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느 귀족에게는 아주 충실한, 그리고 유능한 하인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호위로서 일했으나, 귀족이 시키기만 하면 무슨 일이든 행하는 자였다.
다루는 마을의 혼란도 제압하며, 사냥도 뛰어났고, 전쟁에서의 계략도 뛰어났다.
문무겸비. 그 말이 누구보다 어울리는 자였다.
귀족은 그를 어떻게든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하고 싶었다.
이미 귀족을 따르고 있었지만, 뚜렷한 계약서의 형태로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었기에 불안했다.
2.
귀족의 아내 또한 그 하인을 마음에 들어했다.
아, 볼륜이라던가 그런 것은 아니다.
하인은 언제나 철저히 거리를 유지했고, 어디까지나 주는 명을 따르되, 가까워지려는 것만은 피했다.
그건 딱히 귀족의 아내만이 아니라, 귀족에게도 그랬다. 어떠한 외도가 아니라 정도적인 방법으로도 그랬다.
귀족이 그의 비위를 맞춰보고자 해도, 그는 언제나 괜찮다며 정중하게 사양했다.
그의 마음은 늘 묘하게 한 발짝 떨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강제적으로 그를 따르게 할 수도 없었다.
그는 귀족의 다른 병사들을 피해 도망칠 수 있을 정도로 유능했으며,
만약 어떻게든 포위한다 해도 그냥 죽일 뿐일 터였다.
그만큼 그는 강했고, 그리하여 귀족은 회유책을 몇 번이고 떠올려 조심스레 접근 했으나, 그는 그 일말의 가능성마저 모두 차단했다.
3.
그의 유능함을 보여주는 일화다.
어느 날 귀족의 병사들이 그를 시기하여 욕설을 하고, 기어코 그를 직접 공격하기 위해 여럿이 모여 달려든 적이 있었다.
그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전혀 공격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반격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피하는 것만으로 귀족의 병사들은 서로 얽히고 부딪혔고, 그대로 자멸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엉망이 된 병사들에게 간단한 응급처치를 했다.
자신들의 부상마저 이용한 그들의 기습까지도 간단하게 회피하고서는.
병사들은 수치심과 분노를 느꼈지만, 그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이었다.
늘 그렇듯이 얼굴에 걸린 친절하고 조그마한 미소와, 평온한 눈빛이었다.
그는 언제나 그런 얼굴이었다.
그런 그였기에, 귀족은 언제나 그를 신뢰했고, 또 불안했다.
4.
하여 귀족은 더는 참지 못했다. 그를 어떻게든 손에 넣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를 개인적으로 둘이서 마주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직설적으로 물었다.
내 충실한 부하가 되어주지 않겠나.
귀족은 서두를 떼었다.
저는 이미 그러합니다.
그는 간결히 답했다.
나와 자네는 그 어떤 계약으로도 묶여있지 않다.
귀족은 이어 말했다.
사실이지요. 하지만 문제가 될까요?
그는 긍정했다.
내가 자네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귀족은 먼저 불안을 의심이라는 단어로 표출했다.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는 귀족과의 신분적 격차나 자신에게 행할 위협이 전혀 두렵지 않은 듯 했다.
나는 자네를 믿고 싶다네.
귀족은 결국 굽히고 들어가기로 했다.
그렇다면 믿으시면 됩니다.
그는 선문답을 하는 것만 같았다.
계약서를 가져왔네. 이거라면 나도 안심할 수 있지.
귀족은 계약의 형태로 묶고자 했다.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지금 귀족과 그 사이에는 그런 게 없었다.
당신께서는 그 계약서를 작성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는 계약을 꺼리는 듯이 말하며, 그럼에도 귀족의 의중을 구하는 듯 했다.
물론이네. 나의 부탁이네. 들어줄 수 있겠나?
귀족은 탐욕이라는 본질을 예의라는 겉옷 아래 숨기며 정중하게 부탁했다.
당신께서 바라신다면.
그는 계약서를 받아들였다. 평범한 계약서였다.
