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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한다. 게임을 받아들인 것을. 이런 게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을. 어쩌면 게임에, 듀얼에 관심을 들인 것 자체를.
소용없는 행위임을 알아도 서문유진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후회가 아니면 도망 뿐이다. 무엇이든 해야한다고 스스로에게 호소하던 그는, 지금 두 가지를 다 하고 있었다.
'여긴 뭐야?'
다리가 쉴새 없이 달리다 보니 무릎에 자극이 간다. 평탄한 아스팔트라 해도 계속 내리치듯 밟고 있으니 발도 서서히 아파왔다.
무거운 가방끈에 어깨는 계속 쓸린다. 가방 끝부분이 계속 무릎과 종아리에 닿는 것도 묘하게 거슬린다.
호흡이 가파르다. 잔잔한 공기 속에서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그의 숨소리만이 귓속을 맴돌았다.
그런 불쾌한 감각들을 감수하고 있음에도, 더이상 바이크가 쫓아올 일도 없음에도, 유진은 아직 도망을 멈출 생각이 없다. 넘쳐나는 의문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그의 머리는, 그만 멈추라는 지시를 내릴 여유조차 없었다.
'난 뭐하는 건데? 왜 여기서 이러는 건데? 내가 어쩌다……'
구역질이 치민다.
방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는 것은 비위를 심하게 건드리는 행위임을 알고 있어도 또다시 덧난 상처를 건드리고 말았다.
머릿속으로 던지는 의문의 답이야 이미 나와 있었다.
이곳으로 들어오라고 권유한 것은 재버워키지만, 들어오기로 선택한 것은 본인. 또한 도망쳐서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바람을 넣었던 것 또한 본인이었다. 과정이 어땠든 듀얼을 하겠다고 말을 꺼낸 것도 본인이다.
무엇을 감당해야 할지 머리로는 알았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눈으로 접한 충격은 이성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애써 억눌렀던 두려움이 때를 노리고서 범람해온다. 도망치는 것조차 간신히 정신을 추스리고서야 할 수 있을 정도다.
이제 와서 참가 의지를 잃고 나갈 생각이나 하는 것이 꼴사나울 수도 있겠다. 다른 참가자들에게는 엄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그런 비웃음을 산들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렇게 해서까지 지킬 만한 자존심도 아니다. 애초에 비웃을 사람이라는 것이 지금은 보이지도 않는다.
게임 시작 직후 재버워키는 이런저런 규칙을 대략적으로 알려주었다. 너무나 대략적이라 따질 거리는 한 두가지가 아니다. 적어도 포기하고 나가는 방법마저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뛰어나간다고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럴 수가 없기 때문에 알려줄 필요조차 없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 자리를 벗어날 수만 있다면 일단 뛰어서 나쁠 것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어디 가야할지는 알 수가 없음에도 일단은 뛰고 본다.
그렇게 고요한 혼란 속을 정신없이 뛰어가던 유진은, 눈앞에 있는 것에 다시 발을 멈춰세우고야 말았다.
"……!?"
사람이었던 것이 또 하나. 이미 거의 말라굳어가는 핏자국 위에 고꾸라진 채, 역시 움직일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평생 볼까말까 했던 사람의 죽음을 오늘 하루만 두 번째로 목격했다.
'이 사람은…, 그럼 여기가….'
유진은 분명 방금 전에 나왔던 길이 아닌 곳으로 뛰었다. 하지만 그 길이 하필이면 와시오가 자신을 발견하기 전에 지나친 곳이었던 모양이었다. 그의 사냥감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몸뚱아리가 널부러져 있으니까. 아까 들었던 또다른 충돌음의 정체, 와시오가 내린 벌칙의 잔해일 것이다.
그리고 그 남자에게, 이번에는 자신이 저질러버리고 나온 것이다. 어쩌면 자업자득이라는 형태로 최후를 맞이한 것일지도 모른다.
또다시 올라오는 구역질을 억누른다. 시각적인 충격, 눈앞에 처한 현실에 대한 더 확실한 자각, 그리고 억울함. 그런 감각들이 이성을 옭아매기 시작하면서 비위가 자꾸만 상해갔다.
언젠가 듀얼을 통해 사설도박이 이뤄지고 있다는 소문을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었다. 여느 스포츠가 그렇듯이, 승부라는 것이 이뤄지는 이상 그 승부를 통해 이득을 보려는 움직임은 있기 마련. 그러니 충분히 있으리라 생각은 하면서도 되도록 그런 것과 연이 없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 대신에 훨씬 더 음습하고 피비린내나는 곳에 들어오고야 만 것이다.
게임을 이해해나가려던 유진은, 방금 전까지 한 번의 게임을 마친 유진은, 다시 이 '게임'을 이해하기를 거부하려들고 있었다. 카드 게임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행위를, 살인이라는 것을 직접 목격한 적조차 없던 유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승리의 기쁨을, 이기고 지는 것의 가치를 이런 식으로 알고 싶지는 않았다. '결투'가 이런 것이라면, 애초에 동경 따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참가자가 50명이란 건…… 지금 몇 명이 빠졌다고 쳐도 다음에 내가 싸워야 할 상대는 얼마나…… 씨, 어쩌자고 이런 데를……….'
어둠의 게임이 매번 이런 식이라면, 만에 하나 이 게임에서 살아서 나간다고 친다면, 이런 것을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봐야하는가. 몇 번이나 더 듀얼이란 걸 해야 하는가.
미친 곳이다. 미친 짓을 벌인 끝에 미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자신도 그 미친 일을 언제 당할지 모른다. 그리고, 아마 자신도 미쳐가고 있다.
어째서 50명이나 되는 인원이 참가할 수가 있단 말일까. 대체 이런 걸 저질러서 무슨 이득이 있을까. 이득을 보기는 커녕, 만에 하나 이런 행위가 바깥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어쩔 생각인 것일까. 어쩌면 그런 것을 신경쓸 필요가 없을 정도로 더 무언가에 말려든 것이 아닐까.
여기서 도망치고 저항하는 일 따위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여길 살아서 나갈 수는 있는 거야? 진짜로?'
패닉에 빠진 유진은 한 순간 멀리서 들려오는 소음에 화들짝 놀란다. 불안한 마음에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돌리니, 얼핏 하늘에서 무언가 거대한 형체가 보였다.
영화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빌딩 사이로 거대한 괴수 한 마리가 떠있다. 머나먼 거리와 비례하듯 현실감이 괴리되어 있다.
충분히 까무러칠 만한 박력이었지만 그 괴수의 시선이 유진을 향하지 않은 덕분인지 나름 냉정하게 사정을 알아낼 수 있었다.
'몬스터!? 듀얼 중인가?'
이윽고 몬스터는 아래를 향해 거센 불줄기를 내뿜었다. 아마도 상대의 몬스터, 또는 플레이어 자체를 향한 일격이리라. 듀얼이 슬슬 결판이 나려는 모양이었다.
저것을 맞는 고통은 어느 정도일까. 저런 불길이 내리쬐어진 곳이 멀쩡히 남아있을지 유진은 의문이었다. 자신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적어도 저곳은 가까이 가볼 만한 곳이 아닐 것이다. 되도록 저런 것을 꺼낸 장본인을 마주칠 일이 없으면 그나마 다행일지 모른다.
그러다 유진은 떠올린다. 저 괴수만한 스케일의 몬스터를 듀얼 내내 꺼내놓았다는 사실을. 자신이 여기서 저 괴수를 목격했듯이, 다른 참가자들도 자신과 상대의 몬스터를 보았을 것이다. 즉 일종의 전력 노출이다.
여기서 듀얼을 치뤄야 하는 것은 자신 뿐만이 아니다. 다른 참가자들도 저런 듀얼을 치루고 있거나 그럴 상대를 찾고 있을지 모른다.
몬스터의 공세를 지켜보고 차마 접근할 엄두도 못낼 가능성이야 있지만, 오히려 투지를 불태우며 죽자사자 달려들 가능성도 전무하지는 않다. 무엇보다 몬스터의 강함은 비주얼이 다가 아니니까.
'나, 뛰쳐나오길 잘 한 거겠지?'
대화가 통할지 알 수 없는 상대와 싸움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도망치는 것 만한 선택이 없다. 하지만 여기서 도망쳐봤자 다른 상대를 마주친다면? 저런 몬스터를 상대해야 한다면?
그런 것을 맞서야 할 용기는 당장에 찾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용기하고는 상관없이 맞서야 하는 운명이 찾아올 것이다.
'지금 겁이나 먹을 때가 아니잖아. 저런 걸 또 해야된다면 대비든 뭐든 해야 되는데. 뭘 어떻게 해야 되지?'
유진은 아직 살고 싶다. 살기 위해서는 일단 듀얼에서 이겨야 한다. 듀얼에서 이기려면 되도록 많은 카드를 알아보고 파악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아까 분명 카드가 생겼었는데.'
유진은 문득 승리 직후 손에 내려온 카드들을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뿌리쳤던 것을 기억한다. 그 중에는 분명 낯선 카드들이 섞여있었다.
듀얼리스트들에게 카드는 일종의 무기나 다름없는 것. 무시해도 될지 모르지만, 분명히 무시하고 넘기기 힘든 카드가 있었음을 떠올린다.
'아씨, 주워가야 되나?'
선 채로 망설이던 그는, 결국 일단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기로 했다. 누군가 접근하기 전에 서두를 필요가 있다.
유진은 스스로를 진정시켜본다.
괜찮다. 다시는 움직일 일 없을 테니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더 두려운 것에 대비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라고.
◇
목적을 찾은 유진의 뜀걸음은, 또다시 사람을 만남으로서 멈춘다.
이번에는 산 사람. 그것도 남녀가 두 명.
"………"
아직 각오를 채 굳히기도 전에 새로운 상대를 마주치고 말았다. 뛰느라 가파라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유진은 상대의 모습을 얼핏 살핀다.
