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서, 뉴스 봤어?"
창훈의 집. 아르바이트를 끝나고 돌아온 창훈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때마침 랜서는 평소처럼 영체화 상태로 있지 않고 텔레비전을 키고 뉴스를 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보고 있소."
"......어제 오후 11시 경 구로역에 인접한 폐공장에서 가스 누출로 인한 폭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람이 드문 위치였던데다가 밤 시간대라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공장 건물은 완전히 전소했습니다. 한편 경찰은 가스가 어디에서 누출되었는지 또 어떻게 불이 붙어 폭발이 일어난 것인지 조사중입니다....."
뉴스에 나오고 있는 것은 어제 있었던 구로역 폐공장에서의 폭발 사고였다.
"저번에 삼명그룹 회장 죽였을 때, 어새신이랑 조우했다고 했지?"
"그랬었지. 그 때도 뉴스에는 가스 누출로 인한 폭발 사고라고 발표되었고."
"이번에도 어새신일까?"
"그럴 수도 있지만, 단정하긴 이르다고 생각하오. 다른 서번트끼리의 충돌 과정에서 일어난 폭발일 수도 있으니까."
창훈은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어새신 한 명만 신경 쓰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젠 다른 서번트에게까지 신경을 쓰게 될 거라는 점에서 앞으로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도 있었다.
"동지에게 내 생각을 말하자면, 지금의 우리는 어새신 외엔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이오."
"이유는?"
"우선 우리가 지금까지 거사를 치르면서 조우한 서번트라고는 어새신 뿐. 다른 서번트와는 조우한 적도, 그 흔적과 마주친 적도 없었소."
"...그랬지. 하지만 그것 만으로?"
"생각해보시오. 어새신이 저 폭발 사고에 관여하고 있다 한다면, 그 자가 이유없이 폭탄을 터트렸겠소?"
"...아니. 누군가와 충돌이 있었으니 폭탄을 터트렸겠지."
"그거요. 어새신이야 우리와 목적이 겹치는 것이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지만, 다른 서번트는 그렇다는 보장이 아직 없소. 어쩌면 우리의 목적과는 아예 다른 길을 가고 있을지도 모르고. 고로, 당장에는 우리가 신경쓸 필요는 없을 것이오."
"요컨대, 어새신 이외의 누군가가 우리 앞에 등장해서 방해하면 그 때 배제해도 늦진 않는다는 얘기네."
"바로 그거요. 역시 동지는 이해가 빠르시군."
랜서의 조언에 창훈은 마음을 다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다음 목표를 선정하는 것. 저번 거사로부터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으니 이제 다시 행동을 개시할 시기일 것이다.
"그럼, 동지. 다음 목표는 정하셨소?"
창훈은 고민했다. 후보는 여럿 떠올랐지만 누구를 먼저 목표로 삼을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던 창훈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다음 소식입니다. 신미래공화당 소속 의원들이 다음 달 있을 총선을 앞두고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을 찾았습니다. 오전 9시부터 전직 대통령 묘역을 참배한 신미래공화당은......"
"...저 자."
창훈은 텔레비전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사람은 신미래공화당 소속 국회의원, 박항진이었다.
* * *
"어이, 여기!"
명동의 한 카페. 체크무늬 남방에 청바지를 입고 반무테안경을 쓴 남자가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방금 막 카페에 들어온 사람은 연청색 와이셔츠에 검은 정장 바지를 입은, 멋드러진 콧수염을 기른 남자였다. 남자는 자신을 부르는 것을 보고 그 쪽으로 다가갔다.
"사람이 많구만. (보는 눈이 많으니, 돌려서 말하겠소.)"
콧수염 사내가 다가오자, 안경 남자가 말했다. 콧수염 사내는 잠시 상대를 보더니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일세. 그러게 왜 이런데서 보자고 했나? (그렇게 하겠소. 헌데 굳이 이런 곳에서 볼 이유가 있었소?)"
"뭐 어떤가. 분위기 좋지 않은가.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일수록 의심받기 적은 법이오.)"
콧수염 사내는 자리에 앉았다.
"뭐 마시겠나? 내가 사겠네. (뭐라도 마시면서 얘기하지. 돈은 내가 내겠소.)"
"거, 자네가 무슨 돈이 있다고. (현대의 화폐를 가지고 있단 말이오?)"
"괜찮아, 돈이야 자네보단 많으니까. 일단 고르라고. (자금원이 있어서 말일세.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하고, 고르시오.)"
