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1992년의 여름의 일이었다.
우리 부모님은 어릴적부터 여름방학때마다
내가 할머니 댁에서 지내는 것을 허락하셨고
(아니, 그건 허락하셨다기보다 강제하셨다는 쪽이 맞을 것이다.)
나는 매번 여름방학때마다 시골에 있는 할머니댁에서
2주간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미 40이 넘는 나이가 되어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기억은 드문드문하게되어
제대로 된 기억이 남이있지않다.
할머니와의 2주간의 생활은 싫지않았지만
견디기힘든 것은 2주간의 나태한 시간이었다.
아무리 할머니와 함께 있는다고 해도
할머니 이외의 아무도 없는 시골에서
아무도 만나지않은채 2주간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중학생에게는 쉽지않은 일이었다.
딱 한번 아버지에게 이에 대해서
불만을 표시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단 한번의 따귀로 답을 대신했다.
평소에는 한번도 손을 대지않던 아버지라서
나는 크게 겁을 먹었고
그 이후에는 단 한번도 아버지에게 불만을 표시한 적이 없다.
할머니는 매주 한번 나를 시골에서 벌어지는 시골장에 데려가셨고
내가 좋아하는 장난감을 사주셨지만 그것으로
만족하기에 시골생활은 너무나도 나태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시간..
할머니는 나에게 어떤 것도 강요하지않으셨다.
집밖으로 나가라는 이야기를 하지도 않으셨고
늦게 잠을 자지않고 있을 때도 일찍 자라고도 말하지않으셨다.
하지만 하루 3번 밥먹는 시간만은 꼭 지키게 하셨고
2주중에 3일은 꼭 연탄을 때우는 방에 재우셨다.
여름날에 연탄을 때우는 방에 재우는 것은 아직도 이해가 되지않는다.
그렇다고 연탄을 때우는 것도 아니고
그저 집 끝에 있는 연탄을 때우는 방에 재웠을 뿐이다.
다른 방과의 차이라곤
문의 방향이 반대라서 문을 밀고 나갈 수 없고
불을 끄면 정말 아무것도 안보이는 암흑이 된다는 것뿐.
시골의 밤은 너무나도 어둡다.
달빛이 없으면 정말 눈앞을 분간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암흑이 되고만다.
전신주라도 있다면 다행이지만
할머니가 살고 계시던 곳은 그런 전신주마저 거의 없는 완전한 시골에서도
산을 3번은 넘어가야되는 그런 깊숙한 곳이었다.
어째서 그런 깊은 산중에 매년 내가 있어야 하는지 몰랐지만
나는 어느새 그런 시골생활에 익숙해졌고
내 나름대로 2주간의 시골생활은 어떻게든 견뎌보려고
집에서 이것저것 챙겨가기도 했다.
무엇을 챙겨갔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않지만
항상 갈때마다 무엇이든 잃어버린 것이 있었기 때문에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가져가지 않았다.
처음으로 잃어버렸던 이불은 내가 너무도 아끼던 것이었이에
집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며칠동안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였다.
다음으로 챙겼던 베게도
그 다음으로 챙겼던 인형도
시골에 다녀온 이후에 나에게 돌아온 적이 없었다.
아니, 분명히 할때는 가지고 있었지만
올해는 가지고 있지않았다.
그 당시 나는 너무 어렸기때문에
내가 할머니 집에 어질러놓은 물건들을
어머니께서 챙기면서 잊어버렸을 수도 있다.
그러고보니 나는 단 한번도 돌아올때의 짐을 챙긴 기억이 없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내가 그저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이겠지만
그것보다 사실 내가 이야기를 하고싶은 것은
시골에서 느꼈던 달빛에 관한 것이다.
달.
달을 볼때마다 아련한 느낌이 든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지만
둥그렇게 뜬 보름달을 보면
모든 것을 용서받는 느낌이 든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 아래에서는 느낄 수 없는
달빛만이 가진 서늘하면서도 따뜻한 그 느낌.
할머니 댁은 깊은 시골이라서
별도 잘 보였겠지만
내가 지내는 2주간은 항상 달이 밝아서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모두 가려버리곤 했다.
