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제시어를 가지고 쓰는 글은 어렵네요.
오랜만에 했더니 연관성이 떨어져서...
안경을 쓴 가느다란 체형의 청년은 지금 담배연기가 들어차있는 공간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노트북을 뚫어져라노려보고 있었다. 드륵드륵 마우스의 휠을 만지작거리다가 가끔 커피를 들이키고 있다. 당초에 얼음을 띄워져 있었던 커피는 이미 얼음이 녹은데다가 그나마의 냉기마저도 공기에게 모조리 약탈당해 미적지근한상태였지만, 양은 절반씩이나 남아 있었다. 청년은 카페에서죽치고 앉아서 제대로 자릿세의 뽕을 뽑고 있는 것이다.
한편, 유리문을 열고 들어선 여성은 찡그린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면서자신의 일행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문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청년의 뒤통수를 간신히 발견한 여성은단화를 신은 두 발을 성큼성큼 움직여 만나기로 약속한 청년의 등 뒤에 우뚝 섰다. 여전히 반응이 없는청년의 등짝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
“야 손주찬! 짐챙겨!”
“아이고 등이야…….”
청년, 주찬은 중얼중얼거리면서 대충 노트북의 전원선을 뽑은 뒤, 오른손으로는 묵직한 노트북을 들고 왼손으로는 가지고 왔던 가방을 쥔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성에게는 아무런 말도 걸지 않고, 일단은 담배연기가 그득했던 방밖으로 빠져 나왔다. 진저리가 난다는 듯한 표정으로 코를 막은 채로 여성이 뒤늦게 뛰쳐나오자, 주찬은 그녀를 바라보면서 단조로운 억양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싫으면 바깥에서 전화 걸었으면 됐잖아. 왜 팔 근육 아프게 남의 등을 때리고 그래.”
그런 태도가 여성의 화를 돋우었다. 주찬 역시 자신이 한 말이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지야 잘 알고 있었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물러설 맘이 없었다. 여성은 맘에 안 드는 주찬의 행각을 다시 한번 꼬집었다.
“너 말이야. 내가몇 번을 말했어! 흡연실에 들어가 있지 말라고 그랬지.”
“지현이 너도 참 어지간하다.내 입장에선 남의 취향에 그렇게 왈가왈부할 의지가 있다는 게 신기해.”
무표정에 가까운 주찬의 얼굴에는 미묘하게 한심하다는 듯한 분위기가 걸쳐져 있어서, 그것이 지현을 한층 더 짜증나게 만들고 말았다. 본격적으로 말싸움을진행하려는 지현의 태세를 순식간에 꿰뚫어본 주찬은 둘이서 막고 있던 흡연실의 입구를 떠나 카페의 금연 구역 한 켠의 테이블을 목적지로 삼아 걸어나갔다.
“우이씨!”
한 손에 백을 쥔 채로 지현은 열심히 주찬의 등을 쫓아 걸어나갔다. 자리에노트북을 내려놓고 허리를 풀려는 듯 가볍게 몸을 돌리는 주찬을 향해 한 소리를 뱉으려고 했지만, 주찬은강제로 화제를 뒤틀었다.
“뭐 마실 거야?”
“……에스프레소 콘파냐. 흥.”
“앉아 있어. 주문하고올 테니까.”
“……엉.”
늘 그랬다. 지현은 주찬과 만나기만 하면 그의 페이스에 휘말렸고, 정신을 차리고 보면 주찬이 하고 싶은 대로 굴러간 결과와 마주하게 되었다. 그랬기때문에, 주찬의 고백으로 연인이 된 뒤 몇 달 되지 않아 주찬이 차버려서 솔로가 됐다. 그랬기 때문에, 우연찮게 소개팅에 나갔다가 다시 만난 주찬과 종종친구로서 만나는 처지가 되었다. 그랬기 때문에, 오늘도 맘에들지도 않는 카페에 와서 정말 싫어하는 담배 연기로 가득 찬 흡연 구역까지 발걸음을 옮겼다. 그랬기때문에, 몸무게를 신경 쓰느라 한동안 손도 안 댔던 에스프레소 콘파냐를 주문해버렸다.
“아, 진짜.”
투덜투덜대봤자 당사자는 지현의 등 뒤에서 주문을 한 뒤 돌아오는 중에 지나지 않았다. 조신하게 앉아 있는 지현의 맞은 편에 주저앉은 주찬은 안경을 밀어 올린 뒤 노트북의 전원선을 근처의 콘센트에쑤셔 넣었다. 그리고는 화면이 보이도록 지현을 향해 돌리면서 대뜸 이야기를 꺼냈다.