"그럼... 난 잘 모르니 달달한 걸로 부탁하지. (그러면... 현대의 가배에 대해선 잘 모르니 일단 달짝지근한 것으로 골라주시오.)"
"좋네. 잠시 앉아있게나. (그렇게 하지. 잠시 기다리시오.)"
안경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 쪽으로 와서 주문을 했다.
"여기 따뜻한 카페모카 1잔이랑, 에스프레소 도피오로 1잔 부탁드립니다. 결제는 이걸로 해주시고요."
"카페모카에 휘핑크림 올려드릴까요?"
"네, 올려주세요."
안경 남자는 카드로 대금을 결제했다. 잠시 후, 나온 음료를 들고 안경 남자는 자리로 돌아왔다.
"자네 살던 동네엔 이런 건 없었지? 위에 올라간 건 크림이네. (그대가 살던 시대엔 이런 가배는 없었겠지. 위에 올라간 건 크림이라고, 우유로 만든 것이라오.)"
"...말로만 들어봤지, 직접 마셔보는 건 처음이군. (성배와 좌에서 얻은 기억에 이러한 것이 있다고는 들었소만, 직접 마셔보긴 처음이군.)"
콧수염 사내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입맛에 맞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나저나 자네건 양이 되게 적어 보이는데? (그런데 그대가 마시는 것은 양이 상당히 없어 보이는 것 같소만?)"
"에스프레소라고, 원액이나 마찬가지인 커피거든. (에스프레소라는 이름이오. 원액이나 마찬가지라 적게 나오지.)"
"그러면 거, 쓰지 않은가? (그러면, 그거 상당히 쓰지 않소?)"
"쓰지. 하지만 맛들이면 괜찮다네. (쓰지. 허나 맛들이면 괜찮소.)"
안경 남자는 설탕을 섞고 한 모금 홀짝였다.
"그래, 서울은 좀 어떤가? 자네가 살던 동네랑은 많이 다르지? (현대는 어떻소? 그대가 살던 시대와는 많이 다를텐데 말이오.)"
"올라오기 전에 들은 것은 있었지만, 이 정도로 번잡할 줄은 몰랐네. (사전에 얻은 지식은 있었소만, 이 정도로 이 나라가 크게 발전했을 줄은 몰랐소.)"
"자네 입장에선 기분이 싱숭생숭하겠구만. (그대 입장에선 감회가 남다르겠소.)"
"뭐, 그렇지."
콧수염 사내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나갔다.
"자네도 뉴스 봤지? 어제 그 사건. (구로역의 폭발, 그대가 조장한 것이오?)"
"봤다마다. 어쩌다 그런 사고가 났는지 원. (그렇소. 거기에서 서번트 간의 교전을 수습하느라 어쩔 수 없었다오.)"
안경 남자는 쯧 하고 혀를 차며 커피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그가 잔을 내려놓자 콧수염 사내는 말을 이어갔다.
"그러고보니, 얼마 전에 자네가 말했던 온라인 게임, 재밌더구만. (교전이라면... 그 중에 랜서는 있었소?)"
"그렇지? 직업이 다양하고 역할도 많아서 재미가 쏠쏠하지. (랜서는 없었고, 캐스터와 그대를 제외한 나머지 4기의 충돌이었소.)"
"난 지금 전사로 시작해서 탱커로 육성중이네. (그렇다면 세이버가 참전했다는 얘기로군. 그 자는 움직이지 않고 있다고 들었소만.)"
"그 게임은 레이드에서 탱커가 워낙 없어서 길드에서 너도나도 데려가려고 하더만. (그쪽이 그 자의 영역이었으니 소란을 두고 볼 수는 없었겠지. 그의 마스터도 그 근처 어딘가에 거점을 잡고 있었고.)"
"난 아직 그런 건 모르겠고, 지금은 다른 직업도 좀 보고 있네. 재밌는 거 없나 하고. (나머지는 어떻소? 난 랜서 외엔 조우한 적이 없어서.)"
"원거리 딜러를 육성한다면 궁수 한번 키워보게. 종족에 따라서는 마상전투도 가능하다더군. (아처랑 라이더는 협력 관계인 듯 했소. 마스터와 동행하고 있더군.)"
콧수염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다시 입에 갔다댔다. 안경 남자는 그가 잔을 내려놓기를 기다렸다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다면 자네, 아직 레이드 해 볼 정도로 육성은 안됐지?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오만, 그 쪽은 가능하면 빨리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뭐, 그렇지. (이유가 있소?)"
