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화 보러가기: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546/read/2682906)
<습격>
기상종이 울리고, 보육원의 아이들은 일어나 아침을 먹는 것까지는 평소와 동일했으나, 그 뒤에 자석에 끌리듯 잠자리로 돌아가 바로 벌러덩 누워 늦잠을 자기 사작했다. 하긴 오늘은 학교에 안 가도 되는 주말이였기에 시현도 느긋하게 늦잠을 자... 는가 싶었으나 신문 대신 어디서 주웠는지 모를 꽃 한송이를 들고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어디 가는 거냐?"
-"가야 할 곳이 있어."
시현은 카드 상태로 주위를 맴도는 라이고우를 쳐다보지도 않은채 초점 없는 눈빛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길쭉한 꽃잎이 촘촘하게 모여있는 것을 보니 저 꽃은 국화였다. '저 꽃을 들고 나갈 만한 곳은... 아, 거기 밖에 없겠네.' 라이고우도 시현의 표정을 보고는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도보로 30분, 횡단보도를 다여섯번 건너 마침내 도착한 곳은 어느 들판. 그리고 그곳에 있는 건... 공동묘지였다. 들판 한가운데에 박힌 비석에 적힌 내용을 보아, 이곳은 전쟁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묻는 곳이였다.
시현은 말 없이 두 무릎을 꿇고는 부모님의 자리 앞에서 준비한 꽃 한 송이를 내려놓았다. 혹시라도 당장 눈물을 쏟아내며 묘비를 끌어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미리 위로의 말을 머릿속에 담아두는 라이고우였지만 시현은 텅 빈 눈동자와 약간의 연민이 담긴 표정으로 그저 멍한히 묘비를 지켜보다가 국화를 조용히 묘비 앞에 내려놓을 뿐이였다.
"엄마, 아빠. 뭐라도 준비하려고 했는데 이런거 밖에 없어서 미안. 그럼 다음에 또 봐."
시현이 가져온 꽃은 병에서 꺼낸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밝은 노란색 빛깔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노란빛도 시현의 검은 눈동자에 반사되자 우울하고 탁한 색으로 보이게 변했지만.
-"그 꽃은 어디서 난거냐?"
-"미리 준비한건 아니고, 보육원 안에 있는 꽃병에 있던 거 하나 들고 온거야. 원래 이러면 안 되긴 하지만."
-"그런데, 오늘은 왜 이른 아침부터 이곳에 온 거냐?"
-"실은, 어젯밤 이상한 꿈을 꿨어."
-"어떤 꿈? 악몽이라도 꾼거냐?"
시현이 자리에 앉은 상태로 두 다리를 앞으로 끌어 양 팔로 감싸고는 고개를 숙이자 라이고우는 더 자세히 듣기 위해 두리번거리며 주위에 사람이 있는지 살핀 후 이내 실체화되어 시현 옆에 앉았다.
"아, 여기서는 카드보다 그게 더 편한거야?"
"뭐, 아침부터 기온이 선선하길래 햇볕 좀 쐴 겸 나와봤지. 인간처럼 정령도 빛을 봐야지 기운이 난다고. 그래서 꿈의 내용은 뭐냐?"
"꿈 속에서 부모님이 나왔는데, 날 무표정으로 바라보더니 등을 돌려 떠나고 말았어. 의외로 이게 내용의 전부이지만.... 부모님이 나에게 실망이라도 한 걸까 싶어서 이런거라도 들고 오려고 했어."
"실망? 어떤 걸 말하는거냐? 이렇게 된 참에 이번엔 내가 너에게 질문을 던지도록 하지. 지난번엔 내가 계속 대답했으니까."
시현은 덱 케이스에서 [바렐로드 드래곤]을 꺼내더니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응? 그냥.... 내가 가족들의 목숨을 앗아간 듀얼, 속된 말로 딱지 치기를 배우고 싶어서 안달인 거? 이 바렐로드도 전쟁 중에 아마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갔을텐데, 그 몬스터를 에이스 삼아 듀얼을 한다는게 한편으로는 믿기지 않아서. 만약 바렐로드가 죽인게 우리 부모님이라면.... 끙.... 그래서 실망한거 아닐까 싶어."
라이고우는 어이없다는듯 고개를 흔들었다.
"뭐야, 그게 무슨 실망할 거리냐. 너가 방구석 폐인이 되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모습에 오히려 감격해도 모자랄 판에.... 바렐로드도 악의를 가지고 인간에게 해를 입힌건 아니야, 정말 그랬는지도 확신할 수는 없고. 동쪽 세력에게 잡힌 정령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듀얼리스트의 말에 복종하는 무기가 되어버렸으니깐....
근데 넌 바렐로드를 쓰는게 찝찝하다면서 정작 듀얼에서는 거리낌없이 불러내더만?"
라이고우의 마지막 한 마디에 시현이 뜨끔하며 몸을 떨었다. 마치 숙제를 깜빡하고 하지 않아 선생님에게 혼나는 아이처럼, 식은 땀이 그의 이마에 맺히기 시작했다.
"그... 그게... 이상하게 내면에서 자꾸만 듀얼을 하라고 재촉을 하는 바람에 여태껏 이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어. 그리고 한 번 듀얼을 시작하고 난 후에는 이겨야 한다는 생각만 들고 듀얼 외의 요소는 전혀 생각나지 않았으니깐... 하지만 이제 안정적으로 너에게 먹일 듀얼 에너지도 있고, 학교 생활 없이 좀 더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주말이다보니 지난 날을 정리하면서 문득 이런 마음이 든거야."
"그렇단 말이지.... 그럼 너가 듀얼하는 이유는 즐거워서 그런거냐, 아니면 강박감 때문이냐? 그러니까,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중 어느거냐고."
시현은 아까보다도 더 빠르게 무릎에 올린 손과 메마른 입술을 파르르 떨며, 입을 열려고 애썼지만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말이 없는 묘비와 물어보고 싶은게 잔뜩이라 입이 꿈틀거리는 라이고우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문득 둘이 대비되면서 어떤 단어가 떠올랐다. '기대'.
"둘 다야. 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강박감도 있어. 그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난 듀얼할 때면 이상하게 가슴이 뛰고 온몸이 떨려. 어릴 적에도 듀얼을 소재로 한 애니를 보고 주인공처럼 듀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은 있지만, 그때와는 차원이 달라. 내가 듀얼을 할 때면 꼭 듀얼 상대가 아닌 제 3자가 내 모습을 늘 지켜보는 기분이야."
"듀얼할 때마다?"