인상착의만으로는 평범하게 거리를 지나치면 있을 법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양쪽 다 듀얼 디스크를 차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둘 다 게임의 참가자가 맞는 모양이었다.
다 경직되어있기는 했지만 그나마 남성 쪽이 상대적으로 침착해 보인다.
이들이 어쩐 일로 이곳을 기웃거리는지는 짐작이 갔다. 역시 자신의 첫 실전 듀얼 또한 만만찮은 흔적을 남겼던 모양이었다. 거기서 무엇을 결정했는지까지 유진이 알 길은 없었지만, 적어도 동태를 살피러 가던 중이라는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셋 모두 굳은 표정으로 서로를 대면한다. 만면에 긴장이 드러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 머리를 굴린다.
그리고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상대 편 남자쪽이었다.
"…뭐야?"
질문을 꺼냈으니 대답을 해야 한다. 어쩐지 솔직하게 대답하면 안 될 것만 같았기에, 유진은 변명거리를 떠올린다.
통할지 아닐지는 몰라도 괜히 사람을 해치웠다는 것을 밝혀서 좋을리는 없으니까.
유진은 항복을 표하듯 양손을 들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아뇨, 일단 듀얼을 하자고 온 게 아니구요, 그게… 저… 무슨 소리가 나서…"
태도를 살핀다. 척 봐도 긴장하고 있다. 참가자임에도 이들은 선뜻 전의를 드러내지 않는다. 어쩌면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처지의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과연 설득의 여지가 있을까. 최소한 이 상황을 싸우는 일 없이 넘길 수 있을까.
저들의 태도가 명백한 적의로 바뀌기 전에 신중한 대처가 요구되었다.
횡설수설하는 유진의 말을 듣던 남자는, 마음을 굳게 먹은 듯한 표정을 짓더니 대답한다.
"우리도 그래."
"………"
일단 작게 한숨. 당장 연전을 치룰 필요는 없다는 사실에 숨을 고를 여유 정도는 되찾는다.
"어쩌다 보니 여기 오게 됐거든요. 뭐가 뭔지 모르는 상황인데."
"마찬가지야."
긴장을 놓지 못하는 와중에도 두 번 연속으로 동감의 표시가 돌아온다.
유진이 서서히 안심하려니, 어색한 문답이 오가는 와중에도 여성의 태도가 심상치 않음을 알게 된다.
두려움이라기 보다는 의심의 시선이다.
숨을 고른다. 도둑이 제 발 저린 듯한 태도를 계속 보여봤자 수상함만 더할 뿐이다.
기왕이면 알 수 없는 일이 닥쳐서 두려울 뿐이라는 태도를 내비치도록 하자, 그런 식으로 유진은 재빨르게 전략을 내세운다.
"저기, 괜찮으면 뭐가 있는지 확인하러…"
'현장에 같이 가보지 않겠냐'는 말을 꺼내려던 그 순간이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묘하게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가 유진의 말을 가로막는다.
"네?"
"아까 그거 너였잖아? 왜 발뺌을 하고 있어?"
여성은 기가 막히기까지 하다는 시선으로 추궁해오고 있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유진은 발뺌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어, 무슨 말인지……"
"네가 저기서 뛰쳐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거잖아? 설마 속이려고?"
이미 무언가 확신을 가진 상태에서 유진을 추궁해온다.
유진은 당황하는 기색을 완전히 감추지 못한다.
"야, 뭐하는 거야!"
"놔 봐! 봐버렸는데 어쩌라고!"
당황한 것은 남자도 마찬가지였는지 여자를 꾸짖듯 어깨를 툭하고 친다. 여성은 야속한 듯 뿌려치는 동작을 취하더니 남자를 흘깃 째려본다. 그리고 그보다 더 표독스런 시선이 유진에게 다시 돌아왔다.
"뭔 일 있었는지 대충 알아. 저기서 사람이 들어올려졌다가 떨어진 거. 그걸 목격했으면 목격했다고 솔직히 말하지, 왜 우리한테 숨기고 접근하는데?"
결코 해코지할 목적이 아니다. 그걸 솔직하게 대답해봤자 이미 갔다온 현장을, 뭐하러 사람을 데리고 또 가려드는지를 물어올 것이다.
고작 5장의 카드를 주우러 가려다 우연히 마주친 것 뿐이라고 한다면 이 사람들이 어떻게 믿어줄까. 아직 상식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유진의 머리는 딜레마의 늪에 빠져버렸다.
무고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더 사람을 죽게 할 생각은 없다. 결백 아닌 결백을 온전히 입증해내기엔 유진의 머리가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정신적인 피로감이 유진의 사고를 제동시키기 시작한다.
"설마 저기서 듀얼했던 게 너야? 사람 떨어뜨린 거, 네가 벌칙으로 저지른 거야?"
그녀의 추론은 전부 사실이다. 단지 유진으로서는 와시오가 알아서 떨어져 죽은 것 뿐이라 받아들이고 싶지만, 서로가 디젠을 통한 어둠의 듀얼에 대한 매커니즘을 이해하고 있다면 변명으로 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유진의 뇌가 냉기에 내던져진 듯 차갑게 식어가기 시작한다.
머리가 새하얘진다.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떠올릴 수가 없다.
"좀 가만히 있……"
"죽인 거 맞잖아? 우리한테도 안 그럴 거라는 보장 있어?"
남자가 말려보아도 여자는 추궁을 멈추지 않는다. 날이 서린 목소리가 유진의 귀를 타고 머릿속을 후벼판다. 어쩌면 그녀도 그녀 나름대로 용기를 쥐어짜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걸 고려하기보다도 앞서, 추궁을 받아 한껏 휘저어진 유진은 뇌는 어느새 빙점에 도달한 듯 굳어있던 상태였다.
"쟤가 뭣 때문에 여기까지 왔을 것 같아? 방금 사람 골로 보낸 애 말을 진짜로 믿으라고?"
맞는 말이다. 적어도 유진으로서는 부정할 수 없다.
사람을 죽였다. 죄라고 할 수밖에 없는 행위를 유진은 어쨌든 두 번이나 저질렀다.
첫번째 무렵에는 왜 무서운 것을 겪었다는 경험 이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일까. 답은 환경의 차이일 것이다.
이름도 가물가물해져가는 첫 상대는 현실을 뒤덮은 어둠 속에서 흔적도 남기지 않고 불타듯이 사라졌다. 더는 증명할 수 없게 된 그 사건을 사실이라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은 그 목소리, 재버워키 뿐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신도 그대로 남은데다, 그 현장의 목격자도 눈앞에 있으니 더는 발뺌할 수가 없다.
차라리 그런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나가있었더라면. 차라리 이런 상황에서도 아니라고 둘러 댈 만큼 뻔뻔했더라면, 계속해서 변명거리를 떠올릴 수 있었을까.
저들이 아직 상식을 버리지 않았더라면, 살인자와 뜻을 같이 하는 것이 내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하나둘씩 생각을 해가며 온기를 되찾아가던 머리는 이윽고 얼어붙은 반동이라는 듯 갑자기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당신은?"
"뭐?"
"당신은 안 그럴 자신 있어?"
갑자기 바뀐 태도에 남녀는 당황하는 기색을 미처 감추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들의 경계심을 더 굳히는 꼴이 되겠지만 그 시점의 유진에게 그런 걸 고려할 여유 따윈 남아있지 않았다.
"다짜고짜 죽일 작정으로 덤비는데, 안 싸우면 내가 죽게 생겼는데, 당신네는 안 그럴 자신 있냐고 묻잖아?"
그들의 의심을 논파할 논리는 없다. 그 듀얼 직전까지 마찬가지로 덜덜 떨고나 있던 그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없었다.
그저 지금은 그저 한 순간 욱하는 심정에 몸을 맡긴 채 떠들고 있을 뿐이다.
대답 대신 몇 초간 침묵이 흐르자, 아직 열점에서 벗어나지 않은 그의 머리는 계속해서 입을 열도록 지시한다.
"이런 일 생길 거라는 거 몰랐어? 아까 한 말 다 들었을 거 아냐? 아니, 그 전에 그놈이 다 설명해줬잖아?"
"……"
"이럴 거면 여긴 뭐 하러 들어왔는데? 딴 사람 트집 잡으러? 자기는 안 그럴 거라고 정신승리하러? 그럼 처음부터 받아들이지 말던가!"
욱한 나머지 언성이 높아지고 말았다. 그제서야 경각심으로 이성을 되찾은 입이 다물어진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표정이 그대로 굳어버리느라 이들도 입을 미처 움직일 수 없는 모양이었다.
더이상 이들이 추궁할 여력이 없는 것을 알자, 유진은 입을 꾹 닫고서 둘을 노려본다.
"…………"
"…………"
유진까지 입을 닫으면서 그 자리는 희미한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그런 반응을 보고서, 시원하게 분노를 내뱉은 직후의 머리는 열기가 서서히 빠져나가며 냉철함을 되찾아간다. 그 머리로 내린 판단은 명쾌할 정도로 객관적이었다.
이젠 틀렸다. 이들의 신뢰를 얻을 기회는 영영 날아가버렸다.
엎질러진 물을 주워담는 재능은 그에게 없었고, 그럴 의욕도 남아있지 않았다.
머리에 남은 열기를 빼내듯 유진은 작게 한숨을 쉰다.
"죄송해요."
왜 사과를 하는지는 유진조차 모른다. 그저 말을 얼버무릴 만한 표현을 찾았을 뿐인 듯 싶었다.
스스로가 말한 대로 이들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 어떠한 변명도 필요없다. 필요없을 텐데 저들이 굳이 적대적으로 나온다면, 애초에 말싸움으로 시간이나 끌고 있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전의도 내비치지 않는다. 말을 듣지도, 싸우지도 않을 것이라면 지금의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노기는 그렇게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히 잦아들었다. 최소한 대놓고 표출하지 않을 정도로는.
