이나 받아먹고 고철이나 주으며 산다고!"
"그보다... 이 이야기는 헬리오스 포론 대령 때문에 나온 거 같은데요."
"아.. 그래. 그놈. 그리프스 전역 때 같은 배를 탔었는데 적전에서 양심적 집총거부를 한 아름다운 마음씨의 사나이이지. 뭐라던가? 같은 연방군인 끼리는 죽일 수 없다던가? 그래놓고는 나중에 네오지온 놈들이 나타나니깐 같은 인류끼리는 죽일 수 없다고 개소리 치더군. 난 말야. 나보다 저놈이 어떻게 대령을 달았는지 그게 더 궁금해."
"어련하시겠습니다."
그때 함교에 알렉스와 에리카가 급하게 들어왔다. 에스테반 함장은 곁눈질로 그들을 보다가 툭 던지듯 말했다.
"그래. 뉴페이스는 데리고 왔나?"
"아직요."
에리카가 답했다.
"그보다 어떻게 된 거죠? 이런 일이 생겼는데 스크램블도 발령안하시고. 방송 보고나서야 이쪽으로 복귀를 시작했습니다."
"뭐긴 뭐야. 또 싸이코놈 한 놈 나선거지. 조용하다 싶으면 꼭 한 놈씩 나타난다니까. 요즘엔 그게 패션이잖아. 그보다 알렉스 중위. 사오라는 건 사왔어?"
"네. 함장님."
알렉스는 품안에서 병을 하나 꺼냈다. 갈색 유리병에 담긴 위스키였다. 그것을 본 에스테반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알렉스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 보였다.
"잘했어. 역시 위스키는 미국식으로 만든 게 최고지."
"스카치위스키는 스코틀랜드라는 곳의 술입니다만?"
에리카가 정정했다.
"아무튼! 헬리우스니 뭐니 하는 놈은 신경 쓰지 말고 빨랑 신입이나 데려와. 그 영감쟁이는 기다리는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
"알겠습니다."
"어디로 면접 갔나? 시나프스 베이 하이스쿨?아니면 세인트 데반?"
"네. 일단 거기만 돌았습니다."
"그럼 거기서 추려."
"네? 그럼... 다른 학교는요?"
"애들 고만고만하다니까. 걍 빨리 뽑아. 요즘 파일럿 지망이 그렇게 없다면서? 파일럿 지망생 뽑으면 되겠구만."
"대충대충 선발하자고 저희들이 이 배에 탄 건 아니잖아요? 함장님."
에리카가 정색을 했다. 그러자 실실 웃던 에스테반도 미소를 지우며 자못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건 농담이고.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해. 빨리 뽑아서 귀환해야 돼."
"하지만.."
"이 배에 뭐가 든 것 정도는 귀띔으로 들었겠지?"
"....네."
에리카는 고개를 숙였다.
"그럼 당장 가서 데려오게. 입에 침 질질 흘리지 않고 눈에 초점만 또렷하다면 누구든 괜찮아. 그 영감하고 싸워주는 것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전 여전히..."
에리카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러자 에스테반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경미한 분노가 깃든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에리카 스타이너 중위. 니가 어디 소속이고 니 직속상관이 누구던 내 배에 탄 이상 내 배의 크루고 너의 캡틴은 나다."
그의 호통에 일순 브릿지엔 싸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에리카는 굳은 얼굴로 마지못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가봐."
에스테반은 다른 쪽을 바라보며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무거웠던 공기가 일순 에스테반 특유의 가벼운 공기로 치환되는 듯 했다. 그러자 당자사지인 에리카와 알렉스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거수경례를 하고 함교를 나섰다. 둘이 함교를 나서려는 찰나 에스테반이 알렉스를 불렀다.
"잠깐 자네는 남게. 심부름 할 게 더 있으니."
알렉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에리카에게 양해를 구했다. 에리카는 본체만체 종종걸음으로 밖에 나갔다. 에리카는 긴 복도를 지나 곧장 격납고 쪽으로 향했다.
"결국 머리 나쁘고 부지런하기만 애들을 뽑으라는 거네. 자기네들 머리 말고 수족이 될 그런 한심한 인간들을 말이야."
에리카는 분한 듯 이를 빠드득 갈았다. 하지만 격납고에 들어선 순간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뜬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함장의 말도 맞아. 지금 우리는 위험한 걸 싣고 있으니."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격납고 한켠에 적재된 도포에 쌓인 거대한 물체를 응시했다. 그 도포 위에는 Excutioner라는 문구가 있었다.
"가만, 파일럿 지망은 한 명 뿐인데."