"응, 그래서 난 누군가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듀얼을 하는게 아닌가 싶어. 혼자 듀얼하더라도 누군가가 지켜봐준다면 외롭지 않은 것처럼... 물론 그게 특정한 대상 1명인지 아니면 듀얼을 구경하는 관중들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대라.... 그럼 네 부모님? 이게 유력한 후보인데."
"그런지는 잘 모르겠어. 사실 부모님은 어릴 때 내가 카드를 사달라고 조를 때마다 완강히 거부했어.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기억나는 말로는 "넌 아직 어리기에 책임질 능력이 부족해"라고 했나? 정작 나보다 1살 많은 누나는 멀쩡히 사주더니만... 그래서 부모님에게 서운한 감정이 많이 들기도 했고. 하지만 그렇다고 부모님을 원망할 정도의 감정을 가진 적은 거의 없는데, 그럼 왜 난 전쟁 전에 가이아 밖으로 밖으로 나와있던거지? 부모님말고 내가 또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있는걸까?"
라이고우는 천천히 턱을 쓰다듬으며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흠.... 그러고보니 너가 어떤 공간에서 홀로 듀얼하는 기억이 남아있다고 했지. 적어도 넌 그 기억을 잃기 전에도 손을 번쩍 들면서 횡단보도를 건너는 평범한 초딩은 아니였던 것 같은데. 아니면... 혹시 기억을 잃은 듀얼에 미친 사이코인건 아닐까? 전쟁터에서 맨정신으로 듀얼하는걸 보면 충분히 가능할지도?"
"웃기기는, 가능은 무슨 가능이야."
그러나 시현에게서 딱히 웃음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혼란스러워 하며 여전히 갈 곳을 잃은채 헤메고 있었고, 머릿속은 왜 자꾸 내면에서 듀얼하라고 종용하는 걸까. 정답을 알 수 없는 질문에 휩싸인 상태였다.
"그래서 이제 앞으로 뭐 할 계획이야? 너무 일찍 나온 것 같은데."
그러자 시현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더니 침대처럼 부드러운 들판 위에 뒤로 벌렁 누워버렸다.
"이제 점심 먹을 때까지 여기서 멍이나 때릴까 싶어. 묘비를 보면 뭔가 잊어버린 기억이 날 것 같아서 여기까지 왔는데, 기억 나기는 커녕 오히려 머리가 아프기도 하고. 부모님을 추모하러 온 목적도 있지만 막상 꽃 한송이 가지고 할 것도 많지 않고... 너무 날씨가 좋아서 드러누워 잘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런데 갑자기, 조금 전만 해도 농담을 주고 받던 라이고우의 표정이 무슨 똥이라도 씹은 것처럼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잠깐, 내 동료들이 신호를 보냈어. 긴급 상황이라는군."
"무슨 일인데 그래?"
"일단 따라와라."
왜 그렇게 다급해진건지는 모르겠지만, 시현은 덱과 듀얼디스크를 주섬주섬 챙겨 카드 상태로 변해 날아다니는 그를 따라갔다.
..............................................
라이고우와 함께 도착한 곳은 어느 변두리 지역의 뒷골목. 여기서부터 라이고우가 날아가는 속도가 더욱 빨라져서 시현은 몸이 앞으로 고꾸라질 정도로 달려야 했다. 원래부터 축구를 하며 밖에 나가 노는 체질이 아니였기에 숨이 차며 다리가 모래주머니라도 달린 것처럼 무거워졌고...
"헉헉.... 같이 가!"
-"좀만 참아라, 이제 거의 다 왔으니까."
라이고우를 따라 잽싸게 오른쪽 모퉁이로 돌아가려는 순간,
"이쪽이야."
시현은 알 수 없는 목소리를 듣고는 몸의 관성 때문에 하마터면 앞으로 엎어질뻔 했다. 방금 목소리는 적어도 라이고우의 것은 아니였다. 귓가에 맴도는 달콤하고 청아한 여성의 목소리... 만약 세상에 여신이 있다면 이런 목소리를 가졌으려나. 시현은 천천히 뒷걸음질 치다 뒤쪽을 돌아보니 어떤 카드가 뒷면만 보인 상태로 떠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뭐지....? 저 카드는... 일단 라이고우를 따라가야 하는데...'
도저히 잊어버릴 수 없는 아름다운 목소리에 사로잡힐 것 같아 시현은 억지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으나, 저 카드(아마도 정령)은 시현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괜찮아, 날 믿어. 너가 찾는게 저쪽으로 가면 있어."
이번에는 목소리가 귓가에만 울리지 않고 머리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려 하는 것이였다. 갑자기 현기증이 나더니 눈 앞이 흐려지기 시작하면서 분홍색 꽃잎이 휘날리는 것이 보였다. 마음이 서글퍼져서 내가 헛것을 보는구나, 라며 털어내려 해도 도저히 잊어버릴 수 없었다. 한 번은 꽃잎이 한 곳에 모이면서 일시적으로 여성의 형상을 나타냈는데, 시현이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그대로 흩어져버렸다.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나머지, 시현의 눈에서 투명한 꽃잎이 천천히 떨어지자 급하게 두 손으로 눈을 비볐다. 난 왜 울고 있는거지? 저건 누구의 목소리지? 시현은 홀린 듯 팔을 뻗어 카드를 잡으려 했다. 저 하늘 위에 있는 태양까지 잡아버릴 기세로 까치발까지 들며 잡으려 했건만, 야속하게도 저 카드는 시현의 손 끝에 스치고는 빠르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안 돼, 가지 말아줘...'
목소리의 주인이 어머니인지 아니면 라이고우 같은 야생 정령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건 오직 하나, 그 목소리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 시현은 마음이 내키는 대로 라이고우와 정 반대의 방향으로 뛰었다.
라이고우 역시 모퉁이를 1번 더 돌고나서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뒤를 돌아봤는데, 그의 눈에도 꽃잎이 휘날리는 것이 보였다. 시현의 뜀박질 소리가 끊긴건 고작 10초 전부터. 모퉁이가 그리 많지도 않았기에 길을 잃진 않았을텐데...? 왔던 길을 되돌아와도 시현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시현아?"
텔레파시를 보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이 자식, 대체 어디로 간거냐...."
라이고우는 동료의 호출과 시현 사이에서 갈등하다 뭔가 집히는 것이 있었는지 일단 동료들에게 통신을 보내 시현부터 찾기로 했다.
"어쩌면 시현이도 걔랑 같이 있을 지도 몰라, 그러면...