"싸울 생각 진짜 없으니까, 잘들 해보세요. 갈게요."
이들을 상대하고 있을 이유가 사라졌다. 그렇게 확신한 유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던 방향으로 터벅터벅 걸어나간다.
이들이 무슨 반응을 보이는지는 뒤돌아 확인해볼 마음도 들지 않았다.
거리는 여전히 고요하고 넓다. 그리고 쓸데없이 길다.
다행히도 이번엔 걷는 도중에 마주치는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산 사람은.
생각보다 더 늦게 도착하기는 했지만, 역시 다행스럽게도 현장은 아무런 변화도 없다. 인기척이 없으니 아직도 시체는 쓸쓸하게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마찬가지로 바닥에 떨어진 카드도 그대로 있었다. 다시 돌아온 것이 헛일이 아니었구나 하는 일말의 안심을 느끼고는, 만에 하나 두 남녀를 일행으로 들였으면 이걸 어떻게 변명하고 수습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은 그저 만약의 일에 불과했지만.
카드에 흠집이 날까 조심스럽게 주워서 그것들을 확인해본다.
"…………"
부스터 팩을 뽑는 것과 마찬가지로 결과물은 무작위로 선출되는 모양이었다. 개중에는 처음보는 카드들도 끼어있었다.
보자마자 기억에 남았던, 당장 써봐도 좋겠다 싶은 카드가 하나. 연구해봐야겠다 싶은 카드는 셋, 그리고 어떻게 써야 할지 감도 안 잡히는 카드가 하나. 5장밖에 되지 않는 카드들의 성능을 살피며 제법 빠르게 분류를 마치고는, 그들을 가방 안에 있는 카드뭉치들 사이로 합류시킨다.
가방을 닫고 나니 문득 유진의 시선은 다시 시신으로 향한다. 꿈에 나올까 두려웠던 참상은 벌써부터 눈에 익으려 하고 있다. 깨진 선글라스는 처량하기까지 할 정도다. 저것은 더이상 살의를 품을 수 없는 뼈와 살덩어리일 뿐이라고 머리는 인식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눈가가 찡그려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이긴 사람을 카드를 챙기고, 진 사람은 끝이다 이거지…'
그러고 보면 와시오의 덱 또한 이제는 주인없는 카드나 마찬가지다. 전부 가져가도 뭐라할 사람은 없다. 앞으로의 듀얼도 이렇다고 친다면 듀얼리스트로서는 더없는 이득이다. 사고 현장을 기웃거리는 털이범이나 다름없다는 윤리적인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러기 위해서는 그 남자의 몸뚱아리 주변을 지나가야 했지만, 막상 다시 보니 사지가 멀쩡한 덕분인지 그렇게까지 끔찍한 편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까지 떠올리고 있었다.
뭐가 두려워서 그렇게 겁을 먹었을까. 이제는 슬슬 헛웃음까지 나오려 하고 있었다.
물론 경계심을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저렇게 바닥에 나동그라지는 것이 자신이 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죽은 뒤에는 그 몸뚱아리를 누가 어떻게 할지 알 도리가 없을 테지만, 죽는 마지막 순간의 고통은 분명히 끔찍할 것이다.
그걸 피하고 싶거든 지금 입수하는 카드도 어떻게 쓸지 숨을 자리를 마련해서 고민해봐야 한다. 이 자리에 있는 이상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할 일이다.
하지만 정신적인 피로 때문인지, 이상하게도 기분은 나른해져온다.
카드를 어디에 챙겨놓았을지 생각해보니 그가 D패드를 꺼낸 위치를 떠올린다. 와시오가 타고있던 바이크는 주인을 잃고서 그의 뒷편에 그대로 정차해 있었다.
유진은 그 좌석 부분에 다가가서는 고정되어 있는 리어백을 열어본다.
'이게 다야?'
카드는 의외로 많지 않다. 무슨 자신감으로 이 정도만으로 나서려 했을까. 어쨌든 전부 가방으로 쓸어담았다.
그러던 중 유진은 드디어 바이크 자체를 주목하기 시작한다. 열쇠는 와시오의 재킷 주머니에 들어있을 테니 찾으면 시동은 걸 수 있을지 모른다.
그 정도의 담력을 얻은 것에 스스로도 놀라는 것도 잠시, 이를 어떻게 처리할지 유진은 잠시 고민에 들어간다.
'한 번 타볼까?'
걷는 것보다는 확연히 빨라지리라. 하지만 만에 하나 달리는 소리에 찾으려는 상대가 숨어버리거나 원치 않는 상대가 추격해올 가능성은 있다.
유진 본인은 무기력하게 도망치다 붙잡혔지만, 남은 참가자도 그래줄지 함부로 장담할 수 없다. 첫 상대부터가 이런 물건을 몰고 왔으니 다른 터무니없는 것을 소지한 상대가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자동차를 타고 올 수도 있고, 더 정신나간 가정을 한다면 비행기를 몰고 올 가능성도 있다.
그런 사람과 편을 먹을 수 있다면 어느 정도 수월해지겠지만 당장 첫 일행 교섭을 말아먹은 시점에서 희망적이지는 않다.
무엇보다 다른 원초적인 문제점도 있었다.
'아니, 됐어. 면허증도 없는데 뭐.'
자전거도 몇 번 못 몰아본 입장에서 저런 물건을 다룰 수 있을리 없다. 함부로 몰았다가 자칫하면 어둠의 게임을 안 하고도 전 주인의 말로를 겪을지 모른다. 이런 이륜차에 괜히 '움직이는 관'이라는 별명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냥 두고가자니 다른 누군가가 노획해갈 우려도 있겠지만, 차마 저걸 끌고 다니면서 숨길 여유는 없다. 되도록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편이 최선이라 결론내리기로 했다.
다른 누군가가 또 보기 전에 유진은 빠르게 걸어나온다. 사거리를 벗어나 한 블록을 통과하는 순간이었다.
"………"
방금 헤어졌을 두 남녀가 길을 막고 서있었다. 남자는 머뭇거리는 눈치, 여자는 여전히 경계심이 가득한 눈치였다.
아무래도 자신을 따라온 모양이었다. 유진은 괜시리 눈이 찌푸려진다.
못 본 척하며 옆으로 틀어서 지나가려던 순간, 남자가 그를 불러세웠다.
"잠깐만, 얘기 좀 들어봐."
돌아보지도 않고서 유진은 일단 대답해주었다.
"일단 아까 일은 사과할게."
"뭔데요?"
"그러니까…… 아까 얘가 한 말이 사실이라고 쳐. 넌 여기서 듀얼을 치뤄봤다는 거지?"
아직 경계하는 기색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지금 그도 나름 용기를 내고 접근해온 것일지도 모른다.
역시 대답은 해주기로 한다.
"그런데요."
"이런 데서는 듀얼 말고 다른 식으로 해칠 방법이 없댔지?"
"……아마도."
유진은 알 수 있었다. 이들이 다시 교섭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엎지른 물을 주워담으려 한다는 것을.
어디까지나 이익관계로서 떠보고 있다는 생각에 유진의 표정은 여전히 벌레 씹은 듯 했다.
"방금 듀얼에 대한 거, 뭐 알아낸 거 없어? 있으면 좀 알려줄 수 있을까?"
"알려달라고요? 당신들한테?"
스스로조차 내심 놀랄 정도로 싸늘한 대답이 입밖으로 튀어나온다.
그 대답을 받아들이듯, 남자는 잠시 숨을 고르고서 다시 답변한다.
"그래, 알아. 우리가 너한테 뭐라고 할 자격 없는 거. 우린 자기가 뭘 해야되는지도 모를 만큼 몰려있었던 거야. 아니, 사실 알면서도 떠올기 싫었던 걸지도 몰라. 그래도 아까 네가 일침해줘서 정신 차렸어. 다른 참가자가 도전을 걸어오면 어쩔 수 없이 죽고 죽이는 일은 못 피할 거야."
반성의 말을 늘어놓던 남자는 여전히 경직되어 있는 여자를 한 번 돌아보고는, 다시 유진에게 시선을 되돌린다.
"그리고 넌 우리하고 싸울 생각이 없다고 했었지?"
"네."
"그래."
심술이 돋아 두루뭉술한 대답이 나올 뻔 했으나, 낌새를 보고서 똑바로 된 대답을 전한다.
"넌 그냥 게임을 먼저 시작한 것 뿐이야. 아마 우리도 해야되는 순간이 오겠지. 근데 섣불리 했다간 손도 못쓰고 당할 거니까, 아무런 준비도 안 할 수는 없는 거잖아."
말 자체야 유진은 충분히 이해한다. 무엇이든 해야 살아서 빠져나갈 확률이 늘어날 것이다.
자신들이 뭘 잘못했는지 인정하고는 있다. 적어도 남자 쪽은. 긴장의 기색을 감추지 못하기에 신뢰도가 다소 떨어지기는 했지만.
"아까 일에 대해선 이제 뭐라고 안 할게. 더이상 적대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까 일단은 조금이라도 뭘 알고 있는 사람이 더 필요해. 특히 실전을 하나라도 더 겪어본 사람이."
"그래서, 제가 필요하다고요?"
"……응."
뭐 이런 뻔뻔한 사람들이 다 있나, 하며 유진은 더 쓴 표정을 짓는다.
본론부터 따지고 보는 것은 좋다. 이런 상황에서 구구절절 사연을 늘어놓을 여유 따위 있을리 없다는 것 정도는 유진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들어줘서 제가 좋을 일은 있고요?"
예상했던 질문인 듯, 남자는 금세 대답한다.
"안전을 보장해줄 수도 있어."
"…안전?"
본인들 몸을 챙기는 것도 위태로워보이는 상황에서 진심으로 꺼내는 말일까.
유진이 반신반의하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하며 그는 자세한 이야기로 들어간다.
"실은, 숨을 만한 자리를 마련했거든. 운 좋게도 안 잠긴 건물을 확보했어. 물론 지금은 잠가놓고 온 상태야."
