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뒤. 담배 맛이 예전 같지 않다고 투덜거리던 주인님은 의구심이 들었는지, 새벽녘에 담배 창고에 몰래 들어가 보신 모양이었다. 담배가 전부 약재로 바뀐 것을 목격한 주인님은 폭포수 같은 눈물을 흘리시며 ‘모두 나만 미워해!!!’라는 진부한 대사를 날리며 드래곤 형태로 변신해 어디론가 날아가셨다고 한다. 관을 열고 상체만 일으킨 상태에서 주인마님의 이야기를 듣던 나는 재빨리 관에서 뛰쳐나왔다.
“주인마님! 빨리 주인님을 찾으러 가야해요.”
“천천히 가도 괜찮지 않아? 발터 도령은 가출한 사람 잡는 데에는 선수잖아.”
1년간의 가출 경험 끝에, 주인마님은 나를 완전히 집나간 사람 잡는 달인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주인님은 인간의 모습이 아닌 드래곤의 모습으로 날아가셨기에 최대한 빨리 찾아야했다. 레어가 있는 산맥은 엘프들의 영토라 인간들이 없지만, 산맥을 조금만 벗어나도 인간들이 바글거린다. 세계 유일의 드래곤인 주인님이 수백 년간 잠적한 상태라 드래곤은 전설상의 생물이 되어버렸지만, 만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학계의 혼란은 둘째 치고, 명예와 부를 위해서라면 한 종족이 멸종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인간들은, 분명히 주인님께 칼을 들이댈 것이다.
박쥐로 변신한 나는 주인마님을 태우고 계곡을 따라 산을 올라갔다. 동틀 무렵의 계곡에 낮게 깔린 산안개가 날갯짓을 따라 요동쳤다. 단숨에 산 정상에 도달한 나는 주인마님을 내려주고 엘프마을로 향했다. 주인마님은 이무기로서의 능력으로 이 산맥에 흐르는 물과 수중생물 및 물의 정령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여 주인님의 자취를 추적하기 위해 사방이 탁 트인 산 정상으로 올라간 것이다. 엘프마을을 향하던 중 뒤를 흘끗 보니, 주인마님이 바위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엘프마을에서 수소문한 결과, 새벽에 보초를 서던 엘프가 북쪽으로 날아가는 주인님을 목격했다고 한다. 서둘러 다시 산 정상으로 가자, 주인마님은 안색이 파리해진 채 바위에 앉아서 어깨와 머리 위를 오가는 운디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 아이들이, 엘크 강을 따라 인간들의 땅으로 가다보면 거대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진다고 하고 있어. 계속 같은 말만 하는 것 보니까, 아저씨가 지금은 움직이지 않고 있는 모양이야.”
“엘크 강이라면 여기서 그리 멀지 않아요. 빨리 가죠.”
주인마님을 태운 나는 계곡을 따라 북쪽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거센 맞바람을 맞아서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주인마님은 내 등에 착 달라붙어서 균형을 잘 잡고 있었다. 한창 가출하던 시기에 몸에 익었을 것이다. 낯선 세계에 와서 의기소침해진 주인마님의 기를 북돋아드리기 위해 가출한 그녀를 데리고 올 때면 항상 잡다한 대화를 나누었다. 주로 주인마님의 불평을 듣는 쪽이었지만.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나네.”
“하하. 그러게요. 도착할 때까지 시간도 남는데, 뭐 하고 싶은 말씀 없으십니까?”
주인마님은 조금 주저하더니, 바람소리에 묻힐 정도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발터 도령도, 아저씨도.”
“뭐가요?”
“이무기는 가족이나 친구가 없어. 물고기들은 수하거나 먹이일 뿐이고, 다른 이무기는 경쟁자들이지.”
“…….”
“처음 이곳에 올 때에는, 상제께서 여의주 없이도 용으로 만들어 주신다고 해서 온 거야. 나는 아주 약한 이무기였거든. 여의주 쟁탈은 꿈도 못 꾸는, 목숨 이어가기 바빴던 시절이었어.”