다들 잘 들어, 당장 내 위치로 따라와라. 위치는 실시간으로 보고할테니, 서둘러!"
....................................................
모르는 카드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곳은 막다른 길이였다. 저 카드는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처럼 담벽 위로 날아가버렸고, 시현은 애처롭게 손을 뻗어 보았으나 무의미한 짓이였다. 그런데 뒤에서 갑자기 후끈한 온기가 느껴지더니, 한 손으로 시현의 셔츠깃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 그의 한 쪽 손목에 수갑을 채워버렸다.
"자, 너도 가진 정령을 얌전히 내놓는게 좋을 거다. 안 그러면...."
검은 양복을 입은 한 아저씨가 세 눈박이인 정령이 든 캡슐을 들고 서있었다.
저 정령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숨막혀 하며 캡슐을 두드리고 있었고, 아저씨의 얼굴은 눈과 그 주위를 가리는 회색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다. 꼭 애니에 나오는 악당처럼. 저 사람이 신문에서 봤던 비밀 결사 세력인건가 생각도 들었으나 이런 곳에서 너무 쉽게 만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거 놔요...!"
아무리 팔을 휘둘러 끊어내려 해도, 시현의 손목에 채워진 수갑은 '나 위험해요'라고 강조하는 것처럼 붉은 빛을 발하다가 꺼지기를 반복했다. 적어도 평범한 수갑이 아니라 포박 대상의 도주를 막기 위한 다른 기능이 있을 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전기 충격이라든지....
"어디 보자.... 오, 강력한 정령을 꽤나 많이 가진 모양이로군. 오늘은 심 본 날인가?"
저 아저씨는 시현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옆구리와 가방을 뒤져 덱 케이스와 듀얼 디스크를 용케 찾아내고는 자신의 자루 안에 넣었다. 시현의 카드가 그렇게 귀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 안 돼.... 제발...."
아저씨의 손에 들린 덱 케이스가 눈 앞에서 아른거렸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다는 것. 그 사실이 시현의 마음을 계속해서 후벼 팠다. 마치 눈 앞에서 놓쳐버린 의문의 카드를 놓쳤을 때처럼. 그 때문에 아저씨의 다리를 물어뜯으려 하는 정령이 눈에 들어오지 않다가 그의 비명소리를 듣고 나서야 누군가 왔음을 인지했다.
"뭐냐, 이 개 자식은!"
"누구보고 개 자식이라는거냐!!"
'라이고우....!'
라이고우가 처음 보는 정령들을 이끌고 시현을 구하러 온 것이였다. 일단 시현은 아저씨가 라이고우에 한 눈 팔린 사이 아저씨의 곁에서 떨어지는데에는 성공했으나 여전히 그와 아저씨 사이에는 10 미터 가량의 길이로 늘어진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흠, 너희들도 이 주인 없는 정령과 한패인건가... 하긴 동료가 잡혔는데 그냥 팔짱끼고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
"그럼 얌전히 크리터를 돌려주지 그래요? 아침부터 이런 짓거리를 벌이고 망신당하고 싶지 않으면!"
"저 인간은 전에도 본 적 있는 정령 포획꾼인가...."
"크리터 공, 조금만 기다리시오. 곧 구해줄테니!"
라이고우와 같이 있던 정령들은 3명. 첫번째는 그마마 인간에 가까운 형태를 가진 여행 가이드, 두번째는 반인반룡의 악마, 세번째는 코뿔소의 머리를 가진 전사였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니 캡슐 안에 갇힌 정령은 라이고우의 동료인 듯 했다. 그리고 라이고우의 시선이 시현에게로 옮겨졌는데, 무슨 말을 할 지는 불 보듯 뻔했다.
"유시현 이 자식, 너 제정신이냐? 넌 내가 날아가던 사이 어디 있었던 거야?"
"미안.... 처음 듣는 목소리의 카드를 무작정 따라갔다가... 저 아저씨에게 디스크랑 덱을 빼았겨버렸어. 이제 어떻게 하지?"
"에휴, 그러면... 이걸 사용해라."
라이고우가 입에서 나온 건지 소환했는지 모를 듀얼디스크를 물고 왔다. 일단 생김새부터 보라색 오라에 해골 장식 등 심상치 않은데, 가장자리에 투명하고 끈적한 무언가가 묻은 것으로 보아 라이고우의 침인건가 싶어, 시현은 그 디스크를 세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집었다.
"원래대로라면 전쟁 중에 이 디스크랑 내 덱으로 듀얼하게 하려 했는데... 너랑 계약한지 하루도 안 되서 전쟁이 끝나버리는 바람에 보여줄 기회가 없었어."
"알았어. 그럼 이 듀얼로 저 정령과 덱을 되찾으란 소리지?"
"그렇기는 한데, 조심해야 한다. 저 녀석의 듀얼디스크는 납치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걸 봐선 아마 불법개조된 듀얼디스크일거다. 솔리드 비전에 의한 피해가 증폭될테니, 가능하면 데미지를 입지 않는 방향으로 플레이 해야 돼. 가능하면 내가 직접 듀얼하려 했지만, 난 너와 계약을 맺어 내 힘의 일부를 너에게 주었기 때문에 듀얼을 하기에는 몸이 불완전한 상태야...."
라이고우는 실체화 능력과 큰 체급 때문에 물리적으로는 잡기 힘들다고 판단했는지, 저 아저씨도 정령을 건 듀얼을 수락했다. 아마도 정령보다는 꼬마를 상대하는게 더 쉽다고 판단했겠지.
"듀얼을 걸어오겠다고...좋다, 그럼 이 듀얼에서 이겨서 저 정령도 포획하도록 하지."
시현이 듀얼디스크를 전개하자 라이고우와 같이 있던 정령들이 카드로 변해 덱 안으로 투입되었다. 카드들의 이름을 보니 이 정령들의 이름은 각각 [마계발 현세행 데스가이드], [마주사이의 전사], [마룡장 디아볼리카]였다.
시현이 덱의 카드를 확인한 후 디스크에 투입한 사이, 어느새 눈 앞에 코인이 황금빛 궤적을 그리며 회전하다, 바닥에 수직으로 섰다. 아쉽게도 뒷면.
"듀얼!"
시작되었다. 정령을 건 위험한 듀얼이...
"선공은 내가 가져가지. 패에서 [범신의 제왕]을 발동! 패의 [진원의 제왕]을 버리고 2장 드로우.
