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8/read/33569182
1619년 음력 2월 경, 후금을 포위한 명나라 군대의 전략은 다음과 같았다.
[후금 수도 허투 알아 코 앞까지 군대를 나누어 동시에 진격하여, 후금의 야전군이 도저히 어느 한 쪽으로 대처할 수 없게끔 한다음
후금 영토 내부에서 군대를 합쳐 허투 알아를 공성, 함락하여 후금을 멸망시킨다.]
그러나 이런 전략은 타이밍과 작전 통제가 대단히 중요했는데, 그것은 무척 힘든 것이기도 했다.
양호가 이런 전략을 쓴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지형의 문제, 군대 기동의 문제, 정보력 부족 문제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이유들을 생각하고서라도, 양호의 이 사로병진 전략은 전체적인 문제가 많았다.
전략 자체로 미루어 보자면 어쩔수 없었다는 측면도 있으나, 문제점이 있다면 그 문제점을 최대한 보완해야 하는데 양호는 그것을 해내지 못했다.
어쨌든, 이렇게 동서남북으로 후금을 포위한 군대는 출진의 시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본래 2월 25일 경 출진할 예정이었는데
한 차례 눈이 오는 바람에 출진은 연기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후방에서의 닦달로 양호는 더 이상 시일을 미루지 못하고 전군에 출정 명령을 내렸다. 목표는 3월 2일까지 각로의 군대가 집결하여 허투 알아를 포위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동로군의 유정(+ 강홍립의 조선군), 서로군의 두송, 북로군의 마림(+긴타이시의 예허군), 남로군의 이여백이 모두 출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급한 출진에 모두가 동의한 것은 아니어서, 동로군 사령관이자 요양 총병인 유정은 이런 조치에 극렬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조선군 도원수 강홍립과의 대화에서 이런 자신의 생각을 극력히 피력한다.
안그래도 총사령관 경략 양호와 사이가 안좋았던 그로서는 이런 상태의 공격이 영 못마땅했을 것이다.
유정이 그런 생각을 가지던 말던 일단 명령이 내려왔기에 진군은 해야 했다.
명-조선-예허 연합군 13만 대군이 후금의 동서남북 각 경계를 넘어 진군할 무렵, 누르하치는 본인의 검을 닦고 있으면서 국경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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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반을 위한 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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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인물임 | 19.12.15 17:55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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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왜란 이후 시점이란게 체감되네 익숙한 이름이 여전히 나오는거 보면 | 19.12.15 17:56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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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휘관 양호의 경우에도 정유재란에서 울산성 전투를 지휘한걸로 유명하지. | 19.12.15 17:58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