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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8년 4월 13일 후금의 한 누르하치의 칠대한 선언과 출병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무순전역은 4월 15일서부터 요동내 명의 주요 국경 거점인 무순(撫順)과 그외 마근단, 동주 등지에서 본격적인 전투가 발발하였고, 그 결과로서 무순 유격 이영방(李永芳)과 유격 산하 중군 조일학(趙一鶴) 등은 항복, 천총 왕명인(王命印)과 파총 왕학도(王學道), 동주(東州) 수보 이홍조(李弘祖) 등은 전사, 마근단(馬根單) 수보 이대성(李大成) 은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전역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21일 명의 요동 총병 장승윤(張承胤)은 국경 지역이 후금에 의해 대규모 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부총병 파정상(頗廷相), 참장 포세방(蒲世芳) 등의 요동내 명군 지휘부와 함께 긴급하게 대응군을 차출해 누르하치를 추격했다. 두 세력은 시여리 인근 고지 지대에서 교전했다. 그 결과는 누르하치의 압승이었고, 명은 순식간에 야전만으로 3천이 넘는 병력을 손실함과 동시에 요동내 상설 지휘부 역시 전멸당했다.
1주일 남짓한 기간 동안 벌어진 해당 전역과 그 안에 속한 여러 전투(무순 전투, 마근단 전투, 동주 전투, 시여리 근교 전투등)을 총칭하여 무순전역(撫順 戰役) 내지는 무순지역(戰役之役)이라고 칭한다. 이는 후금과 명간 최초의 대규모 충돌이었다.
명에서는 해당 전역에서 전사한 장관과 병사들에 대한 사후 포증을 단행했다. 비록 패전이었으나, 후금의 대규모 기습 공격이라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초유의 상황에서 자신의 의무를 지킨 장관들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 수는 없는 법이었으며, 향후 후금의 정벌을 위해서는 장관들과 병사들의 사기 고취가 중요했으므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장승윤은 이전에 언급했듯 태자소보(太子少保) 좌도독(左都督)이 추증, 3급을 습승(襲陞)하게 했으며, 그로서 아들 중 한 명에게 본위의 지휘첨사를 세습받도록 조치했다. 시호로 정충(旌忠)이 내려지고, 그 시호에 따른 사당이 건립되었다.1여기서 지휘첨사의 세습 조치를 받은 것은 장승윤의 아들 중 장자인 장응창(張應昌)이었다.2
장승윤 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 역시 추증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장승윤 휘하의 부장이었던 부총병 파정상은 전투 도중에 휘하 영의 병사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공적이 있었기에 누구의 비판도 받지 않고 도독동지(都督同知)를 추증, 3급을 습승하게 했으며, 장승윤과 함께 정충사에 헌액되도록 했다. 참장 포세방 역시 도독첨사(都督僉事)를 추증, 3급을 습승하게 했으며, 장승윤과 함께 정충사에 헌액되었다.
유격 양여귀(梁汝貴) 역시 포세방과 마찬가지로 도독첨사가 추증되었고, 3급을 습승하게 했다. 유격임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직급이 높았던 참장 포세방과 마찬가지로 도독첨사에 추증된 것은, 그가 파정상과 함께 시여리 근교 전투에서 가장 활약한 장관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3
광녕총진대영(廣寧總鎮大營)에 소속된 수비(守備)로서 장승윤의 직속으로서 시여리 근교 전투에서 전사한 위거정(魏居正), 무순 전투 당시 전사한 파총 왕학도(王學道)는 본래 직책에서 2급을 올려 추증하였으며, 마찬가지로 2급을 습승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요양부총병영(遼陽副總兵營)에 소속된 응습(應襲)이자 파정상 휘하로서 시여리 근교 전투에서 전사한 파중광(頗重光)은 백호(百戶)를 실직으로 추증하고, 세습을 허락했다.
무순 전투에서 전사한 천총 왕명인(王命印)은 본래의 직책에서 3급을 올려 추증하고, 마찬가지로 3급을 습승하게 했다. 이들은 모두 정충사에 마찬가지로 위패가 헌액되어 제사를 받도록 조치되었다. 이외에 전사한 관병들은 경략 아문에서 전례에 의거해 위로하게 했고, 부상병들 역시 진휼하게 조치되었다.
해당 조치는 『명신종실록』 만력 46년 6월 22일 기사에 기술되어 있는데, 전역 도중에 전사한 장관 모두가 추증 대상으로 언급된 것은 아니다. 일례로 명의 천총급 장령은 시여리 근교 전투 당시에만 무려 17명이나 전사했고, 파총은 19명이 전사했다. 그러나 해당 사료에는 그들이 모두 생략되었으며 천총급은 무순 공성전 당시 전사한 천총 왕명인, 파총은 왕학도만이 사료상에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사료상에 언급된 이들만이 추증을 받았고, 언급되지 않은 장관들이 추증되지 않은 것이라 볼 수는 없다. 다른 전사자들에 대한 추증이 생략된 것은 실록의 특성상, 지면 관계로 인해 생략되었을 뿐으로 보인다. 사료상 천총, 파총과 같은 하급 장관에서 대표 전사자가 직급당 한 명씩 거론된 것을 보면, 해당 전사자들에 대한 추증은 일종의 추증 기준을 세우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며, 그에 따라 언급되지 않은 다른 천총, 파총, 수보등의 전사자들은 해당 기준에 맞추어 합당한 추증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만 왕명인에 대한 추증이 다른 하급 장령들에 대한 추증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후한 것을 생각해 보면 다른 천총급이 일괄적으로 왕명인과 같은 추증을 받았을 것으로 보긴 힘들며, 아마 다른 천총급은 왕학도, 위거정과 마찬가지의 기준으로 추증을 받지 않았을까 한다.
왕명인이 다른 하급 장령들보다 후한 추증을 받은 까닭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그가 배치된 무순의 주장과 부장인 이영방과 조일학의 행동과 그의 행보가 상반되게 비교된 탓으로 생각된다. 이영방과 조일학은 모두 누르하치가 지휘하는 후금군의 공격에 결국 항복을 선택했지만, 왕명인은 전투 와중에 전사 했으므로, 적에게 항복한 자신의 상관들과 뜻을 달리하여 전사한 것으로 더욱 높게 평가된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왕학도 등 역시도 무순에서 전사하긴 했으나, 왕명인은 이영방과 조일학을 제외하면 무순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인물이었으므로 그 행적이 더욱 후하게 참작받았으리라고 유추할 수 있다.
1.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74279782?
2.『명사』 권239 열전 127 「장신 열전」 부록 장응창 열전.
3.이는 각주 1번의 글에서도 자세히 다루었다. 또한 『명사』 권239 열전 127 「장신 열전」 부록 장승음 열전에도 양여귀와 파정상 두 사람의 분투가 기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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