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로치청의 난은 신라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탁발부에서는 '절도사'라는 것을 두어 국경의 변경 지역들을 방어했습니다. 현종 경운 2년(711)에 처음 10개를 설치했다고 합니다. 사실 제가 탁발부사를 잘 모르거든요. 그래서 찾아 보니 처음에는 절도사들이 국경 지역(외지?)에만 있었고, 절도사의 권한도 군대 통솔권에만 있었다고 합니다. 철저히 방어적인 관점에서 말이죠. 그런데 사정이 점점 안 좋아지다 보니 절도사에게 행정권과 수세권이 넘어갔다고 합니다. 즉, 절도사들은 자기 관할 지역은 행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안녹산과 사사명의 난을 거치며 내지(원래 전통적 중국 영토, 만리장성 안?)로도 절도사가 확대되고, 이 와중에 기존 행정 단위인 도를 절도사가 아예 대체해 버렸다고 합니다.
역설적인 것은 절도사를 처음 둔 것도 현종, 그리고 안사의 난 때문에 나라를 말아먹을 뻔 한 것도 현종 때라는 점이겠습니다. 이후에도 절도사들은 탁발선비의 아주 깊은 병폐로 남았습니다. 이 글에서 소개할 평로치청의 난 때도 그랬고, 탁발선비의 수명에 결정타를 날린 황소의 난 때도 그랬습니다. 다만 황소 본인은 절도사가 아니었고, 황소의 난을 진압한 절도사들이 결국 탁발 조정을 멸망시키는 직접적인 원인이었습니다. 절도사들의 세력은 탁발부 본진의 세력과 반비례하며 크고 작아졌는데, 한창 클 때는 엠페러가 장안 또는 낙양에서 성도 같은 곳으로 도망갈 때도 있었습니다. 아니, 문제가 생기면 없애 버리면 되지 않나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만들기는 쉬워도 없애기는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여튼, 자세한 건 저는 잘 모르니 선비사를 전공한 분들에게 물어 보시길 바랍니다.
아무튼, 군권과 통치권을 함께 갖고 있었던 만큼, 절도사는 일종의 시한폭탄이었습니다. 주나라가 각 지역에 자기 따까리들을 분봉했다가 피를 본 것처럼, 탁발부의 절도사도 잊을 만하면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이 글에서 다룰 평로치청의 난도 절도사의 난 중 하나였습니다.
헌덕왕본기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秋七月, 唐鄆州節度使李師道叛. 憲宗將欲討平, 詔遣楊州節度使趙恭, 徴發我兵馬, 王奉勑旨, 命順天軍將軍金雄元, 率甲兵三萬以助之.
대충, 가을 7월에 탁발부의 운주절도사 이사도가 반역을 일으켜서, 헌종이 이를 진압하기 위해 신라에다 병력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는 말입니다. 신라에서는 3만 명을 보내서 진압을 돕게 했습니다. 819년이죠.
그런데 사실 이 반란은 이사도가 죽으면서 진압되었습니다. 이사도는 819년 2월에 이미 잡혀 죽었습니다. 따라서 신라가 사신을 받아 군대를 징발할 즈음에는 이미 반란 지역은 사후 처리 중이었을 겁니다. 당시엔 위성 전화 같은 게 없었을 테니까, 2월 전에 보낸 사신이 어쩌어찌하다가 7월에 도착했거나, 그 전에 도착했지만 병력을 신라가 보낸 것이 7월이 아니었나 합니다. 따라서 신라군은 이사도의 난을 진압하는 데 별 공훈을 세우진 않았을 것입니다.
이사도의 난은 어쨌거나 탁발부 역사기 때문에 삼국사기에는 기록이 저 한 줄밖에 없습니다. 자세한 기록을 보시려면 구당서나 신당서를 뒤벼 볼 수밖에 없겠네요. 근데 전 안 봐서 모릅니다.
이사도의 난은 평로치청의 난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이사도의 할아버지인 이정기가 평로군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평로군의 시작도 재밌습니다.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755) 평로절도사는 안녹산 본인이 맡고 있었습니다. 평로절도사는 현종 때 설치된 최초의 절도사 중 하나였는데, 요서 지역인 영주에 주둔하면서 동북방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겠죠. 사실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킬 당시 안녹산은 범양절도사(북경과 그 부근)와 하동절도사(태원과 그 부근)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력이 아주 무지막지했습니다. 안녹산은 반란을 일으켰지만, 평로군이 모두 반란에 가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회옥(나중의 이정기), 왕현지, 후희일이 반란군 안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반란군의 반란군'들은 안사의 난 중에 요서에서 산동으로 남하해서 산동의 여러 군들을 '탈환'해서 탁발부 조정의 편을 들었다고 합니다. 안사의 난은 762년에 마무리됐는데, 탁발 조정에서는 평로군에게 논공하며 치주, 청주, 기주, 밀주, 제주, 해주(모두 산동과 그 일대?)를 관할하게 했습니다. 이에 평로절도사(원래 있던 요서 지역)에 치청절도사(산동 지역)를 더해 평로치청절도사라고 했습니다. 놀랍게도 평로치청절도사 자체는 탁발선비가 멸망한 이후에도 쭉 유지됐던 것 같습니다. 굴곡이야 있었겠으나, 최종적으로는 북송 태종 연간에 짝눈이의 눈 한 짝처럼, 짝눈이 새끼가 사랑한 자기 아빠의 여자 무측천처럼, 현종이 사랑한 자기 며느리 양귀비처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한편 '반란군의 반란군' 중 하나였던 이회옥은 원래 절도사가 아니었으나, 후희일을 축출하고 절도사직을 찬탈했다고 합니다. 탁발부의 대종은 이회옥에게 '정기'라는 이름도 주고 우대해 주었는데, 이정기는 이 때부터 꾸준히 세력을 확대해 776년에는 15개 주를 통치하는 거대 세력이 되었다고 합니다. 778년엔 치소를 청주에서 운주로 옮겼다고 하는데, 삼국사기의 '운주절도사 이사도' 운운은 아마 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멀쩡하게 잘 살던 이정기는 781년에 이유악 등의 다른 절도사들이 탁발부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함께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반란군은 낙양으로 들어가는 수운을 막고 탁발 조정과 결전을 치를 태세까지 갔지만, 이정기가 병(황달? 종양?)으로 죽으면서 인류가 멸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정기의 '자리'는 아들인 이납이 물려받았는데, 이납은 제나라의 왕을 칭하며 여전히 반란을 이어갔습니다. 이 와중에 덕종은 783년 10월엔 봉천(지금의 함양 건현)으로 도망가기까지 했다니 위세가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784년에는 이 반란을 묵인하고 절도사들을 군왕으로 봉했는데, 이납은 농서군왕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납 이후에도 절도사들의 반독립 상태는 두 대나 더 이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