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건국한 태봉국에서 미륵정토를 꿈꿨던 궁예는 호족 세력에게 밀려나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미륵으로서 신하와 백성들에게 부처의 가르침을 설파하던 나날들을. 왕건의 품에서 죽음을 맞이한 궁예는 나라의 미래를 그에게 맡겼지만, 미륵정토를 대한 미련 만큼은 버리지 못했다.
그토록 염원하던 부처의 나라.
전생의 기억이 깨어난 것은 못 다 이룬 미륵정토의 꿈을 실현 시키라는 하늘의 계시렸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아른 거리는 궁예의 기억이 자신을 이 길로 이끈다.
전생의 회상을 끝내고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린 사토리. 자신의 앞에 2열로 서로 마주보는 형태로 서있는 오니들을 감개무량한 눈으로 쳐다본다.
모두 자신의 신하로 들어온 자들이었다. 예외 없이 전부 오니로 구성된 신하들은 불교와 인연이 깊은 요괴답게 자신의 뜻에 찬동하는 바람직한 자들이다.
용맹하며 시킨 일을 실수 없이 처리하는 그들은 애완동물은 물론이고, 전생에 자신을 따르던 벼슬아치들과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유능하다.
황금 옥좌에 않아 현세에 얻은 진정한 신하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사토리는 진작 이들을 회유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그랬더라면 사흘간 무능한 애완동물을 상대로 끙끙 앓지 않았어도 되었을 텐데.
많아진 신하로 인해 좁은 응접실 대신, 비교적 넓은 로비에서 행해지는 어전회의. 사토리는 근엄한 표정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대대적인 개혁에 앞서 묻고 싶은 게 있구만.」
사토리의 시선이 자신의 오른쪽 줄의 두 번째 오니에게 향했다. 시선을 받은 오니는 머뭇거리다 「네..네!」하고 황급히 대답했다. 사토리가 그에게 묻는다.
「지금 지저에 나를 따르는 백성들이 얼마나 되는 가?」
질문을 받은 오니는 쭈뼛거리다 옆에 있던 오니의 옆구리를 찌르며 대답을 넘겼다. 그러나 넘겨받은 오니도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고, 그 옆에 오니에게 너는 알고 있냐는 시선을 보낸다.
그렇게 누구도 확답을 들려주지 못하는 상황에 사토리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허허.. 이것들 봐라. 그걸 모르고 있다는 게 말이 되냔 말이야. 그렇다면 내 경들에게 다른 질문을 할테니, 얘기들 해보시오.」
으흠. 헛기침을 작게 내뱉은 사토리. 머리의 외눈과 가슴의 서드아이. 두 개의 눈이 사납게 번뜩인다.
「나를 따르지 않는 미련한 백성을 어찌하면 좋을 것 같소?」
질문이 바뀌자, 오니들의 태도가 아까와 달라졌다. 자신 있는 얘기인양 저마다 손을 쳐들며 발언권을 얻고자 했다. 「거기, 한번 말해 보거라.」하고 사토리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 오니가 우쭐대며 대답했다.
「따를 때까지 패버리면 됩니다!」
제정신이냐며 질타를 받아 마땅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사토리의 표정은 아까보다 느슨해져 옅은 미소까지 머금고 있었다.
「허허허. 거 참, 마음에 드는 대답이구나. 그래, 바로 그거야. 말을 듣지 않는 개에겐 몽둥이가 딱이지.」
도저히 멀쩡하다고 볼 수 없는 담론이었다. 애초에 공포정치를 펼치던 폭군과 무슨 일이던지 폭력으로 해결하는 오니가 모였으니 제대로 된 어전회의가 이루어질리 만무했다.
방침이 정해지자, 사토리는 오니들에게 큰소리로 명했다.
「경들은 듣거라. 지금부터 미륵정토의 실현을 위해 불신자들을 색출하라!」
반대파 숙청이었다.
사토리에게 명을 받은 오니들은 강한 사명감을 가지고 저택을 나가 지저마을로 우루루 몰려갔다.
그리고 혼자 남은 사토리에게 다가가는 한 인영이 있었다. 어느세 그녀의 코앞까지 온 코이시는 무의식을 풀고 모습을 드려냈다.
