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봉요원 38권 309화 손책 암살
38권 전반부에서, 조조의 목숨을 노리고 행한 손책의 서주 습격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한술 더 떠서 손책은 자신이 혐오하는 인물상인 조조에게 일장 훈수까지 들어야 했었지요.
철퇴하여 본거지로 돌아온 손책은, 가라앉은 기분도 달랠 겸 능조를 데리고 사냥에 나섭니다. 309화의 시작은 그 사냥으로, 손책과 능조는 멈춰서서 사슴 무리를 쳐다봅니다.
이 '사냥'은 하나의 은유를 형성하게 되는데, 손책이 현실 세계에서 사슴 사냥을 하고 있음에 그치지 않고, 축록중원(逐鹿中原)이라는 관용어구- 다시 말해 '천하'라는 더 큰 사냥감을 쫓는 군웅들의 치열하고 혼란스러운 다툼으로 발전하지요.
그리고 손책은 한창 사슴을 쫓아야 할 이 시기에, 비유적인 의미에서나 물리적인 의미에서나 멈춰서 있습니다. 정(靜)의 상태죠.
핵심으로 향하는 자신의 행보가 과연 제대로 된 길이었는지 의문을 품으며, 다른 사냥꾼들이 너도나도 물리적인/형이상학적인 사슴(중원)을 쫓는 사이 주저하며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는 모양새입니다.
손책은 자신의 행보를 회고합니다. 자신의 강동정벌은 '토끼사냥'에 불과했다며 내리칩니다. '축록중원(逐鹿中原)'에 비하면 난도(難度)가 훨씬 쉬었을 뿐만아니라, 토끼 사냥을 함에 별다른 고뇌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었죠. 땅을 넓히고, 반항하는 사람을 무릎 꿇리고, 적들은 베어넘기면 그만이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사냥- 사슴을 두고 쫓는 각축전(축록중원)에 이르니 상황은 일변합니다. 사냥감이 커질 수록, 그 핵심으로 향하는 길에는 더 많은 위선과 도덕적 딜레마가 놓이기 시작합니다.
야심을 휘두를 때도 '백성의 뜻을 대신한다'는 둥, '한실 회복'이라는 둥 충의로 포장해야 합니다. 어떨 때는 살인자 소리를 듣고, 어떨 때는 영웅 소리를 듣는 모호한 경계 등.
그 끝은 손책이 조조에게 훈계를 듣는 것으로 정점에 달합니다. 조조도 자신처럼 '중원의 사슴'을 쫓는 인물(逐鹿中原)인데, 조조는 자신과 달리 그런 야심을 '충의'로 화려하게 포장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정작 손책의 아버지는 조조의 훈수대로 그런 '규칙'을 충실히 따랐음에도 억울하게 죽었어요.
손책의 머리로는 '하늘의 뜻'으로 함축되는 이 딜레마를 도통 모르겠습니다.
손책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축록중원'하면서도 비열함이 판치는 군웅들의 행태에,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저 '더러운 규칙'들과 선을 그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토끼사냥(강동정벌)을 했던 이래로 '소패왕'이라는 별호에 걸맞게 진실되게 행동했죠.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떻죠? 자신은 야심을 충의로 포장한 '비열한 군웅'인 조조에게 한 소리를 듣고 철학적 가치관이 송두리째 뒤흔들렸습니다. 더욱이 자신처럼 진실만을 추구하다 몰락한 원술을 보고 그 철학적 회의감은 커집니다.
그렇기에 손책의 회의감은 한 줄기 의문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런 진실만을 추구하는 행태가 '축록중원'이라는 사냥터에서 철저히 배제되고, 하늘이 저 사냥터를 지배하는 '더러운 규칙'에 눈길도 주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공의(公義)에도 무심함을 견지한다면...그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어쩌면 하늘은, '명예'과 '이익'이 전부일 뿐인 허위로 가득찬 세상이 올바른지 묻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명리(名利)만을 추구한다면, 인생에 무슨 의의가 있는가?"