그리고 바로 (2)번 효과를 발동! 덱의 [진제왕영역] 2장과 [제왕의 개암] 1장을 보여주고, 상대는 이 중 내 패에 넣을 카드를 고르지. 자, 어떻게 할테냐?"
카드 효과를 읽어보니 [진제왕영역]은 조건을 만족시키면 상대가 엑스트라 덱의 몬스터를 소환할 수 없게 만드는 강력한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왜 굳이 3장이 아닌 2장을 보여준걸까? 이미 나머지 1장이 패에 있어서? 아니면 그 생각을 이용한 심리전?
-"라이고우, 어떡하지?"
-"저 녀석의 덱은 패를 빠르게 순환시킬 수 있는지라, 여기서 필드 마법을 고르지 않아도 어떻게든 그걸 가져올 확률이 높아. 그리고 나머지 1장인 저 지속 마법도 강력한 효과를 가지고 있으니... 차라리 진제왕영역을 고르는게 나을지도."
-"그럼 엑덱 소환 제약은?"
-"의외로 간단해. 저 덱은 어드밴스 소환한 몬스터를 지킬 수는 있어도 그걸 지원하는 마함까지 지킬 수는 없거든. 파괴해버리면 그만이다, 이 소리야. 그리고... '파괴'는 내 힘을 담은 언체인드 덱의 전매 특허란 말씀! 너의 바렛 덱이랑 비슷하지만 좀 더 빠른 감각으로 플레이한다고 생각해."
-"그래, 그럼 널 믿을게."
시현은 홀로그램으로 뜬 3장의 카드 중 1장을 터치했다. 역시나 고른 카드는 [진제왕영역].
"좋다...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패에서 [천 제왕종기 이데아]를 일반소환하고, (1)번 효과로 덱에서 [명 제왕종기 에이도스]를 특수소환! 그리고 소환에 성공한 에이도스의 효과로, 통상 소환 외에도 1번, 몬스터를 어드밴스 소환할 수 있지.
난 이데아와 에이도스를 릴리스! 혼돈스러운 세상에 성스러운 빛을 발하며 강림하라, [천 제왕 아이테르]!!"
시현은 건물 한 채는 거뜬히 넘는 몬스터의 높이에 순간적으로 압도되었으나, 카드 효과를 읽어보며 침착하게 상황을 분석하였다.
"어드밴스 소환한 아이테르의 효과와, 묘지로 보내진 이데아의 효과 발동! 이데아의 효과로 제외되어 있는 [범신의 제왕]을 패에 넣고, 아이테르의 효과로, 덱에서 [제왕의 굉의]와 [제왕의 동기]를 묘지로 보내고, 덱에서 [빛의 제왕 크라이스]를 특수소환!
그리고, 소환에 성공한 크라이스의 효과로 크라이스 자신을 파괴하고 1장 드로우! 또한 방금 패에 넣은 [범신의 제왕]을 또 발동해서, 패의 [진제왕영역]을 버리고 2장 드로우!"
역시나 진제왕영역 1장이 이미 패에 있었던건가... 라이고우의 말을 듣기 잘했다.
-"이걸로 몇 장째 드로우지...."
-"지가 뭔 쥬다이인줄 아나, 쳇...."
그나저나, 저 의문의 듀얼리스트는 대체 무엇을 보여주려고 계속 패를 교환하는걸까...
"흠.... 그럼 장착 마법 [재림의 제왕]을 발동, 묘지의 크라이스를 특수소환하고 이 카드를 장착하지. 그리고... 카드 2장을 세트하고 턴 엔드."
{유시현 LP 8000, 패 5장 ??? LP 8000, 패 2장}
"드로우 페이즈, 드로우!
패에서 [마계발 현세행 데스가이드]를 일반 소환하고, 유발 효과 발동합니다! 덱에서 [마주사이의 전사]를 특수소환!"
"...너의 덱이 뭔지는 대충 알겠군. 그럼 여기서 전개의 숨통을 끊어주지! 지속 함정, [연격의 제왕]을 발동! 상대 턴에 어드밴스 소환을 실행한다! [재림의 제왕]을 장착한 몬스터는 2장만큼의 릴리스 소재로 사용할 수 있지, 난 크라이스를 릴리스하고, [웅장한 번개 제왕 자보르그]를 어드밴스 소환!!"
눈 앞에 눈부신 벼락이 치더니 양손에서 전기를 내뿜으며 제왕이 강림하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시현의 엑스트라 덱에도 정전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드밴스 소환에 성공한 자보르그의 효과로, 자보르그 자신을 파괴!
그리고, 이 효과로 빛 속성 몬스터를 파괴했으니 그 몬스터의 레벨/랭크 수치만큼 서로의 엑스트라 덱을 묘지로 보낸다!"
자보르그의 레벨은 8, 그리고 저 상대방은 엑스트라 덱이 없었다. 그렇다면...
"네 녀석의 엑스트라 덱 8장을 묘지로 보내마!!"
"윽....!"
시현의 엑스트라 덱에서 일어나던 정전기는 벼락이 칠 것이라는 신호였던건가? 눈부신 섬광과 함께 듀얼디스크에 하얀 벼락이 치며 엑스트라 덱 8장이 빠져나갔다. 빠져나간 카드는....
언체인드소울 라기아 2장.
언체인드소울킹 야먀 3장.
언체인드소울 아루바 2장.
그리고.... 가장 중요한 라이고우. 모든 언체인드 링크 몬스터가 문자 그대로 갈려버렸다.
-"저... 라이고우, 너 무사한거야...?"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라이고우를 덱에 넣고 듀얼하는건 이번이 처음이였기에, 만약 듀얼 중 파괴된다거나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 일단 무사하기를 바래야지.
아무튼 지금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전개의 시작이 될 링크 몬스터가 대부분 묘지로 보내졌고, 어드밴스 소환한 아이테르가 건재하기에 진제왕영역의 엑덱 봉인도 유효. 지금 시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렇다면... 패의 [언체인드소울 샤바라]의 효과로, 마주사이의 전사를 파괴하고, 이 카드를 패에서 특수소환합니다. 그리고 묘지로 보내진 마주사이의 효과로 덱에서 [언체인소울 슈야마]를 묘지로 보내고, 슈야마의 (2)번 효과로 샤바라를 파괴하고 자신을 특수소환합니다."
개의 형상을 한 악마들은 동족 의식이라곤 전혀 없는건지 벼락과 함께 앞발을 내리치며 자신 필드의 카드를 파파괴했다. 물론 자신의 카드를 파괴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만.