콧수염 사내의 질문에 안경 남자는 뭔가 생각하듯 이마를 찌푸렸다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아직은 그 쪽까지는 내가 알려줄 필요는 없겠군. 그래도 아이템은 최대한 맞춰나가보게. (지금은 추측이오. 다만 지금의 그대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오.)"
두 사람 사이에는 제법 긴 침묵이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의 침묵을 깬 것은 창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이맘때 즈음 진행되는 정치인의 선거 유세 운동. 명동 거리의 유세 현장의 주인공은 신미래공화당의 박항진이었다.
"여러분의 한 표가 이 나라의 미래를 지킵니다! 신미래공화당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십시오! 저희 신미래공화당과 저 박항진은 여러분의 믿음에 보답하겠습니다!"
"솔직히 자네 저 양반 싫어하지? (저 자도 그대의 암살 대상이었소?)"
한동안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안경 남자가 물었다.
"잘 아는구만. (그랬었지.)"
"뭐, 저 양반 싫어하는 게 자네만은 아니겠지만. (랜서도 아마 저 자를 노리고 있을거요.)"
콧수염 사내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선거 유세장을 바라보며 잔을 비웠다.
* * *
"덕분에 잘 마셨네. (덕분에 현세에서 이런 것도 마셔보는구려.)"
"다음에도 한 번 보자고. (또 맛보고 싶다면 말하시오.)"
선거 유세가 끝나고 모여있던 사람들이 흩어질 즈음, 두 사람은 카페를 나왔다.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때깔 좋구만. (뒤늦은 소리지만, 내가 구해준 현대의 옷을 입고 나와줘서 고맙소. 잘 어울리는군.)"
"뭘 낯간지러운 소리를 하나. (솔직히... 조금 어색하오.)"
"잘 어울린다는데 뭘 그러나. 모처럼 상경했는데 그 정도는 입어줘야지. (익숙해지는 것이 좋을 것이오. 영체화로 돌아다닌다고 만사는 아니니.)"
콧수염 사내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보니, 자네도 나랑 동향 아닌가. (그러고보니, 그대도 나와 같이 억지력이 부른 자 아니오.)"
안경 남자는 잠시 멈칫했다 다시 입을 열었다.
"뭐, 그렇긴 하지. (...그렇소.)"
"자넨 언제 상경했었나? (언제부터 불려왔소?)"
"몇 년 되었지. (이 전쟁이 시작하기 전이었소.)"
"상경하고 불편한 건 없었나? (그대는 왜 억지력이 그대를 불렀는지 아시오?)"
"없진 않았지만, 금방 익숙해졌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모르겠소. 불려온 이유가 있으니 불려왔을테지만.)"
두 사람은 한동안 함께 걸었다. 얼마 쯤 걷다보니 그들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 둘 적어지더니 이윽고 인적이 거의 없는 곳까지 오게 되었다.
한참을 걸었을까.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차량이 지나다니는 것 외엔 그들의 대화를 들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안경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어새신. 어찌할 것이오?"
"솔직히, 랜서는 아직 다시 만나기는 조금 꺼려지고 있소. 난 이번엔 물러나 있지."
"잘 생각하셨소. 그렇다면 랜서는 이쪽에서 저지하지."
"그 자를 살리겠다는 소리요?"
"그렇소. 지금 그 자가 죽는다면 대성배의 행방을 추궁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테니까."
콧수염 사내는 잠시 안경 남자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겠군. 그렇다면 맡기겠소."
"걱정 마시오. 일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테니."
"...그러고보니, 그대는 뭐라 불리는 것이 좋소?"
"편한대로 하시오. 진명을 부르던, 클래스로 부르던 관계없소."
"그렇다면... 그대를 믿어보도록 하지. 룰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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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내용은 8화에서 있었던 어새신과 룰러의 대화에 특별의역을 더한 것입니다.
처음 8화를 작성했을 때 의역판을 먼저 머리속에 구상하고, 거기에 맞춰 우회언급판을 생각해서 같이 작성했습니다.
본래 의미랑 겉 의미에서 나름대로의 연결고리를 만드느라 조금 골머리를 썩혔네요.
제목의 이문의 한자 표기는 속 리(裏), 들을 문(聞)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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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재밌게 봐주고 계셔서 감사합니다 :) 페스페같은 경우는 모르겠지만 아포크리파같은 대규모 세력의 서번트 간 격돌은 아니고요. 등장 서번트들이 전부 한국계인 것은 이후에 작중에서 추후 전개에서 밝혀질 예정입니다. | 20.09.20 01:3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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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그렇군요. 역시 한국계인게 떡밥이었군요. 역시나... | 20.09.20 01:3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