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를 함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P
오늘은 제목대로 연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토막상식 시리즈이긴 하지만 글이 조금 길어졌습니다.
*해당 리뷰의 스포일러 목록
약한 스포일러
- 게임 『Twelve Minutes(2021)』
- Ezra W. L. Pound 『The Cantos(1962)』
강한 스포일러
- 영화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 1993)』
- William Butler Yeats 『연옥(Purgatory, 1938)』
- 『단테의 신곡(LA COMMEDIA DI DANTE ALIGHIERI, 1320)』
- Johann Wolfgang von Goethe 『파우스트(Faust, 1831)』
- 당연하게도, 에반게리온 시리즈
목차
1. Groundhog Day (성촉절)
2. Purgatory (연옥)
3. Harrowing of Hell (지옥으로의 하강)
4. Erbsünde, Gebet, Buße, Erlösung
(원죄, 기도, 속죄, 구원)
5.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요약
- 신지는 연옥에서 마저 속죄하려했고
- 이타심의 발현을 통해 타인을 구원했으며
- 타인의 이타심을 통해 구원받았다.
- 그리하여 신지에게 다시 봄이, 사랑이 찾아왔다.
1. Groundhog Day
지난달 『Twelve Minutes』 라는 인디게임이 발매했습니다.
코지마 히데오 감독도 몰입해서 즐겼다는 트윗(링크)으로 화제가 되었습니다.
주인공은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시리즈처럼
반복되는 시공간에서 죄의 진실을 찾아 나름의 결말을 맞습니다.
이 게임의 도전과제중에는 "고슴도치"라는 항목이 있는데
영어 원문은 "Groundhog"로 고슴도치(Hedgehog)와 다릅니다.
마멋(Marmot)류의 일종으로 땅돼지, 우드척(Woodchuck)등으로 주로 불립니다.
해당 도전과제는 『Groundhog Day』라는 영화의 오마쥬입니다.
1993년 개봉작으로 한국어 제목은 『사랑의 블랙홀』,
일본어로는 『恋はデジャ・ブ(사랑은 데자뷔)』입니다.
무한히 반복되는 세계에서 자기수련과 사랑을 통해
성장하며 깨달음을 얻고 이타심을 발휘하여
새로운 미래를, 구원을 얻는 루프물의 고전이기도 합니다.
GroundHog Day는 유럽에서 비롯된것으로 보이는
북미지역의 유명한 전통입니다.
펜실베니아의 독일계 미신에 따르면
봄이 되면 이녀석들이 땅굴에서 고개를 내미는데
날이 맑아서 자신의 그림자가 보이면 다시 숨고
겨울은 6주간 더 지속되며
날이 흐려서 그림자가 안보이면 숨지 않고
봄이 일찍 찾아오게된다고 합니다.
'날씨 그딴거 모르겠고 인간놈들 그냥 다 꺼졌으면...'
이름은 Phil. 영화 주인공과 같습니다.
통계적으로 연관성이 별로 없다는게 함정이지만
2월 2일이면 북미에서는 이녀석에게
날씨를 물어보고(...) 결과를 발표하는 축제를 엽니다.
대표적인 지역이 영화의 배경이기도한
펜실베니아의 펑서토니(Punxsutawney)입니다.
북미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이 남아있는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2월 2일은 성모취결례의 날, 주의 봉헌 축일이기도 합니다.
Candlemas(s)라는 명칭에 따라 성촉절이라고도 합니다.
율법에 따라 성모 마리아가 몸을 청결히하고
요셉과 함께 성전에 아들을 봉헌한것을 기념하여 촛불을 밝힙니다.
저같이 잿밥에 관심이 더 많은 불순한 종자들은
La Chandeleur때 먹는 크레페(Crêpe)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프랑스와 벨기에 등지에서는 크레페의 날이기도 합니다.
로마에 도착한 순례자들에게 팬케이크를 나눠주신 교황과
Lupercalia때 케이크를 바치던 베스타의 여사제들 덕분입니다.
잡설을 뒤로하고 다시 영화로 돌아가겠습니다.
감독과 연출, 스토리를 담당한
루빈(Danny Rubin)과 레이미스(Harold Ramis)는
영화에 대해 수차례 분석하고 토론했고
각계 전문가들과 접촉해 다양한 해석을 얻습니다.
