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당은 초기에 베르사유 조약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상황에 환멸을 느낀 여러 보수 세력의 지지를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히틀러의 정책이 점점 더 극단적이고 권위주의적으로 변함에 따라 더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히틀러에 반대하게 되었고 이들은 진보주의자들과 협조하기도 했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Claus von Stauffenberg, 1907–1944)
독일 귀족 출신의 육군 장교로, 보수적인 군사 엘리트 계층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처음에는 나치를 지지했으나 점차 만행에 환멸을 느낀 그는 나치의 전쟁 범죄와 독재에 반대하며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시도(발키리 작전)를 주도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독일의 전통적 가치와 질서를 회복하려는 보수적 이상을 지녔으나, 나치의 극단주의를 용납할 수 없었기에 저항에 나섰다. 암살 실패 후 그는 즉결 처형당했다.

루트비히 벡 (Ludwig Beck, 1880-1944)
독일군 참모총장을 지낸 군사 지도자로,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군사 철학을 신봉했다. 처음에는 베르사유 조약 등에 반대하며 나치를 지지했으나 히틀러의 무분별한 전쟁 확대(특히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반대하며 1938년 사임했다. 이후 7월 20일 음모의 정신적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실패 후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1944년 7월 20일 처형당했다. 그의 저항은 군사적 명예와 국가 이익을 중시하는 보수적 관점에서 나온 것이었다.

헨닝 폰 트레스코프(Henning von Tresckow, 1901-1944)
프로이센 귀족 출신의 군 장교로, 보수적 군사 전통을 계승한 인물이다. 베르사유 조약 때문에 처음에 나치를 지지했으나 장검의 밤과 수정의 밤 사건을 본 뒤 일찍이 히틀러에게 저항하기로 했다. 히틀러 암살을 여러 차례 시도했으며, 7월 20일 음모에도 깊이 관여했다. 계획 실패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독일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저항했다고 밝히며 보수적 애국심을 드러냈다.

카를 프리드리히 괴르덜러 (Carl Friedrich Goerdeler, 1884–1945)
라이프치히 시장을 역임한 보수 정치인으로, 독일 국민당(DNVP)과 같은 보수 세력에 속해 있었다. 나치 집권 초기에는 협력 가능성을 모색했으나, 곧 나치의 폭정과 경제 정책에 반대하며 저항 운동에 합류했다. 그는 7월 20일 음모의 민간 지도자로 활동하며, 히틀러 제거 후 보수적이고 민주적인 정부를 수립하려 했다. 계획 실패 후 체포되어 1945년 처형당했다.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독일의 루터교 목사이자 신학자로, 보수적인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나치 정권에 저항했다.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 계획에 연루되었으며, “침묵은 악을 묵인하는 것”이라는 신념 아래 나치의 유대인 박해와 전체주의에 맞섰다. 그는 1939년 안전한 미국으로 떠날 기회가 있었지만, 독일로 돌아와 저항 운동에 뛰어들었고, 결국 1945년 플뢰센뷔르크 강제수용소에서 처형당했다. 보수적 신학자였지만, 그의 저항은 단순히 이념을 넘어 윤리적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클레멘스 아우구스트 폰 갈렌 (Clemens August Graf von Galen, 1878–1946)
독일 귀족 출신 가톨릭 추기경으로, 보수 민족주의자였지만 1941년 나치의 T4 안락사 프로그램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유명해졌다. 설교를 통해 “인간 생명은 신의 선물”이라며 안락사 정책을 “악마의 행위”로 규탄했고, 이를 전단지로 배포해 대중에게 알려 안락사 프로그램이 일시적으로 중단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또한 나치의 반종교 정책과 유대인 박해를 비판하며, 교회와 신앙의 자유를 지키려 했다. 그는 독일의 전통적 질서와 가톨릭 신앙을 기반으로 한 저항을 펼쳤으며, 나치를 “신앙과 도덕의 적”으로 보았다. 나치는 갈렌의 대중적 인기와 교회 내 영향력을 의식해 그를 직접 체포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활동을 철저히 감시했다.

