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1년, 후금-명 전쟁 최전선: 대릉하 지역
후금 2대 한 홍 타이지
"그래서 적 병력은?"
"대릉하의 명군 병력은 대충 2만 1천에서 2천 정도입니다. 전투병력 1만 4천, 비전투전력이 7~8천이군요. 우리는 대략 3만 5천에서 4만 가량입니다."
"2배 정도로군. 아마 한(누르하치) 께서는 방어병력보다도 적은 군대로 성을 함락하시기도 했던 전적이 있으나
힘 대 힘으로 상대를 찍어 누르는 것에 익숙하시었기에 영원성의 패전을 당하셨다. 나 역시도 금주에서 같은 실수를 했었고.
이번에는 안전하게 가도록 하지. 참호를 파고 장기전으로 간다. 그리고..."
"...드디어 그걸 쓰는 날이 오는 군요."
1631년 대릉하 공방전 - 후금은 최초로 대규모 포병부대를 전쟁에 동원하여 명군의 전장 화력 우세를 상대로 대등 이상의 상황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가둬놓고 패니까 편하긴 한데 명군은 분명 지원군을 보낼 텐데요."
"오는대로 다 박살내면 되오. 우리의 야전 능력은 최강이니까."
그리고 실제로도 대릉하에 지원 온 명군은 오는 족족 궤멸되었고, 대릉하는 10월 말 항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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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 부분은 와전된 부분이 강한데, 모문룡 사후 모문룡의 부하였던 이들이 후금에 항복한 건 맞지만 일단 명에 대한 복무는 계속하다가 1631년 오교에서 요동 출신 장병들에 대한 차별과 병사들 간 분란 문제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그게 실패한 이후 후금에 항복함. 그리고 원숭환의 부하였던 이들 중 대부분은 명 조정에 실망하긴 했지만 마지막 책임감+명의 또 다른 대들보였던 손승종의 설득에 따라 다시 명을 위해 싸웠고. 당장 저 대릉하 공방전 당시 대릉하의 지휘관이 원숭환 밑의 제일 장수였던 조대수였거든. | 25.07.21 01:33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