니체의 영원(영겁)회귀와 시지프스의 형벌,
보리살타와 열반 등의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오늘 다루고자하는것은 가톨릭의 시각,
"이타심을 통한 연옥으로부터의 구원" 입니다.
In Catholicism, Phil's situation can be identified as a
form of purgatory, escaped only by embracing selflessness.
- A Movie for All Time, National Review by Jonah Goldberg
지옥같은, 연옥같은 상황에서 주인공들은
자신의 과거를, 죄를 돌아보게되며
Twelve Minutes에서 주인공의 이타적 행동은
엔딩 분기에 큰 영향을 줍니다.
영화에서도 이타심은 필의 변화를 이끌어냈고
사랑을 통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타심은 신지의 덕목이자 구원이기도 합니다.
2. Purgatory
연옥(煉獄, Purgatorium)은 가톨릭 교리에 등장합니다.
죄를 지은자가 가게되는 지옥의 일종으로
천국에 이르기 전 잠벌(暫罰)을 통해 남은 죄를 정화합니다.
죄와 속죄는 에바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1) 죄 (Sin)
죄는 원죄와 본죄로 나뉘고
본죄는 다시 대죄와 소죄로 나뉩니다.
ㄱ. 원죄 (Original Sin)
선악과를 먹은 최초의 인간이 지은 죄입니다.
덕분에 낙원에서 추방당했습니다.
에바에서는 지혜의 열매의 후손들이
행성의 원주인인 생명의 열매의 후손들을 몰아내고
지구를 차지한것, 혹은
지혜의 열매를 받아 태어난것 그 자체를 뜻합니다.
대를 이어져 내려오게됩니다.
ㄴ. 본죄 (Actual Sin)
갖고 태어나는 원죄와 달리 살아가면서 짓게되는 죄입니다.
ㄷ. 대죄 (Mortal Sin)
문자 그대로 죽을죄입니다.
죽으면 지옥 직행입니다.
ㄹ. 소죄 (Venial Sin)
Venial의 동의어는 Forgivable,
용서할 수 있는, 용서받을 수 있는 죄입니다.
소죄가 많이 모여도 대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생전에 죄를 다 씻지 못한 이들이 연옥에 가게됩니다.
대죄와 소죄를 구분하는 세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 사안의 경중
- 심각성에대한 인식
- 행위의 의도성
세 가지 모두 충족해야 대죄가 성립하며
나머지는 소죄로 분류합니다.
신지의 경우 사안이 매우 심각하나
제대로 인식할만한 상황이 아니었고
두 차례 모두 세상을 파괴할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카오루 또한 신지에게 용서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옥의 모습을 그린 관련 창작물로는,
특히 연옥에 대한 작품으로는
단테의 신곡과 예이츠의 연옥이 유명합니다.
2) 연옥(Purgatory, 1938)
Re-live
Their transgressions, and that not once
But many times; they know at last
The consequence of those transgressions
Whether upon others or upon themselves;
Upon others, others may bring help,
For when the consequence is at an end,
The Dream must end; if upon themselves,
There is no help but in themselves,
And in the mercy of God. (CPL 682)
다시 살게된다.
그들의 죄를,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번임을; 결국 그들은 알게된다
그 죄들의 결과를.
남들이나 자신들에게 내려진 결과를;
다른이들의 결과에 있어서, 이들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 결과가 결말을 맞이할 때, 그 꿈이 끝나야 하기에;
그들 스스로의 결과에 대해서라면,
그들 스스로나 신의 자비 외에는 도움이 없다.
예이츠(W.B.Yeats)의 연극에서 연옥은
회한의 감정과 깊이 연결되어있습니다.
후회나 격정을 남기고 죽음을 맞이하면
사후 영혼은 그 행동을, 죄를 반복하며
행위의 인과를 진정 깨달아가게됩니다.
그리고 회한의 고리가 외부로부터 끊길때까지
그 장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됩니다.
앞의 게임과 영화뿐만 아니라
예이츠의 『비전(A Vision)』에서도
이러한 개념이 나타납니다.