“여기야.”
“……여기가 뭐.”
뚱한 마음에 지현은 틱틱대는 태도로 받아 쳤지만, 주찬은 신경도쓰지 않았다.
“오늘의 오컬트 포인트.”
“결국 또 그거야?”
“그럼 뭘 기대했는데.”
지현과 동갑인 주찬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오컬트에 흥미가 많은 음침한 대학생이었다. 매일 같이 도서관에 박혀서 전공 공부는 손도 안 대고 이상한 신화나 무서운 이야기가 적힌 책 같은 것들을 정말로진지하게 파고 있는 녀석이다. 좀 말랐지만 멀쩡하게 생긴 허우대 때문에 첫 인상은 나름대로 호감형이었지만, 파고들어보니 장난이 아닌 문제아였다.
“됐어. 그렇다 치고좀 자세하게 설명을 하란 말이야.”
“읽으면 되잖아. 읽어.”
“……너 진짜 오늘따라 평소보다 더 짜증나. 알어?”
“네가 나 맘에 안 드는 게 뭐 하루 이틀이라고 굳이 말로 하냐. 네 눈만 봐도 알아 그런 건. 됐고 그냥 좀 읽어 봐.”
“…….”
지현은 툴툴거리면서도 화면에 띄워진 것에 신경을 집중했다. 지현은듣도 보도 못한 어떤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글이 노트북에 채워져 있었다.
『……OO 종합병원 뒷산에서 폐암 말기 환자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장소가 있는데, 새벽에 그곳에서 자살한 사람의 유령을 본 사람이 많이 있어
이건 진짜배기야 목격자 장난아니게 많음
유령이 나와서, ‘야 담배한까치 있냐’ 이렇게 물어본대』
본문을 좀 읽다가 지현은 뒷골을 붙든 채로 고개를 들었다. 눈을부리부리하게 번뜩이면서 맞은 편의 주찬을 보려고 했지만, 정작 본인은 자리에 앉아 있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다 보니 주찬은 어느새 카운터로 가서 지현이 시켰던 메뉴를 받아오는 도중이었다.
지현은 주찬의 동선을 따라 도끼눈으로 주시했고, 주찬은 그것에는아랑곳하지도 않고 태연하게 작은 커피잔을 지현 앞에 내려놓은 뒤 의자에 앉았다.
“어디까지 읽었어?”
“담배 한 개피 어쩌구하는 부분. 이 멍청아. 어딜 봐도 시덥잖은 헛소리잖아.”
“다 읽어봤어야지. 됐어. 얼른 그거 꾸역꾸역 퍼 먹어. 내가 대충 설명할 테니까.”
“너 말이야 진짜 말 좀 골라서 해라.”
“사람한테 멍청이라고 하는 여자가 할 소리냐 그게.”
당연하다면 당연한 대꾸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지현은 꿍얼거리면서 커피에 수저를 가져갔다. 에스프레소 위에 올려진 생크림 덕택에 이 메뉴는 지현이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 중 하나였지만, 거꾸로 그 탓에 살이 찔 것을 염려하느라 자주 먹지도 못하는 것이었다. 어차피주문했으니, 하는 심정으로 그 맛을 음미한다. 그 사이 주찬은주절주절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이게 이야기 자체는 황당무계하고 어이가 없는데,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면이 조금 있거든. 첫 번째로 진짜 목격자가많아. 인터넷이라면 자작극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는데, 실제로근처에 가서 물어보니까 본 사람이 꽤 있더라고.”
“너 벌써 사전답사도 갔다 왔어?!”
주찬이 아무렇지도 않게 한 말에 지현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입가에생크림을 묻힌 채로 중얼거리는 지현을 보고 피식 웃으면서 주찬은 자신의 입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지현의 몰골을 알려주었다. 지현은 조금 부끄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혀를 놀려 훔쳐냈다.
“그래. 당연히 갔다왔지. 장소가 어딘지 정도는 알아야 갈 거 아냐.”
“……말하는 꼴 보니 오늘 가잔 소리잖아 이거.”
“그래.”
지현이 고시랑거리는 소리가 한층 더 심해졌지만 주찬은 개의치 않고 이야기를 마저 이어 갔다.