> '축록중원'하는 군웅들의 1차적 목표입니다. 천하에 이름을 떨쳐 명예를 얻고, 천하의 부를 얻는 것. 하지만 손책은 이 '내용'자체를 문제삼고 있습니다. 설령 그런 부와 권력을 얻었다 한들, 그것이 이 세상의 비열한 규칙을 따른 결과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겁니다. 허위로 가득찬 텅 빈 껍데기뿐인데, 그런 인생의 의미가 있을까요?
"번성이나 영리(榮利)만을 추구한다면, 생존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 번성과 영리는 '세력을 키우고 영화를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질문은 앞선 의문을 한층 심화시킵니다. 군웅들이 이렇게 치열하게 사슴을 쫓는 이유가, 고작 살아남아서 세력을 키우고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냐는 겁니다. 치열하게 경쟁하며 생존에 급급한 이유가 고작 세력확장에 있다면, 이런 인생이 짐승의 인생이랑 다를 게 무엇입니까?
하지만 '하늘에 또다른 저의(底意)가 있는게 아닐까'라는 건, 그저 손책의 막연한 추측에 불과합니다. 더군다나, '하늘이 품고있는 또 다른 속셈'이란 물음을 제기한 본인부터가 제대로 된 답을 내놓을 처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질문자인 자신은 '토끼(강동)'서부터 '사슴(축록중원)'에 이르기까지 피아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을 죽였고, 그 시체들 위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회의에 빠진 손책. 그런 모습을 지켜본 능조는 당차게 말합니다. 당신이 그런 고뇌를 가진 것이야 말로 인생에 대해 진실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대부분의 영웅들은 '명리(명예와 이익)'을 얻는 것에 대해 손책처럼 괴로워하거나 고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영웅이 되기 위한 당연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서 벌어지는 일련의 비열한 행위들이나, 살육에 대해서 깊이 성찰조차 하지 않아요.
반면 손책은 지금처럼 '명리' 이면에 놓인 허무함과 '살인'이란 행위의 무게를 느낍니다. 이 고뇌야말로, '축록중원'하는 다른 이들이 놓치거나, 일부러 지나치고 있는 '인생의 어둠'을 꿰뚫어보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 합니다.
그렇기에 손책은 인생의 명과 암을 진실로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능조가 말하는 바입니다.
그 뒤에 능조는 다른 군웅(郡雄)들이 '허무한 생존'을 급급했다며 손책과 구별점을 둡니다. 여기서 '허무함'의 함의란 1)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에 열을 올렸다는 것이자 2) 이런 생존 과정서 작은 부산물인 '명리'에 목적을 두고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켰음을 드러냅니다.
반면 손책은 '작금의 규칙' 너머의 의미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에 더하여, 손책의 생명은 그 혼자만의 가치가 아닙니다. 그를 위해 희생된 사람들과, 그를 위해 자진하여 희생할 사람들, 그리고 그에게 기대를 거는 백성들(능조같은 이들)의 염원을 짋어진 사람입니다. 능조의 말따마나, 그는 사냥을 통해, '작금의 규칙'을 넘어서는 '손책만의 길'을 세우는 과정에서 ('주재(主宰)'란 단어의 함의처럼) 그 목숨들을 자신이 떠안고 가고 있어요.
따라서 이 '살인'이란 행위는 그가 혼란한 시대를 끝내고 '번연'이라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임을 역설합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 온 천하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기대를 걸었고, 그 과정서 무수한 희생(살인)이 일어난다는 것이죠. '살인'은 역설적으로 손책의 생명을 절대적으로 가치있게 만드는 데 기능합니다.
따라서 희생된 수많은 생명의 가치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또한 그가 짋어지고 있는 가문과 나아가 강동의 염원을 짊어지고 있는 점에서라도 그의 생명은 누구보다 가치있는 겁니다.
즉, 능조는 손책이 저지른 수많은 '살인'이란 행위를 리더로서 타인의 희생 위에 서있는 숙명과 책임으로 재정의 합니다. 살인을 일삼는 소패왕이 아니라, 수많은 생명을 주재하는 군주의 운명으로 관점을 바꾼 것이죠.