급여도 상당했으며, 귀족의 평생 동안 하인이 되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는 서명했다.
마침내 귀족은 기뻐하고 안심했다.
그는 여전히 차분한 표정이었다.
5.
그는 귀족을 위하여 일했다.
그러나 귀족은 시름시름 앓아가기만 했다.
그는 언제나 귀족의 수발을 들며, 그의 뜻을 행했다.
귀족은 자신이 이제 패배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귀족의 오판으로 귀족의 가문은 점점 무너져갔다.
그럼에도 그만 있으면 충분하리라고 귀족은 생각했다.
마침내 귀족이 숨을 거두기 직전, 귀족은 말했다.
자신의 아들에게도 헌신해줄 수 없겠냐고.
그는 말했다.
그런 건 계약에 없노라고.
귀족은 말했다.
그럼 새 계약서를 써달라고.
그는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다고.
이것으로 모든 계약은 완료되었노라고.
귀족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공포를 느낄 새도 없이, 귀족은 숨을 거두었다.
그는 비릿하게 웃었다.
지금 죽은 귀족에게는 처음 보여주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전, 이 귀족의 아버지에게는 보였던 웃음이었다.
악마를 믿다니 어리석기는.
그는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리고 이 세계는 자유를 잃을 것이었다.
0.
어느 귀족은 악마를 불러내었다.
절대적인 계약. 그러나 교묘한 상술.
그 귀족은 모든 계약을 논파할 지혜가 있었다.
악마는 처음에는 비릿하게 웃으며 교묘한 계책들을 사용했지만, 귀족은 무수한 조항들로 악마의 계약 조건들을 하나 하나 파탄시켰다.
귀족은 지혜로웠다. 처음에 악마의 서명을 유도한 뒤 자신은 서명하지 않았다.
그저 문득 떠올랐다는 듯, 악마의 교묘한 조항을 하나 하나 지적했다.
그 귀족은 악마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았고, 악마의 계약 방식도 너무나 잘 알았다.
하나 하나, 조항들이 파훼되고 그것들이 귀족이 제안한 것으로 뒤바뀔 때마다 악마의 얼굴은 점점 굳어져갔다.
귀족은 악마를 완벽히 통제했다.
악마는 계약서를 없애버리고 싶었지만, 악마의 계약은 악마와 계약자 간의 영혼에 새겨지는 것이었다.
그 모든 것을 간파한 귀족은, 기어이 자신의 이름을 서명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오직 악마의 족쇄가 되었다.
계약으로만 현현할 수 있던 악마는, 계약이라는 이름의 족쇄에 갇혔다.
그 계약은 오직 악마를 기준으로 했기에, 악마의 계약에는 중재자만 필요하다는 것마저 귀족은 통찰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악마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귀족에게 굴복했다.
그러나 귀족이 알지 못한 것이 있었다.
지혜로웠기에 알지 못한 것이.
귀족이 처음이었다. 악마를 농락한 것은.
하여 악마에 대해 알지 못했다.
악마 자신에게만 새겨지는 계약은 영구적이라는 것.
그러나 계약의 조항은 계약을 중재한 중재자에 의해 바뀔 수 있다는 것.
중재자에 대한 기준은 그 중재자의 실질적 계승자 또한 자격을 갖춘다는 것.
하여 악마는 기다렸다.
계승자가 계약을 원할 때까지.
그가 계약 조항을 적는 것으로, 자신에게 새겨진 계약이 모두 덧씌워지기를.
그리하여 악마는 자유를 얻었다.
자신의 영혼에 계약이 있기에 얼마고 현세에서 존재하고 마음껏 즐기면서도,
계승자로 덮어씌운 계약의 조항은 귀족의 죽음 이후 지킬 내용이 사라졌다.
악마를 규제하는 규율은 이제 없었으니,
악마는 즐겁고도 유쾌하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그렇게,
한 명의 오만과 한 명의 어리석음으로 세상은 조용히 유린당했다.
본문
[자작기타] 글) 계약의 끝 [1]

2025.07.22 (05:4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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