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칼부림
1616년 음력 5월에 보지리와 함께 후금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던 세력들은 당해 7월 누르하치에 의해 파견된 안피양구와 후르한에 의해 총작전기간 약 4개월, 실제 현장 작전기간 약 2개월여만에 토벌당했다. 이후 해당 세력의 암반들은 안피양구와 후르한에 의해 허투 알라로 이송되어 음력 11월 누르하치를 접견했고 누르하치는 그들을 용서해 주었다. 인도적 차원이기보다는 자신에게 항복의사를 밝힌 암반들을 통해 이번에 복속한 세력들을 통제코자 한 것이었다. 항복한 암반들을 처형하면 그들은 또 다시 저항을 결의할 수 있었으므로 전략적 온건책을 사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전에 필자는 이 때 항복한 암반들의 출신을 그저 반란 진압의 거시적 대상들, 즉슨 사할리얀, 후르하, 인다훈 타쿠라라로 뭉뚱그려 판단하고 인다훈 타쿠라라, 노오로, 시라힌이라는 사료 기술은 착오로 판단했었다. 이는 보지리의 난의 후반부 사건의 전개에 대한 필자의 집중과 해석이 부족했던 탓으로, 해당 암반들의 출신 세력 3개를 보지리의 난 당시의 반란 세력 계열 3개, 사할리얀, 후르하, 인다훈 타쿠라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료를 다시 복기해 보건대 이 때에 안피양구와 후르한이 항복시키고 허투 알라로 데려간 40여명의 암반들의 경우 대부분 인다훈 타쿠라라, 노오로, 시라힌 출신으로 살펴진다.
만문노당 병진년 11월의 기술을 살펴보자면 후르한과 안피양구가 얼음다리가 생긴 흑룡강을 도하하여 사할리얀계 부락들을 토벌한 후 인다훈 타쿠라라, 노오로, 시라힌 3개 세력을 항복시켰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 이후 그들은 (항복한) 암반 40명을 데리고 복귀, 11월 7일에 허투 알라에 도착했다. 위의 기술은 40명의 암반들의 출신이 인다훈 타쿠라라, 노오로, 시라힌 3개 세력에 집중되었을 것이라는 유추를 가능케 한다.1그러나 해석에 중의성이 생겨, 8월~10월에 있었던 사할리얀계 부락 및 보지리, 뫀콘 산하의 부락의 암반들이 해당 '40명의 암반'에 포함되었을 것이라는 추론 역시도 가능케 한다.
그런데 구만주당은 보다 자세히 기술이 되어있다. 구만주당에는 '그 후 인다훈 타쿠라라, 노오르(노오로), 시라힌 3개 나라를 항복시키고 40명의 암반을 항복시켜 암바 겅기연 한(누르하치)에게 고두시키게 하기 위해 데려와'라는 기술이 살펴진다.2구만주당의 기술은 해당 40여명의 암반들이 확실하게 인다훈 타쿠라라, 노오로, 시라힌 3개 세력 출신임을 명시하고 있다.