뒤이은 능조의 대사 '번연'은 이를 대변합니다. 그의 생명은 다른 생명을 주재하는 것이자, 시대를 바꿀 가능성을 지녔음을 시사합니다.
능조는 이 번연의 핵심을 두 가지 세계관으로 설명합니다.
번연의 첫번째 세계는 자연 세계입니다. 물리적인 현실에서, 호랑이는 짐승을 잡아먹으며 후회나 죄책감을 가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본성에 따라 짐승을 사냥하며, 여기엔 생존과 본능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이는 첫째, 손책이 '살인'으로 느끼는 죄책감과 도덕적 고뇌가 '호랑이'같은 생물이 사는 자연 세계에서는 불필요한 감상임을 역설합니다. 둘째로, 조조가 말한 '충의'란 잘 꾸며진 겉치장일뿐, 그 포장지를 걷어내면 실상은 생존과 패권을 건 비정한 '축록중원'의 사냥터임을 명시하고 있는 겁니다. 셋째로, 호랑이가 허기 채움에 고뇌나 후회를 품지 않듯, 손책에게 지금같은 비상한 시기에는 그에 걸맞는 결단력을 촉구하는 것이기도 하죠. 이런 약육강식의 냉정한 현실 속에 그에 걸맞는 마음가짐을 새로 해야 함을 지적하는 것이죠.
그럼 일부는 이렇게 반박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번연의 개념을 짐승의 잣대로 재단하려 드는가? 인간에게는 하늘이 부여한 도덕과 양심이 있지 않은가?
능조는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초월적 세계에서 번연의 논지를 심화시킵니다. 번연의 두 번째 세계는 하늘의 법칙이 적용되는 초월세계입니다. 인간계 너머의 하늘(天)은 그럼 어떨까요? 능조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늘이 '충의에 대한 보상'에 따라 움직였다면, 선한 자가 천수를 누렸어야 합니다.
조조가 운운하는 '충(忠)'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이 진정 충신을 보우했다면, 애초에 손견은 죽지 않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죠? 손견은 비참하게 죽었고, 선한 자는 제대로 된 천수를 누리지 못합니다. 하늘조차 인간의 선악에 무심하거나, 인간의 도덕 기준대로 움직이지 않음을 증명하죠.
이 땅(자연)의 법칙이 손책이 고뇌하는 도덕과 다르고(물리적 세계의 도덕률 부정)
인간계 너머의 하늘의 법칙조차, 손책이 고뇌하는 의문에 힘을 보태주거나 해답을 내려주지 않습니다(초월적 세계의 도덕률 부정)
능조는 손책이 기댈 수 있는 모든 도덕적 근거를 제거해 버립니다. 조조의 말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소리에 불과한지 지적하며, 그런 말장난에 어울리지 말 것을 부탁하는 것이죠.
여기서 잠깐, 그렇다고 (호랑이같은 위세를 지닌) 손책의 '번연'과 짐승 호랑이의 '번연'이 같다고 봐서는 안됩니다. 단순히 '번연'을 [후손을 남기는 것]으로만 본다면 둘을 같다고 볼 여지가 있습니다.
호랑이같은 '소패왕'은 근본적인 점에서 짐승 호랑이와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목적'에 있습니다.
호랑이가 '번연'하는 것은 생존 본능에서 비롯됩니다.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사냥하는 건 본능에 의존할 뿐입니다. 기존의 '자연질서'안에 살아갈 뿐 어떤 철학적 사유나 회의 따윈 없습니다.
또한 호랑이의 '번연'은 사적인 번영에 불과합니다. 짐승의 번연은 철저히 사적(私的)입니다. 자신과 그 가족이 번성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이 '번연'이 성성하게 일어난다고 하여 숲에 사는 다른 동물에게 이익이 돌아가지도 않습니다. 오직 자신들에게 이익일 뿐입니다.