"묘지로 보내진 샤바라의 (2)번 효과로, 덱에서 [언체인드 쌍극]을 세트하고, 슈야마의 (1)번 효과로 방금 세트한 함정 카드를 파괴합니다! 그 후 필드의 마/함 1장, [진제왕영역]을 파괴!"
"아니?!"
"그리고, 파괴된 [언체인드 쌍극]의 효과로 덱에서 [언체인드소울의 화혼령]을 특수소환하고, 화혼령의 기동 효과로 화혼령과 상대 필드의 아이테르를 소재로 침식 링크 소환! 링크 2, [마계특파원 데스캐스터]!"
파괴되면 어드밴티지를 천천히 복구하는 바렛과 달리 언체인드는 파괴를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렇기에 더욱 공격적인 플레이가 가능했고. 만약 평소처럼 바렛 덱을 썼다면 [진제왕영역]에 맥도 못 추고 졌을 것이다.
"데스캐스터의 기동 효과로, 패 1장을 골라 버리고 묘지의 샤바라를 특수소환합니다. 그리고, 방금 패에서 묘지로 보내진 [마룡장 디아볼리카]의 (2)번 효과로, 묘지의 [언체인드소울킹 야마]를 엑스트라 덱으로 되돌립니다!
이어서, 샤바라와 슈야마를 소재로 [DDD 노도대왕 이그제큐티브 시저]를 엑시즈 소환하고,
배틀 페이즈! 먼저 데스캐스터로 직접 공격합니다!
데스캐스터는 링크 소환된 턴, 링크 소재로 사용할 수 없다. 엑덱에 소환할 몬스터가 얼마 없기도 했고. 그러니 지금은 다음 턴 상대방의 수를 대비하여 적당히 필드를 세워놔야 했다.
"묘지의 [진원의 제왕]의 효과 발동! 묘지의 [제왕의 동기]를 제외하고, 이 카드를 몬스터 카드 취급하여 특수소환한다!"
시저의 효과를 발동...하고 싶었으나 시저가 막을 수 있는 건 몬스터를 특수소환하는 효과를 가진 몬스터의 효과, /마/함 '카드'의 발동이였다. 저건 묘지에서 발동하는 효과라 '카드'의 발동이 아닌 '효과'의 발동.
"그럼 공격은 중지... 시저로 [진원의 제왕]을 공격합니다! 그리고 데스가이드로 직접 공격!
..... 이제 턴 엔드입니다."
"그럼 이쪽은 엔드 페이즈, 세트된 지속 함정 [진원의 제왕]을 발동. 묘지의 [진제왕영역] 2장을 덱으로 되돌리고 1장 드로우하지."
[유시현 LP 8000, 패 3장 ??? LP 7000, 패 2장]
"내 차례다, 드로우! 묘지의 [명 제왕종기 에이도스]의 효과를 발동...하고 싶지만 시저가 거슬리는군. 그렇다면 치워주지! 패의 [제왕의 심원]을 발동, 패의 [명 제왕 에레보스]를 보여주고, 덱에서 [제왕의 열선]을 패에 넣지."
"....!"
시현은 카드 효과를 읽어보고는 무언가를 직감한 듯 잇몸을 깨물었다. 시현이 불안함을 감출 때 자주 보이는 행동이였다.
"묘지의 [진원의 제왕]의 효과를 발동해 묘지의 [제왕의 굉의]를 제외하고 자신을 특수 소환!
그리고 [제왕의 열선]을 발동! 이 턴, 어드밴스 소환할 경우 상대 필드의 몬스터 1장도 제물로 삼을 수 있지!
난 진원의 제왕과 시저를 릴리스하고.... 강림하라! 이 세계의 멸망을 지켜보는 시초의 파괴자! [명 제왕 에레보스]!!!"
다른 제왕과는 차원이 다른 크기와 위압감을 가진 제왕이, 왕좌에 앉아 턱을 괸 채로 시현을 노려보았다. 그가 왕좌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디딜 때마다 대지가 무너져 내려버릴 것처럼 크게 울리고, 하늘은 탁한 회색으로 물들었으며, 골목 전체가 검은 그림자에 뒤덮이고 말았다. 이것이 정령의 진정한 힘...? 장기 쌤과의 듀얼에서 본 인잭터의 증식과는 차원이 다른 공포감이 느껴졌다.
"에레보스의 효과 발동! 덱의 [제왕의 개암]과 [범신의 제왕]을 묘지로 보내고, 상대 필드/패/묘지의 카드 중 1장을 골라 덱으로 되돌린다!"
"저는 묘지로 보내진 샤바라의 효과로, 덱에서 [언체인드 창도]를 세트합니다..."
그러나 세트된 카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에레보스의 효과에 의해 도로 덱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제 겨우 시작이다. 묘지의 에이도스의 (2)번 효과로 자신을 제외하고 묘지의 이데아를 특수소환! 특수소환에 성공한 이데아의 효과로 덱에서 2장 째의 에이도스를 특수소환! 에이도스의 소환에 성공한 것으로 통산 소환 외에도 한 번, 몬스터를 어드밴스 소환할 수 있지.
그리고... 난 이데아와 에이도스를 릴리스! 나와라, [원사 제왕 가이우스]!
묘지로 보내진 이데아와 어드밴스 소환에 성공한 가이우스의 효과 발동! 이데아의 효과로 제외되어 있는 [제왕의 굉의]를 패에 넣고, 가이우스의 효과로 상대 필드의 카드 1장을 제외하고 상대에게 1000 데미지를 준다! 하지만 여기서, 어둠 속성 몬스터를 릴리스하고 어드밴스 소환에 성공한 것으로 이 효과의 대상을 2장으로 할 수 있지!"
'필드의 카드 2장... 그렇다면...!'
해골 형상의 원혼을 두르고 등장한 가이우스가 양손을 동그랗게 모으더니, 필드의 데스가이드와 데스캐스터가 가이우스의 검은 자기장에 빨려들어가 입자로 분해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가이우스의 효과로 제외한 카드가 어둠 속성 몬스터라면, 그와 같은 이름의 카드를 상대의 덱/패/묘지/엑스트라 덱에서 전부 제외한다!"
'가이드 씨...'
시현의 덱에 있던 데스가이드 2장 역시 홀에 같이 빨려들어가고 말았다.
"그럼 배틀. 가이우스와 에레보스로 직접 공격! 제왕의 압도적인 힘 앞에, 무릎 꿇어라!!"