지상낙원의 모습, 그리고 그곳에서
되풀이되는 죄악의 사슬을 끊어내고
연옥에 갇힌 영혼을 구원하는것이 내용입니다.
이전보다 더 깊은 회한의 감정을 보여주는
신극장판 시리즈의 모습도 이와 닮았습니다.
가쓰라기 박사와 겐도의 인류보완계획,
그리고 이를 부정하는 미사토와 신지.
자식에게 못할짓을하는 겐도와
그걸 보고도 똑같은짓을하는 미사토.
부모에서 자식으로 이어지는 죄와 가족의 비극,
그 반복은 연옥과 마찬가지로 에바의 큰 줄거리를 이룹니다.
특히 연옥에서 고통받는 여인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킨 주인공 늙은이의 모습은
신지마저 희생시켜 유이를 만나려는
겐도와 너무나도 겹쳐보입니다.
예이츠는 일본 전통 가무극 노(能, Japanese Noh)에서
영향을 받았고 이는 연옥에서도 나타납니다.
신극장판 시리즈 제목 서(序), 파(破), Q(급, 急) 또한
이러한 일본 전통문화의 흐름과 형식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공통점도 흥미롭습니다.
3) 단테의 신곡
이러한 지옥, 연옥 관련 창작물들의 원조격이
바로 단테의 신곡입니다.
단테가 베르길리우스(버질)과 베아트리체의 안내로
지옥과 연옥을 거쳐 천국에 이르는 과정을 담고있습니다.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으로 구성되어있고
각 33곡에 서곡이 더해져 총 100곡이 됩니다.
신극장판의 남극 폭심지의 구조는
단테의 신곡과 매우 유사합니다.
아케론, 플레게톤, 림보, 코키투스 등의 용어가 등장하며
모식도의 아케론(Acheron) 건너 아홉 계층은 지옥편과 동일합니다.
L 결계 너머의 세계는 지옥으로 묘사되며
지옥 너머는 연옥으로 연결됩니다.
즉, 신지가 남게되는 마이너스 우주는 연옥에 대응하게됩니다.
단테가 베르길리우스(남성)에게 안내받았듯이
신지와 빌레는 L 결계 너머에서 겐도와 후유츠키에게 끌려다녔고
지옥문 너머에서도 신지는 겐도에 이끌려 골고다 오브젝트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베르길리우스와 함께하는건 연옥까지입니다.
그는 천국에는 이를 수 없는 존재이기에
이후 지상낙원의 여정은 단테 평생의 연인,
베아트리체(여성)와 함께하게됩니다.
단테를 연옥에서 천국으로 이끈 여성의 모습과
신지를 마이너스 우주에서 새로운 현실로 이끈
마리의 모습이 꽤나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3. Harrowing of Hell
신극장판에서 신지의 여정은
현실에서 지옥과 연옥을 거쳐 다시 지상낙원에 이르는
구원의 길을 비교적 충실히 따릅니다.
단테의 신곡에서 영향을 받아 현대의 신곡을 만들려했던
에즈라 파운드(Ezra W. L. Pound)의 서사시
『칸토스(The Cantos)』 초기 구상과도 매우 유사합니다.
A. A. 산 자가 죽은 자들의 세계로 감.
C. B. 역사의 반복.
B. C. 마법같은 변화의 순간이 나타나고
현실은 신성하고 영원한 세계로 변화함.
특히 "죽은 자들의 세계로 가는것"은
예수의 지옥으로의 하강(지옥강하)를 연상케합니다.
= Descensus Christi ad Inferos
= the Descent of Christ into Hell
이 역시 가톨릭의 교리이며
예수가 십자가형(죽음)과 부활 사이 기간에
지옥에 내려가 이전에 죽은자들을 구원한것을 말합니다.
신지 또한 보완계획과 원환을 이어받으면서
이전에 연옥으로 내려간 인물들을 보완하여 구원으로 이끌었습니다.
이처럼 신지는 타인을, 인류를 보완하는
구원자의 모습을 갖고있지만 앞서 말했듯이
구원을 필요로하는 인간이기도 합니다.
그 또한 현생에서 죄를 미처 다 씻어내지 못해
속죄를 위해 연옥에 갔으며 약속대로 그곳에서
용서를,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부활을 통해 신지를 구원해줄 신은 죽었습니다.