반면 (호랑이같은) 소패왕은 다릅니다. 손책은 호랑이에게는 없는 주재(主宰)라는 개념- 시스템을 관리하는 통치자의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패왕의 번연을 위해 자행된 '살인'은 생존 본능이 아니라 그의 '내면의 하늘',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명확한 '의지'와 비전 아래에서 실행된 것입니다. 손책의 '번연'이 단순히 손(孫)가문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의 번연으로 강동에는 새로운 생명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평화를 누립니다. 그는 수많은 희생 위에 서서 그들의 운명을 책임져야 할 주재자(主宰者), 다시 말해 공적인 존재가 된 겁니다. 그렇기에 그는 호랑이와 다릅니다.
결론적으로, 능조는 손책이 지금 추구하는 길이 올바른 길임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손책이 현재 얽매이고 있는 우울감과 회의감은 이 시대가 답을 내려줄 수 없다는 것이죠. '축록중원'이라는 더럽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도덕적 해답을 내놓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니까요.
능조는 손책이 그토록 구하던 답, 천명(天命)을 당신 자신, 당신의 의지와 능력 속에서 찾으라고 합니다. 그것은 '번연'으로 요약되며, 손책의 의지와 결단이 곧 하늘의 뜻으로 귀결됩니다. 당신이 품은 의문에 대한 답은 결국, 당신 당신 안의 하늘(번연)을 밀고나가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힌 뒤에서야 해결될 수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수많은 생명을 품에 안고(主宰) '번연'을 좇는 당신이야말로 새로운 세계를 주재(主宰)하기에 걸맞다는 겁니다.
능조의 논치를 통해, 손책의 '축록중원'은 다른 이들의 사냥과 구별됩니다. 손책이 '사슴을 쫓는'이유는, 단순히 사슴(권력)을 차지하기 위함이 아는, 모든 것을 이룬 뒤에 도래할 새로운 가치관인 '번연'을 이루기 위한 사명이 되는 것이죠. 능조는 여기에 한 발 더 나아가 그렇게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 만인의 생명을 책임지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손책을 짓누르던 죄책감과 철학적 혼란은 연기처럼 사라집니다. 능조의 말에 손책은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하면 된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손책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완전한 통제력을 얻었습니다. 심지어 외부의 하늘조차 자신의 파트너로 삼을 수 있다고 확신하기까지 합니다.
이제 주저함은 끝났습니다. 내면의 의지(天)를 확인한 그는 (초월적 심판자, 외부 세계의) 하늘(天)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만의 하늘(天)을 품은 손책은, 하늘을 초대하며 자신의 의지이자 동반자로 선언합니다. 정(靜)이 끝나고, 동(動)으로 전환됩니다. 이제 그는 활대를 고쳐매고 자신만의 사냥, 축록중원에 나섭니다.
그리고 그 순간, 우길의 잔당- 태평도 암살자들이 암습을 가합니다.
이 이야기의 비극성을 정점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암살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성공 요인에 바로 능조가 있었다는 겁니다.
분명 능조가 손책에게 뭐라 하기 전까지만 해도, 손책은 주저하며 한치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손책을 정(靜)에서 동(動)으로 끌어낸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능조였습니다. 능조의 연설이 자신의 주군을 죽음의 올가미로 밀어넣었습니다.
능조가 돌멩이를 던져 사슴을 몰아내지 않았더라면, 손책은 말을 타고 내달릴 일도 없었을 테고, 암살자들에게 무방비한 모습을 노출할 일도 없었을겁니다.
분명 능조는 순수하고 충성스러운 의도였을 겁니다. 멈춰버린 주군을 각성시켜, '번연'이라는 그 길을 계속 걸어가게 만들려는 의도였겠지요. 그의 말 하나하나는 손책에게 '내면의 하늘'을 확인시키는 구원의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능조의 숭고한 행위가 손책을 파멸로 내몰고 만겁니다.