“그럼 여기에서 생각을 해 봐.이렇게 이상한 이야긴데, 목격자가 많아. 진지한목격자가 꽤 있단 말이야. 오히려 그걸 보면 이게 진짜배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 이런 어린애도 안 믿을 것 같은 가벼운 이야기인데, 그걸 진지하게보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야. 지어낸 이야기라면 오히려 더 무서울 거라고.”
“……일리는 있어 보이네 그건.”
마지못해 인정한다는 식으로 지현은 맞장구를 쳤다. 이야기가 그렇게진행되자, 주찬은 대뜸 용건을 들이댔다.
“그러니까 지금 가자. 그러려고일부러 늦은 시간에 부른 거야.”
“……어휴.”
지현은 자신이 전생에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녀석과 엮이게 되었는지를 속으로 한탄하고 있었다. 어차피 또 주찬의 페이스에 떠밀려 같이 그곳에 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지현은 결국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일종의 교섭 조건을 내걸기로 한다.
“야 근데 저녁 먹고 가자.”
지현의 요구에 주찬은 그저 의문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꾸할 뿐이었다.
“밥? 어차피 진짜만나면 토할 텐데 뭐 하러 먹어 그냥 가자.”
“싫어. 이렇게 된이상 진짜 비싼 소고기를 먹어서 네 등골을 뽑아 먹어 버릴 거야.”
“너 그러다 살찐다.”
“이게?!”
지현은 발끈해서는 다시 본격적으로 주찬과 옥신각신하기 시작했다. 여자의마음을 모른다는 둥, 정말로 살이 찔 것 같아도 그런 이야긴 하면 안 된다는 둥, 그래서 내가 살이 쪘냐는 둥 성화도 그런 성화가 없었다. 게다가그 와중에도 자신이 에스프레소 콘파냐를 모조리 비워버렸다는 사실은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
정말로 주찬이 쏜 소고기를 퍼먹은 지현은 앞장선 주찬의 등을 따라 언덕 위에 있는 유명한 OO 종합병원의 뒤뜰까지 걸어 올라온 상태였다.
어둑어둑한 것은 확실했으나, 그래 봤자 명색은 종합병원의 부지다. 밤 늦게 까지 불빛도 군데군데 켜져 있고, 종종 심야에도 사람들이나타나곤 하는 장소였다. 어딜 어떻게 봐도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스팟이 아니었다.
주찬 역시 그런 것은 다년간의 경험상 잘 알고 있을 터였지만, 전혀주저함이 없이 두리번거리면서 목적지를 향해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그 등을 힐끔힐끔 바라보면서, 지현은 조금씩 긴장감에 휩싸이고 있었다. ‘진짜’가 나와버리면 충격을 입는 것은 지현뿐이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주찬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절묘하게도, 여러 개의 전등이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는 위치에 사람 서넛이 설 만한 매우 어두운 장소가 존재하고 있었다. 아마도 인터넷의 그 글이 단순한 창작 괴담이라면, 이러한 분위기때문에 생겨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곳이다.
“어때? 보여?”
“……좀 으슬으슬하긴 하네. 아예없는 것 같진 않아.”
주찬의 말에 지현은 얇게 입고 나왔던 블라우스의 어깨를 감싸 쥐면서 중얼거렸다. 밤이라고는 하나, 묘하게 한기가 도는 느낌이었다. 불과 몇 분 전만해도 느낄 수 없었던 기묘한 감각이, 지현의 전신에경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소리소문 없이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희뿌옇지만 선명하게 눈을 번뜩이고 있는 노인은 입을 뻐끔거리면서 한쪽 팔을 내밀었다.
“담배. 담배 있수.”
“…….”
반면, 지현은 그 모습에 시선을 맞추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지현은 자신이 덜덜 떨고 있다는 사실 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주찬이 살짝 어깨를 주물러 주자 그 긴장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저기 있는 거지?”
“…….”