남자는 주머니에서 열쇠꾸러미를 꺼내든다. 문득 형용하기 힘든 기운이 뇌리와 피부에 스쳤다. 저기 걸린 것 중 하나가 그의 디젠일까.
그 가운데 여자 쪽은 여전히 불안한 낌새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자리를 떠벌리지만 않으면 거기 머무르게 해줄 수도 있어."
눈이 활짝 뜨이는 것이 남자에게도 보였을 것이다.
유진의 머리는 새로운 고민을 맞이했다.
"거기가 저한테 안전하다는 걸, 어떻게 믿어요?"
"그럴 줄 알고."
남자는 D-패드를 켜서 갤러리 창으로 이동한다. 거기서 가장 최근에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자, 내부는 이렇게 생겼어. 좁긴 해도 셋이 버티는 데 큰 지장은 없을 거야."
넓다란 창문과 책걸상이 눈에 띄는 좁은 실내 사진이 몇 장. 내부 구조는 대략 소규모 사무실이나 경비실 정도로 추정된다. 버티고 있으라면 못 버틸 수준은 아니다.
이런 자료화면까지 찍어온 시점에서, 이곳을 얼쩡대던 이유가 남자가 말한 대로임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이들은 아군이 되어줄 인물을 찾고 있다. 되도록이면 살아남을 만한 실력이 있고, 자신들을 대놓고 적대시하지 않는 인물.
그런 인물을 찾다가 마침 발견한 유진을, 남자는 조건에 들어맞는 인물이라 판단하고 교섭을 시도했다.
하지만 여자 쪽에서 유진에게 반감을 드러내는 바람에 하마터면 파토날 뻔한 것이다. 아마도 남자는 여자 쪽을 다시 설득시키고 자신을 따라온 모양이리라.
전적으로 믿든 뒷통수를 치든, 저쪽은 자신을 기회라 여기고 있다.
그 기대를 어떻게 응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목숨을 보전할 수 있을까.
"보여줄 건 이것 뿐이야. 안 가겠으면 할 수 없는데, 하다못해 적으로 상대하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어. 어떡할래?"
선뜻 믿을 수 있을리가 없다.
여자가 냉대한 것을 제치고서라도 이런 제안이 사실일지부터가 회의적이었다. 저들이 순순히 저곳으로 데려가줄까? 데려갔다고 해도 정말로 안전한 장소가 되어줄까?
유진은 모리스가 자신에게 나이프를 던지던 순간을 떠올린다. 어둠 속에서 듀얼 말고 다른 수단으로 해를 끼칠 수 없다는 걸 입증하고자 그는 아무렇지 않게 흉기를 던졌다.
그 어둠이, 어둠의 듀얼을 벌이게 하는 이 공간과 비슷한 성질이라면 같은 법칙이 적용되고 있지 않을까. 적어도 칼을 맞을 걱정까지는 안 해도 되는 것 아닐까.
듀얼 말고 다른 방법으로 해를 입힐 수 없다는 걸 남자쪽도 이미 숙지하고 있다. 적으로 상대하기 싫다는 말도 꺼냈다.
그런 말들을 다 뒤집고 만약 해를 입히려고 시도한다면 결국 싸워야 한다. 적어도 이들 중 하나가 두번째 상대가 될지 모른다.
이 자리에서 거부하고 떠나려 해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일 가능성을 떨칠 수 없다.
또다시 비위가 상하는 감각을 억누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니 눈앞의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는 것보다 일단 협동하는 것이 나으리라.
만약 적이라면, 더 나아가 이들이 재버워키라면 상대하길 미룬다는 것은 클리어만 더 늦춰질 뿐인 결과가 될지도 모르나, 그렇다고 큰 대책 없이 섣불리 덤벼들 수만도 없는 노릇.
무엇보다 바로 연전을 치뤄야한다는 사실이 유진에게는 피곤하고 괴롭게 다가온다는 이유도 있었다.
'당장 싸우는 일만 없다면……'
결정에 힘을 실은 것은 결국 피로감이었다.
피를 보게 된 첫 듀얼을 벌이기 전부터, 게임 장소로 향하는 순간부터, 나아가 디젠이라는 것을 접한 순간부터 그는 끝없이 긴장에 시달려야 했다. 조금씩 조금씩 기력과 이성을 좀먹히는 것만 같다.
신중에 기해야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해도, 아무리 복잡한 생각을 해봤자 자신이 정말 현명한 대처를 떠올릴 수 있을까. 떠올린다고 실행에 옮길 수 있을까.
결과적으로 그나마 할 수 있는 판단은 당장 닥칠 싸움을 피하는 것이었다.
건물에 도착해서 운이 좋다면 최소 눈을 붙일 만한 순간이 생길지도 모른다. 일단 이들이 소개한 건물을 직접 보고 나서 판단해도 될 것이리라.
그렇기에 어리석은 결정일지도 모르는 대답을, 유진은 기어이 내뱉었다.
"갈게요."
남자는 가볍게 끄덕이고 호응해준다.
"승낙해서 고맙다. 다시 사과할게. 야, 뭐해?"
"……미안."
남자가 재촉하자 여자도 마지못해 사과한다. 퉁명스러운 태도 너머로 애써 겁을 참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좀 넘어가줘. 얘는 더 심란한 상태거든. 다 내 잘못이야."
"잘못이요?"
"여기 오기로 먼저 결심하고 설득한 건 나니까."
남자가 잠시 시선을 내리깐다.
척 봐도 내향적인 이미지의 남성이 이렇게까지 찾아와서 교섭을 시도하게 만든 동기는 아무래도 죄책감인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
또 사과의 말이 나왔다. 이유는 역시 알 수 없다. 그렇게 유진과 여자는 벌써부터 영혼 없는 사과를 서로 주고받은 셈이 되었다.
"그렇게 됐으니까, 누가 쫓아오기 전에 빨리 서두르자."
"아, 잠깐만요."
유진이 불러세우자 남자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쳐다본다.
딱히 당황하는 기색은 없이 진짜로 궁금해하는 반응이다.
"실례지만, 혹시 바이크 몰 줄 알아요?"
남자는 잠시 멈춰서 있는 바이크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위험해서 좀."
"그렇죠."
역시 바이크는 포기하기로 확정짓는다. 적어도 다른 사람이 가져가기 전까지 이 쇳덩어리는 주인 곁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혹시나 이걸 타고 올 사람을 마주칠 일은 없기를 빌며, 유진은 그들의 뒤를 따라간다.
◇
유진을 포함한 남녀 세 명이 거리를 걷는 동안, 들리는 소리라고는 그들의 발소리 뿐. 가능한 한 소리를 죽이고 있지만 잘못하면 이 소리만으로도 따라오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았다.
혼자 있을 때는 아무렇지 않던 침묵이, 이렇게 동행인이 생긴 뒤로는 너무나 어색하다. 미지근한 공기가 답답함을 더한다.
오토바이가 있는 거리를 완전히 벗어난 뒤로 이들의 속도는 더 낮아져 있었다. 셋 모두 걷는 행위에 스태미너를 상당히 소모한 것이다.
지쳤으니 좀 쉬었다 가자고 누군가 말을 꺼내길 기다리면서도 여전히 침묵은 유지된다. 그렇기에 그들은 계속 지친 발만 구를 뿐이다.
그 가운데 유진의 망설임은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어릴 적 익히 듣고는 했던,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지 말라'는 말을 괜히 떠올린다.
따라가기로 정한 게 정말로 잘 한 일일까.
그런 고달픈 행진 도중, 남자는 갑자기 선서를 하듯이 팔꿈치를 쳐든다. 멈추라는 신호임을 깨닫고 즉시 둘의 발이 멈췄다.
이후 남자는 곧장 검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더니 그 방향으로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역시 빠르게 이해한 나머지 둘도 같은 방향으로 따라간다.
소리 죽인 발로 세 명은 각자 떨어져서 적당한 곳에 은신한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거리를 주시했다.
그들이 곧 지나가야 했을 길에서 누군가가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그 인상착의가 눈에 잡혔다.
외국인임을 알 수 있는 남성이 D-패드를 팔에 찬 상태로 거리를 기웃거리고 있다. 아무리 봐도 상대를 물색하는 듯한 눈치다.
만약 지금 맞닥들이면 무슨 일이 생길까. 남자는 혹시나 유진처럼 동료로 입안하는 선택을 포기하고 일단 숨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유진의 선택 또한 별 다를 것은 없었다.
계속해서 쭈그리고 앉아있음에도 외국인 남성은 낌새를 느꼈는지 유진 쪽이 있는 곳을 향하려다,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듀얼로 인한 소음을 듣고는 그 쪽을 향해 발길을 돌린다. 그렇게 세 명은 남자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고 나서야 이동을 재개했다.
유진은 잠시 D-패드를 켜본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슬슬 학교는 점심시간에 들어갈 무렵이었다. 벌써 학급 시간의 반을 땡떙이친 셈이다.
이 상태로 얼마나 학교를 빠져야 아린을 데리고 나올 수 있을까. 그 걱정이 떠오르자 유진은 한숨을 삭힌다.
도심에서 떨어진 외곽에 들어서며 점차 건물이 뜸해지기 시작한다.
보도 너머에는 철책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 너머에는 탁한 벽돌길로 이루어진 바닥, 수풀, 그리고 늘어서있는 비석들이 가득한 공간이 보인다.
"설마……."
"응, 다 왔어."
철책 문 기둥에 붙은 명패에는 '도미노 시 공동묘지'라고 적혀있었다.
'하필 이런 데를…'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님을 알고 있어도 저도 모르게 그런 감상이 튀어나온다.
아무래도 이것 때문에 건물 외부 공개를 꺼린 모양이었다. 과연 무덤에 묻힌 것까지도 재현되어 있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떨치고서 문제의 건물이 어디있는지를 확인한다.
"건물은요?"
"저기."