뒤집어 말하자면, 소패왕이 각성이 없었다면 죽을 일도 없었을 거란 이야기가 됩니다. 소패왕이 소시민으로 남았다면, 우울감에 잠겨 머뭇거렸다면 목숨만은 구했을 거란 아이러니의 극치. 영웅의 각성 따위, 하늘은 아무 관심도 없다는 작가의 냉소.
그리고 그 비극의 끝은, 사슴이란 '사냥감'을 쫓던 손책이 바로 그 사냥감의 처지로 전락했다는 부분입니다.
바로 직전, 손책은 '하늘은 내 곁에 있다'란 깨달음을 품으며 말발굽을 박차던 순간은, 태평도 암살자들에게 목숨을 내줄 가장 절호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손책은 본인이 사슴을 쫓는 사냥꾼의 편이라 생각했지만, 실상 오래전부터 이미 사냥감의 신세였던 것이죠. 그가 가장 화려하게 비상하는 순간은, 뒤이을 비참한 추락의 예고에 불과했습니다.
운명의 동반자라고 생각했던 하늘은 손책에게 일절 관심도 없었던 것이죠.
한 발 더 나아가, 능조의 '손책(의 내면)=하늘' 연설을 다른 관점에서 조명할 수도 있습니다.
원래라면 손책을 '사냥'하려던 태평도 인원들은 지극히 사적인 동기로 움직였습니다. 허공(許貢)이 피살당한 것에 대한 전면적인 보복행위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능조가 끼어들더니, '손책=하늘'이라는 공식을 선포하네요. 사적 보복행위의 대상이었던 손책을, 하늘로 뒤바꾼 능조의 행위는 태평도 암살자들의 관계를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암살자들은 단순히 복수라는 개인적 선호를 성취한 것이 아닌, '하늘은 죽었다(창천이사蒼天已死)'란 태평도의 인지적/도덕적 기초에 따른 결과로 재정의되었습니다. 능조의 말대로라면, 태평도 암살자들은 '하늘'을 죽인 사회적 정당성을 성취한 것입니다. 능조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태평도 암살자들에게도 자기실현의 장을 제공한 셈입니다.
결론적으로 능조는, 손책에게 위대한 영웅으로의 각성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암살자들에게 '하늘은 죽었다'란 태평도 구호를 실천한 정당성/가치성을 부여했습니다.
능조가 던진 돌멩이가, 사슴의 주의를 끌어 사냥당할 처지에서 목숨을 살렸습니다.
능조가 던진 돌멩이가, 손책에게 위대한 깨달음을 선사했지요
능조가 던진 돌멩이가, 태평도에게 암살을 성공시켰습니다.
이 어마어마한 여파는, 능조가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돌멩이'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이 알레고리는 거시적으로 확장됩니다. 아무생각 없이 던진 돌멩이가 모든 것을 뒤바꾸듯, 하늘 역시 마찬가지라는 결론이 나오죠. 모든 것을 평등하게 내다보는 하늘 역시 아무 생각없이 능조라는 '돌멩이'를 던져 세사(世事)를 결정지은 것입니다.
손책이 품었던 희망과 깨달음, 확신 등이 '사냥감'이라는 가장 허무한 방식으로 치환되고, 자신이 쏘려는 화살에 역으로 꿰뚫리고 만다는 잔혹한 아니러니함.
능조의 숭고함이 역으로 손책을 죽음으로 몰고갔을 뿐 아니라, 태평도 암살자들도 치장했다는 아이러니한 패러디.
손책은 그 모든 것을 '하늘은 죽었다'라는 한 마디로 대신합니다.
이는 첫째, 손책이 품었던 희망과 깨달음, 손책 내면에서 타오르던 '하늘'이 바로 그 자리에서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둘째, 외부의 하늘(天)은 인간의 선악이나 의지와는 무관하게 돌아가는 시스템임을 상징합니다. 손책은 자신의 위대한 의지가, 우주의 흐름과 호응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하늘이여, 나와 함께 중원의 사슴을 쫓자꾸나.") 그러나 그 믿음은 착각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외부의 하늘(天)은 그의 위대함이나 깨달음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는 손책에 대한 가장 잔혹한 반박입니다.