지현은 귀신을 만났을 때,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멋대로 중얼거렸다가 호되게 당해버린 경험이 있는 탓이었다. 반면에주찬은 그런 일에 거리낌이 없다. 아니, 정확히는 거리낌을가질 수가 없었다. 오컬트를 추구하는 이 치는 평소 행동과도 잘 어울리게 이런 방면에서조차 둔감한 인재였던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공포,귀신이라면 환장을 하는 주찬은 귀신은커녕 어떤 오컬트 현상도 본 일이 없는 인간이었다. 실제로오컬트라는 방면을 떼어놓고 보면, 주찬은 굉장히 합리적인 사고를 하고 논리를 사랑하는 인종이다. 심지어는 전공도 이과 계통으로, 수학 문제 하나를 붙들고 시험을보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반면에 귀신이라면 치를 떠는 지현은 허구헌 날 좋지 않은 일에 휘말려영적인 일로 욕을 보고 있었다. 몇 번인가는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의 사태도 있을 정도라 지현은 이런일에는 도무지 발을 담그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두 사람이 일부러 오컬트 탐방을 하는 데에도, 이유는 있었다. 두 사람은 모종의 이유로 저주에 걸린 상태였다. 둘 다 목숨의 햇수를 빼앗겨, 가만히 살다간 2년 뒤에 죽을 몸이었다. 그러나 귀신 같은 초자연 현상을 만나 그기운을 몸에 베이게 하는 것으로, 저주로 인해 빼앗겼던 수명을 조금씩 돌려 받을 수 있었다. 본질적으로는 저주를 건 주체를 찾아 헤매고 있는 중이기는 했지만, 멍때리고 있다가 죽을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정기적으로 만나 오컬트 스팟을 떠돌고 있는 처지였다. 운이좋으면 진짜배기 공포 현상을 만나 정신적인 수명을 깎아 내리는 대신 실제 운명으로 정해진 수명을 늘릴 수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이야? 한가운데야? 담배 주자.”
주찬은 귀신을 만난다면 건넬 요량으로 사온 담배 한 보루를 가방에서 꺼내 들었다. 요령도 없이 한 갑도 아니고 한 보루나 사왔다고 지현에게 타박을 들었던 물건이다.
그러나 그런 주찬의 행동과는 상반되게, 지현은 묵묵히 고개를휘저으면서 시선을 지면으로 향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거부하는 지현을 보고 주찬은 주섬주섬 다시 담배를집어 넣으려고 했으나, 금새 그 행동마저 멈추고 말았다.
“어째 귀신으로 끝날 날이 아닌가 본데.”
심상찮은 기운을 느끼고 주찬이 중얼거리자, 등 뒤에서 지현 역시중얼중얼 입을 열었다.
“……야 너 진짜 책임져라. 나오늘 좀 화날 것 같아.”
담배담배 노래를 부르고 있는 귀신의 등 뒤로, 한층 더 무거운기운이 솟아 오른다. 지현의 눈에는 마치 샛노란 기둥이 솟아 오른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펑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 착각에 휩싸인 지현의 눈 앞에서, 기둥을뚫고 튀어나온 ‘진짜’가 한 입에 담배 할아버지 귀신을 삼켜버렸다.
잿빛으로 물든 괴상한 이형의 존재가 세 개의 눈을 번뜩이면서 지현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왼쪽에 두 개, 오른쪽에 한 개.자연의 법칙을 무시한 비대칭의 괴상한 얼굴에는 눈 이외의 기관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꽉막힌 비닐로 만든 듯한 얼굴의 아래쪽 역시 밋밋한 형상이다. 인간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굴곡은 하나도없는 괴상한 몸에는 다리가 없고 길쭉하게 삐져 나온 꼬리가 펄럭이고 있었다. 젓가락같이 뻗은 양 팔이다리를 대신해 대지를 짓밟는다. 길쭉한 팔은 몸의 세 배는 되는 길이였다. 이생의 것이 아닌 그 괴물은 세 개의 눈 만으로 웃음을 지으면서 지현을 비웃었다.
“낄낄낄! 너네, 소문으로 듣던 그 놈들이잖아!”
괴물 같은 이 녀석은 소위 말하는 ‘악마’다.
“소통이 되는 놈이 나오면 나도 도움이 되지. 지현이 넌 좀 쉬어.”
둔감한 주찬에게조차 악마는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물론뿌옇게 흐린 형체만이 보이고, 목소리가 들리는 정도에 불과했으나, 귀신이코앞에 있어도 알아채지 못한 주찬에게는 눈 앞에 휜히 드러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주찬은 지현을 가리듯버티고 서서는 의기양양하게 지껄이고 있었다. 목소리는 오랜만에 만난 악마를 상대한다는 사실에 흥분했다는것을 여실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꾸에에엑.”