에리카는 물끄러미 거대한 도포를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
한편 시나프스베이 콜로니 외각. 한 무리의 불빛이 은밀하게 콜로니에 접근하고 있었다. 우주공간에 널린 운석군과 데브리를 빠르고 냉혹하게 해치고 나아가는 그것들의 정체는 모빌슈트. 모두 3대로 지구연방군 주력기인 제이간이었다. 그 모빌슈트들은 콜로니가 드리운 그늘 아래 숨어 은밀하게 출입구로 진입했다.
***
비상방송이 나간 후 마리는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다녀왔어요!"
"응. 마리 벌써 왔니?"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던 그녀의 모친 롤랜드 부인이 에리카를 반겼다. 주황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를 지녔고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날렵한 몸매의 여성이었다.
"어땠어? 면접은?"
롤랜드 부인은 조심스레 결과를 물었다.
"몰라요. 아 망쳤어요!"
마리는 소파 위에 벌러덩 드러눕더니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몸을 움츠렸다. 롤랜드 부인은 그런 마리를 사랑스런 눈으로 보더니 마리 머리맡의 사이드 소파에 앉아 부드럽게 마리의 흘러내린 금발 가닥을 쓰다듬었다.
"너무 자책하지는 마. 니가 못 봤다고 생각해도 면접관 생각은 아닐 수도 있잖아?"
"아니에요! 완전 망쳤다고요. 면접관 얼굴을 못 봐서 그래요! 어휴~! 그 벙찐 얼굴이란..."
"또 한 건 터뜨렸니?"
"또라뇨? 무슨 소리에욧!"
"아니야. 아니야. 착한 우리 딸이 그럴 리가 없지. 하지만 엄마한텐 사실대로 이야기해도 되지 않겠어?"
"어휴... 아 그래요. 한 건 터뜨렸어요. 또. 또. 아 몰라요. 안 그래도 기분 싱숭생숭한데.."
문득 마리의 뇌리에 오후에 들었던 쿠데타 방송이 떠올랐다. 그녀는 벌떡 몸을 일으키고는 다소 심각한 얼굴로 그녀의 모친을 응시했다.
"오늘 방송 들었어요? 다카르에서..."
"응. 들었어. 쿠데타가 일어났다며?"
"어떻게 되는 건가요?"
"늘 있는 일이란다... 요즘 세상엔. 엄마 세대는 그런 걸 너무 많이 봐서 이젠 놀라지도 않아."
"정말요?"
"다른 나이든 사람들은 어떤 반응 보였는지 기억나? 아마 이번 것도 지나가는 바람일거야. 샤아 아즈너블 급도 아니고.. 이름도 없는 사람이잖아? 아마 오래는 못 갈 거야. 게다가 사이드5는 예전부터 전쟁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렇군요..."
"왜? 그 얼굴은?"
"아니에요. 아무래도 평화가 제일 좋겠죠. 평화 최고!"
그런 대화를 하던 차에 문이 열리고 중년 사나이가 들어왔다. 마리는 쪼르르 그에게 달려가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아빠!"
"어이쿠. 무슨 바람이 불었나. 우리 딸이 이런 착한 짓도 하고!"
라고 말하며 해맑게 미소 짓는 사나이는 마리의 아버지. 쟈브로니 롤랜드. 콜로니 공사에서 안정적인 수입을 얻으며 살아가는 중년 사나이의 유일한 고민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외동딸이 너무 예뻐졌다는 것이다.
"오늘은 추근거린 놈 없지?"
"없어요~ 없어! 있어도 로이드가 알아서 처리해줄 거예요."
"아.. 그 로이드. 뭐... 로이드라면 조금은 믿을만해. 그러나 말이다. 마리! 남자는 전부 늑대란다. 로이드 놈도... 언제까지고 믿을 놈은 아니라는 소리!"
"또! 또! 시작이에요. 그놈의 늑대타령!"
듣다 못한 롤랜드 부인이 타박을 한다.
"어서 씻고 식사나 하세요. 마리 너도 준비하고!"
"네~!"
마리는 눈웃음 지으며 계단 위로 올라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롤랜드 부부는 행복에 겨운 눈으로 응시했다. 그러나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탄식과 함께 둘의 고개가 떨구어졌다. 둘은 약속이나 한 듯 손을 내밀어 서로의 손을 꼬옥 잡았다.
"드디어.. 시작 된 건가요?"
롤랜드 부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영원한 행복이란 없어.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즐겨요. 여보. 그분이 아니었다면... 우리에게 이런 호사 따윈 없었을 테니까."
쟈브로니 롤랜드는 굳은 얼굴로 거실 벽면에 걸린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 사진 속엔 롤랜드 부부와 그 사이에 해맑게 웃고 있는 어린 마리가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