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유리쿠마 아라시="백합곰 폭풍"이란 아리달달쏭한 이름의 애니를 접했습니다.
감독의 전작 돌아가는 펭귄드럼을 초반 하차한터라 그닥 끌리지 않는 작품이었지만 어떤분의 추천으로 1편을
보기 시작했고 남은 7화 까지 단숨에 몰아봤습니다.
[인터넷 원멤버십이라 올라오는게 느려요.
때문에 이 글은 8화 시청 전에 중후반까지 쓰여 유리카에 대한 해석은 못했습니다.]
갖가지 메타포를 작품내 한정 은어로 포장해서 전달하는 아주 복잡하게 꼬인 연출에도 불구, 세련된 연출과
안정적인 작화, 적당한 템포로 점점 조여들다 한번에 터뜨리는 연출로 몰입감이 상당했죠.
반대로 몰입은 좋은데 제작진이 의도하고 노골적으로 표현한 "투명한 폭풍= 집단 따돌림"을 제외한 다른 것들.
단절의 법정과 그 안의 백합 재판, 질리도록 나오는 "좋아"를 버리내 마네 하는 갈등들은 마치 무슨 예술 단편영화
를 보는것 처럼 머리를 아프게 하는 수수께끼들 입니다.
때문에 이 밑으로 이어질 저의 개인적인 해석은 다분히 제 지식의 한계내에서 쓰여진
부족한 글임을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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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라시가오카 학원
"우린 처음부터 당신들이 너무 싫고.
처음부터 당신들이 엄청 좋았어.
그래서 진정한 친구가 되고 싶었지."
"저 벽을 넘어서."
마치 한편의 시의 후렴구 처럼[노인들이여 분노하시오] 싫고 좋고의 모순된 양가적 감정이 공존하며
친구가 되고싶다는 도발적인 수수께끼의 문구가 오프닝마다 반복됩니다.
1화 부터 곰은 원래 사람을 먹는 그런 동물이야! 라며 등장하는 "유리시로 긴코"와 "유리가사키 루루."
그들은 자신들이 구미호처럼 인간으로 변신해 인간을 잡아먹는 몬스터임을 초반부터 숨김없이 알려줍니다.
"어느날 우주 저편의 소행성 쿠마리어가 폭발해 버렸어.
산산조각난 쿠마리어는 유성군이 되어 지구로 쏟아졌는데, 그러자 온 세상의 곰이 일제히 궐기!
모든 곰이 인간을 덮치기 시작했어.
어찌나 놀랐던지.
인간들은 단절의 벽을 만들어 우리 곰들을 인간 세계에서 쫒아내려 했지.
하지만 인간이 만든 룰 같은건 안통한다고.
우리는 곰.
곰은 사람을 먹지.
그런 생물이야!"
"안타깝게도 오늘 아침 통학로에 곰이 나타났어요.
곰이 단절의 벽을 넘어 인간세계에 침입하는건 원래는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경보는 해제됐지만 절대 방심하지 마세요.
교내를 이동할 때는 반드시 누군가와...친구들과 함께 행동하세요."
곰쇼크, 곰 경보발령 -> 오프닝, 루루의 쿠마리어와 곰 생태 설명 ->하코나카의 친구들 어쩌고.
....이 순서는 참 계산적으로 배치되었습니다.
이야기의 무대 "아라시가오카 학원"이 공포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시스템인지를 함축적으로
잘 설명해주는 연출이기 때문이죠.
사람이 죽었음에도 학생들에게 하교조치를 취하지도 않고 "집단화"만을 종용합니다.
"친구들과 함께 행동하세요."
원래 이 애니가 초현실주의적 표현이 많긴 합니다만 그래도 이 부분에 지적을 안 할수는 없죠.
애니를 보기전 엔하위키미러에서 정보를 살피며 좀 의외였던게 여학생들의 교복 디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본편을 보면서 그 인상은 더더욱 굳어졌죠.
바로 "안 예뻐!!![분노]" 입니다...................
화려한 붉은색 외벽과 기하학적인 형태,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창문들을 가진 아름다운 학원건물에 비해 너무도 삭막하고 밋밋한
디자인의 교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쿠레하에게서 절정에 다다릅니다.
명색이 주인공인데 알바유니폼을 입은듯한 모습이라니!
보통, 건물과 거기 딸린 정원이 화려하다면 교복도 거기 어울리게 비싸보이도록 만들기 마련입니다.
현실이 아닌 서브컬쳐에서도, 학교 디자인과 매칭이 되도록 교복을 디자인하게 되죠.
그래야 미관상 관객에게 어필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유리쿠마 아라시는 거꾸로 가네요.
하다못해 치마에 주름이라도 잡혀있다면 덜 할텐데.....최저한의 미관유지를 위해 넥타이만 변형을 주고 말다니.
[쿠레하의 검은 텍타이는 일종의 "메멘토 모리"겠죠. 치마의 형태고 그렇겠고.
기억하고, 애도하는 상복을 의미할겁니다..]
교복도 유니폼에 속하긴 하지만 효율성보담 미관을 더 중시하는 추세로 바뀐지 오래입니다.
헌데 이 작품에선 반대로 "효율"을 위해 "미관"을 포기한 의도를 보여줍니다.
단순할수록 만들기 쉽고 화려한 건물과 비교되어 그 획일화가 더욱 부각됩니다.
이쯤되면 노린겁니다.
일부러 "건축물"과 "인간"을 대조시키기 위해 화려함과 단순함을 양자에 부여한 거죠.
결국 유리쿠마 아라시에서 가장 화려하고 돋보이는 존재는 여학생들이 아닙니다.
바로 "아라시가오카 학원"이라는 이름을 지닌 건축물이죠.