어쩌면 하늘이 손책의 위대한 의지에 조응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허나 그렇다 한들, 그 조응이 태평도에게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지요. 하늘이 손책의 부름에 응답하여 그와 같이 사냥을 나섰다면, 하늘은 태평도의 부름에도 응답해 '창천이사'를 실현하도록 도와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니 하늘의 무정함을 확인한 순간, 하늘이 손책에게 조응했는지 여부는 더이상 중요치 않아진 겁니다.
(거대한 초월적 법칙세계로서의) 하늘은 인간의 선악이나 위대함에 전혀 관심없습니다. 하늘은 손책이 위대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그를 봐주는 일 따윈 없습니다. 하늘은 손책이 수많은 생명을 주재할 자라고 하여 특별히 태양을 더 쬐어주거나 편의를 봐주지 않습니다. 햇볕은 성인이나 악인에게 똑같이 내리쬐듯, 운명의 화살역시 그 사냥감의 가치를 따지지 않습니다.
여기서 '하늘의 죽었다'란 세번째 해석이 나옵니다. 손책이 이전부터 주장했던 '하늘이 손가(孫家)를 보우한다'란 생각이 거짓에 불과했음을 깨닫는 겁니다. 하늘은 애초부터 손책(그리고 손씨 가문)을 보우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늘은 비정하고, 공평하며, 무심합니다. 하늘은 사슴과 손책, 그리고 태평도를 동일한 가치로 매기고 있습니다.
하늘의 시선에서는
외부에서 결정된 운명(능조가 던진 돌멩이)에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는 사슴떼나
내면의 답을 확신하고 막 말발굽을 박차던 손책이나 동등하게 보이는 겁니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손책의 억울하게 죽었다 말한다면, 하늘은 바꿔말하자면 피조물의 구사일생이요, 또 바꿔말하자면 태평도의 정의실현이라 무심히 답할 겁니다.
손책은 하늘이 모든 것을 평등하게 내려다 보고 있음을, 죽는 순간이 되서야 겨우 깨닫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위대하다고 믿었던 '내 안의 하늘(번연)'조차, 무심한 '외부의 하늘' 법칙 아래서는 사슴과 같은 부서지기 쉬운 존재에 불과했다는 것을요.
그렇기에 손책은 말합니다.
화려하되 음울하고, 오르내림도 무상(無常)한 것이라고
제아무리 숭고한 목적을 가진 행위라도, 그것이 어떤 끔찍한 결과를 낳을지 아무도 모르는 예측 불가능함.
인간의 의지가 제아무리 위대할 지라도, 사소한 우연 하나에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냉혹함.
영웅의 위대한 각성이 가장 허무한 방식으로 좌절되는 비극.
이 세계는 우리의 의도를 평가하여 결과를 보상해주는 도덕적인 공간이 아니라는 끔찍한 사실.
인간의 초월적 의지가 한낱 사냥감처럼 무시당하고마는 거대하고 초월적인 세계의 법칙.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본 화자(話者)는 손책의 회한어린 '무상(無常)'에 다음과 같은 글을 씁니다.
혹은...천행이란 유상하기에,
요순을 위해 존재하지 아니하고, 걸주에 의해 사라지지 아니하는가?
손책 개인적 시점으로는, 이 세상이 무상하다고 느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한다[無常]고 느꼈던 것이죠.
여기서 화자는 개인의 감정에서 벗어나, 더 거대하고 냉정한 우주적 원리로 나아갑니다.
하늘의 법칙이 항상 일정함을 유지하기에[有常] 만물을 낳고 죽게 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개별 존재의 삶은 덧없고 무상(無常)합니다.
또한 하늘이 항상 일정하게[有常] 선악이나 개개의 의지에 무심하기에 때문에야말로, 영웅의 삶도 허무하게 끝날 수 있는 무상(無常)한 비극이 일어난다는 것.
