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기찬 응원 소리가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선생은 빈틈 없이 사람이 들어찬 응원석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체육 대회가 규모가 커졌다길래 얼마나 커졌을까, 싶었는데 상상을 가볍게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으레 이 정도 일을 벌이다 보면 자연스레 참가자는 신경 쓰지 못하는 일이 많이 터지기 마련이다.
아니나 다를까, 운동장 외곽에 설치된 실행위원회의 천막으로 향하니, 그 큰 크기에 비해 텅텅 비어있는 천막이 보였다. 학생 서넛이 지쳐 축 늘어져 있는 꼴이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저게 자기가 참가하는 종목에서 온 힘을 쏟아부은 뒤 쉬고 있는 것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놓인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다급한 목소리를 듣자하니 꼭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어휴, 선생은 한숨을 푹 내쉬며 양 손 무겁게 들고 온 아이스 박스를 내려놓았다. 퉁, 하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누가 온지도 모르고 푹 퍼져 있었던 학생들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서, 선생님!"
"신경 안 써도 되니까 좀 더 쉬고 있어. 아이스크림 사왔으니까 더우면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 먹고."
손을 설레설레 흔들며 아이스 박스의 뚜껑을 열자 학생들이 환호하며 모여 들었다. 하기야 날이 선선하다 한들 햇빛 짱짱한 가을 날씨에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보면 땀도 줄줄 흐르고 힘들기도 하겠지.
철이 지났다고 해도 그럴 때 먹는 차가운 아이스크림은 반갑기 그지 없을 터다.
아이스크림 하나에 활기를 되찾은 운영 위원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잘 사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은 따로 대회에 참가 하시나요?"
적당히 구석에 의자 하나를 끌고 앉자니 저들끼리만 떠드는 게 무안했던지 정의실현부 학생 하나가 쭈뼛쭈뼛 선생에게 물었다. 평소 같은 정장 차림이 아니라 나름 운동복을 걸치고 왔으니 궁금할 법 했다.
하지만 그거야 드레스 코드에 맞췄을 뿐이지, 선생이 직접 어느 종목에 참가할 예정은 아니었다.
그야 키보토스의 초인 여고생들 사이에서 선생은 가장 나약한 존재가 아니던가.
"학생들끼리 처리하기 힘든 일이 있을까 해서 나온 거고, 나름 분위기만 내본 거야. 직접 참가하진 않아."
"아……, 그렇군요."
아쉬운 듯 말 끝을 흐리는 학생을 바라보며 선생은 쓴웃음을 짓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까딱하다 선생과 키보토스의 학생 하나가 부딪혔다간 선생은 아마 저 어딘가에 날아가 처박힐 게 뻔했다. 목숨이나 건지면 다행이지.
다시 한 번 무전기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또 어딘가에서 사고라도 터진 모양이었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천막을 좀 지켜주실 수 있을까요?"
"걱정 말고 갔다 와."
무장을 챙기며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이는 학생들을 향해 선생은 손을 흔들었다. 샬레 사무실에 앉아 있을 바엔 여기에 앉아있는게 훨씬 나았다.
다행히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머리를 묶어 올린 하스미가 가벼이 한숨을 내쉬며 천막으로 돌아왔다. 여기저기 바쁘게 뛰어다녔는지 이마에 맺힌 작은 땀방울이 또록 흘러내렸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에 정리 되지 않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뺨에 달라붙어 있었다. 정의실현부 부장인 츠루기를 대신해서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힘들어 보였다.
"아, 선생님."
"어서 와."
허겁지겁 옷 매무새와 머리를 정리하는 하스미에게 선생은 가볍게 인사했다.
"고생했어.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을래?"
"그으, 음……."
"그리 뛰어 다녔는데 이거 하나 먹는다고 더 안 쪄."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스미는 그리 말하면서도 아이스 박스를 뒤적거리며 아이스크림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마 개중에도 칼로리가 가장 적은 물건을 찾는 듯 했다.
하스미의 키든, 날개든, 어느 쪽 하나만 고려해도 하스미는 절대로 체중이 많이 나가지 않을텐데도 늘 저랬다.
게다가, 음, 저 크다 못해 거대한 가슴도.
지퍼가 닫히지 않는지, 하스미는 저지의 지퍼를 반쯤만 올리고 있었다. 오히려 그게 하스미의 가슴을 더욱 강조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렸지만 그녀는 생각지도 못한 듯 했다. 그리 강조된 하스미의 흉부는 경이로울 수준이었다.
어째 교복을 입고 있었을 때보다 더 커 보이는 것 같기도.
핫, 선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선생이 학생의 신체적 성장을 품평하고 있다니, 몹쓸 짓이었다.