남자가 가리킨 곳은 묘지 입구 근처에 서있는, 주변 비석들 처럼 하얀 벽으로 이루어진 건물. 관리사무소인 모양이었다.
"주변에 사람 없지?"
"네. 아마도."
만약 세 명의 시야를 완전히 피해서 쳐들어올 수 있는 인물이라면 애초에 여태까지의 경계로는 대처가 불가능하다.
그런 인물이 튀어나온 날에는 각오를 감수하기로 하며, 이들은 서둘로 건물로 행한다.
덜컥덜컥거리는 소리 끝에 문이 열리고, 여자가 먼저, 그 다음은 유진, 남자 순서로 건물에 들어갔다.
"휴우."
남자가 참아온 듯 한숨을 내쉰다.
실제 그들이 도착한 공간은 유진이 사진으로 느낀 것보다 체감상으로 넓고 깔끔했다.
그럼에도 유진은 아직 긴장을 놓지 못한다. 밀폐된 공간에서 걸려든 사냥감을 천천히 사냥하려는 속셈일지도 모르니까. 아니라고 쳐도, 적어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들 또한 아직 의심을 거두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곳을 어떻게 찾았어요?"
"뭐, 우리가 출발한 지점에서 가까운 것도 있고, 무엇보다 여러모로 연이 있는 장소니까. 얼마나 버텨줄진 모르겠지만, 일단 식량도 있고, 심지어는 전기에 물까지 다 나오더라."
그 말에 유진은 새삼 도시의 재현도에 또다시 경악한다.
역시 이곳은 사람이 장기적으로 지낼 수 있는 여건이 어떻게든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들도 여기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가 얼마나 믿을 만한 장소인지는 그들로서도 확신할 수 없을 터. 오히려 이런 편의성으로 인해 발목을 잡힐 가능성도 버릴 수 없다.
아마도 그들 또한 의식하고 있으리라.
두리번거리던 중 실내의 벽시계에 눈이 들어오자, 유진은 D-패드를 켜고 시작화면의 전자시계와 시간을 번갈아 비교해보았다.
표시된 시각은 D-패드에 표기된 것과 거의 일치한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학교를 땡땡이치고 있다. 담임 선생한테 어떻게 변명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점은 확실하니 현실에 대한 고민은 잠시 미뤄두기로 한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점을 확인한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지나쳐버리고 있던 사실.
"날짜가…, 왜 이렇지?"
D-패드에 표시되어있는 것은 현재의 년도가 아니다. 까마득하다면 까마득하다고도 할 수 있는 과거의 시간.
듀얼몬스터즈'라는 게임이 '매직&위저드'로서 명성을 떨치던 시절. 그리고, 진짜 '배틀 시티'가 처음으로 개최된 년도이기도 하다.
'설마 여기가 진짜 과거라고?'
재현된 것은 공간 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 공간에 들어오면서 시스템 조작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진짜로 이 공간에서 흐르는 시간이라는 것일까.
"뭐야, 이제 확인한 거야? 여기 오면서부터 그랬어. 생각보다 본격적이라니까."
무심결에 새나간 유진의 의문을 남성은 바로 대답해준다. 그리고 여성은 불평하듯 자신의 D-패드를 쳐다보며 말한다.
"시간 설정이야 다시 하면 되는 일인데, 아무튼 귀찮게하고 있어."
"진짜로 게임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한 걸까요?"
"글쎄, 솔직히 기분나쁘다는 건 확실해. 놀랍기 전에 변태스러운 수준이라고."
만약에 재버워키라는 작자가 이 발언을 듣고 있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유진은 저도 모르게 뜨끔했다.
"아, 통성명 해야지. 야마네 토키(山根 冬季)야."
"……카나이 하츠카(家內 初夏)."
"서문유진이요."
선뜻 본명을 댄 것에 유진은 뒤늦게 앗차 하는 심정을 느낀다.
이들이 댄 이름은 정말로 본명일까. 둘 다 진실일 수도, 하나가 속이는 것일 수도, 아니면 둘 다 속이는 걸 수도 있으니 단정짓기는 너무 이르다.
또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는지 모른다.
"반갑다.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
"네."
대답을 듣는 즉시, 토키는 이미 샅샅이 뒤져봤는지 능숙하게 구석에 자리잡은 서랍을 열어 컵라면을 하나씩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하나를 유진에게 내밀어 권유한다.
"벌써 점심 시간이네. 먹을래?"
"괜찮은 거에요?"
"괜찮을걸. 최소한 독은 없어."
지금의 유진이 허기가 진 것은 부정하기 힘든 사실. 나름 든든한 저녁 식사를 마친지 벌써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이곳에 오래 있게 된다면 분명히 뭔가로 배를 채워야 할 상황은 온다.
하지만 아직도 반신반의 중인 상대가 먹으라고 내미는 것을 선뜩 받아먹어도 되는지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이곳 세계에 있는 음식물 따위를 건드려도 정말로 괜찮을 것일까.
저렇게 장담하는 것을 보면 이미 내부에 있던 식량에 손을 대본 것일까.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일까.
유진이 망설이는 사이 받아든 컵라면을 살피던 하츠카가 토키에게 묻는다.
"근데 유통기한이 옛날 거잖아. 진짜 먹어도 되는 거 맞아?"
"과거를 재현했다고 그랬잖아. 이것도 그런 일환이겠지. 지금 시간 기준으로는 얼마 안 지난 거니까 상관없을 거야."
"어…, 그냥 안 먹을게요."
"싫음 말고."
쿨하게 남은 라면 하나를 다시 집어넣는다.
적어도 이들 손에서 무슨 조치를 해놓은 건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다른 의미로 먹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결심을 세우게 만들었다. 하츠카 역시 떨떠름한 표정으로 포장을 뜯는다.
혼자 태연한 토키가 태연히 맞은 편에 있는 전기 포트에 수돗물을 받는 것을 보면서, 유진은 전기나 물이 나온다는 그의 말이 사실임을 실감한다.
'그나저나, 진짜 이래도 되는 거야?'
유진은 입밖으로 꺼내봤자 큰 소용은 없으리란 걸 알기에 혼자 머릿속으로 의문을 품었다.
남의 기물을 멋대로 손대는 일을 연달아 저질러도, 어차피 여기서만큼은 이들의 행동을 지적할 사람 따위는 없다. 이 건물의 주인이 되는 사람까지는 재현되지 않은 모양이니. 아무리 그래도 함부로 손을 대는 것은 너무나도 속편한 판단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있으나, 직접적으로 들킬 우려가 있는 행위가 아니라면 따로 상관하지는 않기로 한다.
뜨뜻한 물이 부어지며 풍겨오는 라면 냄새를 피할 겸 유진은 바깥을 살펴보기 위해 창가로 발을 옮겼다.
혹시나 하고 D-패드를 다시 켜서 인터넷에 접속을 시도하지만, 변함없이 오프라인 상태라는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시간을 죽이기 위한 웹서핑도 여기서는 꿈도 못 꾸는 일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오프라인에서 시간 때울 거리를 찾는 수밖에.
이 참에 그냥 서로를 알아가기로 하면서, 유진은 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며 의자에 앉은 남녀에게 질문을 꺼내보기로 한다.
"두 분은 어떤 사이에요?"
돌아오는 두 시선을 맞이하고 나서야 무례한 발언이었음을 깨닫는다. 혹시 지뢰를 밟은 게 아닐까. 유진은 무심코 쏟아버린 말을 주워담듯 황급히 수습에 들어갔다.
"아니,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하셔도……
토키는 라면 용기의 온기를 만끽하려는 듯 뚜껑에 양손을 포개올리고서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같은 취미로 모인 사이지."
"취미?"
"뭐, 미스터리. 주로 오컬트 쪽으로. 커뮤니티 창립 멤버로서 오프라인에서 만나고 알게 된 사이야."
"아아."
커플이 정말로 아닌지까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유진은 또 실례가 될 것을 우려해 그 이상의 질문은 꺼내지 않기로 한다.
"평소에는 그냥 도시전설이나 창작 괴담 들으면서 와 무섭다, 재미있다, 이러는 게 끝이긴 한데. 가끔 있잖아. 사실인지 아닌지 직접 확인을 안 하면 좀이 쑤셔서 다른 일이 집중이 안 되고, 결국은 뛰어드는 케이스."
"설마 그게…"
"맞아, 그게 우리야."
나무젓가락을 쪼개던 하츠카 쪽에서 맞장구치며 자학한다.
"자기 혼자일 때면 차마 못 하겠다 싶다가도 딴 사람이 같이 있으면 괜한 용기가 생길 때가 있잖아. 그 틈에 저지르고 보는 거지. 가지 말라는 데로 가보거나, 이상한 생물을 찾아다니거나, 영물을 부르는 의식을 치루거나, 하여튼 별 해괴한 것들. 그리고, 말해도 되는 걸지 모르겠는데…"
토키는 따뜻해진 손 한쪽을 주머니에 넣어 열쇠를 다시 꺼내보인다.
"이 열쇠, 사실 예전에 복사해둔 거거든."
"……네?"
황당한 반응을 예상한 듯이 토키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하츠카도 못 말린다는 듯 찡그린 표정을 보낸다.
"아니, 왜 그렇게까지…"
"아버지가 여기 관리하면서 드나들 일이 꽤 있었지. 예전부터 신기하다 싶어서 탐구 대상으로 점찍어 왔었어. 죽은 사람들한테는 실례일지 모르지만, 내가 오컬트에 관심을 가진 것도 그런 영향인가 봐."
"혹시 무덤을 파헤치고 그런 건 아니죠?"
"에이, 그런 짓까지는 안 했다."
이야기를 토로할 대상이 있다는 것에 안도감에 취해있다가도, 자신들이 미스터리 동호회로서 사고를 쳐온 나날들이 여간 고생스러웠는지 하츠카는 얼굴을 찌푸린다. 그리고 유진의 심정을 대변하듯 쓴 소리를 내뱉었다.