손책의 대사와 화자의 말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화자는 손책의 죽음을 지켜보며, 어쩌면 하늘이 저렇게 무심한 원인이 '하늘의 일정한 법칙(유상)'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던지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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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을 좀 다듬고 생각을 좀 추가했습니다. 뭔가 미진한 부분이 많은 것 같아서 내용 보충을 많이 했네요.
미리 읽으신 분들의 편의를 위하여, 수정한 부분은 취소선을 가하고 그 밑에 새로 내용을 달았습니다. 보기에 좀 지저분할 지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한 1주일 뒤에 취소선 내용 부분은 삭제토록하겠습니다.
볼품없는 제 글을 언제나 꼼꼼히 읽어주시고. 재밌게 봐주시는 분들께서 제게 감사인사를 남겨주셨습니다.
제 글 덕분에 만화 감상에 있어 더욱 재밌었다고, 더 많은 풍미를 느낄 수 있었다고요.
정말 그런 과분한 칭찬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글쓰는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지극한 칭찬을 듣지 못할 겁니다. 제가 여러분께 도움이 되었다면 오히려 저야말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긴 한가위 잘 쇠시고, 언제나 행복한 일들만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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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전부터 정말 어떻게든 써보고 싶었던 글이었는데 쓰다말다쓰다말다 고민만 엄청하다가 결국 어떻게든 써냈네요...후련하네요 하하....글 못썼는데 봐주시는 모든 분들 감사드린다는 말씀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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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의 미진한 글이 화봉요원 만화 감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다니 정말 기분 좋네요. 글을 재밌게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오늘 하루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IP보기클릭)121.184.***.***
댓글을 너무 성의없이 쓴 것 같아서 조금 더 남겨봅니다. 제가 쓰는 글은 퇴고도 대충 하고, 내용도 일관적이지 못해서 이해하기에 매우 불친절한 글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쓴 글이 댓글쓴이님께서 화봉요원을 더욱 깊게 감상하는데 힘을 보탰다니 정말 뿌듯하기 그지없습니다. 제 글이 댓글쓴이님께서 만화를 즐기는데 조미료 역할을 했다면, 제가 글을 쓴 이유를 100% 만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멋진 표현으로 제 글에 대한 칭찬을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항상 행복하시고, 추석 한가위 잘 쇠시길 바랍니다!
(IP보기클릭)175.208.***.***
덕분에 화봉요원을 접하고 있습니다. 깊이 있는 해석까지 덧붙여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IP보기클릭)211.235.***.***
잘 보고 있습니다. 해설을 봄으로 인해 화봉요원을 계속해서 읽어나가는 원동력이 되네요. 각고의 노력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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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비타민제
잘 보고 있습니다. 해설을 봄으로 인해 화봉요원을 계속해서 읽어나가는 원동력이 되네요. 각고의 노력에 감사드립니다. | 25.10.01 09:59 | | |
(IP보기클릭)175.208.***.***
신경비타민제
덕분에 화봉요원을 접하고 있습니다. 깊이 있는 해석까지 덧붙여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 25.10.01 21:30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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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기설기 엉망진창으로 쓴 글인데 좋게 봐주셨다니...못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25.10.02 15:13 | | |
(IP보기클릭)121.184.***.***
소중한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의 미진한 글이 화봉요원 만화 감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다니 정말 기분 좋네요. 글을 재밌게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오늘 하루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 25.10.02 15:14 | | |
(IP보기클릭)121.184.***.***
댓글을 너무 성의없이 쓴 것 같아서 조금 더 남겨봅니다. 제가 쓰는 글은 퇴고도 대충 하고, 내용도 일관적이지 못해서 이해하기에 매우 불친절한 글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쓴 글이 댓글쓴이님께서 화봉요원을 더욱 깊게 감상하는데 힘을 보탰다니 정말 뿌듯하기 그지없습니다. 제 글이 댓글쓴이님께서 만화를 즐기는데 조미료 역할을 했다면, 제가 글을 쓴 이유를 100% 만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멋진 표현으로 제 글에 대한 칭찬을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항상 행복하시고, 추석 한가위 잘 쇠시길 바랍니다! | 25.10.02 20:09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