내용상 별 필요없는 학교의 외관과 내부의 인테리어를 비롯,
외부의 정원까지 장황하게 보여주는 건 이러한 대조를 더 극명
하게 해줍니다.
일반적인 학교 건물과 달리 통짜구조로 위압적으로 솟은
건물과 지나치게 작게 묘사되는 학생들.
특히 정원 사이를 가로지르는 주인공 쿠레하의 색상처리는
유령처럼 희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가장 인공적 형태인 기하학의 삼각형 외형.
그 옥상의 방사선으로 뻗은 중앙집중형 바닥장식.
성당을 연상시키는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와
아치형 복도의 디자인, 섬세한 계단난간.
붉고 화려한 백합문양의 벽지와 바닥.
이 모든게 흰바탕에 푸른 색조를 지닌
학원생들의 외형을 옹색하고 미약하게
가둬버립니다.
학생뿐 아니라 사람이 직접 사용하는 가구들-
의자와 책상 역시 초라하고 쓰기 불편한 구식
디자인이네요.
이건 뭐 토목공사 리베이트도 아니고.....
학원 외부의 건물들은 아예 무대 밖 배경으로서만 존재하며 학생들 처럼 푸른색조를 지닙니다.
붉은 학원의 본무대와 푸른 원경은 나선계단을 오를때 이질적인 부감을 조성해 상당히 몽환적인 비주얼을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 마도카 마기카의 연출이 떠올라 마음에 든 초현실적 연출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있는 학원과 원경사이에 마치 보이지 않는 결계= 단절의 벽이 존재함을 얘기하는 듯 하더군요.
이쿠하라 쿠니히코 감독이 전작 "돌아가는 펭귄드럼"에서 특정 건축물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고 하는데 여기서도 그 건축덕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는가 봅니다.
"칼라킬"이 옷을 통해 메시지를 전하려 했다면 이"유리쿠마 아라시"는 건축물[인테리어와 정원 포함]을 통해
관객에게 대화를 시도하는 작품으로 보입니다.
인간 스스로의 확장은, 인간 스스로의 제한한다는 아이러니를 낳고 만다.
물론 이러한 제한에는 여러가지 형태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극한에 이른 형태가, 바로 파시즘(전체주의)이다.
파시즘은 전제군주의 폭정과는 차원이 다르다.
<킬라킬>의 1화에서 언급되듯이, 민주주의 끝에, 인류의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 도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극한의 조화(調和)를 추구한다.
인류 스스로가 원했단 안전과, 위생과, 쾌락의 조화(調和).
인간과 인간끼리의 조화(調和).
파시즘은 일반적인 이미지와 달리 전쟁은 원하는 것이 아니다.
파시즘은 평화를 바란다.
나치는 국가 사상 처음으로 암 설치 센터를 설치했다.
나치는 국가 사상 처음으로 아우토반이라는 거대한 고속도로를 만들었다.
나치는 국가 사상 처음으로 금연운동을 국가 단위에서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이토록 조화로움을 추구한 문명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만큼 완벽함을 추구한 문명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만큼 안전과 위생과 쾌락을 추구한 문명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그것을 단 하나의 메시지에 맞추고자 노력했을 뿐이다.
그들은 어떠한 불안도 없는 ‘순결(純潔, 쥰케츠)’함을 원했다.
-[킬라킬] 중간점검, 옷=문명=미디어 with 파시즘.
[데이비드상 님의 글 일부. 제목에 링크처리]
맨날 식민지배만 해 본 유럽의 서구 열강에게 난생처음 제국주의식 식민지배를 일부나마 경험시키고
그 비인간성에 대한 혐오를 학습시켜준 인류의 기념비적 반면교사 히틀러와 나치.
그리고 독일 제3제국.
잘 알려졌다시피 그들은 "패션"뿐만 아니라 신고전주의적 건축물을 통한 프로파간다를 아주 적극적으로
이용해 국민의식을 고취시키고 통합시키는 로마시절 부터의 전술을 기가막히게 계승한 집단입니다.
물론 킬라킬과 달리 유리쿠마아라시의 경우는 정치이념과 상관없이 좀 더 단순한, 일본의 문화적인면 만을
비판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 해도 "투명한 폭풍"은 전체주의와 무관하지만은 않죠....
아라시가오카 학원은 그 옥상의 타일문양하며 불투명한 색유리창 등, 건물의 구조가 아주 폐쇄적인
통합구조입니다.
건물의 옥상을 제외하고 다른장소로 이동하는데 외부로 나올 필요가 없고 덕분에 밖에서 안의 학생들
을 살펴볼 수 도 없죠.
이런 와중에 소외받는 두 인물, 쿠레하와 스미카가 둘만이 있을 수 있는 공간은 백합화원과 옥상,
고작 두 장소 뿐 입니다.
특히 화원의 경우 아주 작은 규모이지만 이 학원에서 유일하게 학생이 뭔가를 직접 꾸릴수 있는 공간이죠.
다른곳은 이미 완성되어 전문가가 관리하는 고급 정원과 분수라 애들이 터치할 수 없습니다.
인공미로 가득찬 학원이란 공간속에서 그나마 두 사람이 숨쉴 수 있는데가 단 두 곳 인거.....
[옥상에 대한건 나중에 다루겠습니다.]
"여긴 쿠레하랑 있어도 아무도 못 보겠지."
밥을 먹는것은 신체적 성장을, 뭔가를 직접 가꾼단 것은 정서적 성장을 위한 것 이며
이 둘이 합쳐질 때에야 인간으로서 제대로 성장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학원의 일부가 아닌 학생 개인이 주체가 되어 직접 뭔가를 만든단 행위와 그 결과물은
집단 시스템으로 완결되고 "통합"된 학원의 구조에 있어선 그저 결함에 불과합니다.