"미쳤어."
묘지 출입 열쇠를 무단 복제한 시점에서 비슷한 수준의 만행을 저지른 것도 같지만 아직 지적하지는 않기로 한다.
더 상세한 설명을 듣지 않아도 충분히 유진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정말 이런 것까지 감수할 만큼 미스터리를 접하고 싶을까.
벌써 질린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유진은 더 질문해본다.
"그러다 큰일나지는 않았어요?"
"났잖아, 지금."
하츠카의 딴지를 듣고서야 또 앗차. 왠지 대화가 계속될 수록 자꾸 실례를 저지를 것만 같다.
토키의 얼굴 역시 쭈그러들었다.
"뭐, 혼쭐이야 많이 나봤지. 경비원한테 쫓겨나기도 하고, 과태료도 물었고, 다른 의미로 봐서는 안 되는 것도 봐버리고."
"그게 무슨 뜻인데요?"
"그런 게 있어."
넘길 수밖에 없는 화제인 것 같으니 유진도 그냥 넘기기로 한다.
"발견하실 건 발견하셨구요?"
"음……"
깔끔하게 대답하기가 힘든지 토키는 또다시 얼굴을 쭈그러뜨리며 고민에 빠진다.
"굳이 따지자면 이 순간을 발견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
하츠카의 눈초리가 날아오는 것을 의식하면서 계속해서 의견을 피로한다.
"근데 그 전까지 우리가 원하는 성과는 딱히 없었어. 그래, 과학 기술이 크게 발전한 시대에 무슨 오컬트냐고."
"뭐야,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네?"
또다시 딴 체하며 이야기는 계속 된다.
"그래도, 사람이란 게 제 일이 뜻대로 안 되다 보면 쓸데없이 오기가 들게 돼있잖아? 이미 목숨 걸어본 몸이겠다, 한번 더 목숨을 걸어봐도 되지 않을까 라는 주체 못 할 똘기가 있었다는 거야. ……그러다 여기까지 왔어."
"후회되시나요?"
"후회되지. 엄청."
"안 됐네요."
유진이 보낼 말은 그 정도 뿐이었다. 위로가 될리는 없겠지만 그냥 넘겨듣는 것 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추임새로나마 넣어본 것이었다.
"발견이란 걸 위해서 그동안 움직여왔는데, 막상 진짜 뭔가를 발견하니까 감당하기가 벅차. 이미 걸은 목숨이라 생각했는데, 각오도 충분히 돼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래도 후회는 들게 돼있나 보더라. 내가 그 동안 해온 건 뭐였을까."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며 힘없는 소리를 내뱉는다. 시선 너머에는 그늘을 품은 천장이 하늘을 가로막고 있었다.
한 편, 이야기를 들으며 젓가락를 비벼 다듬고 있던 하츠카가 또다시 끼어들기 시작한다.
"너도 후회라는 걸 하는구나."
"…사람은 반성하는 동물이잖아."
"그래, 말 잘한다. 나도 사람이라서 후회 중이야."
하츠카는 젓가락을 용기 뚜껑 위에 살포시 올려높고 이마를 짚는다.
"아, 내가 어쩌다 선 지킬 줄 모르는 미스터리 성애자하고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됐을까. 어쩌다 개설자 대신 어그로들이 수시로 기어나오는 사이트를 관리하게 됐을까. 어쩌다 관리는 커녕 어그로꾼하고 씨름이나 하고 있는 개설자 대신 수습이나 하고 있어야 될까. 어쩌다 날이 갈 수록 도둑 마냥 잠입하고 뜀걸음 기술이 몸에 배고 있을까. 어쩌다 수상한 사람들 취재나 하고 다니는 처지가 되었을까."
"……"
이어지는 하츠카의 넋두리에 토키는 바늘방석에 떠밀려 앉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에게 하츠카는 의자바퀴를 끌고서 단숨에 접근해온다.
한탄하던 표정은 어느 샌가 살기어린 시선으로 바뀌어있었다. 그 자리에 일어서면서 겁에 질린 토키를 내려다본다.
"이상하지? 반성을 하면 할 수록 열이 받는단 말야. 평소에 쌓인 게 많아서 그런가? 그러고 보니 매 번 사고친 내역을 날조를 결들여서 무용담마냥 늘어놓던 놈이 누구더라? 아주 최근에 내가 그만 두자고 말렸는데도 '당장 같이 할 사람 너밖에 없잖아, 속는 셈 치고 해보자' 하고 설득한 게 누구더라?"
"…미안, 아니, 죄송합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일말의 자존심까지 내려놓은 사과를 하며 여전히 시선을 피하고 있던 토키의 어깨가 눈에 띄게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처형 직전 망나니의 시선을 피하는 죄수같은 모습이었다.
벌써부터 불화의 편린이 엿보이는 현장에서 유진도 숨이 턱 막히면서도 시선을 떼지는 않는다.
"방금 네 입으로 말했다. 지금까지 일만 해도 때려죽여야 마땅하다는 거 잘 안단 말이지? 좋아."
한숨을 내쉰 뒤, 하츠카는 눈을 부릅뜨며 살기를 발산하는 것이었다.
"그럼 그냥 여기서 죽어어엇!"
"아악!"
말이 끝나자 마자 힘을 실은 주먹을 그에게 내리치기 시작한다. 양팔을 들어 막는 시늉만 할 뿐 토키는 그저 어깨와 팔에 날아드는 주먹을 받아들였다.
"악! 아얏! 일단 여기 나가고 나서 얘기하자. 아니, 하다 못해 이거부터 다 먹고, 응?"
"시끄러! 배탈나서 죽으나 여기서 맞아 죽으나!"
하지만 질책과 구타의 현장이라기엔 묘하게 장난스러운 분위기다. 만화나 격투 게임에서 주먹을 연달아 내지르는 동작을 흉내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당사자들이라면 모를까 보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여턔까지의 긴장감이 날아 기세다.
괜히 긴장했음을 깨닫고는, 유진은 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애써 참는다. 그리고나서 저 정도의 타격은 해를 입히는 정도로 간주되지 않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문득 피어올랐다.
잠시동안 샌드백 두들기듯 휘두르던 주먹을 거두고, 하츠카는 팔에서 쥐가 나는지 손을 털며 한숨을 내쉰다. 토키는 얼굴을 한가득 구기며 욱신거리는 팔을 감싸쥐었다.
"…여기까지만 할게. 한 번 더 약한 소리 꺼냈다간 봐."
"아야……, 감사합니다."
여전히 자존심이라곤 없는 토키의 대답을 들은 후 이번엔 하츠카의 시선이 유진에게로 향했다.
힐끔 하고 유진은 시선을 마주했다.
"유진이라고 했지?"
"…네."
이번엔 서서히 주눅든 표정으로 바뀐다.
"아까 살인자 취급한 거 다시 사과할게."
"아뇨. 결국은 사실인걸요."
아무리 마음이 편해졌다 한들, 유진 스스로도 이런 대답을 꺼낸 것이 놀라웠다.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태연하게 인정할 수가 있었다니. 한 순간 다시는 볼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들하고 같은 지붕 아래에서 잡담을 하고 있다니. 그리고, 이 모든 일을 거치고 있음에도 자신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해질 수가 있다니.
무언가 강하게 쥐어잡고 있던 것을 내려놓은 것만 같다. 가벼운 해방감의 편린을 맛본 것만 같다. 정말 이래도 괜찮을까, 라며 유진은 다시 자신을 향해 질문해왔다.
"그 때 했던 말 너무 새겨듣지 마. 여긴 듀얼에서 지면 살아남지 못하잖아. 디젠이란 물건도 다뤄야 되잖아. 그런 거에 익숙하지 못해서 실수를 저지른 거겠지?"
위로를 위해 건네는 그 말이, 마치 말하는 본인에게 설득하는 것으로도 들린다.
유진도 알 수 있었다. 역시 아직은 찜찜한 기색을 완전히 떨치진 못한 모양이다. 자칫 주의를 놓치면 그녀는 다시 짓이겨진 벌레를 보는 것만 같던 표정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이 사실은 일반적인 반응이 아닐까.
"우리도 곧…"
"하츠카."
그 이상 나가려는 걸 토키가 제지하듯 이름을 부른다. 그제서야 자신의 태도가 어색한 것을 자각했는지, 하츠카는 잠시 머뭇거리듯 눈을 굴리다 다시 편한 말투로 돌아온다.
"또 미안. 경계는 교대로 가면 되니까, 그 동안은 아까 일로 흔들린 멘탈 추스를 수 있게 조금이라도 마음 놓고 있어."
"아, 네. 감사합니다."
정말로 안심이 가능할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유진은 감사를 전한다. 속으로는 더 안심이 필요한 사람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을 품었다.
그 순간 그 동안 욱신거리는 게 잦아들었는지, 다시 토키가 말을 꺼내기 시작한다.
"뭐. 뻘짓을 한 나도 나지만, 여기까지 오게 만든 직접적인 원흉은 따로 있거든."
"원흉이요?"
말하기에 앞서 눈을 위로 굴린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을 다시 떠올리는 중일까, 아니면 이야기를 꺼내도 될지 망설이는 것일까.
"아까 말한 커뮤니티에서 회원 하나가 있었어. 어디서 들은 얘기라느니, 직접 체험했다느니, 하여튼 테마도 다양하게 맞춰서 근성 넘치게 글을 올려댔는데. 믿든 안 믿든 흥미로운 건 사실이니까 꾸준히 커뮤니티를 활성화시킨 공적 덕분에 프리미엄 자리까지 따갔거든."
"아, 그거 캡처해 뒀어."
설명을 듣던 하츠카는 바로 D-패드 화면을 키더니 분주하게 손가락으로 밀어넘기는 동작을 취한다.
"그리고 그 때부턴가, 프리미엄급 회원들끼리만 확인할 수 있는 게시물을 올려대는 거야. 인증샷에 실황 영상까지 있더라고."