기세등등하게 버티고 선 주찬의 등 뒤로 배경음악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위장을비워내고 있는 지현의 소리였다. 낄낄 거리면서 등장한 악마의 모습이나 주찬의 당당한 모습이 무색해질정도로 처참한 광경이었다. 거대한 종합병원의 뒤뜰 부지에서 처량한 여성은 곱게 차려 입은 옷이 더럽혀지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고 위 속의 음식물을 모조리 게워낸다. 이대로라면 위장마저 입 밖으로 튀어나올기세였다. 지옥에서 튀어나온 듯한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악마가 아니라 토하고 있는 지현이다.
보다 못한 주찬은 결국 악마에게서 등을 돌리고는 지현의 등을 도닥이기 시작했다. 지현 역시 그 친절을 순순히 받아들이면서 계속해서 토하기를 거의 1분. 주찬은 쓸데 없는 말을 덧붙이고 말았다.
“그러게 말했잖아. 어차피토할 텐데…….”
“쿨럭쿨럭. 너 진짜죽었어.”
주찬이 건넨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아 내면서, 지현은 주찬의 얼굴을꿰뚫으려는 듯 노려보았다.
지현은 너무 강한 영적인 현상에 조우하게 되면 강한 두통과 구토감을 느끼는 체질이었다. 사실 이미 담배 영감쟁이를 만났을 때부터 울렁거림이 그치지 않았었는데, 갑작스레악마가 나타난 것이다. 버틸 재간이 없었다.
“으헤헤헤! 토쟁이! 멍청이!”
입도 없는 삼눈이 악마는 지현을 조롱하듯이 팔을 굽혔다 폈다 하면서 혐오스러운 목소리로 노랠 불러댔다. 그러나 지현의 심기는 심히 불편한 상태였다.
“넌 지금 죽었어. 뭐야? 뭐 하는 새끼야. 엉? 용건말해 임마.”
“…….”
지현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쳐다보는 것은 악마와 주찬, 둘다였다. 이대로라면 싸움판이 날 기세였기에, 주찬은 지현을살짝 밀어내면서 악마와 다시 대면했다.
“너네들이 뭐 하는 지 우리는 다 알아. 얼른 본론부터 말해라.”
“살고 싶으면 나에게 소중한 것 하날 바쳐. 낄낄. 목숨으로 거래다.”
섬뜩한 눈 웃음과 함께 악마는 기세등등하게 소리쳤지만, 주찬에게는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웃기고 앉았네. 니네가사람 목숨을 그렇게 쉽게 빼앗을 것 같으면 우리가 지금 여기에 이렇게 서 있겠냐? 어디서 사기를 치고있어.”
“…….”
주찬의 말에 악마는 조금 주눅이 든 듯한 모습이었다. 그 꼴을본 지현과 주찬은 대뜸 상대가 구워삶기 좋은 놈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꼭 칼을 갖다 줘도 사람도 못 죽이는 악마들이 더 허세 부리면서설치더라. 계약이나 저주 때문에 집에도 못 가고 귀신이나 먹는 어중이 떠중이가 어디 사람을 속이려고들어. 아주 버릇이 잘못 들었구만.”
“우, 웃기지마 너. 내가 얼마나 경험이 많은데.”
“그래, 그래. 몇 년 살았냐? 500년? 1000년? 그렇게 살아도 인간 목숨 하나 못 빼앗고. 진짜 악마는 누가 만들었냐? 볼 때마다 진짜 짠하다.”
“…...힝.”
서스럼없이 악마를 까내리는 주찬의 언행에, 악마의 눈은 금새울상으로 변해 있었다. 연기인지 아닌지를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나,주찬은 아무래도 이번에는 제대로 호구를 만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언가를 깨달은 듯 악마는 한쪽 손을 들어 올려 네개밖에 없는 손가락 중 하나로 주찬을 손가락질 하기 시작했다. 한 팔로는 땅을 지지하고 한 팔로는 삿대질을하는 악마는 이상할 정도로 기울인 몸으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해괴한 모습이었다.
“너네 숨기려고 해도 소용 없어! 다 안다며! 악마랑 만난 인간은 계약을 할 때까지 악마에게서 떨어질수 없잖아! 좋든 싫든 나랑 거래해야 된다고!”
“뭘 잘난 듯이 소리치고 있냐?그러니깐 목숨으로 거래 안 한다고. 지금 우리가 뭐 때문에 여기 와 있는 건데 목숨으로거래를 하려고 하냐? 제대로 헛다리 짚은 거야. 우리가 하기싫다고 하면 넌 아무것도 못해. 까불지 마.”