갑자기 나타난 여동생의 모습에 사토리는 조금 놀라했지만 이내 냉정함을 되찾는다. 자신을 보며 우물쭈물하는 코이시에게 사토리는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느냐?」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 머릿속에서 아직 정리가 되지 않은 코이시는 뒷짐을 지고 몸을 배배꼬았다. 그런 모습이 답답한 사토리가 짜증을 드려내며 언성을 높였다.
「할 말이 없거든 썩 물러 나 거라.」
사토리는 자신의 여동생인 코이시가 거북했다. 전생의 기억을 되찾기 전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자유분방한 성격 탓에 사고를 치기 일쑤였다. 본연의 모습을 되찾은 지금의 사토리에게 코이시는 관심법도 통하지 않고 통제도 되지 않는 골칫덩이. 가장 큰 불안요소에 지나지 않았다. 자매로서의 정은 궁예가 된 후로 사라진지 오래다.
자신을 차갑게 대하는 언니의 모습에 코이시는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심장이 따끔하게 아프다.
「언니.. 어떻게 된 거야? 요즘 이상해.」
너 같은 건 언니가 아니라고 외치고 싶지만, 눈앞에 있는 건 틀림없는 자신의 언니였다. 계속되던 업무에 지쳐 잠시, 정신이 이상해진 게 분명해. 그리 생각하는 코이시에게 사토리는 윽박을 지른다.
「어허. 물러나라고 했거늘.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이냐! 동생이라고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느니라. 당장 썩 물러나지 않으면 철퇴로 네 머릿속의 마구니를 패 죽일 것이야!」
살의가 담긴 시선에도 불구하고 코이시는 언니를 부루퉁한 얼굴로 노려봤다. 그리고는 삐친듯 감정을 담아 고함을 질렀다.
「언니, 바부팅이! 멍청이! 메롱이야-!」
그렇게 내뱉은 직후, 코이시의 몸이 불헌듯 사라진다. 무의식의 상태가 된 것이었다. 사토리는 보이지 않게 된 여동생에게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저런 응석받이가 내 여동생이라니. 부처가 되서도 고행이 따르는 법이로구만.」
*
폭군의 수족이된 오니들은 용서 없었다. 길가는 요괴 아무나 붙잡아 대뜸 '부처를 믿냐'며 물어보고는 그렇지 않다는 자를 그 자리에서 두들겨 패는 것이었다. 그런 난동이 동시 다발적으로 터져 나오자, 작은 소동 정도가 아닌 큰 사건으로 번지게 되었다.
사토리의 사상에 감화된 오니들의 수가 대략 오십을 넘어갈 정도로 많다보니 지저 곳곳에 피해자가 속출했고, 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이렇게 외쳤다.
오니들이 단체로 미쳐버렸다고.
실제로 그들이 벌이는 난동은 미쳤다는 말 외엔 달리 설명할 말이 없었다. 미륵을 따르지 않겠다면 다짜고짜 두들겨 패버리니 말이다. 길을 걷던 요괴도 장사를 하던 요괴도 놀고먹는 한량들까지 닥치는 대로 오니들의 표적이 된다.
시간이 지나자, 거리는 두들겨 맞는 요괴와 진열대 등의 가재기구가 박살이 나는 광경이 일상적인 풍경이 되어버렸다. 그런 폭력배들에 맞서는 요괴들도 있었지만, 힘과 쪽수에 밀려 금세 제압당하고 만다.
한 가게에서 와장창 소리와 함께 부서진 문의 잔해와 함께 한 요괴가 거리로 날려졌다. 쓰러진 요괴의 몸은 유리파편 등의 잔해가 무수히 박혀 있었고, 그런 그를 쫒아 거구의 오니가 가게 밖으로 모습을 드려냈다.
오니는 쓰러진 사내에게 다가가 한 손으로 그의 머리를 움켜쥐고는 자신의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사내는 신음하면서 반쯤 감긴 눈이 사납게 번뜩이는 오니의 눈과 마주친다.
사내가 쿨럭하고, 각혈을 뱉어내며 말했다.