이때문에 악의적이라 할만큼 뒤틀리고 숨겨진 이 화원의 "진짜 역할"이 스토리 진행에 따라 차츰 드러나게 됩니다.
바로 전체에 통합되지 않는 "불투명한 아이들"을 걸러내는 "이중 덫"
겉보기엔 소박하고 예쁜 화원이지만 이곳은 이미 여러명의 여자아이들이 사냥 당해 죽은 살육의 장소입니다.
햇살 비추는 양지와.
뒷편의 그늘진 음지에서 양쪽으로 말이죠.
위 두 스샷은 1화의 것입니다.
특히 긴코와 루루가 식인하는 화원의 뒷편은 벽을 경계로 빛과 그늘을 의도적으로 강조한 연출이 돋보입니다.
1화에서 화원의 음지에서는 곰이 인간을 살육하고, 6화에서는 양지쪽에서[밤이었지만] 인간이 인간을 사냥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것을 지켜보는 "눈"이 있습니다.
화원 뒤의 맑고 큰 투명창이 정면의 꽃밭과
그 앞의 아이들을 지켜보는 포지션으로 위치한
장면이 종종 나옵니다.
학원 건물에서 유일하게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닌
투명창을 가진 이 건조물은 항상 사람이 없음에도
꼭 아이들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식으로 자리합니다.
저 투명창 안에서 이쪽 화원을 바라볼 경우 이런 장면이
되리란 것은 위치상 아주 쉽게 상상이 됩니다.
눈이 마음의 창이라면 유리창은 바로 건물의 눈이 되는 것 이죠.
1화 중반, 유리노조 미츠코가 둘에게 다가서며
스샷의 "폭풍에 맞서자." 할때 보여준 투명창의
클로즈업은 많은 것을 말없이 들려줍니다.
대사를 보면 유리노조는"투명한"이란 단어를 빼먹고
폭풍이라고만 합니다.
화원을 정면으로 주시하는 이 투명창은 모든것을 지켜봐
온 아라시가오카의 시선입니다.
유리노조가 스미카를 살해해 먹어치운것도.
앞으로 벌어질 투명한 폭풍도 다 이 투명한 시선앞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라시가오카"가 낡은 벽에 가려졌다고 화원 뒷편의 참상을 모르는것은 결코 아닙니다.
학원을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로 본다면 투명한 아이들 전원이 학원의 일부인 것 이고 그들 모두가
아라시가오카라는 시스템의 손이자 눈인 것 입니다.
1화에서 끝에서 긴코와 루루가 최초의 포식을
하는 장면을 유리노조가 훔쳐보고 있네요.
유리노조란 캐릭터는 아라시가오카 학원 학생들의
흑막 역할을 하던 네임드입니다.
얘가 알고있는건 학원도 알고있단 뜻이 되죠.
이 화원"뒷뜰"은 학원이 암묵적으로 "승인"한 곰들의
사냥터인 것 입니다.
[하코나카가 둘의 정체를 간파한 것은 긴코의 펜던트 때문입니다.]
이때문에 비록 밤이지만 화원"앞뜰"에서 인간사냥을 강행한
긴코와 루루는 사냥감이던 하리시마에게 역공을 당할 수 밖엔
없었습니다.
인간의 영역, 양지의 공간에서 곰이 인간에게 사냥당한단 룰이 적용된 것이죠.
그런 시스템의 학원입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을 표면에서 운영하는 학생대표라는 완장은 곰이 되어서도 차고있는 인간으로서의 신분증이자
동시에 유리노조의 정체성입니다.
감독은 이 유리노조 미츠코란 대변자를 통해 자신이 말하려는 바 일부를 아주 노골적으로
3화만에 다 풀어내 버리는데요.
완장은 지배층이 "승인"한 집단통제자로서의 표식.
그만큼 완장을 찬 자는 시스템을 잘 숙지하고 운용하는 자리에 위치합니다.
"무리의 분위기를 못 읽으면 제거되지.
그런 시스템이니까."-2화.
"학교라는 건 정말 잘 만들어진 시스템.
내역할은 여기 머물면서 그때만 기다리면 돼."
"산다는건 끊임없이 뭔가를 포기하고 버리는 것.
과거에 얽매인자는 결국 망하고 말지.
우리 짐승은 과거에 살지 않아.
있는건 그저 현재의 감정뿐.
지금 이 순간의 공기, 분위기가 전부.
갇힌세계의 질서는 투명한 것 들이 정하지.-3화.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단 말은 현재 일본의 여러가지를 시사해 주는군요]
3화의 유리노조 중2병 대사가 나오면서 학원 외관을 배경으로 백합이 지는 것을 시작으로 독서실, 음악실 등
학원의 내부시설을 한번씩 화면에 담으며 지나갑니다.
하교시간이 지난 학원의 내부는 학생들이 보이지 않고 텅 비어 오직 건축물만이 보입니다.
혹은.....남아있을 학생들이 투명해 보이지 않습니다.
1화에서 스미카를 찾아 학교를 뒤지던 쿠레하의 동선과 연출도 유리노조의 것 처럼 과학실, 도서실, 음악실은 텅 빈체로
그려졌죠.
교실과 복도, 현관 근처는 애들이 와글대면서 목적이 있는 공공시설은 그저 투명하고 적막하기만 합니다.
2화에서 유리노조에게 헤드샷 당한 유리카와 코노미는 이때 자신의 "좋아"를 위해 전체가 아닌
개인으로서 움직였고, 그때문에 더이상 투명하지 않습니다.
불투명한 코노미는 교실안에서 아주 잘 보이죠.
야밤에 혼자 있어서든, 개인의 의지로 움직여서든, 어느쪽으로든 얘는 이미 불투명 합니다.