하지만 난 별보다는 따뜻한 달이 좋았다.
할머니도 딱히 늦게 자라는 이야기를 하지않으셨기 때문에
연탄방에 자는 3일을 제외하곤 항상 늦은밤에
달을 바라보고 했다.
할머니는 매주 한번 식료품을 구입하기 위해 시내를 나가셨다.
버스는 하루 2번만 왕복하는 하기 때문에
아침일찍 할머니와 함께나가서
하루종일 시장을 돌아보고 약국도 들렀다가
항상 할머니께서 쉬는 다방에가서
그곳에서 동전을 다쓸때까지 오락기에 매달렸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와 장을 봤던 것은 대부분 기억이 난다.
할머니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만들기위해
대부분 나를 위한 재료들을 하셨고
닭고기는 과하다 싶을정도로 많이 사셨다.
웃기는건 할머니도 닭을 기르신다는 것이지만,
직접 잡으실 순 없는지 항상 장을 보실때마다
5마리씩 통으로 사서 내 가방에 넣어주시곤 했다.
버스를 타고 한시간을 가야하므로
할머니께서 가방에 짐을 넣으실때마다
난 닭고기나 다른 고기에서 피가 새어나와
가방에 묻지않을까 걱정했었다.
물론 할머니는 항상 피가 새지않도록 여러번 포장하셨기 때문에
한번도 피가 가방에 새어나온 적은 없었다.
오히려 피냄새가 나냐고 몇번이고 물어보셨을 정도?
나는 아직도 닭고기를 좋아한다.
아마도 할머니께서 해주시던 닭요리를 기억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매일 닭을 먹어도 질리지않을거라고 생각할 정도이다.
너무 두서없지만 글로 쓰고 있는 지금도
그 당시의 기억은 너무나도 흐릿하다.
특히 연탄방의 3일은 기억조차 나지않는다.
다만 방에 들어가서 아무것도 하지못하고
거의 잠만 잔 것 같다.
그때 밥은 먹었던 걸까?
아니, 할머니와의 기억속에서
연탄방에서 같이 식사한 기억은 없다.
연탄방에 들어가기전에는 꼭 닭요리를 먹었던 기억은 있다.
마치 동면에 들어가는 곰을 준비하듯
평소보다 훨씬 많은 양의 음식을 준비하고
얼마나 먹는지 지켜보시곤 했다.
아..
이야기가 또 잠시 샛길로 빠지긴 했지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달에 대한 이야기다.
달은 항상 차고 기운다고 할머니께서 이야기하셨다.
기운이라는 것은 차오르다가도 다시 내려가는 것이라고
내가 달을 좋아하는 것은
내 안에는 너무나 뜨거운 것이 있어서
햇살속에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내 기운을
달이 차갑게 식혀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난 아직도 할머니의 그 말을 좋아한다.
달.
달을 떠올리면 항상 마음이 부풀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달빛 아래 춤추던 소녀의 모습도 기억이 난다.
하지만 정작 할머니댁에서는 보름달을 본 기억이 없다.
할머니댁에서 자기 시작한 것은 딱히
보름달을 보기위함은 아니었다.
보름달을 시내에서도 보기엔 충분하니까
굳이 시골에 가지않아도 보름달을 충분히 보인다.
언젠가 할머니께서 사시는 시골에 놀러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마을에서 사는 아이가 실종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할머니는 너무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며 다른 곳으로 이사하셨고
아버지는 매년 그 시기가되면 나를 할머니댁으로 보냈다.
할머니에 대한 걱정이 지나쳤던 탓이겠지.
어쩌면 내 뺨을 때리셨던 것도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나를 질책하셨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튼, 할머니댁에 가는 것은 지루했지만 나쁘지않았고
시골에 가기전에는 곤두서있던 내 신경도
할머니댁에 가기전에는 초긴장상태였던 집안 분위기도 내가 할머니댁에 가면 나아졌기 때문에
나는 단 한번의 따귀 이후로는 할머니 댁에 가는 것을 거부하지않았다.
할머니댁에 가지않게 된 것은 막 성인이 되려고 하는 시기부터이다.
고2의 여름.
나는 마지막으로 할머니댁으로 방문했었다.