어깻죽지가 살짝 아파왔다. 힘들었던 시절을 떠올리던 주인마님이 무의식중에 손아귀에 힘을 가한 모양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드래곤의 신부가 된다는 얘기는 못 들었어. 그래서 나를 짝으로 맞으려는 아저씨가 무서웠고. 하지만 발터 도령이 많이 도와줬고, 아저씨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 그리고……가족이 되어줬는걸.”
보이지는 않았지만, 주인마님이 미소 짓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 누가 봐도 멋진 미소일 것이다.
“아, 저기!”
숲의 가장자리에서 무시무시한 마나의 요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굳이 마나를 느낄 필요도 없이, 나무들이 쓰러져 뻥 뚫려버린 곳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이 보였다.
시간을 되돌려, 4시간 전.
예비 신부와 집사가 작당하여 삶의 원동력 중에 하나인 담배를 몽땅 내다버리자, 홧김에 집을 뛰쳐나온 스티그마는 실로 오래간만에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요즘에는 인간이나 드워프들이 새로운 담배들을 많이 개발했다고 하던데, 집 나온 김에 둘러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스티그마는 가장 가까운 도시가 있는 북쪽으로 향했다.
쉬익.
바람을 가르는 날개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다. 스티그마는 이대로 인간들의 도시까지 갈까 하다가, 교양 있는 현대 드래곤답게 인간으로 변하기로 했다. 모름지기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 법.
“드래곤이다!”
평지와 맞닿은 숲의 가장자리에 막 착지하려는 순간, 난데없이 들려온 인간의 목소리에 멈춰선 스티그마는 장난기가 동했다. 세계 유일의 드래곤인 자신이 인간과의 접촉을 끊은 지 어언 200년. 인간들 사이에서 드래곤은 전설의 생물이 될 정도로 긴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알기에, 우매한 인간들에게 멋지고 훌륭한 드래곤의 모습을 각인시킬 겸 소리가 난 방향으로 날아가던 스티그마는 한 무리의 인간들이 천막을 치고 있는 작은 공터에 다다랐다.
“안녕하신가! 힘세고 강한 아침, 만일 내게 물어본다면 나는 스티그마!”
힘차게 앞발을 내딛으며 대사를 날린 스티그마는 20m 높이에서 인간들을 내려다보았다. 한참 폼을 잡던 그가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 때는, 이미 인간들이 자신의 무기들을 꺼내 드래곤 사냥 준비를 완료한 다음이었다.
“음하하하하. 이 용사 미르미돈님의 높은 명성을 듣고 사악한 드래곤이 제 발로 찾아왔구나! 가자, 동지들이여! 나의 부와 명예……가 아닌, 저 드래곤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사악한 드래곤을 무찌르자!”
“우와아아아!”
처음 보는 드래곤을 사악한 폭군으로 몰아세우며 덤벼드는 인간들을 보며 스티그마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아니, 애초에 처음 본 드래곤일 텐데, 무섭지도 않나?
스티그마는 몰랐던 것이다. 전설상의 생물은, 그것을 잡는 이에게 전설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름과 함께, 몸무게보다 훨씬 많은 양의 황금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전설 속, 살아 움직이는 보물창고인 드래곤이 눈앞에 등장한 것은, 용사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었다.
[플레어 윈드(Flare Wind)!]
용사 일행 중 로브를 뒤집어쓴 마법사가 시전한 마법을 아슬아슬하게 막아낸 스티그마는, 상대방의 마법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는 긴장했다.
“인간 중에 이 정도로 강력한 마법을 사용하는 자가 있다니!”
스티그마의 말에 마법사는 로브를 재끼며 입 꼬리를 살짝 올려 썩은 미소를 지었다. 이마가 훤히 드러난 중년 남성 마법사는 플라이 마법으로 스티그마의 눈높이보다 높게 올라간 뒤,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남자는 25세까지 동정을 유지하면 강력한 마법을 쓸 수 있지.”
스티그마가 마법사에게 시선을 빼앗긴 사이, 금속으로 만들어진 막대기 같은 무기를 꺼내든 용사는 스티그마의 왼쪽 앞다리를 목표로 삼았다.
타앙.
귀를 찢는 파열음과 함께 앞발에 명중한 총탄은, 웬만한 무기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는 스티그마의 비늘을 부수었다. 겁에 질릴 만한 상황이었지만, 스티그마를 감싸는 것은 공포보다는 분노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장난칠 마음이 사라진 스티그마는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감히 인간 따위가…….”