“…….”
주찬이 하는 말은 모조리 사실이었다. 악마가 인간을 희롱하여거래를 하려고 하는 것은 사실이나, 실제로 숨은 규칙으로는 모두 인간의 동의가 필요한 작업이다. 그렇기 때문에 악마의 일은 그 부분을 얼마나 잘 은폐하고 포장하여 인간을 꼬드기느냐에 의해 성패가 좌우된다.
주찬과 지현은 이미 몇 번이나 악마를 만나보았고, 실제로 목숨에대한 저주도 악마에게 받은 것이었다. 이런 일에는 이골이 나 있는 상태였다. 그런 의미에서 악마치고는 어수룩한 이번 상대는 오히려 기분 좋은 먹잇감이었다.같은 초자연 현상이라고 해도, 악마라면 차원이 다른 상대다. 잘 넘기게 되면 수명을 대폭 늘릴 수 있는 기회였다.
“…….이, 이, 이, 머, 멍청한 이, 인간이! 너, 너……! 그래! 그거! 너손에 쥔 그거!!”
“이거?”
징징대던 악마가 소리를 치자, 주찬은 집어 넣으려고 들고 있었던담배 한 보루를 꺼내 들었다.
“이 자식 몸에서도 담배냄새가 진동하고 아주 꼴초구만! 보루로 담배를 들고 다니는 거 보니 장난 아니네! 너 근데 요새몸도 안 좋고 그렇지 않냐? 그럴 거야 그렇다고 그런 거야 넌 폐암에 걸릴 거야 그러니까 내가 널 영원히금연하게 해주지.”
“……흐음. 글쎄다. 별로 안 땡기는데. 요새 몸이 좀 안 좋긴 하지. 애초에 담배는 기호잖아? 좋아서 피는 건데. 그걸 빼앗아 가는 게 담배 피는 사람에게 무슨 득이 되냐? 건강보다담배가 우선인 사람한테는 소용없는 거래인 것 같은데.”
“너, 너 인간 사회에공헌해야지 임마! 그런 거 맨날 한 보루씩 피면 몸 버려! 금연하자금연! 네 흡연에 대한 욕구를 내가 꿀꺽 마셔줄 테니깐 말이야! 너네세상에서 제일 힘든 게 금연이라며? 담배는 딱 끊는 게 아니라 계속 해서 참는 거라며? 죽을 때까지 하는 게 금연이라며 얼마나 힘들어 그걸 내가 대신해주겠다고 내가.”
악마는 필사적으로 주찬을 설득하려 들었다. 주찬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 팔짱을 낀 채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악마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영혼이다. 귀신을 먹는 것 역시 그러한식습관의 여파였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 역시 악마에게는 맛있는 식사 중 하나였다. 일등품으로 치는 것은 성욕이지만, 묘하게 완강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주찬과 뒤에서 진짜로 악마를 때려잡을 기세로 노려보고 있는 지현을 보고 있자니, 세눈박이 악마는 다른선택지를 찾을만한 여유가 별로 없었다.
“……좋아. 물적인증거로 이 담배를 가져가. 계약 역시 여기에서 진행해. 단, 조건이 두 가지 있다. 첫째. 흡연욕은당장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한달 뒤에 가져갈 것. 둘째. 이계약에 의해 어떤 득이나 실이 있더라도 서로 간에 다투는 일은 없을 것.”
“뭐, 뭐가 그렇게복잡해.”
“시끄러. 얼른 계약서써.”
“…….”
악마는 기특하게도 주찬이 시키는 대로 계약을 진행해 나갔다. 그런것처럼 보였으나.
“너. 수작 부리지마라. 다투는 일 없을 거라고 써야 될 거 아니야.”
“……젠장! 인간이무슨 악마어를 읽어?!”
“확실하게 지장 찍어라. 이부분 어기면 진짜로 죽어야 돼.”
투덜투덜 대면서 주찬의 말에 따라 악마는 계약서를 수정했다. 기묘한노랫소리와 함께 계약을 끝낸 악마는 꼬리로 지면을 내리 그었다. 나타났을 때처럼 노랗게 빛나는 기둥에휩싸인 채로 악마는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조금 안심이라도 한 건지, 세눈박이 악마는 지현을 향해 눈웃음을 치면서 조롱을 시작했다.
“바~보! 멍청이!! 아픈 사람들 사는 데서 토했대요!”