같은 공간을 다르게 보여주는 유리노조와 유리카와의 연출은 투명함과 불투명함의 차이를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줍니다.
동시에 완장을 찬 자가 말하는 시스템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건축물적 체제인지를 드러내 보입니다.
"저녀석은 이제 글렀어."
"맞아 걸림돌은 제거해 버리자."
"제거다. 제거다."
-짐승의 세계는 냉혹하다.
힘이 약한 자, 주변과 다른 행동을 취하는 자는 간단히 제거되고 만다.
"그래, 난 실패했구나."
"넌 필요없는 곰, 외톨이 투구다."
"외톨이 투구....그렇구나...."-7화.
3화의 유리노조에 이어 7화에서도 짐승이란 단어가 언급됩니다.
전체에 의한 개인의 소외를 설명할때 짐승이란 단어가 반복되는데 "힘이 약한 자", "주변과 다른 행동을
취하는 자"는 유리노조가 말한"무리의 분위기를 읽지 못하는 자"와 동의어로 반복됩니다.
"폭풍이 쫒아왔어.
이게 시작이야.
소중한 것부터 부수겠다는 경고.
투명한 폭풍은 모든걸 부수고 말거야.
우리가 달아서 사라져버릴 때까지."
"쿠레하, 나도 좋아를 포기할 수 없어.
쿠레하가 내게 하준 것처럼.
설령 무슨짓을 당한다 해도.
난 쿠레하를......좋아를 포기하지 않아." -1화. 쿠레하와 스미카의 대사.
2화의 회상에서 스미카는 백합꽃을 쿠레하의 "좋아"로 정의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후에는 스스로가 백합꽃과 동일시 되죠.
아라시가오카 학원의 외벽을 배경으로 떨어지는 꺽인 백합들은 여러 형태를 통해 반복됩니다.
3화 시작부분의 이사장 연설을 보면
낙화하는 백합들 위로 새들의 형상이
뚜렷해지는 문양이 학생들 위로 겹치며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 정점의 새는 하코나카의 뱃지와
오버랩이 돼죠.
"명심하세요.
지금 옆에 있는 친구가
당신의 생명을 지킬열쇠입니다.
학교내에서도 결코 혼자 있지 말고
서로가 서로를 지켜줘야 합니다."
교장인지 이사장인진 모르겠으나 하코나카 유리카는 현재 나온 학원의 최고위 인물이며 8화에서는
곰으로 밝혀집니다. [이름에 "유리"가 들어가 엔하위키에서도 많은 관객들이 이미 예상한 일이라고....]
곰에 의해 하루가 멀다하고 학생들이 희생되는 공포속에서 인간으로 분장한 곰이 친구간의 결속을 말합니다.
집단결속에 성공한 투명한 학생은 새가 되어 날아오르고 불투명한 학생은 "악"이 되어 새들의 날갯짓 바람에
꺽여 져버리겠죠.
이것이 바로 "투명한 폭풍"입니다.
"우리는 투명한 존재여야 합니다.
그럼 제거의식을 시작하도록 하죠.
친구는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지금 이 교실에 있는 친구, 그게 우리입니다.
그런 우리의 마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최악이겠죠.
우리와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은 안 되겠죠.
우리의 색에 물들지 않는 사람은 민폐겠죠.
그렇게 분위기를 파악 못 하는 사람은 악입니다."
이즈미노 스미카는 그래서 곰에게 당했습니다.
어쩔 수 없죠, 그녀는 악이었으니까요.
우리는 다음에 제거할 악을 정해야 합니다."
주동자가 "렛츠 서치 이블!"을 외치며 가동되는 "악" 색적작업.
건물 벽이 투명하게 변하며 단절의 벽이 보여지는 연출은 제법 압권이었습니다.
교실바닥의 새때 문양도 인상적이었고.
교사 위치의 하코나카는 곰의 공포에 집단적 경종을 울리며 전체로 결속해야만 살아남는다 강조합니다.
그리고 학생대표 유리노조는 투명한 폭풍의 진짜 주동자이며 불투명한 아이만이 "꿀과 석류의 맛"이 난다며
악으로 규정된 개인들을 하나하나 먹어치웁니다.
투명한 아이는 아무 맛도 안난다면서요.
3화에서 분노하는 쿠레하에게 유리노조가 말하길-
"좋아, 느껴져. 네 속에서 피가 부글부글 끓고 있어."
와인처럼 진한 붉은 과즙의 석류는 "피와 생명"에 많이 비유되어 왔습니다.
[석류 먹을때 즙이 벽지나 옷에 튀면 안 지워집니다. 그만큼 불투명하고 진하죠....]
시스템을 정하고 운용하는 둘은 사람이 아닌 곰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모여있는 학원 건물은 곰들의 포식장과
사육장의 두가지 역할을 합니다.
제일 먼저 먹이가 되는 아이는 약하고, 분위기 파악 못하는
전체주의에서 겉도는 개체들 입니다.
이즈미노 스미카는 그래서 유독 작고 여리게 그려지고
연기되어 집니다.[그러나 심지는 강합니다.]
하지만 이후에 목표가 되는 츠바키 쿠레하는 상징 아이템
엽총이 보여주듯 결코 약한 아이가 아닙니다.
다만 무리에서 겉도는 성향이죠.
따돌림 당하는 부류가 약자인 이유가 다른애들에 비해 모자라서가 아닌 소수이기 때문임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작품 "유리쿠마 아라시"입니다.
집단이 개인에게 린치를 가하고 그 의지를 꺽는 것.
불편하고 다루기 민감한 소재를 이만큼 세련되면서도 매끄럽게 다루기가 쉽지는 않죠.
그런데 이 전체주의의 사육장인 학원건축물 안에서 애들은 계속 곰한테 소모 되는데 보충이라곤
전학온 곰 두마리가 전부입니다.