에레보스가 주먹으로 지면을 가격하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과 함께 시현이 위아래로 흔들리다, 순간 공기층이 위로 뜨면서 시현의 몸도 함께 붕 떠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바닥을 등진 채로 공중에 뜬 시현에게로, 이번에는 가이우스가 쏜 검은 구체가 날아와 그의 명치를 짓누르며 아래로 급강하하였다.
"크윽.... 아아아아아악!!"
{유시현 LP 7000-> 1400}
3초 정도 지났을까,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이 시선에서 점점 멀어지더니, 이윽고 등에 강한 충격이 느껴지면서 시현은 한 번 더 비명을 질렀다. 충격에 의한 반동으로 3바퀴 정도 구르고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워보니, 오른팔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거친 아스팔트 표면에 쓸린 바람에 피가 난 것이였다. 안전 장치 없는 듀얼이 이렇게 위험할 줄이야... 시현이 느낀 충격은 여태까지의 듀얼과는 격을 달리했다. 정말 목숨에 위협을 느낄 정도로.
"후후... 그럼 메인 페이즈 2, 묘지의 [범신의 제왕]의 효과 발동. 보여줄 카드는 [진제왕영역] 3장. 자, 이제 너에게 선택권은 없다..."
"헉... 흐윽..."
시현은 힘겹게 카드 1장을 지목했다. 물론 당연히 그것은 진제왕영역.
"진제왕영역을 발동하고 카드 1장을 세트. 그리고 [진원의 제왕]의 1번 효과로 묘지의 제왕의 개암과 범신의 제왕을 덱으로 되돌리고 1장 드로우, 이걸로 턴 엔드다."
{유시현 LP 1400, 패 3장 ??? LP 7000, 패 1장 }
세트한 카드는 당연히 [제왕의 굉의]. 그리고 [진제왕영역]이 다시 깔리면서 엑스트라 덱에서 몬스터를 꺼낼 수 없다. 지금 듀얼에서 지고 있는 자신을 보니 초라한 몰골, 부상을 입은 오른팔, 그리고 온몸에서 들리는 심장 뛰는 소리.... 마치 저승에서 온 고든 아저씨가 자신에게 속삭이는 소리인 것같아 소름이 끼쳤다. 이대로 정녕 지는건가....?
아니다, 여기서 지게 되면 라이고우를 비롯한 모든 정령을 빼았기게 된다. 지금은 듀얼에 집중해, 어떻게든 [진제왕영역]을 돌파할 묘책을 마련해야 했다. 하지만 상대도 시현의 이런 심리를 이미 알고 대책을 마련해 두었겠지... 그럼 그 심리를 '역이용'하는 수밖에.
"드로우 페이즈.... 드로우합니다!
패에서 카드 1장을 세트하고, 묘지의 슈야마의 효과를 발동, 그 카드를 파괴하고 자신을 특수소환합니다!
그리고 방금 파괴된 [쌍왕의 계]의 효과로, 덱에서 [언체인드트윈스 아루하]를 특수소환합니다!"
상대 듀얼디스크에 빨간 불이 들어왔으나 이내 꺼졌다. 슈야마의 효과에 체인하여 발동해 확인사살을 하겠다는 건가. 하지만...
"슈야마의 기동 효과 발동합니다. 아루하를 파괴하고..."
"어림도 없지, 속공 마법 [제왕의 굉의]를 발동! 가이우스를 릴리스하고, 슈야마의 효과를 무효로 한다! 진제왕영역을 파괴하지 못했으니 네 녀석의 패배다!!"
슈야마에게 자보르그가 쐈던 것과 비슷한 하얀 벼락이 z자를 그리며 떨어졌다. 마치 어제 시현이 그랬던 것처럼, 마지막 희망까지 짓밟히는 심정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인건지, 번개가 슬로우 모션처럼 몸을 천천히 흔들며 땅이 내려꽂히는 것이였다. 덕분에 패 1장을 내려놓기가 더 수월했지만.
살이 타들어가는 냄새와 함께 자욱한 검은 연기가 서서히 걷히고, 아저씨가 "말했지, 나에게 같은 수는 안 통한다고."라며 도발을 시전했다. 순간 시현은 아까 전 목숨에 위협을 느낀건 잊어버린건지, 몸의 긴장을 풀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 통해버렸네요."
"뭐?"
통구이가 된 슈야마가 쓰러져 있어야 할 그 자리에는 빨간 털을 가진 짐승이 버티고 서있었다.
"아니, 슈야마가 아니잖아!"
"방금 패에서 [언체인드소울 샤바라]의 효과로, 슈야마를 파괴하고 자신을 특수소환 했습니다. 제왕의 굉의의 대상이 된 몬스터가 필드에서 벗어났으니, 그 효과는 적용되지 않고요. 따라서 아루하를 파괴하고, 진제왕영역도 파괴합니다."
문득 라이고우와 듀얼할 때 [라피도 트리거]로 함정 카드의 효과를 회피한 것이 떠올랐다. 자신의 카드를 파괴해 이득을 얻는 것은 물론 프리 체인으로 카드를 파괴하는 것까지... 왠지 모르게 바렛과 언체인드는 서로 닮은 점이 많았다. 이건 우연인가, 운명인건가...
"그리고 파괴된 아루하의 효과로 덱에서 [언체인드트윈스 사라마]를 특수소환하고, 악마족 몬스터가 자신 묘지로 보내진 것으로 묘지의 [마룡장 디아볼리카]를 자신의 (1)번 효과로 특수소환합니다!"
사라마의 기동 효과를 발동해서, 묘지의 [언체인드 쌍극]을 세트하고 세트한 그 카드를 파괴합니다. 그리고 파괴된 쌍극의 효과로, 덱에서 2장 째의 아루하를 특수소환. 그 후, 사라마와 샤바라를 소재로 [언체인드소울킹 야마]를 링크소환합니다."
분명 언체인드 링크 몬스터는 자보르그에 의해 전부 묘지로 보내졌지만, 시현은 데스캐스터의 효과를 쓰면서 묘지로 보내진 디아볼리카의 효과로 이 카드를 미리 회수해놨다. 그리고 이제 남은 일은....
"야마의 효과로 묘지의 라이고우를 엑스트라 덱으로 되돌리고, 묘지로 보내진 샤바라의 효과로 덱에서 [언체인드소울의 통곡]을 세트합니다.
그리고 이제.... 야마, 아루하, 디아볼리카를 링크 마커에 세트! 소환 조건은 링크 몬스터를 포함하는 몬스터 2장 이상!
지금이야말로 현세의 봉인으로부터 뛰쳐나와, 그 난폭한 힘을 휘둘러라! 링크 4, [언체인드 쌍왕신 라이고우]!!!"