방어 마법을 펼친 스티그마는 숨을 몽땅 내뱉기 시작했다. 그 사이 인간들의 무기가 불을 토해냈지만, 총탄은 모두 마법에 막혀 잠시 체공하다가 지상으로 떨어졌다. 허파에 공기가 다 빠지자, 스티그마는 있는 힘껏 공기를 들이마셨다. 드래곤 하트는 화덕이 되어, 허파에 뜨거운 기운을 공급했다. 이제 저 건방진 인간들에게 브레스를 쏘면 되는데,
“콜록, 콜록, 켁!”
공기를 들이키던 스티그마는 터져 나온 기침을 참지 못하고 몸이 꺾일 정도로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근 몇 년간 레어 밖을 나온 적이 없는지라 이렇게 오래 날아본 것도 오랜만이고, 신마 전쟁 이후에 브레스는 담배 피울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쓰지 않았던지라, 그는 자신의 몸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500년 간 피워온 담배는 스티그마의 기관지를 약화시켰고, 폐와 함께 그 옆에 붙어있는 드래곤 하트마저 썩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점점 호흡도 달리고, 마나의 원천인 드래곤 하트가 금방 한계에 달하자 방어 마법이 풀리고 말았다.
[그라비티 폴(Gravity Fall)!]
중력 마법이 스티그마의 몸통에 적중했다. 땅으로 곤두박질 친 스티그마를 향해 용사와 일행들이 달려들었고, 떨어질 때 큰 바위를 머리로 으깨버린 스티그마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 불타는 숲을 보았다. 인간 마법사가 쓴 마법 때문에 불이 붙은 모양이었다.
숨쉬기가 어려웠지만, 심장은 산소가 부족하든 말든 상관없이 심하게 고동쳤다. 인간들의 무기가 불을 뿜으며 내뱉는 매캐한 연기에 눈이 따가웠다. 몸의 상처는 늘어가고,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정신을 잃기 직전, 스티그마는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주변에 야생 담배 군락지가 있었던 모양이다.
‘담배 냄새…… 코이한테 혼나는데…….’
스티그마가 기절한 뒤, 용사 일행은 공격을 멈추었다. 근처의 나무들이 잇따라 불타 넘어지면서 공격하기가 어려워졌고, 저 상태라면 드래곤도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고 판단한 그들은 불이 다 꺼지면 시체를 회수하기로 하고 장소를 이탈했다.
“아저씨-!”
“주인님!”
우리가 내려왔을 때는, 주변이 온통 불바다였다. 한참을 헤맨 끝에 주인님을 찾아냈지만, 불붙은 나무들이 주변에 쓰러져있어서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때마침 강 근처라, 주인마님이 강물을 끌어다가 주인님이 계신 곳까지 길을 뚫자, 나는 잽싸게 달려갔다.
“정신 차리세요, 주인님!”
온 몸이 그을린 채,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주인님은 드래곤 상태로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앞발에 생긴 상처를 보아하니, 다수의 인간들이 총격을 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이 덩치를 옮길 방법도 없는데, 화마는 숲을 살라먹으며 점점 더 커져갔다. 내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시간을 낭비하는 사이, 뒤따라 온 주인마님은 주인님의 머리 쪽으로 달려갔다.
“아저씨, 내 말 들려? 일어나!”
주인마님이 자기 몸의 몇 배나 되는 거대한 머리를 양 팔로 감싸 안은 채 소리쳤지만, 주인님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일어나, 바보야! 멍청이! 이 로리콘 변태! 빨리 일어나란 말이야!”
주인님이 들었으면 펄쩍 뛸 내용의 폭언이 숲속에 메아리쳤지만, 주인님의 눈이 떠지는 일은 없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주인님의 목에 귀를 가져다대니, 다행히 숨은 쉬고 있었다. 울먹이는 주인마님을 일단 진정시킨 뒤, 불을 끌 방법을 생각하고 있던 그때였다.
“발터 도령. 이것 좀 가지고 피해있어.”
“네. 에에??”