하츠카는 토키의 설명에 맞춰 유진에게 다가오더니 D-패드 화면을 보여주면서 화면을 초 단위로 뒤로 넘긴다. 그 회원이라는 인물의 게시글이나 이미지, 영상을 하나하나 캡처하고 저장한 자료들이 지나갔다.
초자연현상이나 희한한 물건 따위가 찍힌 사진들을 보면서도, 미신에 크게 연연하지 않은 탓인지, 혹은 그저 이미지 자료가 정신없이 눈앞에 지나간 탓인지 유진에게 큰 감흥은 찾아오지 않았다.
"진짜일리는 없겠죠?"
"글쎼. 그야 얼마든지 주작일 가능성은 있지. 근데 뭔가 이상하잖아. 이런 더 주목받기 좋은 화제들을 왜 굳이 얼마 안 되는 사람들한테만 보게 만드느냐. 그리고 왜 되도록 비공개로 해달라고 부탁을 하느냐."
"그건 그러네요."
보통 영상 플랫폼 사이트를 포함한 각종 커뮤니티에서 조회수를 끌어모으기 위해 자극적인 화제를 다루는 경우는 차고 넘친다.
하지만 프리미엄 회원 전용이라고 공개한 자료들을 봐도 딱히 자극적이라 할 만한 요소는 보이지 않는다. 비슷한 수준의 자료들은 포럼을 뒤지다 보면 얼마든지 찾아낼 만 할 텐데.
그럼에도 굳이 비공개라 당부한 것을 보면 이 정보들 자체가 프리미엄 급이라 주장하는 것만 같다. 이걸 아는 것 자체가 프리미엄 급이 아니라면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일까.
어쩌면 그저 이야기의 신빙성을 더하기 위한 독특한 조치일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조회수만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에 화제 하나가 떠오른 거지. '어둠의 아이템'이라는 거에 관해서."
"어둠의 아이템……"
유진도 짚이는 바가 있는지 그 키워드를 되새긴다.
"그 회원이 풀어놓은 썰도 인용하자면, 옛날은 지금보다도 미신과 과학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시절이었단 말야. 온갖 자연 현상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신이니 혼령이니, 요괴니 하는 게 상식처럼 통용되고는 했어."
"…보통은 사람들을 겁줘서 주무르려는 의도로 지어낸 소리겠지만."
다소 로망을 깨는 발언을 미스터리 동호회원인 하츠카가 내뱉자, 토키는 살짝 씁쓸한 표정으로 끄덕이고는 설명을 계속한다.
"당연히 그런 것들하고 소통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겠지? 말하자면 샤머니즘.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들이 실존한다는 걸 증명하려고 소통할 수 있는 도구나 소통했다는 기록 따위가 세계 곳곳에서 발견돼 왔어."
"성서나 성유물 같은 거 말이죠?"
"맞아. 종교나 무속신앙이 그런 식으로 기원하고 전해지는 거야. 그걸 근거로 왕이나 족장 같은 권력자한테 조언을 전하면서 권력을 얻어가는 수단으로 이용된 거지. 신이나 혼과 관련된 아이템은 곧 권력의 상징인 셈이야.
세계사 교과서에서 들은 기억이 있는 듯한 내용이 이어진다.
이런 걸 연재했다는 것을 보면 미스터리 고찰이랍시고 역사 강의라도 하고 있던 것이 아닐까.
"그 종교의 권세가 쇠퇴한 시점에서도, 사람들은 신비에 관심을 가지고 유희거리로 삼는 거지. 간단한 도구로 영혼과 소통을 나눌 수 있다거나, 신비한 생물을 발견했다거나."
"재미로 말이죠."
"맞아. 그게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담력 시험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유진에게 신비가 거짓이라는 의제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고도, 미스터리라는 분야에 굳이 흥미를 갖고 파고드는 태도는 묘하게 다가온다.
그것을 즐기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묻힌 진실을 알아간다는 지적 욕구? 무서운 일에 다가갈 수 있다는 용기의 증명? 아니면 남들과는 다른 것에 관심을 갖는다는 허영?
'즐긴다'는 마인드는 그런 식으로 수상쩍은 곳에 발을 들일 용기까지 부여해주는 것일까.
"그리고, 그런 아이템을 일부 소장하고 있다는 글이 올라온 거지."
설명을 듣고 있던 유진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의심과 의아함이 공존하는 표정이었다.
"그걸 믿었다구요?"
"설마, ……라 하고 싶어도 우리같은 사람들은 호기심이 동하는 법이거든.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 해서 더 자세하게 파고들어 봤는데 거래 얘기가 나왔을 때는 아, 그럼 그렇지 라고 생각했어."
단순히 장사질에 낚인 문제라면 아직 여기까지 올 만한 사정은 아니다.
"근데 거기서, 자기도 찔린다 싶었는지 하다못해 기념품으로 몇 개 챙겨갈 생각 없냐고 제안을 하는 거야. 배송비 포함해서 다 공짜로 보내준다길래 우리도 좀 혹했거든. 그래서 이런저런 상의 끝에 위저 보드 세트를 주문했어."
"위저 보드?"
유진은 문득 기존 듀얼몬스터즈에 존재하던 특수 승리 카드를 떠올린다. 이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관심을 가지고도 남을 카드이기는 할 것이다.
"카드 말고 실물. 방금 말했듯이 죽은 사람 영혼을 현세에 불러내서 소통을 하기 위한 판떼기인데, 역시 가짜는 가짜였는지 의식을 치뤄봐도 별일은 없더라고. 문제는, 그 물건에 그냥 덤 처럼 딸려나온 물건이야."
토키는 가방에서 열쇠나 휴대폰걸이로 삼기 좋을 만한 조그마한 크기의 수정해골을, 하츠카는 삼각형 한가운데 사람 눈이 박힌 문양이 새겨진 메달을 꺼내 보여주었다.
어느 것이든 기념품 가게에 적당히 진열되어 있을 만한 물건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디젠을 떠넘긴 거군요."
"응, 뭔가를 간절히 원하면 즐거운 일이 생길 거다, 라고 귀띔을 해주더라고. 그 땐 그게 위저 보드 얘긴 줄 알았지."
토키는 원통한 표정으로 해골을 주시했다. 아마도 저걸 얻은 이래 여태까지 한 두번 살펴본 것이 아니겠지만 답이 나온 적은 없을 터.
"강령 의식할 때만 해도 아무 일 없었는데, 그 다음 날부터 꿈에서 누가 자꾸 말을 걸어오는 거야. 혹시 성공한 건가 싶었어."
"뭐라고 했는지 기억 하세요?"
"게임 해볼 생각 없냐고 했었지. 즐거운 게임을 준비 중이다. 현실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신비를 찾아다닌 끝에 자기하고 접촉한 너희들이라면 다시 없을 경험이 될지 모른다."
'재버워키……'
척 봐도 수상하기 짝이 없는 사안에 그들은 결국 승낙을 택했으리라. 그 과정은 하츠카의 말처럼 토키가 그녀를 설득시키고 끌어들이는 구조였을 것이다.
어째서 그가 묘하게 하츠카에게 죄스러워하는 태도를 이어갔는지, 그녀의 주먹 세례를 별 대항도 못하고 받아들였는지도 유진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불길에 흘러드는 나방을 떠올리며 유진의 심정이 복잡미묘해진다. 그리고 무언가 놓친 것을 떠올리며 바로 언급한다.
"근데 그걸 줬다는 사람, 그리고 나서 어떻게 됐는데요?"
"어쩌긴. 잠수 탔지. 적어도 우리가 마지막으로 확인하던 때까지는. 그 때문에 우리 커뮤 리젠도 확 떨어졌고."
"역시 작업 친 거겠지? 누구 하나 걸려라 하는 마인드로 저주받은 물건을 짬때리려 든 거야."
"어쩌면 여기 있는 거 아닐까."
"에이, ……글쎄."
찜찜한 의혹을 떨치려는 듯 토키는 유진에게 질문을 던진다.
"너는 뭐하다 왔는데?"
"친구가 인질로 잡혀서요."
"………"
"구하고 싶으면 참가하랬어요."
별다른 부연설명 없이 알기 쉬운 이유를 듣자 둘 모두 쓴 물이라도 들이킨 표정을 짓는다.
어색한 기류가 다시 찾아와버렸다.
"그거 큰일이네."
"우리하고 비교된다. 하하, 면목이 없네……"
또 멋쩍은 웃음으로 무마하려 들었다.
"디젠은 어디서 났어? 너도 사기당했니?"
"모르겠어요. 갑자기 생긴 거에요."
"갑자기? 누가 준 것도 아니고?"
"그나마 재버워키라는 놈이 직접 준 거라고 생각은 하는데, 솔직히 모든 게 갑작스러워서 아직도 뭐가 뭔지. 꿈 속에서 말을 걸다 집 앞에 이게 배달됐거든요."
"그 쪽도 괴담이네."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한 순간 두 사람의 눈빛이 환해진 것이 엿보였다. 아직까지도 미스터리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못 한 것일까. 본능 수준이란 말인가.
"친구 잡아간 게 재버워키인 건 확실해?"
"…글쎄요. 그 일 생기고 며칠 뒤에 메시지에 사진까지 보내왔어요."
유진은 무거운 마음으로 메신저 켜서 당시 대화 이력을 공개한다.
"어후……"
짧고도 감상으로서 한숨을 내뱉었다.
"개최자 장본인이 이런 거면 단단히 찍혔나본데."
"이것들은 나가면 증거 자료로 쓸 수 있다 치고, 뭐지? 어디 원한 살 만한 일에 엮인 적 없어?"
"글쎄……"
유진은 갸우뚱할 뿐.
수수께끼의 목소리가 '재버워키'라 자칭한 것을 들은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무엇 하나 아는 것이 없다.