한스 오스터(Hans Oster, 1887-1945)
독일군 정보기관(아브베어) 소속 장교로, 보수적이고 반공주의적인 신념을 가져 처음에는 나치를 지지했으나 생각을 장검의 밤과 수정의 밤 사건을 보고 혐오하게 된다. 나치의 전쟁 범죄를 폭로하고 히틀러 암살을 도모한 초기 저항자 중 하나였다. 1938년 독일의 체코 침공(뮌헨 협정 무렵)을 막기 위해 쿠데타를 계획했으나 실패했고, 이후에도 저항을 계속하다 1943년 체포되어 1945년 4월 9일 본회퍼와 함께 처형당했다. 정보기관 내에서 나치의 실체를 간파하고 저항한 보수적 반골로 평가된다.

헬무트 제임스 폰 몰트케 (Helmuth James von Moltke, 1907–1945)
독일 귀족 가문 출신의 법학자로, 보수적이고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가진 인물이었다. 몰트케는 나치 정권 하에서 법적 정의를 무너뜨리는 행태를 비판하며, 크라이자우 서클(Kreisau Circle)이라는 저항 단체를 조직했다. 이 단체는 히틀러 사후 독일의 민주적 재건을 목표로 했다. 그의 보수성은 독일의 전통과 도덕적 질서를 중시하는 태도에서 드러났다. 그는 직접적인 폭력 저항보다는 지적이고 윤리적인 반대를 추구했으나, 나치에 의해 체포되어 1945년 처형당했다.

프란츠 예거슈태터 (Franz Jägerstätter, 1907–1943)
오스트리아의 농부이자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보수적인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나치에 저항했다. 그는 1943년 독일군 징집에 응하지 않고, 히틀러에 대한 충성 서약을 거부하며 양심적 병역 거부를 선언했다. 이는 그의 깊은 신앙과 나치의 비도덕성을 거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선택이었다. 예거슈태터는 결국 단두대에서 처형되었고, 그의 저항은 개인적 신념과 보수적 가치가 결합된 상징적인 사례로 남았다.

한스 폰 돈안이 (Hans von Dohnanyi, 1902–1945)
독일 법률가이자 공무원으로, 보수적인 관료 계층 출신이었다. 그는 처남인 디트리히 본회퍼와 함께 저항 운동에 가담했으며, 독일 국방부 내에서 나치의 전쟁 범죄를 폭로하려는 자료를 수집했다. 돈안이는 히틀러 암살 계획에도 연루되었고, 1945년 강제수용소에서 처형당했다. 그의 저항은 법치주의와 도덕적 질서를 중시하는 보수적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슈멘친 (Ewald von Kleist-Schmenzin, 1890–1945)
프로이센 귀족이자 보수 정치인으로, 독일 국민당 소속이었으며 나치 집권 이전부터 히틀러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나치의 전체주의가 독일의 전통적 가치를 파괴한다고 여겼고, 저항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7월 20일 음모에도 연루되었으며, 체포 후 1945년 처형당했다. 그의 저항은 보수적 국가주의와 군주제 지지라는 배경에서 나왔다.

번외: 콘라트 아데나워(Konrad Adenauer, 1876-1967)
가톨릭 중앙당 소속의 정치인으로, 나치 집권 전 쾰른 시장을 지냈다. 보수적 가톨릭 신앙을 가진 인물이었다. 나치에 협력하지 않아 공직에서 쫓겨났고, 여러 차례 체포될 위험을 겪었다. 직접적인 저항보다는 생존과 사상적 반대를 선택했으며, 전후 서독 초대 연방수상으로 독일 재건에 기여했다. 나치에 대한 소극적 저항이 보수적 가치 회복으로 이어진 사례다.

"신성한 독일 만세! (Es lebe das heilige Deutschland!)"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총살되기 전에 한 말
이외에도 많은 보수 성향의 저항가들이 있었으며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보수적 배경(기독교 신앙, 귀족 전통, 국가주의적 가치 등)을 지녔지만, 나치의 비인간적이고 파괴적인 정책에 맞서 저항했다. 이들의 저항은 단순한 반대가 아니라, 도덕적이고 실천적인 행동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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