-"드디어 내가 나설 차례로군! 계속 묘지에 박혀있느라 답답했다고~!"
-"무사해서 다행이야, 라이고우..."
라이고우를 필드에 꺼내자 끊켰던 텔레파시도 다시 복구되었다.
"베틀 페이즈, 라이고우로 명 제왕 에레보스를 공격!"
-"시현, 공격명은? 바렐로드도 있는데 내가 없으면 섭섭하지 않겠어?"
-"음... 아직 못 정했는데..."
-"쳇, 그럼 그냥 내가 알아서 하지!"
라이고우가 시현과 처음 만났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더니, 이내 에레보스와 비슷한 수준의 덩치가 되었다. 이게 라이고우 고유의 능력인지 아니면 공격력 차이에 의한 크기 보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라이고우는 에레보스의 다리를 물고는 그 상태에서 점점 빠르게 회전하다가 해머 던지기를 하듯이 그대로 날려버렸고, 에레보스는 전턴 보여준 그 압도적인 포스가 무색하게 솔리드 비전이 만들어낸 방벽에 처박히고는 입자로 분해되었다.
{??? LP 7000-> 6800}
"전투로 몬스터가 파괴되었으니, 라이고우의 (2)번 효과로 필드의 카드 1장을 파괴합니다! 대상은 제 필드의 세트 카드!"
그러고보니 라이고우를 소환하기 전, 샤바라의 효과로 세트한 지속 마법, [언체인드소울의 통곡]을 발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발동하지 않은데에는 다 이유가 있지.
"파괴된 통곡의 효과로, 덱에서 [언체인드트윈스 라키아]를 특수소환하고, 직접 공격합니다!"
"그렇게 둘까 보냐! 묘지의 [진원의 제왕]의 효과 발동! 진제왕영역을 제외하고, 이 카드를 몬스터 취급해 특수소환한다!
이 카드의 수비력은 2400, 너의 배틀 페이즈도 이제 끝이다! 다음 턴이 오면 그땐 넌..."
"아뇨, 다음 턴 같은 건 없어요."
".....?!"
라이고우도 시현의 말에 킁킁, 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뭘 할지 알고 있다는 거겠지.
"라키아의 효과를 발동합니다. 자신 필드의 카드 1장, 라이고우를 파괴하겠습니다."
"뭐? 설마... 다음 턴이 없다는게, 니 턴이 없다는 소리였냐! 결국 패배를 인정한 모양..."
"시끄럽거든, 이 '딱알못'아! 넌 잠자코 보고나 있어!"
라이고우가 포효 소리가 섞인 고함을 내지르자 상대가 언제 그랬냐는듯 그새 잠잠해져버렸다. 아마 저 아저씨도 묘지에서 카드가 반짝이는걸 보고 눈치 챈 모양인가 보지. 라키아가 쇠사슬을 펼쳐 라이고우를 포박하고 천천히 조이는 순간, 라이고우의 몸에 푸른 불이 붙더니 도깨비불처럼 형체가 일렁이기 시작한 것이였다.
"자신 필드의 카드가 파괴되었으니, 묘지의 [언체인드소울킹 야마]의 효과를 발동합니다! 이 카드를 제외하고, 묘지의 악마족 몬스터, [언체인드소울의 화혼령]을 특수소환! 그 후, 자신 필드의 카드 1장, 라키아를 파괴합니다!
그리고, 라키아가 파괴되었으니 덱에서 [쌍극의 언체인드소울]을 특수소환하고, 유발 효과 발동. 패를 1장 버리고 [진원의 제왕]을 파괴합니다!"
쌍극이 던진 부적으로 인해 큰 폭발이 일어나고, 석판 형태로 버티고 서있던 진원의 제왕은 돌 무더기를 통해서만 그 흔적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 먼저 쌍극의 언체인드소울로 직접 공격합니다."
"끄윽... 느아아아악!!"
{??? LP 6800-> 3800}
"그리고, 언체인드소울의 화혼령으로 직접 공격. 화혼령의 공격력은, 자신 묘지의 언체인드 카드 1장당 300 오릅니다!"
"잠깐, 언체인드 카드라면..."
"네 녀석이 자보르그 효과로 묘지에 잔뜩 쌓아놨지! 날 묘지에 처박아둔 대가를 톡톡히 치르도록!"
이로서 화혼령의 공격력은 무려 4200. 방금 목소리를 보아 아무래도 라이고우는 정규 소환 후 묘지로 보내져도 대화가 가능한 모양이다.
"묘지에 쌓인 언체인드들의 원한을 하나로 모아 결전을 내라, 화혼령!"
"저런 꼬맹이 녀석에게 질 줄은... 끄아아아악!!"
{??? LP 3800-> 0 듀얼 종료}
화혼령이 상대의 옆구리에 달린 캡슐을 깨물자 유리막이 박살나면서 그 안에 갇혀 있던 크리터가 빠져나왔다. 라이고우는 시현이 장착한 전용 듀얼디스크를 물어 빼고는 입 안으로 넣어버렸다. 설마 했는데 입에서 뺀게 진짜였더니, 시현은 하마터면 오늘 먹은 아침이 목으로 올라올 뻔했다. 라이고우에게 한소리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게 아니지.
"크리터 쨩~!"
솔리드 비전이 사라지면서 듀얼디스크를 접을 틈도 없이 가이드 씨가 실체화되어 크리터에게로 달려갔다.
"괜찮아? 방금 시현이가 듀얼에서 이겨서 캡슐이 부서졌어..."
"헉..헉... 정말 숨 막혀 죽을뻔 했어요!"
그렇게 2명이 재회의 감동을 누리는 사이, 시현과 라이고우는 천천히 의문의 듀얼리스트에게로 다가가 자신의 덱과 디스크부터 챙겼다.
"당신은.... 누구죠...? 왜 정령을 납치하는 거에요?"
솔리드 비전의 피해량 증폭 때문에 큰 부상을 입은 건지 그가 입을 열자 새빨간 피가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듀얼디스크를 불법개조하고 듀얼을 한 것은 그이니 결국 자업자득인 셈이지만.
"너 같은건 알아 봤자다. 왜냐하면..."
그 순간, 어디선가 쇠사슬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라이고우가 낸 소리라고 생각해 무시한 순간....
"모두 동작 그만."
