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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쓰에이 전쟁>
1862년 9월 14일 일본의 사쓰마 번 (현재의 카나가와현)과 영국 사이의 전쟁. 영국 등 서양에서는 가고시마 포격전(Bombardment of Kagoshima)이라고 칭한다.
1853년, 미국 매튜 페리 제독이 군함을 이끌고 와서 일본에 개항을 요구하여 무력시위를 벌인 사건이 있었는데
일본에선 이걸 쿠로후네 사건이라고 한다.
쇄국을 유지하고 싶었던 에도 막부는 시간을 끌어 흐지부지 하려했으나
페리 제독은 1년후 다시 온다고 얘기한 후
7개월 만에 9척의 군함을 이끌고 일본에 상륙하여 다시한번 개항을 요구한다.
이를 계기로 1854년, 막부는 미국과 미일화친조약을 맺었고
4년 뒤,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게된다.
그러나 미일수호통상조약은 일본 측에 심각하게 불평등한 조약이었고, 같은 해, 영국, 프랑스와도 이와 동등한 수준의 불평등 조약이 맺어지게 되어
에도 막부의 권위는 떨어지고, 외세를 몰아내자는 존황양이 운동이 거세지게 된다.
존황양이 운동이 빠르게 퍼지게 되면서
에도 막부와 지리적으로 멀었던 사쓰마번, 조슈번의 하급사무라이들을 중심으로 존황양이 사상이 유행하게 되는데
나마무기 사건 (메이지 시대에 그린 상상도)
1862년, 하나의 사건이 터지게 되는데, 사쓰마 번의 번주인 시마스 히사미쓰의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고
맞은편에 영국상인 차스 리처드슨과 동료들이 지나고 있었다.
당시 일본에선 고위 관료의 행렬을 마주칠 경우, 예를 표시해야 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영국 상인들은 그냥 지나치려고 했고
영국 상인들이 예를 갖추지 않고 말을 탄 채로 행렬에 끼어들자 호위하던 사무라이들이 무례하다며 1명을 살
해하고 2명에게 중상을 입힌 사건이 일어났다. 이걸 나무무기 사건이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영국은 이에 대한 보상금을 에도 막부와 사쓰마 번 모두에게 이 사건에 대한 책임자 처벌 및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고 막부는 보상금으로 10만 파운드를 지불했다. 영국은 유가족에 대한 위로금으로 사쓰마 번에게 2만 5천 파운드의 합의금을 받아내고자 했다.
하지만 사쓰마 번은 이를 거부했고,
이에, 영국은 7척의 군함을 파견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쟁을 할 생각은 없었고, 함대로 위협하여 배상금을 뜯어내려는 목적이었지만, 사쓰마 번은 선전포고로 간주하여
사쓰에이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병력
- 사쓰마 번 : 증기선 3척,해안 포대 10개
- 영국 : 증기선 7척
영국 함대는 2일간 사쓰마 번의 10곳의 해안 포대를 초토화 시켰고 항구와 근대식 무기공장에도 피해를 입혔으나 거친 날씨와 예상 밖으로 강력한 사쓰마군의 화력에 결국 전투를 포기하고 요코하마로 퇴각했다.
피해 규모
- 사쓰마 번 :증기선 3척 소실,25여명 사상, 막대한 재산 피해
- 영국 : 증기선 3척 소실, 60여명 사상
이 전쟁의 결과로
당시 서양 열강들은 세계최강이라는 영국 해군이 겨우 일본의 일개 지방정부를 상대로 전투를 포기하고 퇴각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으며,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1863년 10월 4일호에서 일본이 의외로 서구의 무기와 전술에 익숙하니 그 전력을 만만하게 봐선 안 된다라는 평을 남겼다.
사쓰마 번은 고작 군한 몇척으로 시내가 잿더미가 변해버린걸 보았고
사쓰마 번의 양이론자들은 서양의 화력을 제대로 알게 된다.
영국과 사쓰마는 서로를 높이 평가했다.
사쓰마 측은 영국으로부터 군함과 무기를 구입한다는 조건으로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제안했다.
서구문물의 우수함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서구문물 도입에 더욱 더 박차를 가했고, 영국은 사쓰마 번과 관계를 강화하기 시작하게 된다.
사쓰마 번에서는 영국에 유학생을 보내고, 영국인 기술자들이 사쓰마에 머물도록 지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