이 두 아웃사이더는 투명한 폭풍 주동자를 먹어치움으로서 학생들 수를 더더욱 줄여가고 있죠.
곰에 의한 희생이란 점에서 결국은 모두가 그저 학원의 소모품일 뿐임을 꾸준히 표현하는게
"백합곰 폭풍"의 핵심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뭔 뜻인고 하면, 메타포의 상징으로 살펴보자면 아이들을 곰, 인간 할것 없이 모두 먹어치우는 최종포식자가
흑막에 존재한단 의미죠.
최종포식자는 죽은 아이들의 사진이 보관 되어지는 하코나카의 "서랍장"입니다.
묘한 효과음과 함께 여러개가 서서히 닫혀지는 서랍은 2화부터 반복되어 보여집니다.
사진이 사람에 대한 기억이라면 이 서랍은 기억을 먹어치우는 포식자라 할 수 있겠죠.
서브컬쳐에서 그리고 현실에서도 말해지길, 기억마저 사라져야 진정한 죽음이라고들 합니다.
이즈미노 스미카의 사진은 학원의 서랍에 들어갔으나 그 영혼은 쿠레하의 회상속에 살아 숨쉽니다.
좋아하는것을 잊지 않으면 잃어도 잃지 않는 것이며 투명해지지 않는 것이죠.
[그리고 성우도 계속 일합니다. 스미카는 살아있어요....]
쿠레하와 스미카는 "좋아"하는 것들을 결코 잊지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학원이라는 전체에 속한 무리들이 죽은사람에 대한 추억을 일절 꺼내지 않을것임은
투명과 불투명의 상징주의로 볼때 예상이 가능합니다.
죽은자의 대부분은 분위기 거스른 아이들인지라 "악"으로 서치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투명한 폭풍에 서치되어 유리노조에게 먹힌 아이든, 폭풍을 주동하다 먹힌 아이이든 사진의 본래 목적인
"추억"되지 못하고 서랍 안 깊숙히 먹이는 아이들은 결국 쿠레하 같은 친구가 없는 이상 학교라는
건축물에 의해 망각되어 버리겠죠.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투명화"가 아닐까 싶네요.
결국 학교의 심장부에 있는 서랍장은 모두를 투명하게 만들고야 말것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호감따위가 아닌 공포에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단으로 무리를 찾는 것은 결국
타자를 "대상화[물화]"하는 것.
인간은 이 건축물 안에서 모두가 물화되고 대상화 됩니다.
목적이 되어야할 존엄이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이죠.
잊혀지는 것은 제거당하는 것입니다.
제거당하는 것은 바로 죽음이죠.
죽음은 공포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아라시가오카 학원은 공포를 잘 이용합니다.
스샷을 잘 보면 하리시마가 살해 당한곳이 화단이 아닌 다른곳이며 진범이 누구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서랍벽장이 있는 방에는 비상하는 새와 꽃이 낙화하는 아라시가오카 상징이 벽지로 장식되어 있죠.
그리고 항상 죽은 아이의 사진이 수납되는 붉은 서랍은 낙화문양과 같은 역삼각형의 배열을 취하고 있습니다.
"제거당하지 않는 소중한 존재가 됐어."
소중한 존재라 함은 곰들이 이야기 하던 "좋아"를 승인 받은 존재입니다.
허나 이 믿음을 가진 하리시마 역시 간단히 제거당하고 잊혀집니다.
제거의식이 백미인 투명한 폭풍을 유독 인상적인 연출로 멋지게 보이게 한 이유는
공포가 시스템의 날개를 타고 날아오르는 것을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아주 역대급 연출이라 평하겠습니다.
투명한 폭풍은 학원의 외벽을 투명하게 만들어 외부 풍경이 훤히 보이도록 만듭니다.
외부에 보이는 것은 "단절의 벽"입니다.
이건 "곰"이라는 외부에 대한 공포와 "악"이라는 내부의 공포가 투명한 폭풍이란 의식을 통해
학생들의 내면에서 하나로 통합됨을 나타낸 고도의 연출입니다.
외부와 내부의 공포가 결국은 적대적 공존임을.
그 시너지 효과를 이용해 학생들에게 시스템의 내면화를 강제하는게 "학원"이란 건축물의
목적임이 아주 극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죠.
그러고 보면 1화 오프닝에 나온 하늘을 가득 메운 단절의 벽은 작품속 실재 하늘에선 존재하지 않습니다.
있는것 이라곤 인간이 사는 건물들 사이로 엉성하게 쌓아올려진 조잡한 건조물들이죠.
이건 곰이 아닌 인간들 사이를 가르고 가두는 벽입니다.
완성되지도 않고 계속 공사중인 이 벽들은 끝내 인간들을 완전히 가둬놓겠죠.
외부란 것은 해석에 따라 타자화 된 외국인이 될 수도.
종교가 다른 사람이거나 이념, 혹은 성적 취향이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타자화[他者化]라는 것은 사전정의에 의하면 "다른 사람의 인격이 나에 의해 대상화 되고 물화[物化] 되는 일."
-이라고 합니다.
이 타자화가 잘 쓰이는 부분이 차별과 적대심을 부추기고 조직화할 때 입니다.
굳이 나치와 일제를 예로 들지 않아도 흔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죠.
"타인에 대한 공포"가 바로 단절의 벽의 정체입니다.[AT필드?!]
그런데 이 외부에 대한 공포를 안쪽으로 뒤집어 놓으면 반대로 자신이 타인에게 타자화 당하는 공포로 바뀝니다.
타인에 대한 공포는 순식간에 소외와 차별에 대한 공포로 반전되는 것이죠.