차분한 목소리를 가진 여대생이 저 골목 모퉁이에서 나와, 아저씨의 것과 비슷한 수갑을 여러 개 던졌다. 수갑은 시현이 아는 모든 물리 법칙을 무시하며 일직선으로 날아가더니, 정확하게 납치범과 세 정령의 손목(라이고우는 발목)에 차였다. '아니, 저 아저씨도 그렇고 무슨 수갑이 10미터를 넘을 정도로 긴거지?'라고 생각한 순간, 시현은 저 여고생의 팔에 달린 듀얼디스크, 그리고 옷에 달린 붉은 뱃지에 쓰여진 '시큐리티 포스'라는 글자를 보고 확신했다. '녀석을 듀얼로 구속하라'.... 애니에서 보던 장면을 자신이 직접 볼 줄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일단 너는 보아하니 정령을 납치한게 확실하니 현행범으로 체포. 방금 전 비정상적으로 강력한 듀얼 에너지가 발생했는데, 불법 개조가 요즘 유행하는 범죄 유형인건가...
그리고 너희들은 등록되지 않은 야생 정령이군.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도 있으니 미리 잡아놨다가 따로 범죄 기록이 없다면 보호소로 보내고, 정 안 되면.... 여기서 추방해야지 뭐."
여대생이 납치범을 줄로 묶어 완전히 포박한 후, 라이고우와 가이드 씨, 크리터는 이상한 스캐너 같은 것을 꺼내더니 카드 형태로 변환시켜 덱 케이스 비스무리한 보관함에 넣었다. 그러고는 깨진 캡슐 잔해를 발로 쓸어내 치우면서 이번에는 시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너 괜찮니? 저 이상한 인간이랑 사나운 야생 정령에게 시달리는 일이 벌어질 줄이야... 이제 여기는 이 누나가 해결할테니 넌 집으로 돌아가도 돼. 혹시 다친 데 있으면 근처의 병원으로 데려다 줄 수도 있으니 미리 말하고."
방금은 바렛 덱을 빼았기더니, 이번에는 라이고우인가? 그나저나, 추방은 또 무슨 소리지? 일단 한 가지 확실한건, 라이고우는 여기서 사는 것을 허락 받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야생 정령이라 당국에서 잡아간다는 것. 여기서 어떻게든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라이고우가 어떻게 될 지 모른다. 순간, 지금까지 시현이 잡지 못한 수많은 것들이 머릿 속을 매웠다. 꿈 속에서 자신을 떠나버린 부모님, 이상할 정도로 그리운 목소리의 여인, 그리고 지금의 라이고우. 더 이상 빼았기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되찾아야 한다. 어떻게든.... 몸이 마비된 것처럼 떨리다가 머릿속이 순간적으로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순간, 그의 손이 듀얼디스크로 향했다.
"잠깐만요."
"응?"
"저와 듀얼해요. 이기면 저 정령들을 제게 돌려주세요."
"뭐? 그게 무슨 소리니?"
"라이고우는.... 제 카드라고요."
시현의 뇌가 화들짝 놀라 몸에 당장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고장이라도 나버린 건지 그의 몸은 듀얼 디스크를 장착하며 대뜸 듀얼을 요청하는 것이였다. '저 여자는 시큐리티라고! 공무원에게 반항할 셈이야??'라며 아무리 소리없는 아우성을 질러도 그만두지 않았다. 아마 방금 듀얼에서 신체에 큰 충격을 받아서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바람에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건가, 시현 자신도 왜 굳이 말이나 다른 방법으로 제지하지 않고 이런 미친 짓을 했는지 알 겨를이 없었다.
"이상한 소리 그만해. 얘네들은 국가가 알아서 관리하거나 처리할테니, 너가 여기서 할 수 있는건 없어. 부모님이 걱정할텐데, 빨리 돌아가는게 좋을 걸?"
"정말 안 하실건가요? 전 분명히 경고했는데..."
'부모님'이라는 단어가 기폭제가 된 건지, 이번엔 한 술 더 떠서, 납치범이 자신에게 채웠던 수갑이 듀얼의 충격으로 인해 풀려있는 것을 보고는 그것을 주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여대생에게 던져버렸다! 시현의 뇌는 깊은 한숨을 쉬며 결국 듣지도 않는 몸의 통제권을 완전히 내려놓았다. '에라 모르겠다, 저질러버린 이상 어떻게든 잘 되길 바라야지.'
여대생은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수갑을 보고는 찌푸려진 미간, 폭발 직전의 솥뚜껑처럼 들썩거리는 몸으로 기분이 더럽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출하며 헛웃음을 멈추지 못 했다.
"....나 참 어이가 없네, 이런 미친 잼민을 봤나. 그 수갑이 어떤걸 의미하는진 알기나 해?"
"네, 아주 잘 알아요. 강제로라도 듀얼하겠다는 겁니다. 라이고우를 데려가는건 용납 못해요."
"하... 넌 분명 후회하게 될 거다. 난 어린 애라고 안 봐줘!"
더 이상 처음 봤을 때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남아있지 않았다. 왜 굳이 저 여대생을 적으로 돌려버렸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시현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하는 수 없이 직감을 믿어보기로 했다. 아직도 등뼈가 욱신거리고 여전히 피가 흐르는 오른팔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신경 신호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빠르게 뛰는 심장의 소리와 처음 들은 여인의 목소리, 그리고 마음 속에 울려 퍼지는 '듀얼해라'라는 울림에 묻혀 그 고통은 서서히 희석되어버렸다.
과연, 이 승부의 행방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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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퀄리티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여러번 수정하다보니 업로드가 평소보다 늦었군요. 완성된 글의 상태도 괜찮은건지 걱정되기도 하고요...
아무튼 이번 화는 언체인드의 데뷔전인데.... 현재 대부분 덱파워가 10기~11기 초반에 머무른걸 생각하면 12기 지원까지 끌어온 언체인드는 팬픽 초반에 쓰기에는 강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바렛은 자보르그로 엑덱 털리고 영역으로 봉인당하면 아무것도 못하기도 하고, 미리 강탈 당하기도 했으니... 라이고우의 말대로 언체인드는 평소엔 안 쓰고 꼭 이겨야 하는 비공인전에만 가끔씩 꺼내는 비장의 수단으로 나올 계획입니다.
로그 오류나 오타 지적 등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다음 화 보러가기: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546/read/2684439)
(IP보기클릭)58.143.***.***
(IP보기클릭)211.106.***.***
현명하게 판단했다면 라이고우보다는 최대한 낮은 링크의 몬스터 위주로 묻었겠지만.... 사실 저 아저씨는 극적인 연출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희생한 젠틀맨이라는게 학계의 정설입니다(?) | 24.09.14 22:47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