순식간에 겉옷을 훌훌 벗어버린 주인마님이 자신의 옷을 내밀며 나의 등을 떠밀었다.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옷을 받아들고 안전한 곳으로 물러나자, 굉장한 마력이 주인마님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쳤다. 그리고 15m가 넘는 거대한 이무기로 변한 주인마님은 주인님의 몸을 돌돌 말며 감쌌다. 그녀는 주인님의 가슴 쪽에 머리를 파묻더니, 가차 없이 물어뜯었다. 혹시 이무기로 변신한 탓에 주인님을 먹이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움찔했지만, 순간 주인마님과 눈이 마주치자, 내 다리는 땅에 달라붙었다. 쉽게 말하면, 쫄았다.
[발터 도령, 드래곤 하트가 여기쯤에 있는 거 맞지?]
아이고, 깜짝이야. 내 머릿속으로 전음을 날린 주인마님을 향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안보였지만, 가슴 근처니까 맞을 것이다. 드래곤 하트가 폐와 심장 사이에 끼어있다는 것은 드래곤을 모시는 집사로서 당연한 상식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주인마님이 하려는 일도 알게 되었다.
가슴이 파헤쳐졌다고 죽는 드래곤은 없었다. 지금은 불길을 잡고 주인님의 크게 다친 머리를 치료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주인마님은, 그 두 가지를 위해 무한한 마나를 품고 있는 드래곤 하트를 여의주 삼아 기적을 행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머리로 주인님의 몸속을 파헤치던 주인마님은 마침내 드래곤 하트를 발견하고는 작디작은 앞발을 드래곤 하트에 얹었다.
“규우우웅…….”
아름다우면서도 소름끼치는 이무기의 노래가 들려왔다. 상처 입은 새끼 짐승이 내는 소리 같기도 하고, 책에서 읽으면서 상상했던 고래의 노랫소리도 이것과 비슷할 것 같았다. 노래가 시작되고 채 1분도 지나지 않아서, 조각구름만 떠다니던 하늘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물기를 가득 품은, 검은 구름들이 사방에서 이곳을 향해 몰려들었다. 이 경의적인 광경을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든 점이 아쉽다.
툭. 투둑.
비가 내린다. 거세던 불길이 차츰 사그라지고, 간신히 형체만 유지하던 나무들이 부스러졌다. 앞이 안 보일 정도로 거세진 빗속을 뚫고 주인님 쪽으로 다가간 나는, 인간으로 변한 주인마님이 신비한 빛이 나는 손으로 주인님의 상처를 쓰다듬는 것을 보았다. 주인마님의 손길이 지나간 부위의 상처는 빠르게 재생되었다. 가슴과 머리의 상처가 아문 주인님은 아까보다 훨씬 상태가 나아보였다.
폭풍처럼 비를 쏟아내던 하늘은 어느새 시치미를 뚝 떼고 검은 구름들을 흩어버렸다. 흩어지는 구름 사이로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었고, 덕분에 기분이 안 좋아진 나는 주인마님께 옷을 돌려드린 뒤 주인님의 상태를 본다는 핑계로 산만한 덩치가 드리운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
“주무시네요.”
“그러네.”
머리가 푹 젖은 주인마님은 양쪽으로 묶고 있던 머리를 풀어 물기를 짜내면서 잠든 주인님의 용안(말 그대로 용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주인마님은 주인님의 이 모습, 처음 보시죠?”
“응? 으응…….”
‘솔직히 도마뱀 같죠?’라고 말할 뻔 했지만, 주인마님도 같은 과(파충류?)라는 것을 깨닫고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정신없이 주인님을 보던 주인마님은 부드러운 손길로 주인님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주인님을 저 상태로 만든 인간들을 찾아보겠다는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해드렸다.
늑대로 변한 나는 그늘진 나무 사이를 오가며 후각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실로 오랜만에 인간의 피를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간간히 보이는 발자국과 조금씩 진해지는 화약 남새를 따라가다 보니, 저 멀리 인간들이 보였다. 인간들의 호흡에 섞여 나오는 피 냄새와, 성직자로 보이는 아리따운 아가씨가 나를 조금씩 흥분시켰고, 나는 조금씩 어두운 수풀의 그림자에 녹아들었다. 그리고 밤의 권능이 펼쳐졌다.