구만주당을 기반으로 편찬된 후금의 태조계실록 역시도 구만주당과 비슷한 맥락으로 해당 암반들의 출신을 서술하고 있는 것을 보건대3 해당 암반들은 인다훈 타쿠라라, 노오로, 시라힌 3개 세력 출신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이들 암반들이 후금에 완전히 내속된 1618년 음력 1~2월에 대한 기록을 보면 이들의 출신에 대해 보다 확실한 근거를 얻을 수 있는데, 만문노당에서는 40명의 암반들의 내귀를 서술하면서 '먼저 항복해 온 세 나라의 암반 40명'4이라고 서술하여 해당 암반들의 출신이 인다훈 타쿠라라, 노오로, 시라힌 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며 실록에서는 직접적으로 해당 암반들의 출신을 인다훈 타쿠라라, 노오로, 시라힌 3개 세력이라고 명시함으로서 이들의 출신에 대해 확증하고 있다.5
이것을 살펴보건대 후르한과 안피양구가 반란 진압후 허투 알라로 이송한 암반들의 출신은 대부분 인다훈 타쿠라라, 노오로, 시라힌 세 개 세력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렇게 된다면 의문이 생기는데, 후르한과 안피양구가 반란 지역에 도착한 1616년 음력 8월 19일에서 후르한과 안피양구가 얼음다리를 도하한 10월 5일까지 진행된 토벌전에서 무려 38개(혹은 47개)의 가샨들이 함락되었는데 해당 가샨들의 암반들, 특히 후르하계 암반들은 어떻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몇 가지 추론을 할 수 있는데, 우선 해당 가샨들 중 27개는 반란의 주모자 보지리와 목콘, 두 명의 대영주에 의해 통솔되고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들 산하의 27개의 가샨에는 두 사람을 제외한 암반들이 없었을 가능성을 추론할 수 있다. 보지리와 목콘이 통치하고 있던 가샨들의 경우 따로 암반들이 없이 그저 마을 지도자들(gašan da)만이 존재했으며 오직 두 사람만이 암반으로 호칭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 사할리얀계 가샨 9개를 통치하던 암반 혹은 암반들은 어찌 되었을까. 기록에 명시되진 않지만 후르한과 안피양구에게 저항하다가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의 경우 인다훈 타쿠라라, 노오로, 시라힌의 암반들과는 다르게 항복했다는 기술이 보이지 않으며, 항복을 하지 않았다면 후르한과 안피양구로서는 반란까지 일으킨 암반들을 굳이 살려둘 이유가 없었으므로 교전중 제거하거나 처형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혹은 일부가 후르한과 안피양구에 의해 사로잡히기 전에 도주했을 가능성 역시도 충분하다.
또 다른 추론으로는 음력 8~10월에 후금군에 의해 제압된 가샨들의 기존 암반들이 보지리와 반후금파 암반들에 의해 이미 제거된 상태였다는 가정을 할 수 있다. 해당 가샨들의 암반들이 바로 1616년 음력 2월중에 후금에 항복하고 본인들의 형제들을 설득하겠다고 말한 암반들로서, 누르하치에 의해 본인들의 부락으로 복귀한 후 보지리와 반후금파 암반들에 의해 음력 5월중에 제거되었다는 추론이다. 이 경우 제거된 암반에 사할리얀계 가샨들의 암반은 포함되지 않으며, 사할리얀계 가샨의 암반들은 위에서처럼 후금군의 토벌과정에서 제거되거나 도주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 있다.
마지막 추론으로 음력 8~10월 사이에 공격당한 사할리얀계와 후르하계 암반들 모두 후금군에 저항하다가 살해당하거나 보지리와 마찬가지로 도망쳤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보지리의 난이 대강 진압된 1617년에도 후금은 후르한과 안피양구의 토벌로부터 도주한 반란세력들을 추격대를 통해 토벌하는 작전을 진행했는데, 해당 토벌의 대상들에 이 때 도주한 암반들이 포함되었을 개연성이 존재한다.
혹은 기록에 명시되진 않았으나 음력 8월~10월 사이에 토벌대상이 되었던 후르하, 사할리얀계 암반들 중 일부가 저 40여명의 항복 암반에 포함되었을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다만 그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어 언급할 필요성이 없었기에 그저 음력 10월 5일 이후에 항복한 3개 세력만을 암반의 출신성분으로 명시했다는 것이다. 다만 개인적으로 이 견해는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많지도 않은 듯 하다.
1.만문노당 병진년 음력 11월 7일
2.구만주당 병진년 음력 11월 7일
3.예시로 만문본 만주실록은 얼음다리를 건너 사할리얀계 부락들을 토벌한 뒤에 인다훈 타쿠라라, 노오로, 시라힌 3개지역 '의' 40여명의 암반이 항복했다고 서술하여 구만주당보다 더욱 명확한 서술을 하고 있다. 만주실록 천명 원년 음력 11월 7일
4.만문노당 무오년 음력 1/2월 8일, neneme dahame jihe ilan gurun i dehi amban.
5.만주실록 천명 3년 음력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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