「미륵정토는 얼어 죽을.. 엿이나 먹으라지!」
망신창이가 되면서도 굴하지 않는 사내의 기개에 오니는 속으로 감탄했다. 하지만, 미륵을 따르지 않는 자는 배제되어야 한다. 불신자는 미륵정토라는 원대한 숙원에 방해가 되는 이물일 뿐이다.
사토리의 신하가 되기 이전이었다면 좋은 술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두들겨 패서라도 교화시켜야 할 대상이었다.
비어있는 손을 말아 쥐고 활시위를 당기듯 근육이 한계까지 팽팽해질 정도로 뒤로 당긴다. 주먹의 직선상에는 사내의 얼굴이 있었다. 오니는 그대로 사내를 죽여 버릴 기세로 당긴 주먹을 앞으로 내뻗었다.
사내의 눈이 질끈 감기고, 오니의 주먹이 그의 면상에 꽂히기 직전. 누군가의 손이 간섭해왔다. 시간이 지나도 아무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사내가 눈을 떴고, 그의 시야에 찰랑거리는 황금빛의 머리칼이 들어왔다.
위협적인 오니의 주먹을 한 손으로 가볍게 막은 외뿔의 여자가 뒤를 돌아보며 사내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
「마음에 드는 걸. 나중에 술잔을 나누고 싶군.」
그리고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린 그녀는 오니의 주먹을 막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손가락 하나하나가 주먹에 파고 들어간다. 이어 오니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고통에 찬 비명. 외뿔의 여자는 오니를 그대로 지면에 매다 꽂았다.
그리고 기절한 오니를 내려다보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멍청한 녀석. 죽일 기세로 때리려 하다니.」
시원한 인상에 탄탄하고 균형 잡힌 기골의 오니 여자. 과거 산의 사천왕이라 불리던 호시구마 유기였다. 드디어 나타난 진정한 두목의 등장에 오니들의 행패가 한풀 꺾인다.
유기는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뭐 때문에 이리 소란스러운 거야?」
무슨 상황인지 묻는 말에 한 오니가 뛰어왔다.
「미륵정토를 실현하기 위한 밑 작업을 하던 중입니다.」
「미륵정토? 그건 또 뭐야.」
「이곳을 부처의 나라로 만드는 것입죠. 지저가 보다 좋아질 겁니다. 어떻습니까? 두목님도 참여해 보시는 게?」
「뭔 소리야?」
오니는 자신의 두목마저 회유해 보려 했지만, 유기의 귀에는 영 뜬구름 잡는 소리로만 들렸다. 지저가 보다 좋아 진다고? 그냥 닥치는 대로 행패를 부리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는데?
「죄 없는 놈들 때리는 거랑 그거랑 뭔 상관인데?」
「아유~ 죄가 없다뇨. 저들은 미륵정토의 꿈에 동조하지 않는 불신자들입니다. 미륵을 따르지 않는다니. 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그러니 때려 패서라도 정신 차리게 만들고 있는 중이었죠.」
자신들의 사상에 동조하지 않는 걸 끔찍하다 여기고,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교화를 시킨다니. 오니의 논리는 극단적으로 치우쳐 있었다. 이런 전체주의적인 사상 뒤에는 으레 독재자가 흑막처럼 존재하는 법.
「그래서 이런 일을 시킨 놈이 누구야?」
주동자를 묻는 유기에게 오니는 희색이 만면한 얼굴로 대답했다.
「지령전의 주인인 코메이지 사토리. 아니, 현세에 강림한 미륵이십니다!」
상상도 못한 주동자의 정체에 유기는 눈썹을 틀어 올렸다. 설마, 거기서 그녀의 이름이 나올 줄이야. 그녀가 아는 사토리는 절대 이런 일을 벌일 만 한 요괴가 아니었다. 분명, 누군가가 그녀를 사칭했다거나 무언가의 착오가 있었던 게 아닐까? 그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미륵'이라는 명칭이었다.
미륵이라면 미래에 출현한다는 부처의 이름이 아닌가.
누군지 몰라도 그런 이름을 자칭하다니. 보통 오만불손한 자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오니들이 감화되었다면 여간내기가 아니라는 거겠지. 유기는 주동자가 상당한 카리스마를 지닌 선동가라 짐작했다.
(IP보기클릭)223.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