생각보다는 힘들었지만, 인간 녀석들을 모두 혼내줬다. 그동안 접하기 힘들었던 인간의 피도 마셨고, 뒤탈 없이 모두 기억을 지운 뒤 인근 마을까지 옮겨놓았다. 아마 한동안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빈혈에 시달리겠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다. 이래봬도, 생명을 함부로 헤치는 것을 싫어한단 말이지. 문제는, 붙으면 안 될 혹이 붙었다는 것이다.
“헤에. 그러면 드래곤님을 모시고 사는 거예요?”
“그래.”
방금까지 용사와 같은 파티였던 성직자가, 사실은 정체를 숨기고 있었던 동족일 줄이야. 아마 기회를 봐서 파티원들이 방심했을 때에 피를 전부 빨아먹은 뒤, 유유히 떠날 속셈이었던 것 같다. 내가 밤의 권능으로 주변에 어둡게 만들자, 다른 인간들은 전부 잠에 빠지거나 시야를 잃었지만 이 여자는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한다는 말이 ‘내 음식 빼앗지 마’라니. 결국 대부분의 피는 그녀에게 내주었고, 뒤처리는 몽땅 내가 다 했다.
“그런데 너는 왜 성직자인 척을 했어? 보통은 마법사를 하잖아?”
“인간 성직자라도 들어오면 정체를 들키기 쉽잖아요. 그리고 나는…….”
옷을 살며시 어깨까지 내린 그녀는, 어깨에 새겨진 작은 날개 문신을 보여주었다.
“진짜 성직자거든요.”
테이시아의 검은 날개. 젠장, 이거 위험하다. 어둠의 신을 모시는 성직자였잖아? 게다가 성격 파탄자 집단이라고 불리는 그곳에서 50년 이상 수련한 엘리트들만 받을 수 있는 직위인 검은 날개라면, 집사 나부랭이인 나 따위는 상대도 안 될 정도로 강할 것이며, 성격 파탄자 집단이란 교단의 명성에 충분히 기여할 정도로 성격도 이상할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인간놀이 할 필요 없이 그냥 원하는 대로 마셔도 되잖아?”
“음, 인간놀이가 재미있어서요.”
“……그렇다면 가서 인간놀이나 마저 하지 그래?”
솔직히 기분이 별로였다. 수컷이란 어쩔 수 없이 자기보다 강한 암컷은 배척하게 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녀는 나의 냉랭한 말투에도 아랑곳 하지 않으며 대꾸했다.
“인간놀이는 재미없어졌어. 더 재미있는 걸 발견했거든요.”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내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 불길한 기운은, 여인의 매끄러운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로 인해 나의 심장 부근쯤에 오버로크 되었다.
“나는요, 인간보다 당신이 더 재미있어 보여요.”
위험하게 반짝이는 눈으로 위험한 말을 내뱉은 그녀는, 왼손을 들어 내 뺨을 어루만지며 나를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듯 내 허리를 끌어당겼다. 점점 다가오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나는 그냥 그녀가 리드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후우…….”
담배를 피우는 그녀의 등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보통 이런 경우(?)는 남자가 담배를 피우지 않나? 이건 뭔가 반대인 것 같은데? 그런데 숲 속에서 이러고 있어도 되나? 담배냄새 나면 주인마님이 싫어하실 텐데.
서로의 피를 흡혈하는 행위는 정말 오래간만이었기에, 거의 탈진할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저쪽이 강해서 그런지, 내 피가 더 많이 빨려나간 것 같았다. 오늘 저녁은 닭백숙으로 영양보충 좀 해야겠다.
“저기, 그럼 나는 이만 가볼게. 로벨리아라고 했지? 고성에 좋은 관 하나 마련해서 잘 살아. 참, 담배는 안 좋으니까 빨리 끊고.”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로벨리아가 살짝 손을 드는 것을 보고는 잽싸게 박쥐로 변했다. 손을 들었다는 것은 잘 가라는 인사겠지? 분명히 그럴 거야. 그런데 왜, 왜?
“왜 따라오는데?!”
“아, 잠깐 기다리라니까요. 금방 다 피우고 간다니까.”
……멈추라는 신호였냐? 젠장맞을.
그렇게 나는 큰 혹을 붙인 채 주인님과 주인마님이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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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나머지는 내일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