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에서 '최악의 독재자'는 박정희다. 대한민국뿐 아니라 조선시대까지 포함해도 '최악의 독재자' 후보에 들어갈지 모른다. 그런 박정희 정권을 붕괴시킨 인물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다. 한국 민중의 민주화투쟁이 결정적 원동력이긴 했지만, 김재규가 '유신의 심장'에 최후의 일격을 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김재규에 대한 평가에서는 그런 요소가 제대로 고려되지 않는다. 그가 일으킨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체제가 붕괴한 사실은 부정되지 않지만, 그가 민주화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그다지 고려되지 않는다.
그런 점들보다는, 그가 경호실장 차지철과의 충성 경쟁에서 밀린 데 대한 불만이나 불안감 때문에 일을 벌였다는 점,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를 비롯한 미국 측의 부추김을 받아 일을 벌였다는 점들이 훨씬 더 비중 있게 고려되고 있다.
그의 행동으로 인해 박 정권이 파탄나고 1980년 '서울의 봄'이 찾아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적인 결과일 뿐 그가 의도한 결과는 아니라고 보는 게 일반적 시각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독재체제를 무너트리기 위해서였다는 김재규의 항변에 대해 우리 사회는 귀를 닫고 있는 편이다. 김재규의 동기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