소외에 대한 공포를 구조적으로 만든것[=조직화]이 바로 아라시가오카 학원입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건물은 바로 벽과 벽이 조합됨으로서 만들어집니다.
곰에 대한 방어는 안중에도 없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세워져 있는 소외의 벽.
단절의 벽과 아라시가오카 학원은 결국 안과 겉으로 구분될 뿐인 동일한 건축물이었던 것입니다.
학원은 단절의 벽의 축소, 구체화.
단절의 벽은 학원의 확장과 관념화.
"갇힌 세계의 질서는 투명한 것들이 정하지."
인간의 사회화 과정을 시스템의 내면화와 동일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과하면 내면이 아주 없어지는가 보더군요.
파시즘이란 내면화하는 무엇이 아니다.
내면을 없애는 활동이야말로 파시즘의 본질이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사이, 즉 우편, 미디어, 해석적 교권을 장악함으로 비로서 파시즘이
꿈꾸는 공공성은 실현 가능해진다.
이러한 우편의 장악은 궁극적으로 공공적 해석 — 메시지에 의해 사적 영역이 완전히 점유되는 일에 다름 아니다.
— 황호덕, <벌레와 제국> 中 [역시 위에 인용된 데이비드 상 님의 글에서 발췌]
짐승처럼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친구를 추억하지 않고,
내면에 간직해야 할 것을 모조리 공포에 내 주어
"좋아"를 없애는 것.
그리고 끝내는 그 자신이 시스템의 서랍으로 들어가 흔적조차 못 남기고 투명하게 사라지는 것.
곰은 산란기 연어의 뱃속 알을 좋아합니다.
동면을 위해 배가 불러도 연어의 속 알맹이 만큼은 탐욕스럽게 먹어치웁니다.
내면이 빠져나간 연어는 껍데기만 남아 죽습니다.
아라시가오카 학원은 사회화가 덜 되어 내면에 "좋아"가 남아있는 학생들의 알맹이를 좋아합니다.
동면을 하지도 않으면서 아이들의 알맹이를 공포로 빼앗아 서랍 안으로 삼킵니다.
알맹이를 빼앗긴 아이는 색이 빠진 유리처럼 투명해 집니다.
감독은 따돌림 문화의 피해자를 양산하는 것이 주동자라는 몇몇의 개인이 아닌 전체주의적 문화를
강요하는 집단적 시스템임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 시스템을 정형화한 상징이 화려한 사육장의 모습을 갖춘 "아라시가오카 학원"이죠.
나치의 건축이념을 검색하다 "길들여진 건축 길들여진 인간"이란 책의 일부 내용이 나왔는데
이것도 아라시가오카의 정체성에 어울리는거 같아 발췌합니다.
인간에 대한 사회적 이념이 건축적 선택의 기준이 될 때 건축은 인간의 불평등을 구현하고, 유지하고 강화하는 도구가 된다.
건축이 본질적으로 담고 있는 길들이기의 속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의도와 목적에 의해 적극적이고도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건축의 본질인 길들이기의 속성이 사람을 길들이는 건축으로, 의식적으로 이용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앞에서 인용한 처칠의 말을 조금 고쳐서 음미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건물을 빚어내고, 건물은 우리를 빚어"내는 것이 아니다.
처칠이 말한 '우리'는 '그들'과 '우리'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해서 그들이 건물을 빚어내고, 건물은 우리를 빚어낸다.
길들이는 '그들'과 길들여지는 '우리'가 같을 거라는 생각은 순진하고 위험하다.
-p. 36
2. 쿠레하의 Sweet home.
백합꽃으로 상징되는 "좋아"란 단어는 인간의 "내면"을 의미합니다.
내면이란 바로 자신의 자아이며 전체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식입니다.
그리고 공포라는 벽돌로 건축된 타인과의 단절을 부술 진심어린 이해와 사랑이기도 합니다.
"이건 엄마가 가르쳐준 좋아의 노래야.
괜찮아, 넌 외톨이가 아냐, 난 네 친구니까.
난 네가 좋아."
"쿠마리어님??"
-7화.
미취학 아동이 전쟁터에 홀로 나타나 처음보는 곰한테 대쉬하는 이 뜬금없는 장면도
타인과 자아에 대한 동화적 상징으로 읽자면 말이 안되는건 아닙니다.
이 또래의 아이들은 아직 자아와 타아에 대한 구분이 미숙해 자신이 남을 좋아하는 만큼
남도 자신을 좋아해 줄거라 철떡같이 믿고 행동합니다.
아직 타인에 대한 공포를 거의 접하지 못한 아이이기에 단절의 벽을 쉽게 넘나드는 쿠마리어가 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던 쿠레하가 어느날 훌쩍 긴코를 잊어버림은 타아의 구분이 없던 자신을 잊고 슬슬
취학아동 나이로 자라남을 의미합니다.
누구나 겪는 성장의 과정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라난다 해도 사회=학원이라는 투명한 폭풍속에서 점차 마모 되어갈 "좋아"의 꽃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가 어른으로 승인받기 위해 대가로 포기할 모든 것들은 사회화와 비사회화의 기로이자 타아의 모호한 경계지점
에 자리한 "스위트 홈"에 고스란히 남아있기 마련입니다.
인도[人道]와 단절의 벽을 향하는 양갈래 길의 정 가운데 위치한 쿠레하의 집.
레이라의 집이라 해도 되겠죠.
"쿠레하, 오늘도 친구랑 사이좋게 놀았니?
왜 기운이 없니? 슬픈얼굴 하지 말렴.
쿠레하는 정말 그 애를 좋아하는구나.
괜찮아, 또 만날 수 있으니까.
쿠레하가 진심으로 만나길 바란다면."