리리스는 사체가 되었고 아담스와 그릇들도
모두 파괴되어 인간이 사용하지 못합니다.
겐도의 신 죽이기 또한 어쨋든 결국 성공했습니다.
그럼 신지는 누가, 어떻게 용서해주고 구원해줄까요?
4. Erbsünde, Gebet, Buße, Erlösung
인류를 보완하여 정해진 운명으로부터 구원하는
보완계획의 핵심인 가프의 수호자들,
빌레의 분더(=부셰) 동형함(자매함)들의
이름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순서대로 원죄, 기도, 속죄, 구원의 의미입니다.
죄를 인식하고 인정하여 속죄해야하며
기도와같은 방법을 행동으로 실천해야합니다.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시작과 끝인 죄와 구원을 제외하면
결국 속죄와 기도 두 가지로 압축됩니다.
미사토의 말처럼 속죄는 스스로 해야합니다.
자신의것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죄도, 기억도, 사랑도.
넘어질때마다 다시 일어난다는 옛 성인의 말처럼
죄를 지을때마다 포기하지 말고 새롭게 뉘우쳐야합니다.
진정한 속죄 끝에서야 구원의 기적(Wunder)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조금 다릅니다.
스스로 구원을 위해 혼자 기도할 수도 있지만
타인을 위해 내 시간과 노력을 들여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언급한 "이타심(Selflessness)"입니다.
인간은 이타심으로 스스로를, 그리고 타인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신의 아들, 인간의 아들이 그러했듯이.
그 예시중 하나가 Birgitta(비르짓다, Bridget) of Sweden의
"Fifteen(15) Our Father and Hail Mary prayers",
우리말로는 "예수 수난 15 기도"입니다.
성모 마리아와 연옥의 환영(Vision)으로 유명한
성녀 비르짓다가 예수의 수난을 알고자 기도한끝에
얻어낸것으로 그 약속중에는 신자(기도자)의 가족을
연옥에서 해방하는것이 포함됩니다.
이러한 스스로의 노력과 타인의 도움은
괴테의 『파우스트』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끊임없이 방황하겠지만
굴하지 않고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타인을 구원할 수 있고 또 구원받을수 있다고 말합니다.
신극장판 또한 이 흐름을 같이합니다.
지난 리뷰(링크)에서 말했듯이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이타적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합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파우스트와 그레트헨의 이야기처럼,
단테와 베아트리체처럼,그리고 필과 리타처럼
잃어버린 자신을, 사랑을 되찾은 신지의 이야기이며
잃어버린 계절을, 봄을 다시 찾은 세계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5.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봄은 사랑, 특히 남녀간의 사랑을 나타내는 계절입니다.
앞에 언급한 작품들 모두 남녀간의 사랑이
큰 주제이며 구원의 실마리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이타심과 자기애의 바탕이기도 합니다.
순환의 고리를 끊는 이야기와 반대로
멈춘 순환의 재개를 알리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신지 SDAT의 트랙 반복처럼 작은 순환에서
보다 큰 순환으로의 확대이기도 합니다.
에바의 세상은 임팩트의 영향으로 계절의 순환을 잃어버렸습니다.
추운곳 더운곳은 존재하지만 계절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에바:서』에서는 여름의 이미지가 강조됩니다.
교실 뒤 칠판에 적힌 시간표에도 7월이 보입니다.
일본은 임팩트의 영향으로 여름이 지속됩니다.
유흥가 광고에서『에파:파』는 가을임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극중 이야기도 한창 무르익어갔습니다.
역시 기후는 바뀌지 않지만『에바:Q』는 시기상 겨울입니다.
시리우스, 베텔게우스, 프로키온으로 이뤄진
겨울의 대삼각형이 보입니다.
이야기 또한 가장 혹독한 전개를 보여줍니다.
신지는 완전히 무너졌고 마음은 얼어붙어버렸습니다.
뚜렷한 근거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맥락의 흐름상, 그리고 결말로 미루어볼때
작품의 마무리는 봄의 이미지라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겨울을 지나 새로운 생명이 태동하는 계절이며
이와같이 신지도, 지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됩니다.
감독님 할배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건강하고 즐거운 추석 연휴 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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