마침내 기준에 맞는 아이스크림을 발견했는지, 하스미는 아이스크림 하나를 입에 물고는 선생의 근처에 자리 잡았다.
"하아아, 이제 좀 살 것 같네요."
"그리 일이 많아?"
"모인 학생 수가 수다 보니, 계속 로테이션을 돌며 순찰하고 있었습니다. 간신히 휴식 시간을 얻어 돌아온 참이에요. 그래도 기껏 얻은 휴식 시간에 선생님과 둘이 있을 수 있다니, 운이 좋네요."
"빈말이라도 고마워."
"빈말은 아닙니다만."
하스미가 입술을 비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립서비스가 다 들통났다고 생각한건지, 제법 귀여운 면이 있었다.
"후우, 날이 좀 덥네요."
얼마간 담소를 나누고 있자니, 그새 아이스크림 하나를 해치운 하스미가 저지를 벗으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선생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안에 입은 얇은 반팔 체육복, 아직 땀이 채 마르지 않은 그 체육복은 하스미의 몸에 고스란히 달라붙어 있었다.
그 뿐이라면 모르겠는데, 이제보니 슬쩍 비쳐보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속옷의 윤곽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까지 했다. 하필 검은색이라 더했다.
운동할 때 입은 속옷이 따로 있다고 들었는데, 아무리 봐도 일반적인 속옷이었다.
여하튼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하스미 혼자 있거나 다른 학생들과 있으면 모를까, 아무리 선생이라 한들 남자와 둘이 있는데 이리 무방비한 모습을 보이다니.
못본 체 하고 넘어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리 하기엔 손부채질을 할 때마다 같이 출렁이는 하스미의 가슴에 선생의 정신이 실시간으로 깎여나갈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말로 지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하스미의 저지는 아까 보았다시피 그 커다란 가슴 때문에 지퍼를 끝까지 올리지도 못했다.
한 번 눈에 띈 이상 계속 눈에 띌 게 뻔했다. 선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저지를 벗어 하스미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키는 선생이 하스미보다 조금 큰 정도라도, 품이 넉넉한 남성용이니 지퍼를 올릴 수 있겠지.
"선생님?"
덥다고 저지를 벗었는데, 자신의 저지를 걸쳐준 선생의 행동에 의문을 표하며 하스미는 선생을 빤히 바라보았다. 선생은 입을 굳게 다물고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하스미는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 보았다. 땀을 제법 흘려서 착 달라붙은 체육복 상의, 그리고 비치는 검은색 속……옷?
하스미가 황급히 선생이 걸쳐준 저지의 지퍼를 올렸다. 가슴을 강하게 압박하는 스포츠 브라는 아무래도 갑갑해서 평소의 속옷을 입고 왔는데, 그게 이런 일을 초래할 줄이야.
다행히 남성용이라 그런지 지퍼를 끝까지 올릴 수 있었다. 그마저 조금 답답하긴 했지만.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천막 한 구석에 놓인 아날로그 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만이 무심히 하스미의 휴식 시간이 지나가고 있음을 알렸다.
'그나저나, 선생님의 옷은 꽤 크네요.'
하스미는 소매가 살짝 남는 옷을 보며 그리 생각했다. 굽이 꽤 있는 신발을 신고 다니다보니 시선이 비슷해서 느끼지 못했는데, 역시 남자는 남자라는 걸까.
반쯤 가려진 손 끝으로 소매를 만지작거리고 있다보니, 문득 평소와 다른 향이 비강을 가득 채웠다.
섬유유연제의 상쾌한 향과는 달랐다. 선생은 딱히 크게 움직이지도 않았으니 땀 냄새도 아닐텐데. 그런 불쾌한 냄새는 아니었다. 무어라 표현할 수는 없지만, 묘한 매력이 있는 향이었다. 어디서 맡아봤더라.
바람이 불었고, 하스미는 향의 정체를 깨달았다.
하스미가 시계를 보았다. 아직 주어진 쉬는 시간은 좀 남아있었다. 다른 운영 위원들에게 배려를 받아 이어서 바로 점심 시간이니, 시간은 충분했다.
하스미가 선생의 소매를 슬쩍 끌어당겼다.
어색함에 고개를 돌리고 있던 선생이 하스미를 바라보았다.
촉촉히 젖은 눈망울, 평소와 달리 올려묶은 머리에 드러난 목덜미에 달라붙은 몇가닥 머리카락이 선명했다.
언젠가 둘이서 밤 늦은 시간까지 일한 뒤 돌아가다가, 작은 공원에서 갑작스레 쏟아지는 비를 피하던 때가 생각났다.
말을 고르던 하스미가 선생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 땡땡이라도 치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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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선생과 하스미가 돌아온 시각을 구하시오 (5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