집의 모습과 함께 나오는 쿠레하의 어머니, 레이라의 나레이션은 이 집이 어머니의 분신임을 말해줍니다
집의 외형과 내부 인테리어는 학교와는 정 반대로 공공성과 합리성이라곤 전혀 없는 아주 말랑말랑한 분위기 입니다.
소녀스러움이 넘치다 못해 청소가 걱정지만 촌스럽지 않게 잘 꾸며진 집 내부.
이는 레이라가 딸에게 넘치도록 주고픈 사랑을 상징합니다.
학원과 달리 가구 하나하나에도 섬세한 장식이 들어가 있죠.[학원보다 손그림이 제데로 갈린 집안]
레이라의 집은 타인의 눈치를 살필 필요없이 자신이 직접 뭔가를 해 먹고, 화원을 가꿀 수 있는 그런 공간입니다.
앓아누운 사람이 간병받고 회복되는 장소이기도 하죠.
그만큼 레이라의 집은 학원의 공공성과 대극점에 있는 개인의 공간이자 확장이며 이는 2화에서
세 마리 곰의 난입과 탈주로도 표현됩니다.
친구가 된다는것은 그 사람의 개인영역으로 자신의 영역을 들이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유리노조도 이 당시 쿠레하를 점유하기 위한 경쟁을 벌였구요.
우격다짐으로 자신만의 공간으로 들어오고 그때문에 유리노조가 장총을 들고 설쳤으며 정작 원흉인
긴코와 루루는 창을 깨고 도망가기까지 합니다.
영역이 훼손당한 쿠레하로서는 루루와 긴코에 대한 인상이 최악일 수 밖엔 없습니다.
동시에 잊을레야 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깨져버린 창은 불쑥 찾아와 냉큼 도망간 둘에게 남은 일종의 서운함을 상징하죠.
마음의 벽에 틈이 생긴겁니다.
이런 틈새를 통해 4화에서 두 곰은 다시금 쿠레하의 영역인 레이라의 집에 들어갑니다.
[재미있는게, 7화에서 정식으로 다락방에 입주한 루루의 엄마 포지션이 돋보인단 점 입니다.
이게 결말에서 어떻게 표현될지.....
긴코와 루루, 둘중 어느 한 쪽이 잘못되면 남은 하나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런지.]
투명한 아이들에 둘러쌓여 혼자였던 학원과 달리 정말로 혼자만 있어 적막했던 집에 친구를 자처하는
타인들이 들어서면서 "공간"들이 의미를 되찾기 시작합니다.
응접실과, 주방, 욕실이 제 용도로 사용되는게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쿠레하 자신의 치유를 의미하죠.
"창문이 열려있었어, 아니 깨졌다고 해야 하나...?"
방 안에 항상 있는 사냥용 장총은 엄마 레이라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쿠레하의 적개심과 경계심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를 무시하고 천연덕스레 침입을 감행한 무단침입자
주제에 상황을 리드하는 것은 바로 루루 입니다.
학원에선 딱딱한 표정과 행동을 하는 긴코가 상황을 이끌어가지만
개인적이고 가정적인 레이라의 집에 오면 루루의 세상이 됩니다.
레이라의 집을 가장 잘 활용하는 주체가 쿠레하가 아닌 곰 소녀
"유리가사키 루루"라는건 참 재미있는 전개였습니다.
주방을 지배하는 자가 집 안을 지배하는 겁니다.
[이 스샷은 7화. 2화의 주방 뱅크샷은 너무 어둡더군요]
4화는 쿠레하가 학교에 나가지 않아 집 안이 무대인 화이며 이때문에 단절의 법정 또한 휴일을 맞아
루루의 과거사에 시간을 할애합니다.
단절의 법정 입구는 아라시가오카의 옥상이죠.
획득과 포기의 등가교환을 강요하는 사회화의 건축물과 달리 레이라의 건축물은 그저 모든걸 포용하기에
곰의 길과 인간의 길 모두의 교차점에 서 있습니다.
집 안에선 뭔가를 얻기위해 다른 뭔가를 포기하라는 말은 아무도 하지 않습니다.
학원이 경계를 명확히 가르는 한편 곰과 인간이 뒤섞여 살육을 벌이는 장소라면
레이라의 집은 경계가 불분명해 긴코와 쿠레하가 예나 지금이나 먹고 씻고 함께하며 생활을 하는 장소가 됩니다.
레이라의 집은 아주 여성스러운 인테리어 취향이 돋보이는데, 특히 꽃장식으로 도배가 되어있습니다.
꽃은 바로 꿀의 샘입니다.
작품속에서 유리가사키 루루에 의해 처음으로 주방이 제 용도를 발휘한 4화는
"꿀"이 제대로 조명 받은 화이기도 한데요.
꿀은 바로 꽃이 생성하는 에센스입니다.
꽃은 열매를 맺기 위한 수분을 해주는 대가로 꿀벌에게 꿀을 만들어줍니다.
이 꿀이 아주 영양만점이죠.
꿀이 담겨있는 용기는 투명한 유리입니다.
일어로 유리가 백합을 의미한다면 한국어로는 투명함의 상징인 글라스 glass가 된다는건 참 절묘한 우연입니다.
투명한 아이가 된다는건 꿀이 다 빠져나간 빈 유리그릇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꿀을 생성하는 꽃부분이 잘려나가
다시는 자신의 내면을 채우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단절의 벽은 벌집의 육각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루루공주의 동생 미룬왕자를 죽인 꿀벌은 가장 성공적으로 집단화를
이룬 생물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사육되는 벌들은 힘들게 모은 꿀들을 사육 시스템을 만드는 자들에게 바쳐야만 합니다.
헌데 불투명한 쿠레하의 내면이 잠시나마 투명하게 비워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백합승인을 받아 긴코와 루루가 그녀의 꿀을 먹은 직후 입니다.