유진은 자신이 갖고 있는 디젠을 전했을 범인의 정체를 잠시 추리해보았다. 현실이라 여겨지지 않는 끔찍한 경험을 연신 겪게 만들고,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게임이 진행중인 도시까지 제 발로 향하게 만든 장본인.
그런 인물과 문제의 회원은 동일 인물일까? 역시 재버워키가 전부 주도해서 자신의 게임판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벌인 수작이었을까? 맞다면 유진 자신이나 저들이나 희대의 민폐질에 당한 피해자일 것이다.
저들은 쓸데 없는 곳에서 행동력을 발휘하다 화를 자처했다. 위험의 냄새를 맡아놓고도 제 발로 들어왔으니 자업자득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치도 않은 상황에 휘말려 어떻게든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진 자신과 비슷하다면 비슷한 처지였다. 더구나, 결국 제 발로 들어오기로 결심했다는 건 본인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적어도 여기서만큼은 무사히 나갈 수 있는 길을 함께 모색해봐도 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아 참! 라면 시간 지났네! 다 불었겠다."
"아이씨, 말이 길어지니까 그런 거잖아!"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하츠카에게 욕을 먹었으니, 면목이 없어서 이번엔 진심으로 사과한다.
이미 뜯어놓은 젓가락을 휘저으며 후루룩대는 것을 그냥 지켜보다 다시 창가로 시선을 옮긴다.
"너 진짜 안 먹을 거야?"
"네, 뭐."
이 구수한 냄새는 자신이 아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먹을 만 하다라고 짐작할 수 있는 냄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식욕을 되찾기엔 역부족이었다. 연신 구역질을 참았던 탓일까.
"지금 나오는 거하고 맛이 묘하게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안 상했다니까. 옛날에는 이랬어. 아마도."
역시 안 먹는 게 낫겠지, 하고 유진은 생각에 쐐기를 박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들은 기다리던 순간과도 비교가 안 될 만한 속도로 국물까지 깔끔하게 먹어치웠다.
"어쨌든, 이걸로 각자 사정은 대충 파악했고."
토키는 어느 새 텅 빈 용기와 젓가락을 모아 쓰레기통에 살포시 떨군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지도 논해봐야겠지."
그 말을 시작으로 세 명 모두 정신을 바짝 차리려는 듯 눈에 힘을 주었다.
"여기 클리어 조건은 다들 기억하지?"
"'재버워키'를 찾으라는 거잖아요."
"맞아. 기존에 알려진 배틀 시티하곤 다르게 토너먼트 식이 아냐. 일일이 싸우고 다니지 않아도 찾을 사람만 찾는다면 게임은 바로 끝나. 근데…"
"말이 쉽지."
"응, 그게 문제야. 혹시, 여기서 자신이 '재버워키'거나 그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
당연히 손을 드는 사람은 없다.
"이렇게 된다니까. 게임이 돌아가려면 장본인도 당연히 입 꾹 다물고 있어야 될 거 아냐. 독심술이라도 안 쓰는 이상 자기가 상대한 사람이 재버워키가 맞는지를 확인하려면 듀얼에서 이기고 결과를 살피는 수밖에 없어. 그래도 계속 여기 있는 거면 못 찾았다는 뜻이고."
"뭐, 진짜 독심술이 되는 사람이 참가했고, 그런 사람이 일찍 찾아줘서 빨리 클리어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겠지. 디젠은 에너지를 얻을 수록 소유자에게 어떤 능력을 준다는 정보를 들었으니까. 근데 그 재버워키의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이런 걸 여는 데까지 필요한 준비가 장난 아닐 거라 보는데, 당연히 챙길 덱도 그에 맞는 준비가 돼있다고 생각해야겠지?"
"카드는 많이 챙겨도 된다고 했잖아. 본인도 그럴 셈이니까 그렇게 말한 거 아냐?"
간단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없다.
굳이 이런 세팅까지 다 해놓았으면서 거기 참가할 개최자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을리가 없다. 카드를 얼마든지 챙겨도 상관없다고 한 것은 참가자 전원. 그리고 그것은 참가한 개최자 자신도 포함된다.
어떤 사기적인 카드들이든 준비해놓고서는 무슨 전략을 써대도 파훼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토키는 자신들의 짐과 유진의 짐을 번갈아 확인한다.
"혹시, 듀얼을 하고 나서 무슨 변화가 있진 않았어?"
이들이 원했을 정보를 드디어 물어본다. 그들이 자신을 굳이 요새에 데려와 포섭하면서까지 필요했던 목적.
"벌칙이 끝나고……"
다시 그 일이 떠오르려는 걸 애써 억누르며 그 직후의 일을 건너뛴다.
"카드가 내려왔어요. 5장."
"다른 건?"
"디젠을 통해서 무슨 이상한 감각이…"
"그건 우리도 알아. 다른 건?"
"아직은 잘 모르겠는데."
"그럼 그 정도가 끝인가."
이번엔 하츠카가 질문해온다.
"그럼 그 카드들 말인데, 그냥 써도 되는 건가?"
"쓰지는 않았지만, 지금 챙기고 나왔는데도 별 일 없는 걸 보면…, 아마도."
"혹시, 거기 레어 카드도 껴있어?"
"저 같은 경우는…… 네."
토키는 잠시 생각의 늪에 발을 집어넣다 나온 듯 바로 눈을 다시 마주치며 이야기한다.
"부스터 팩 같은 개념인가. 설마 카드 좀 얻겠다고 사람 잡고다니는 사람 케이스는 없겠지?"
"솔직히, 각오해야될 것 같아요."
불안을 잠재우는 데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헛된 희망을 불어넣어 목숨을 위태롭게 만드는 사태는 피해야 하니까.
"생각해 봐요. 엄선했다는 참가자 50명을 무슨 기준으로 뽑아왔을지. 사람 목숨이 걸린 게임을 재미있다고 하는 놈들이 얼마나 있을지 몰라요."
누군가에겐 천국일 수도, 누군가에겐 지옥일 수도 있는 공간.
유진 자신도, 눈앞의 남녀도 일단은 이곳을 지옥이라 인식하고 있다. 그 생각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그 전에 생각이란 걸 계속 할 수 있을 만큼 버티는 게 가능할까.
"싸우는 걸 포기하고 아예 그냥 여기 틀어박혀있는 방법도 있겠지. 문제는 남은 컵라면도 둘 뿐이야. 만약 더 오래 있게 된다고 치면 어떻게든 밖에서 식량을 찾아다닐 수밖에 없어."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아도 셋 모두 염두해둔 상황이었다.
오래 버틴다는 것은 그만큼 굶주림과 싸워야 한다는 의미가 되니까.
"사실, 여기까지 왔는데 우린 생각보다 운이 좋은 편일지도 몰라. 우선 숨을 자리도 마련 됐고, 서로 싸울 생각이 없다는 걸 파악하고 동맹까지 맺었잖아. 솔직히 내 교섭이 통한 것도 신기할 정도라고."
유진도 공감은 하되 썩 탐탁치 않은 느낌 또한 받는다. 이런데서 발휘되고 있는 운에 정말로 감사해도 되는 것일까.
"진심으로, 와줘서 고마워."
손을 불쑥 내민다.
유진은 잠시 눈만 마주치더니 천천히 그 손을 잡아 악수를 나누었다.
"감사합니다."
적어도, 이 사람들에게만큼은 고마워해도 될 것이다. 병주고 약주는 꼴일지도 모르지만 한 순간이나마 마음을 놓을 순간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들이 걱정하는 대로 마음을 놓고만 있어서도 안 된다. 지금부터 눈앞에 닥친 일을 해결하기 위해, 이들과 머리를 맞대고 하나둘씩 궁리해볼 차례다.
"근데, 듀얼은 할 줄 아시죠?"
"왜? 하자고?"
"아, 아뇨."
"덱이 있으니까 여기 왔겠지. 카드도 꽤 챙겨 왔어. 나름 연구도 해봤고. 얼마나 버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겠네요."
유진은 의문이 들었다. 단순히 테스트를 위한 듀얼도 어둠의 듀얼로 포함되는 것일까? 시험해보자니 사뭇 듀얼 디스크를 작동할 용기는 나지 않는다.
테이블 듀얼은 되지 않을까 싶지만, 어둠의 듀얼은 듀얼이라는 의식 자체를 승부로 간주하지 않을까 하는 의혹에 일단 시도는 보류.
그래도 불완전한 승부 형식으로나마 카드만 늘어놓는 선은 괜찮겠지 생각하며, 조만간 이곳에서의 덱 성능 시험 방식을 고려해보았다.
조금이라도 더 이길 수 있도록 생각해야 한다.
이긴다는 것은 또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가 되리라. 하지만 자신이 죽기도 싫다.
토키의 말대로 지지 않으려면 결국 이길 수밖에 없다.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을 떨어뜨리는 한이 있더라도 발버둥쳐야 한다.
그것을 게임에 임하는 순간부터 자각하고 있으리라 생각했었지만, 잊지 못할 경험을 통해 그 사실의 무게를 다시금 깨달으면서 정신을 바로잡기로 한다. 이런 사고의 반복도 얼마나 계속될까.
유진은 목에 걸린 디젠을 문득 내려다보았다. 이런 고민을 끝도 없이 해야 하는 이유는 다 이 저주스러운 물건 때문이다.
결국 이 물건에 엮여 이런 지경에까지 몰린 것이니. 앞으로 얼머나 더 끔찍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그리고 남녀도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음을 막 들은 참이다. 심지어 이들은 엮이게 만든 장본인이 누군지를 일찍부터 알고 있었으니 더 열불이 터졌을 것이다. 그 동안 얼마나 조사에 열을 올렸을까.
문득 궁금해진 의문을 유진은 바로 꺼내보았다.
"그나저나, 그 디젠 보내준 사람 닉네임은 뭐였어요?"
"'메이거스'. 바꾼 적은 없었지,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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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듀 게시판에 듀얼없는 노잼 글 또 올려봅니다 홀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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