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용사 헤르만의 수난과 버튼 하나의 중요성에 대하여
용사 헤르만은 유능했고, 성녀 이졸데는 신실했다. 그리고 둘은 서로를 죽도록 싫어했다.
문제는 신(神)께서 둘을 '1+1 세트 상품'으로 묶어 마왕 퇴치 프로젝트에 파견했다는 점이다.
'일단 가서 다 때려 부수자'는 실용주의 노선의 헤르만과, '규정과 절차에 따른 신성한 과업 수행'을 외치는 원칙주의 노선의 이졸데는 사사건건 부딪혔다.
그리고 그들의 상극인 성격이 최악의 형태로 폭발한 곳이 바로, 화룡 익나시우스의 둥지였다.
화룡의 브레스가 동굴 천장을 핥았다. 종유석이 녹아 엿가락처럼 흘러내렸고, 공기는 폐를 태울 듯이 뜨거웠다.
하지만 용사 헤르만은 웃고 있었다. 그의 검 '선슬레이어(Sunslayer)'가 뿜어내는 오라가 용의 불길을 뱀처럼 갈라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하하! 이졸데! 봤나! 저 멍청한 도마뱀을 구석으로 몰았다!"
"도마뱀이 아니라 '화룡'이라고 정정해달라고 했을 텐데요!"
성녀 이졸데가 후방의 엄폐물 뒤에서 빽 소리쳤지만, 헤르만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완벽한 피날레를 위해 검을 고쳐 잡았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태양신 헬리오스께서 하사하신 궁극의 권능으로 이 지긋지긋한 파충류의 비늘을 통조림 깡통처럼 따버릴 시간이었다.
"자, 보아라! 하늘의 영광이 네놈의 그림자를 불태우리니! [태양신의 철퇴]!"
헤르만은 온 힘을 다해 외쳤다. 그의 검 끝에 태양과도 같은 광휘가 응축되어야 했다. 동굴 전체를 대낮처럼 밝히는 신성한 폭발이 일어나야 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헤르만의 검 끝에서 "피융-" 하는, 바람 빠진 풍선 같은 소리만 났다. 검날에 맺혔던 한 줄기 빛마저 스르르 사라졌다.
정적이 흘렀다. 헤르만은 물론이고, 필살기를 맞을 준비를 하던 화룡 익나시우스조차 '네?'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헤르만이 기계처럼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 끝, 바위 뒤에 쭈그려 앉은 이졸데가 있었다. 그녀는 애써 그의 눈을 피하며 손에 든 '신성 회계 장부'의 페이지를 미친 듯이 넘기고 있었다.
"이졸데." 헤르만이 불렀다. 목소리가 너무 차분해서 오히려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아... 아... 그게..."
이졸데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저... 2분기 신성력 동기화 감사 보고서 말인데요..."
"보고서가 뭐."
"보고서... 제출을..."
"제출을 뭐."
"제가... '전송' 버튼을 누른다는 걸 깜빡했어요."
"......"
동기화 감사 보고란, 신의 권능을 행하는 자가 그에 걸맞는 자격을 갖추었는지 검증하고 그것을 신에게 보고하는 절차다.
모든 신을 섬기는 자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 분기별로 한 번씩.
(물론 섬기는 신의 성향에 따라 반기에 1회인 경우도 있다.)
동기화 감사 보고를 통과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느냐.
이름만 용사일 뿐, 실제 주어지는 권능은 기껏해야 일반 교구장 정도에 그치게 된다.
헤르만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이졸데를 가리켰다.
"내가! 내가 그 빌어먹을 보고서 때문에! 감사관 앞에서 '진정성 있는 자세'를 보여주겠다고 검술 자세 교정받고! 기도문 톤까지 연습한 거 몰라?! 헬리오스 님이 직접 '자네의 무브는 제법 쓸 만하지만, 골반의 각도가 2도 정도 아쉽군' 하고 지적까지 하시면서 완성한 필살기인데! 그걸! 버튼 하나를 안 눌러서 날려 먹어?!"
"아니, 그래도 임시 저장은 해놨거든요?!"
그 순간, 상황 파악을 끝낸 화룡이 다시 한번 거대한 화염을 머금었다. 이제는 정말 끝장이었다.
"이럴 수가!"
다급해진 이졸데가 외쳤다. 그녀는 품 속에서 두루마리 양피지 하나를 다급하게 꺼내 들었다. [긴급 지원 요청서 (양식 3-C호)]였다. 그녀는 엄지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로 미친 듯이 무언가를 휘갈겨 썼다.
[사유: 담당자의 행정 착오로 인한 파견 용사의 순직 위기.]
"에잇, 받아라!"
이졸데는 필사의 힘으로 양피지를 화룡의 입을 향해 던졌다. 화룡은 막 불을 뿜으려다 말고, 웬 종이 쪼가리가 날아오자 반사적으로 꿀꺽 삼켜버렸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화룡의 몸이 갑자기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비늘 틈새로 맹렬한 불꽃 대신 성스러운 황금빛이 새어 나왔다. 화룡은 당황하여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꾸르르륵... 끄어어어억-
이윽고 화룡의 입에서 세상에서 가장 장엄하고 성스러운 트림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태양신의 철퇴'가 화룡의 '내부에서' 발동되었다.
신의 권능을 소화불량(민간요법에 의한 표현을 빌자면 급체라고 변환할 수 있는)으로 체험한 화룡은 눈이 빙글빙글 돌아 그대로 바닥에 대자로 뻗어버렸다.
동굴에는 다시 정적이 흘렀다. 잿더미가 된 긴급 지원 요청서 조각만이 나풀거렸다.
한참 동안 기절한 용을 내려다보던 헤르만이 나직하게 말했다.
"이졸데."
"네, 네에..."
"다음 분기 보고서는... 그냥 내가 제출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