꽃을 잘라 다시는 꿀을 만들 수 없게하는 것과 달리 꽃 자체는 무사히 남겨둠으로서
이 백합승인은 여러번 반복될 수 있습니다.
언뜻보면 쿠레하가 일방적으로 꿀을 빼앗기는거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4화의 루루가 약간의 힌트를
주는군요.
바로 "꿀벌"과 "수분"입니다.
꽃을 상처입히지 않고 꽃의 내부에서 꿀을 취하는 것은
꽃이 열매를 맺는데 필수적인 과정이죠.
꿀...즉, 꽃의 마음이 담긴 에센스는 꿀벌이 노력한
대가로 얻는 약속의 키스입니다.
꽃이 수분의 결과로 열매와 씨를 맺는다면 인간은 뭘 맺지??
뭐긴 뭐야, 바로 아기지!! 이젠 수분의 시대다!!!
작품 속에서 긴코와 루루는 비록 살인이란 그릇된 방법이지만 나름 쿠레하를 지키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합니다.
그리고 주방을 이용해 집안을 리드할 수 있는 캐릭터가 루루인 것은 루루가 이미 충분히 사랑받고
늦게나마 사랑을 주는 법을 깨달은 "꿀의 소유자"이기 때문이죠.
꿀죽과 진저허니밀크티를 만들어 타인의 배를 채워주고 치유를 돕는 꿀의 주인은 최고의 자리도,
키스도 포기했지만 마음 속은 가장 풍족합니다.
3화 까지 학원에서의 곰이 몬스터의 이미지 였다면 루루의 회상에서의 곰은 동화속 세계의
동화같은 거주민 들입니다.
또한 극중 공간적 상징으로 보면 현재 루루는 레이라의 집 안에 있기에 저 곰의 세계 또한
레이라의 집 안에 존재하는 작은 세계가 됩니다.
학원이 단절의 벽을 자신에게 오버랩 한다면 레이라의 집에서는 단절의 벽이 안개 저편으로
멀어지기에 가능한 상징들이죠.
루루의 회상속에서[화자는 라이프 섹시이지만] "왕자 미룬"이 꿀을 몇번이고 찾아다 주는 기억은
달리 보면 레이라의 집 안에서 꿀이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꽃과 마음이 자라나는 추억의 공간.
레이라가 딸 쿠레하에게 남긴 고향이죠.
"진짜 '좋아'는 별님이 된다는 게 정말이야?"
"그래, 맞아.
진짜 '좋아'는 하늘로 올라가 별님이 되지.
그리고 별똥별이 돼 지상에 떨어진 별님은 약속의 키스가 되지"
"반짝반짝 빛나는 별님이랑 같은 색이지?
누나, 약속했잖아 키스해줘."
왕자 미룬은 쿠마리어의 별조각들 중 하나가 왕성에 떨어져 탄생한 "별의 화신"입니다.
[왕과 왕비님이 하늘을 보고 별을 땃네요. 경사로세 경사야.]
미룬은 누나에게 약속의 키스인 꿀을 몇번이고 찾아다 주지만 공주는 그 꿀을 하늘 멀리
몇번이고 던져버립니다.
결국 미룬도 하늘로 돌아가 버린 뒤에야 루루공주는 상실감에 빠져버립니다.
만약 긴코가 미룬의 약속의 키스를 찾아다주지 않았다면 루루 역시 투명하게 되어버렸겠죠.
[꿀단지 크기가 들쭉날쭉이네요.....혹시 마음의 성장을 의미하는건가? 아님 작화오류인가;;;;]
"좋아"를 포기하지 않는 쿠레하의 내면이 끊임없이 백합의 꿀을 생성해내듯
루루의 꿀단지 역시 아무리 써도 투명하게 비워지지 않고 샘솟아나겠죠.
쿠레하는 스미카에게 마음을 나누어줄 줄 알며.
루루는 비록 잃은 뒤에나마 배운 사랑을 긴코에게 아낌없이 줍니다.
심지어 쿠레하에게도.
[그런데 8화에서의 행동이 뭘 의미할지....완결이 나야 알겠죠.]
꿀의 주인이 주방을 쓸 자격이 있는 어머니 레이라의 집은 바로 꿀이 흐르는 Sweet home.
"스위트 홈"이란 꽃이 피고 꿀이 샘솟는 그런 마음의 고향이며 아이가 자라나는 요람입니다.
"좋아"가 있다는 것은 상대적 개념인 "싫다"도 함께 있다는 의미입니다.
내면이 투명하게 비워진 사람은 좋고 싫고가 없이 그저 공포의 원리에 따라
수단을 위한 친구를 갈구할 뿐입니다.
단절의 벽은 그래서 생기는 것이며 이 벽을 넘기 위해선 내면에 스스로의 자아를 간직한체
상대방을 진심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타인과의 벽을 넘어서야만 별처럼 빛나는 "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좋아를 잊지 않은면 언제든 외톨이가 아냐.
좋아를 포기하지 않으면 뭔가를 잃는다 해도 투명해지지 않아."
"난 처음부터 당신이 너무 싫고.
처음부터 당신이 엄청 좋았어.
그래서 진정한 친구가 되고 싶었지."
"저 벽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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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김에 단절의 법정도 쓸려고 했는데 막히네요 ㅜㅠㅠㅠㅠ
아마 완결이 나야 좀 제대로 쓰지 않을까 싶습니다.
안그래도 스압이니....
솜씨가 부족해 길어진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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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너무 잘 만들어 주고 있어서 고마운 작품입니다. 덕분에 눈치채지 못했던 연출들도 많이 알게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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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너무 잘 만들어 주고 있어서 고마운 작품입니다. 덕분에 눈치채지 못했던 연출들도 많이 알게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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