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의 최초 단신보도]
1987년 1월 14일, 서울대 재학생 박종철군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실에서 경찰에게 잔혹한 고문을 받다가 사망했다. 11시 45분 경 중앙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경찰은 시신을 화장하여 증거를 인멸하려 했으나, 당시 최환 검사가 시신 보존명령을 내렸다.
다음날 오후 6시, 한양대 병원에서 부검이 실시되어, 고문치사임이 만천하에 들어났다. 한편,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가 검찰 간부의 한마디 말에 단서를 잡고 남영동에서 조사받던 대학생이 숨졌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하여 15일자 중앙일보 석간에 <警察에서 조사받던 大學生 "쇼크死"> 라는 제목으로 단신 보도되었고, 큰 파장을 일으켰다. 주요 저녁 뉴스는 물론, 외신들 까지 앞다투어 박종철군의 의문사를 보도했다.
비상이 걸린 치안본부는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과 박처원 당시 치안감이 16일 기자회견을 열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 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동아일보가 부검의에게 사건현장이 물로 가득했다는 진술을 확보해 고문 의혹을 공개적으로 제시했다.
결국 치안본부는 19일 고문치사를 인정하고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 등 2명의 경찰관을 사건주도자로 지목했다. 그리고 신임 내무부 장관 정호영이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나." 라고 해명했는데, 그는 1980년 당시 특전사령관으로서 광주 학살의 책임자 중 한명이다.
두 경찰관은 영등포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당시 안유 보안계장이 두 경찰관을 접하는 동안, 고문 경찰관이 더 있고 정권이 축소 발표했음을 알아냈다. 이를 수감 중이던 이부영한테 알렸고, 이부영은 쪽지로 은폐 사실을 적었다. 이 쪽지는 한재동 교도관이 외부에 전달하여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 소속 김승훈 신부와 함세웅 신부가 전달받았다.
1987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 7주기 추모 미사에서 김승훈 신부가 황정웅 경위, 반금곤 경장, 이정호 경장 등 3명도 고문을 주도했으며 정권이 이를 축소했다고 폭로했다. 결국 5월 21일, 당시 서울 중앙지검 검사장 정구영 검사장이 추가로 3명의 범인이 있음을 인정했으며 즉각 연행했다.
그러자 4.13 호헌조치에 불만이 커진 국민들은 거세게 분노했다. 결국 이는 6월 민주 항쟁의 도화선이 되어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저자의 말:오늘은 故 박종철 학생의 33주기 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