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7년 음력 3월, 피오 호톤의 수령 첨터허로부터 내속 의사와 호위 요청을 받은 누르하치는 자신의 동생 슈르가치, 장남 추영, 차남 다이샨을 최고 지휘관으로 한 3천여명의 건주군을 파견하여 피오 호톤의 귀순 의사자들을 허투 알라로 데려오게 했다. 동시에 피오 호톤 주변에 세거하며 귀순을 원하는 이들과, 심지어는 건주에 대한 귀순을 거부하는 이들 역시 강제적으로라도 데려오게 했다. 그것은 한 번의 작전으로 최대한 많은 수의 번호들을 데려와 전력과 속민을 보강하기 위함이었다.
슈르가치의 군대는 '부잔타이가 번호들을 제거하고 조선을 침탈하는 것에 대해 규탄하며, 조선과 번호들을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작전을 개시했다. 그들은 며칠여간의 번호 철거 작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뒤, 장수 후르한과 양구리를 선행복귀부대 지휘관으로 하여 건주 수도 허투 알라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자신들을 가로막는 울라군 1만여명과 조우했다. 두 세력간의 전투는 이틀여간 대치와 교전 끝에 다이샨이 울라군의 최고 지휘관 봌도를 참살함으로서 결국 건주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이 전투를 '오갈암 전투' 혹은 '문암 전투'라고 칭하는데, 주로 오갈암 전투라고 호칭된다.
오갈암 전투의 발단과 전개, 결과는 확실히 파악이 되지만 몇 가지 쟁점이 되는 부분이 있다. 이전에 첫째 쟁점을 다루었으니 이번에는 두 번째 쟁점을 살펴보자면, 둘째 쟁점은 이 때에 출정한 건주군의 정확한 수효이다. 이때 전투에 직접 참전한 건주군의 숫자는 약 1천 8백명이었으며, 총파견인원은 청의 태조무황제실록과 고황제실록, 만주실록에 모두 3천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후일 오갈암 전투에 관한 조선의 자문을 받고 명나라가 누르하치에게 선유를 할 무렵, 누르하치가 선유에 대해 해명을 하면서 본인이 자신의 동생과 두 아들에게 7천의 군대를 맡겼다고 말한 기록이 존재한다.1
이 때 출정한 건주군의 전체병력에 관한 기록중 무엇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냐면, 사실 3천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할 수 있다. '7천의 병력'이란 대외적인 해명 발언에 내포된 숫자일 뿐이라는 점, 국가 내부 기록들 모두가 슈르가치가 이끌고 출정한 군대를 3천으로 비정하고 있는 점, 태조계실록보다 상세한 사료인 구만주당과 만문노당에서 비록 3천이라는 병력수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기록된 각각의 부대의 인원 수효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2, 무엇보다도 병력의 편성 역시 자세히 남아 있다는 점 때문에 건주의 출진병력이 7천일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다. 또한 당시의 건주의 상황이나 임무를 생각해 보자면 7천에 달하는 병력을 해당 임무에 배정했을 가능성 역시 그리 크지가 않다.
건주 세력의 대외선전적 발언을 그대로 신뢰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일례로 임진왜란 시기 건주의 외교실무자 마삼비가 당시 누르하치 휘하에 보병 4~5만, 기병 3~4만에 달하는 군대가 존재한다고 명나라에 전한 바가 있으나 그것은 확실히 사실이 아니었으며 그저 형세적 과장에 불과했다.3 누르하치의 '7천 파견' 발언 역시 자신의 형세를 부풀리기 위한 '과대포장'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인다.
파견된 건주군의 총원은 3천이라고 할 수 있으나, 실제 전투 당시 건주의 편에 선 사람의 수는 훨씬 많았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3천이란 어디까지나 누르하치가 건주 내부에서 차출하여 슈르가치와 추영, 다이샨에게 맡긴 병력의 숫자라고 판단된다. 여기에 로툰과 같이 이전에 누르하치에게 귀부했던 번호 출신 추장 역시 향도로 참전했음을 고려하고, 또 건주군이 허투 알라로 호송하던 번호 인민들 역시도 일단은 건주측 인원 수효를 구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실제 전투투입 건주 병력(약 1천 8백)과 총파견인원(약 3천)보다 훨씬 많은 수의 인원이 건주의 승리에 직간접적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후르한과 양구리가 호송하던 '5백여호의 번호'들의 경우 그 숫자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약 2천여명은 되는데, 이들의 경우 실제로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그들의 존재가 전투에 주요한 역할을 했음을 고려해 보자면 이들의 존재는 상당히 큰 변수였다고 할 수 있다.
1.사대문궤 권48 음력 5월 24일
2.구만주당과 만문노당의 경우 오갈암 전투에 관련한 기록 앞부분이 소실되었기에, 그 앞부분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확신되는 출정건주군의 전체병력수를 확인할 수가 없다.
3.조선왕조실록 선조 25년 음력 9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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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경력 있는거 빼고는 그냥 취미. | 22.01.02 13:2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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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취미가 독특하시네여. | 22.01.02 13:24 | | |