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선물
80살의 베버는 노인요양원 옆방에 들어온 뮐러라는 사람을
이름은 달랐지만 얼굴은 금방 알아보았다.
그러나 백발의 치매노인 뮐러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들의 인연은 먼 아우슈비츠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휠체어를 탄 베버는 틈날 때마다 뮐러를 만나 추억을 더듬
었다.
특별한 뇌의 손상이 없는 그의 해리성 기억상실을 회생시
키려고
베버는 나치 시절의 사진책과 상징물들까지 구해 설명했다.
6개월쯤 지나자 뮐러의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는 듯했다.
누구나 그렇듯 상처 준 것들보다 상처 받은 것들을 먼저 기
억했다.
이때부터 베버는 요양원 주변 골목에 쌓인 쓰레기들을 가
리키며
누가 먼저 저기에 몰래 버리니 너도나도 같이 버린 것처럼
사소한 혼란을 방치하면 곧 큰 범죄로 확산된다고 강조했다.
어디선가 본 ‘깨진 유리창 이론’이 어렴풋이 기억났던 것이다.
얼마 후부터 두 노인은 방문을 잠그고 밀담을 나누었다.
아직도 은신 중인 아우슈비츠 나치 전범의 처형 모의였다.
그리고 성탄절 전야에 베버가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지폐뭉치와 권총을 주며 약도를 자세히 설명했다.
이튿날 여전히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뮐러는 먼 여행을 떠
났다.
그는 열차와 버스 속에서 품속의 권총을 만지작거리며
난 깨진 유리창도 치워야 하고 쓰레기도 치워야 한다고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곤 했다.
마침내 뮐러가 헤맨 끝에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얀 눈에 덮인 넓은 저택의 정원을 산책하던 백발노인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가 언젠가는 한 번쯤 찾아올 줄 알았네.”
“그럴 테지 골드만. 그동안 잘도 숨어 있었군.
이제야 내가 베버의 선물을 전하러 왔네.”
“베버? 아……”
뮐러가 품속에서 천천히 권총을 꺼내 골드만에게 쏘았다.
“아니, 베버도 아닌 자네가 어, 어떻게 나를……”
이때 뮐러는 뭔가 큰 충격으로 갑자기 기억이라도 돌아
온 듯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자기 머리에 권총을 쏘
았다.
오래전 뮐러와 골드만의 공모로 베버의 가족이 모두 웃으
며 가스실로 간 것은
어느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였다.
악의 평범성
이산하, 창비시선 4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