“야! 이리와 이새끼야! 안 서? 야! 너이름 뭐야! 죽었어!”
“으아!”
서슬이 퍼렇게 선 지현이 당장이라도 악마를 때려잡을 기세로 튀어 오르자,주찬이 달라붙어 지현의 움직임을 막았다. 그 사이에 악마는 한층 더 창백해진 얼굴을 언뜻보인 채로 사라져 갔다. 그 모습을 배웅한 뒤 지현은 이번에는 휘릭 고개를 돌려 주찬을 바라보았다.
“이제 니 차례야.”
“좀 봐주라. 운좋게 호구 같은 악마 만나서 수명도 벌었는데. 물론 미안하긴 하지만,너도 득은 봤잖아.”
“이씨, 그건 그거고이건 이거지. 악마만 안 나왔으면 토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아니 뭐 내가 부른 것도 아니고. 그리고 토할 거라고 충고도 했잖아.”
“야!”
두 사람은 한동안 티격태격하면서 말싸움을 해댔지만, 곧 시끄럽다고항의를 한 환자에 의해 출동한 병원의 경비원들에게 붙들려 한껏 사과를 한 뒤 물러나는 꼴이 되고 말았다.
*
며칠 뒤, 지현은 또 다시 주찬의 호출을 받고는 저번에도 갔던그 카페에 다시 당도했다. 흡연실에 들어가 또 간접흡연을 할 각오를 하고 문을 열었지만, 의외로 주찬은 금연 구역에 자릴 잡고는 지현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예상밖의 상황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지현은 또각또각 하이힐 소릴 내면서 주찬의 맞은 편을 향해 걸어갔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기에 앉아 있어? 이제야 좀 내 말 들을 맘이 들었나?”
“뭐, 그런 걸로쳐라. 이거 마셔. 미리 시간 맞춰서 주문한 거니까.”
“……에스프레소……콘파냐. 살찌겠다.”
“어차피 먹을 거면서 또 그런다.”
“야.”
들어온 지 1분도 안 되어서 뚱한 표정이 된 지현은 또 먹을것을 거절하지는 않고 꾸역꾸역 생크림과 에스프레소를 퍼먹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주찬에게 다시 한번 질문을던진다.
“그래서. 진짜 뭐야. 네가 자진해서 금연 구역에 앉아 있는 건 진짜 처음 보는데.”
“계약이야. 그 자식진짜로 흡연욕을 가지고 갔어. 한 달도 안 지났는데 가져갔지만, 그건뭐 그 자식들 다우니까 어쩔 수 없지.”
“너한테 흡연욕이 진짜 있어?너 담배 안 피우잖아.”
주찬은 실제로 자신의 입으로 담배를 피운 적은 대학생이 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흡연 구역을 좋아하는 것은 그저 분위기와 간접 흡연이라는 행위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간접흡연을 하고 싶어하는 것도 흡연욕이라면 흡연욕이지. 어쩌면 의외로 녀석이 만족할만한 욕구였을지도 몰라.”
“진짜 너도 너지만 걔네도 알 수가 없는 놈들이야.”
이해할 수 없는 주찬의 간접흡연 기호는 물론이거니와, 굳이 그런욕구를 가지고 거래를 한 바보 악마도 이해 불능이었다. 지현은 고개를 휘휘 가로저으면서 지끈거리는 머리통을식히려고 노력했다.
“대신이라고는 뭐하지만 반품이 안 되는 부분은 확실하게 못 박아뒀으니까. 설령 놈이 만족하지 못했더라도 괜찮겠지. 아 그리고.”
“그리고?”
“오늘은 뒤에 어디 가는 일 없이 진짜로 깔끔하게 밥 살 테니까. 어디 가고 싶은데 있냐.”
“와. 무슨 바람이불어서 그런대. 내일은 해가 동해 바다 해저를 뚫고 힘차게 로켓처럼 튀어 오를라나.”
“너 말이야. 내가만날 때마다 밥 산 거 다 알고 그런 소리 하는 거지?”
실실 웃어가면서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누가 봐도 연인처럼 보인다는 것이 또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목숨을 걸고 귀신을 보러 갈 일이 또 언제 올지는 모를 일이지만, 당장은그런 미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행동한다. 주찬이 그런 인생 지침을 잠시나마 후회하게 된 것은, 몇 시간 뒤 지현에 의해 끌려가 참치회 풀코스를 사게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