아버지는 할머니께 이제는 위험하시니 제발 도시로 돌아오시라고 이야기했었고
할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다독거리시면서
아직 저 녀석에게는 여기가 필요한거라면서
내 핑계를 대시곤 했다.
중학교때에 겨우 120이던 내 키는
고2가 되면서 아버지보다 큰 170이 되어버렸기때문에
아버지의 따귀도 내가 시골에 가지않는 것을 말릴 순 없었지만
나는 오히려 아무도 없는 시골에서의 그 나태한 시간이 그리웠다.
아무것도 하지않아도 되는 시간
오히려 내가 좋아하는 달을 보고
내가 소리높여 울부짖어도 아무도 듣지않을
그런 시간들.
할머니는 나를 연탄방으로 들여보내는 3일 이외에는
너무나 상냥했고 연탄방에서 나오는 날에는
혹여라도 다쳤을까봐 손톱의 밑까지도 꼼꼼히 살피며 닦아주셨다.
연탄방에 대한 기억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애초에 빛조차 제대로 들어오지않는 방이어서
나는 여기저기 부딪히기 일쑤였다.
또한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인지
벌레가 서걱거리는 소리도 너무 시끄러웠고
방에 들어오기전에 먹었던 닭의 냄새는 비린내가 되어서
거의 닭의 피냄새까지 맡는 느낌이 되었다.
아니, 그때의 기억이 맞는 것일까
단지 들어섰을때의 기억일 것이리라.
시간이 흘러
할머니는 시골에서 벗어나
우리집 근처에 방을 얻어지내셨고
돌아가실때까지 매년 여름 나에게 약을 챙겨 보내시며
내 건강을 걱정하면서 지내셨다.
몇년전 할머니께서 지내시던 시골에 도로가 나게되어
공사를 하던 도중 오래전에 실종되었던 소녀의 유골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뉴스에서 하지않았지만
시골집을 팔던 도중에 들은 소문으로는
엉망진창이 되어 들개에라도 물려죽은 듯 하다고 했다.
작년에 돌아가신 할머니는
반년전부터 시작된 치매때문에 대화가 제대로 되지않았지만
이미 그렇게 되실것을 예상하셨던 것처럼
나에게는 작은 상자를 남겨주셨다.
상자에는 더운 여름에는 꼭 챙겨먹으라는 당부와 함께
수많은 알약들이 들어있었다.
왠지 기분이 나빠진 나는 그것들을 다 버려버렸다.
어째서 할머니는 이런 약만 남긴 것일까.
차라리 본인의 건강을 챙기시는 것이 더 좋았을 텐데.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떠나가신지 오래...
차라리 시골집을 판 돈이라도 남겨주셨으면 했지만
어디다가 돈을 쓰신 것인지 빚을 정리하고나니
남는 것이라곤 나를 연탄방에 가두셨던 그 시골집밖에 남지않았다.
이전의 시골집은 도로라도 나서 팔 수 있었지만
연탄방에 있는 시골집을 너무 외진 곳이라
도로가 나긴 커녕 팔기도 힘들 것이다.
홀로남은 탓인지 얌전하게 지내던 직장에서도
얼마전 공주병걸린 직장상사를 때려눕혀 잘렸다.
이제 진짜 어떻게 살아야할지 걱정이 된다.
거기 들어가서 살 생각도 해봤지만
이미 15년도 넘게 방치된 집이 그대로 남아있을리는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째서 나를 그 연탄방에 가둔 것일까 생각하게 된다.
아니 어쩌면 내가 가장 편안했던 것은 그 연탄방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진짜 어쩌면 나에게는 할머니와 함께지내던
그 2주간이 편안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달은 차고 기울고 달이 차오를때
반짝이던 잔디위로 춤을 추는 소녀의 기억이 떠오른다.
달이 기울면 소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는 달빛아래 혼자 울고있다.
쏟아지는 달빛아래에서는 더이상 혼자가 아니다.
최근들어 그 어린시절 더운 여름에 시골에서 바라보던 달이 무척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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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상 그런것 같음 엉망진창된 아이도 어쩌면.. | 22.10.03 04:5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